Ep. 1
‘고민해 봐야 소용없겠지.’
좌절은 여기까지 하기로 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낙천적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것이 아니다.
에이모프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전투종족이지만, 해츨링 때는 아니다.
가능성과 잠재력만 한보따리지, 지금의 나는 1시간 안에 뭐라도 먹지 않으면 죽어 버리는 연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니까 남은 체력이 바닥나기 전에 부지런히 움직여야 한다.
현재 내가 있는 이곳은 거대한 금속 구조물의 내부.
그것이 우주라는 이름의 바다를 헤엄치는 합금으로 만들어진 배, 우주 함선이라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양식만 봤을 때는 메가콥이나 스타유니언 같은데.’
어느 쪽이든 내게 달갑지 않은 세력들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사람 3명 정도 높이의 컨테이너가 보였다. 겹겹이 쌓여 있는 컨테이너 사이에 플라스틱 박스들이 보였다.
턱 아래의 보조기관이 꿈틀거리자, 각종 정보가 내 뇌리에 꽂혔다.
‘신기한 감각이네.’
게임적 허용으로 미니맵 형태로 구현되던 ‘초감각’을 몸으로 직접 체험하니까 느낌이 확 다르다.
냄새가 소리처럼 들리고, 소리가 눈에 보이는 등 오감이 뒤섞여서 정보를 전달한다고다 할까? 느낄 수 있는 범위 내의 모든 것을 동시에 감지하는 그런 감각이다.
발톱 끝에서는 핵융합 엔진이 맥동하며 발생하는 울림이 느껴진다. 공기 중에 미세하게 섞여 있는 인, 탄소 등등 다양한 성분의 냄새가 보조기관의 끄트머리를 자극한다.
보조기관이 여러 가지 냄새 중에서 먹을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끄집어내 내 뇌로 전송했다.
현재 나의 최우선 과제는 영양 보충. 식량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3쌍의 다리가 먹이를 향해 바지런히 움직이며 차가운 금속판을 밟았다.
그레이팅(grating)식 바닥에 발톱이 맞닿을 때마다 찰그랑 찰그랑 소리가 난다.
컨테이너의 숲을 지나 플라스틱 박스에 도착한 나는 발톱을 활용해 박스 위로 기어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상자에는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열리는 락이 걸려 있었다.
‘비밀번호라서 다행이다. 어디 보자.’
나는 번호판 위에 턱을 가까이 댔다. 보조기관이 꿈틀거리면서 번호판 위를 거닐자 표면에 뭍은 지문이 뇌리로 흘러들어왔다.
‘1234라니. 실화냐.’
우주시대가 되어도 이런 보안수준이라니. 나는 경악을 금치 못하며 앞다리로 버튼을 꾹꾹 눌렀다.
상자 안에서 락이 해제되는 소리가 났다.
뚜껑을 열자 안에 진공 포장된 칼로리바가 잔뜩 쌓여 있었다. 나는 맨 위에 있는 칼로리바 하나를 꺼냈다.
발톱으로 간단히 포장을 찢고 한입 베어 물었다. 퍽퍽한 식감이 마치 고무지우개를 씹는 느낌이었다. 게임 속 툴팁에도 오직 영양만을 중시해서 설계된 식품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그게 사실인 것 같았다.
‘쩝, 그래도 영양 보충에는 성공했어.’
맛은 없지만 고열량이다 보니 꼬리 끝까지 힘이 차오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나 더 까먹기 위해 다리를 드려는 순간, 내 감각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나의 꼬리가 쏘아진 화살처럼 빠르게 움직여 정체불명의 그것을 꿰뚫었다.
‘바퀴벌레?’
날카로운 침에 박혀 있는 그것은 바퀴벌레였다. 녀석은 빠져나가려고 버둥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나는 무엇에 홀린 듯 바퀴벌레를 깨물었다. 놈의 갑각이 내 이빨에 부서지며 육즙이 튀었다. 어지간히 잘 먹고 잘 자란 듯 아주 쥬시한 녀석이었다.
녀석을 홀라당 먹어 치우니 아까와는 다른 내용의 텍스트창이 떠올랐다.
「포식 효과 발동! ‘날개’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바퀴벌레’의 생물 특성 중 ‘날개’를 탈취.」
「‘날개’를 적용하시겠습니까?」
‘오?’
이렇게 빨리 유전자 정수를 얻다니 제법 운이 좋다.
유전자 정수는 에이모프 운영에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핵심적인 요소다. 다양한 유전자 정수를 획득할수록 더 강한 생물로 진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날개라.’
우주가 배경인 게임에서 날개 자체는 특별한 의미를 갖기 힘들다. 그러나 여기는 게임이 아닌 현실. 내가 유약한 유충이라는 점을 고려해 보면 나쁘다기보다는 유용한 쪽에 가까운 특성이다. 사냥할 때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고, 도주에도 유리하니까.
‘수락.’
「특성 적용 중.」
등에서 간질거리는 느낌이 나더니 키틴질 특유의 매끈매끈하고 탄력 있는 질감의 날개가 자라났다.
「‘날개’ 특성 적용 완료.」
‘좋아.’
나는 시험 삼아 날개를 움직여보기로 했다.
‘어떻게 움직여야 하지?’
다리랑 달리 날개는 인간에게 친숙한 부위는 아니다.
그래도 등 쪽에 났으니까 승모근 부근을 움직인다는 느낌으로 힘을 한번 줘봤다. 정답이었는지 날개가 천천히 퍼덕거렸다.
‘열량 소모가 생각보다 심하네.’
몇 번 움직여보니까 바로 알겠다. 비행은 에너지를 굉장히 많이 소모한다.
나는 날개 움직이는 것을 그만두고 칼로리바를 깠다.
‘날개를 제대로 활용하려면 더 필요한 것이 있어.’
날개를 얻은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었지만 바퀴벌레에게 얻어야 할 핵심 능력은 따로 있었다.
원활하고 쾌적한 생존을 위해서는 필수 불가결로 얻어야 하는 능력이다.
‘첫 번째 목표는 정해졌네.’
칼로리바를 오독오독 씹으면서 생각했다.
우선은 바퀴벌레 학살자가 되어야겠다고.
-
어린 시절 이런 이야기를 읽었던 적이 있다.
요나라는 남자가 신의 명령을 피하려고 도망치다가 바닷속 고래에게 먹혔다. 일반인이라면 죽었겠지만 요나는 신의 가호를 받는 사람이라 죽지 않았고, 고래 뱃속에서 3일간 있다가 탈출했다. 죽다 살아난 요나는 그 이후 신의 말에 충실히 따랐다.
뜬금없이 왜 옛날이야기를 꺼냈냐면, 내 모습이 고래 뱃속에 있던 요나와 비슷해서 그렇다. 나도 무중력의 공간을 유영하는 강철 고래의 뱃속에서 바퀴벌레를 찾아 헤매고 있으니.
벽에 붙어서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으니 내 아래쪽으로 바퀴벌레가 지나갔다. 내 꼬리가 갈고리가 달린 낚싯줄이 되어 녀석을 낚아챘다.
푹
어부가 그물을 끌어당기듯이 조심스럽지만 억세게 올라오는 꼬리. 그 끝에 매달린 녀석은 자기 운명을 직감하고 어떻게든 빠져나가기 위해 애를 썼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날카로운 이빨이 녀석의 머리에 박혔다. 나의 작지만 예리한 이빨이 저 단단한 외피와 두터운 살점을 소화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였다. 바퀴벌레의 잔재는 거의 믹서기에 갈린 즙 상태가 된 뒤에야 목구멍을 통과할 수 있었다.
사실 영양 측면에서는 칼로리바가 압도하지만 맛의 측면에서는 바퀴벌레가 훨씬 맛이 좋았다. 덕분에 인간 시절이었다면 상상도 못할 일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었다.
‘이런 말 하면 웃기지만 왠지 번데기 맛이 난단 말이야.’
말 그대로 소주를 부르는 맛이다.
‘이걸로 20마리째. 또 성과 없음 인가.’
인간 시절 버릇대로 앞다리로 이빨을 쑤시며 텍스트창을 떠올렸다. 내 의지에 따라 텍스트창이 머리 앞에 나타났다.
「종족: 미확인 적대적 우주생물
상태: 해츨링
목표: 생존하라.
보유 특성: 초감각, 날개, 키틴질 외피」
처음 날개를 얻은 것은 초심자의 행운이었나 보다. 그 이후로 19마리를 더 잡아먹었지만, 얻은 유전자 정수는 한 개 뿐이었다.
‘키틴질 외피도 나쁘지는 않지만….’
키틴질 외피는 성장 수준에 따라 방어력을 크게 상승시켜 주는 강력한 특성. 후반으로 갈수록 유용한 특성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불필요했다.
방어력이 제로에 가까운 해츨링 상태에서 방어력을 조금 높여 봐야 의미가 없다. 그것보다 다른 능력이 더 중요하다.
‘강인한 생명력 특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잘 안 나오네.’
강인한 생명력은 곤충형 생물이나 식물형 생물들 대부분이 갖고 있는 흔한 특성이다. 물론 그만큼 효과도 굉장히 심플하다.
‘에너지 소모를 줄여서 노화를 늦추는 것.’
수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게임에서는 컨셉을 중시하는 유저들이나 챙기는 특성이었다. 그렇지만 게임이 현실이 된 상황에서는 그 위상이 전혀 다르다.
‘강인한 생명력이 있으면 먹이에 연연할 필요성이 크게 줄어들어.’
언제까지 이 화물칸에서 살 수만은 없다. 벽 너머에서 느껴지는 진동, 희미하게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 이를 느낄 때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이 함선의 주인, 인류는 나의 적이다.
게임 속 배경 스토리를 생각하지 않더라도 그들이 나를 봤을 때 좋게 넘어갈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화물칸에서 물품이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알면 나를 찾으려 하겠지. 그러다가 걸리면? 사망, 아니면 실험체행이다.
암울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진화 조건을 충족시켜서 해츨링 단계를 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활동 범위를 화물칸 이상으로 더 넓혀야 하고.
잡설이 길었다. 요컨대 살고 싶으면 바퀴벌레를 부지런히 잡아야 한다는 거다.
‘자리를 바꾸자.’
바퀴벌레는 예민하고 머리가 좋은 곤충이라 동료가 죽은 지역으로는 절대로 오지 않았다. 동료가 죽은 곳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그 사실을 모르고 30분 동안 같은 자리에서 죽치고 있다가 시간을 낭비했다.
‘읏차!’
8개의 다리를 굽혀서 벽에 몸을 바짝 붙였다가 한순간에 힘을 폭발시키듯 뻗었다.
내 몸이 탄력적으로 튕겨 나가며 비상한다.
허공에 떠 있는 동안, 나의 등에서 날개가 활짝 펼쳐졌다. 인간으로 치면 승모근에 해당할 등 쪽 근육에 힘이 꽉 들어갔다. 날갯짓이 시작되자 추락하고 있던 내 몸이 천천히 위로 날아올랐다.
사막거미처럼 생긴 괴물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날아다니는 꼴이라니. 심장이 약한 사람이 보면 기절하지 않을까.
비행하는 중에도 시각과 보조기관은 쉬지 않고 바퀴벌레가 어디 있는지 탐색했다.
‘이쯤 되면 진짜 명예 에이모프인데.’
실없는 생각에 빠져있던 중, 바퀴벌레가 감지되었다.
벽에 붙어 있는 녀석 한 마리, 플라스틱 박스 위를 열심히 기고 있는 녀석 한 마리다.
나는 가까이 있는 녀석, 즉 벽 쪽에 있는 녀석부터 잡기로 했다. 날개의 각도가 조정되고 그에 맞춰 내 몸이 녀석이 있는 방향으로 선회했다.
바퀴벌레는 딴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의 강습을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독수리가 물고기를 낚아채듯 녀석을 앞다리로 붙잡았다.
녀석이 발톱 사이로 빠져나가기 전에 잽싸게 녀석을 입에다 집어넣었다. 잘 닦인 구두처럼 보이는 외피가 부서지고 옆구리에서 육즙과 내장조각들이 튀어나왔다.
아직 한 마리가 더 남았기에 녀석을 입에다 문 채, 다음 타깃을 노렸다.
‘이런.’
바닥 쪽에 있던 녀석이 나를 인식했다. 녀석은 포식자를 피해 박스 아래로 내려갔다.
저 작은 몸집에 달린 다리들이 향하는 곳은 바닥의 틈새. 놈이 합금 철판의 틈 사이로 빠져나가면 사냥은 그걸로 끝이다.
‘놓칠 수 없어!’
나는 4쌍의 다리로 벽을 밀어서 추진력을 확보하고 놈을 향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날아갔다. 녀석은 이미 철판 틈새에 더듬이와 머리를 드밀고 있었다.
놈의 하반신만 보일 때, 나는 바닥에 처박히듯 착지했다. 부드러움이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쇠붙이에 전신을 들이받는 바람에 온몸으로부터 고통이 밀려왔지만, 내 정신은 녀석의 꽁무니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 꼬리가 살모사가 먹이를 노릴 때처럼 쏘아져 나간다. 꼬리가 대기를 가르고, 그 끝에 있는 침이 철판의 구멍 속으로 들어간다.
이제 괜찮겠지 하고 한숨 돌리던 녀석이 기겁했다. 당장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한 녀석의 뇌는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뾰족한 침에 의해 두 동강이 났다.
‘후.’
간발의 차로 나는 두 마리 모두 사냥하는데 성공했다. 내 꼬리가 우아한 몸짓으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 끝에는 자랑스러운 전리품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나는 입에 물고 있던 시체를 마저 처리한 뒤, 꼬리에 달린 녀석을 먹기 시작했다. 녀석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지가 나타났다.
「포식 효과 발동! ‘강인한 생명력’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바퀴벌레’의 생물 특성 중 ‘강인한 생명력’을 탈취.」
「‘강인한 생명력’을 적용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수락이지.’
전신에서 아까와는 질적으로 다른 활력이 느껴진다.
길고 가늘기만 했던 다리에 근육이 붙어 굵어졌고, 등과 배를 덮고 있는 키틴질 외피의 광택도 좋아졌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내 몸에 비해서는 어마어마하게 크고 넓지만, 함선 내에서는 극히 일부분에 불과한 화물칸.
내가 첫발을 내디딘 세계를 깨고 나갈 시간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