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
에이모프 플레이의 본질은 무엇인가.
스페이스 서바이벌은 높은 자유도를 보장하는 게임이지만 소위 정형화된 플레이 방식이 없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메가콥 노블캐피탈로 시작하면 초기지원자금으로 용병이나 함선을 구매해 스노우볼을 굴리는 방식이 정석이다. 종족 특성이 용병이나 노예를 활용하는데 최적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에이모프 플레이의 정석은 뭘까? 에이모프가 다른 종족과 질적으로 다른 점은 무엇일까?
‘사냥꾼.’
적의 정보를 미리 얻고, 함정을 파고, 유인하고, 등 뒤에서 몰래 덮치는 것.
아무리 많은 유전자 정수를 모아서 강해진다고 해도 에이모프의 본질은 사냥꾼이다.
정수 파밍을 끝낸 후반에는 다수의 유저를 학살할 수 있지만, 그때도 위의 공식은 유지된다.
내가 에이모프로 게임에서 최고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했다.
‘사냥을 잘하니까.’
다른 유저와 달리 파티원 없이 혼자 싸워야 했다.
어린 유저보다 피지컬이 좋지 않았다.
오래 플레이한 유저보다 장비와 특성이 부족했다.
온갖 악조건 속에서 나는 언제나 그들을 짓밟고 승리했다.
징징거리고 항의하는 놈들의 유전자를 내 것으로 만들었고, 그들이 가진 고유 특성을 복사했다.
사냥감의 트로피가 쌓일수록 나의 사냥 노하우도 함께 축적되었다. 멍청한 희생자들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덤벼들수록 나는 강해졌다.
그 과정에 한없이 반복된 결과, 나는 스페이스 서바이벌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포식자가 되었다.
그랬던 내가 지금 새로운 사냥감을 노리고 있다.
“젠장! 안정화 작업까지는 너무 오래 걸려.”
키사라기 유진은 화를 내며 책상을 내리쳤다.
아까부터 실험실 위에서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했다. 예리한 직감이 분노에 의해 무뎌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혼자 있지만 아직 때가 아니다. 밖에 경비들이 서 있고, 군인들이 돌아다니고 있으니까.
“빌어먹을….”
기계를 만지작거리던 그녀가 짜증을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다른 실험관으로 가더니 단말기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뭘 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실험관 속에 있는 생물에게는 그리 달가운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가 지나갈 때마다 실험체들이 고통에 몸부림쳤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그녀가 하는 짓은 실험이 아니라 화풀이를 위한 고문에 불과했다. 실험실이 소리 없는 비명으로 가득 찼다.
“그러고 보니 너도 있었지.”
그녀 앞에 있는 것은 26번 실험체.
녀석이 불안해하는 것이 여기까지 느껴진다.
키사라기가 사이오니움을 꺼내 들자 26번 실험체는 덜덜 떨었다.
실험체가 무서워하는 것이 만족스러웠던 것일까. 그녀는 일그러진 미소를 지었다.
“이건 실험이야.”
그녀는 사이오니움을 전부 투입했다. 26번의 온몸이 찢어지고 몸 색깔이 순식간에 탈색되었다.
실험관 내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거품들이 실험체의 절규를 그대로 드러내는 듯했다.
실험을 빙자한 가학적인 고문이 끝나고 26번은 또다시 살아남았다.
키사라기는 혀를 차고 실험실을 그대로 나가 버렸다.
‘…….’
끝까지 마음에 안 드는 짓만 골라서 하는 여자다.
그녀를 추적하려고 발을 옮기려는데 26번 실험체가 내게 파장을 쐈다.
「반가움.」
‘…….’
이럴 때도 평소랑 똑같이 인사하는 녀석이다.
나는 대꾸하지 않고 그대로 떠났다.
어차피 우리 사이에 대화는 필요 없다. 몇 마디의 위로보다는 녀석에게 진짜 필요한 것을 줄 생각이다.
‘복수.’
실험실을 나와 키사라기를 따라갔다.
그녀는 선장실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 뒤에 경비 두 명이 따라붙었다.
굳이 내 보조기관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들에게는 불만의 기색이 역력했다. 키사라기도 그 점을 알고 있는 것 같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살얼음 같은 분위기는 선장실에 도착한 이후 한층 더 고조되었다.
“2시간이 지났어요. 성과는요?”
“이제 막 수색을 개시한 참입니다. 조금 더 기다리셔야….”
“선장님, 아니 유성 사뮤엘. 노블캐피탈의 의지를 거역하는 겁니까?”
그녀의 말에 선장 유성 사뮤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봐도 화가 난 모습이지만 그것은 허세였다. 동공의 수축, 목 뒤에 흐르는 땀, 바지 속의 다리의 떨림 등을 봤을 때 그는 명백히 공황 상태에 빠져 있었다.
그는 배의 선장이지만 키사라기는 메가콥의 지배층이다. 위계 자체가 완전 다르니까 겁이 날 수밖에.
“저는 이 배의 선장입니다. 연구팀장님. 발언에 주의해주십시오.”
“그 선장이라는 자리, 제가 내려놓게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노블캐피탈이라고 해도 월권행위는 용납할 수 없습니다. 저는 연구팀장님을 구금시킬 권리가 있습니다.”
“하. 구금? 지금 저를 구금하신다고 했나요?”
“선내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자는 선장의 권리로 구금을 명할 수 있습니다.”
“미쳤나요? 유상 사뮤엘?”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 내가 지켜보기 전에도 둘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 같다.
하긴 안하무인의 키사라기가 선장을 갈구지 않을 리 없으니 이 파국은 예정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둘은 한참 동안 서로를 노려봤다. 그 끝에 눈을 돌린 사람은 키사라기였다.
‘이것도 어찌 보면 예상대로인가?’
키사라기가 만약 잘못되면 이 배의 승무원들의 운명은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까운 법. 이곳은 우주 한복판이다. 그녀의 신변에 문제가 생겨도 그녀를 도와줄 메가콥은 저 멀리 있다.
막말로 선장이 맛이 가서 그녀를 죽이려 들어도 그녀는 저항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해도 몸은 평범한 여성이니까.
“…나중에 두고 보죠.”
키사라기는 이를 벅벅 갈며 선장실을 나섰다.
선장은 그녀가 나가자마자 보좌관을 부르더니 당장 그 빌어먹을 고양이 새끼를 찾아오라고 소리를 질렀다.
‘뭐 급하겠지.’
이대로 가면 선장은 행성이든 우주기지든 상관없이 도착하자마자 죽는다. 감히 노블캐피탈 앞에서 구금을 한다니 뭐니 하는 협박을 했으니 어쩔 수 없다.
그에게 남은 유일한 동아줄은 고양이를 찾아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뿐이다.
‘이미 죽었지만.’
어차피 선장도 내 살생부에 오른 사람. 뭘 하든 그는 죽을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후에도 키사라기는 함선 내를 돌아다니며 패악질을 부려댔다.
그녀가 승무원들에게 미움받을수록 나야 좋다. 그녀가 사람들의 시야에서 이탈하면 내가 작업하기 편해지니까.
함선을 들쑤시고 다니던 그녀의 마지막 행선지는 화장실이었다. 경비 두 명과 함께 가고 있던 그녀가 말했다.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죠.”
“예.”
내가 알기로 원래라면 최소한 경비 한 명은 그녀를 따라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경비원들은 종일 그녀의 횡포에 시달렸기 때문에 따라 들어가지 않았다.
그들이 감정적인 이유로 명령을 위반했음을 그녀가 아는지 모르겠지만, 그녀도 경비원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인지 뭐라 하지 않았다.
“야, 나도 잠깐 화장실 좀.”
때마침 경비 두 명 중 한 명도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자리를 비웠다.
여자 화장실에는 그녀 혼자뿐이고 밖에는 경비 한 명밖에 없는 상황.
‘기회다.’
화장실에는 내 움직임을 방해하는 보안설비가 없다. 화장실 외벽을 둘러싼 환풍 통로 속에서 나는 습격을 준비했다.
발톱 두 개로 나사를 푼 뒤, 철망을 조심스럽게 치웠다. 소리가 나지 않도록 발톱을 최대한 위로 세운 채 걸었다.
그녀는 세면대 앞에서 세수 중이다. 물을 끼얹는 소리가 내 소리를 집어삼킨다.
나는 거울에 내 모습이 반사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그녀에게 접근했다.
세수를 끝마친 그녀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그녀가 물방울이 맺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도약 한번으로 그녀에게 닿을 수 있을 정도까지 가야 한다.
4쌍의 다리가 여태까지 본 적 없을 정도로 신중하게 움직인다. 꼬리 끝에는 마비 독이 차오른다. 고양이와 마찬가지로 일격에 끝내기 위해 몸이 준비하고 있다.
“후우.”
키사라기는 멍한 얼굴로 거울을 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이런!’
세수 덕분에 정신이 맑아진 걸까? 그녀의 감이 나를 감지했다.
그녀의 뇌로부터 위기신호가 발사되어 몸 전체로 퍼져간다. 목에 있는 근육이 명령을 받아 꿈틀거린다. 1초 내로 그녀의 고개가 내 쪽을 향할 것이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다리가 강철의 대지를 박찼다. 내 몸이 총구를 떠난 흉탄이 되어 그녀에게 사출되었다.
아직 거리는 제법 남은 상황. 지금이야말로 날개를 쓸 때다.
불러 주기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날개가 나의 명령을 받고 활짝 펼쳐졌다. 추진력을 상실해가던 내 몸이 급격히 떠올랐다.
키틴질 특유의 검갈색 광택을 뽐내는 날개가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그녀와의 거리는 이제 50cm 정도. 꼬리가 감춰뒀던 독침을 꺼내 든다.
키사라기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녀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진다. 놀람, 혐오감, 위기감, 공포 등 부정적 감정의 칵테일이 그녀를 잠식한다.
사람이 예상치 못한 위기가 닥쳤을 때 자기도 모르게 손으로 얼굴을 가린다. 그녀의 팔이 위로 움직인다.
팔목이 반쯤 얼굴을 가렸을 때, 내 꼬리가 양팔 사이를 통과했다.
유연한 몸놀림으로 상대의 방어를 무력화시킨 꼬리. 그 끝에 있는 작은 바늘이 그녀의 경동맥을 찔렀다.
“앗?”
그녀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사실 길게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불가능했다. 목에 주입된 독이 삽시간에 퍼져나가 전신을 마비시켰으니까.
해독되기 전까지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숨을 쉬는 것 말고는 없다.
“…….”
그녀는 세면대 앞에서 쓰러졌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모습은 그녀를 본떠 만들어진 마네킹 같았다.
그저 숨만 간신히 쉬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 그녀의 눈에 내 모습이 비친다. 사람 머리만한 외계생물이 침을 질질 흘리고 있다. 외계생물의 모습이 점점 커지고 입안에 나있는 날카로운 이빨들이 보인다.
그녀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할까?
괴생명체를 본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이 처한 처지에 대한 분노?
혹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아무래도 상관없다. 키사라기 유진은 어차피 죽는다.
콰득
내 이빨이 그녀의 목을 물었다.
그녀의 눈에서 빛이 꺼져간다. 물고 있는 이빨 너머로 숨이 잦아드는 것이 느껴진다.
‘잘 가라.’
나의 단단한 턱이 목뼈를 단숨에 부러뜨렸다. 목을 문 상태로 고개를 흔들자 그녀의 목은 간단히 뜯어졌다.
그녀의 길지 않은 인생은 그걸로 끝이었다.
메가콥의 노블캐피탈은 이 배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참수된 여자의 시신만 남았을 뿐.
인간의 피가 내 목을 통과했다. 위장이라는 생물적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유전자 정보만 따로 빠져나왔다.
정보가 뇌에 도달하는 순간 나는 느꼈다.
내게 잠들어 있던 가능성의 퍼즐 중 하나가 맞춰졌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를 구성하는 유전자들이 진화의 나선 고리 아래에서 재배열될 수 있음을 알려왔다.
「‘해츨링->유체’ 진화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하시겠습니까?」
내가 동의만 한다면 이 자리에서 즉시 진화 작업에 착수할 수 있다. 나는 수락하려고 했다.
만약 내 보조기관이 경종을 울리지만 않았어도 그랬을 것이다.
「키사라기가 쓰러진 소리를 듣고 경비원이 들어왔다.」
「그의 총구가 나를 향했다.」
「총알이 내 몸을 꿰뚫었다.」
「나는 죽었다.」
‘방금 그건 뭐야?’
현실을 동영상으로 촬영해서 수십 배 빠르게 돌린 것처럼 여러 장면들이 휙휙 지나갔다. 진화된 감각이 아니었다면 제대로 인지할 수 없는 속도였다.
‘포식자 감각!’
방금 내가 본 것은 앞으로 닥칠 위기였다. 포식자 감각이 미래를 내다보고 경고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거였나?’
영화처럼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여주다니. 위기시에만 발동된다는 점만 빼면 강력한 특성이다.
아무튼 곧 경비원이 들어올 타이밍이었다. 나는 문 뒤로 뛰어가 몸을 숨겼다.
포식자 감각을 통해 봤던 미래에서 나를 공격한 경비원은 한 명이었다. 다른 하나는 아직 화장실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도망칠까?’
내 눈에 반대편에 있는 환풍 통로가 보였다.
‘아니야. 시간이 없어.’
경비원이 장님이 아닌 이상 도망치는 내 모습을 놓칠 리 없었다.
경비원이 내 존재에 대해 알면 안 된다. 그랬다간 키사라기가 죽어도 추적을 피할 수 없다.
‘여기서 경비도 처리한다.’
다행히 상대는 한 명뿐. 기습한다면 죽일 수 있다.
내 몸이 다시 전투 태세에 돌입했다. 화장실 문 뒤에 몸을 바짝 붙이고 있으니 문이 조금씩 밀려났다.
문짝 너머로 군화의 끄트머리가 보인다. 이윽고 그의 몸이 완전히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다.
“헉!”
경악한 목소리.
그는 피바다 위에 있는 시체에 정신이 팔린 상태.
문 뒤에 숨어있던 나는 그를 향해 뛰어들었다.
내 몸이 그의 어깨에 달라붙었다. 그가 화들짝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바로 총을 들어야했지만, 그러지 않았다. 대신 어깨를 털었다.
어찌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반응이었다. 날개 달린 사막거미 같은 것이 어깨에 붙으면 누구나 다 그럴 테니까.
그러나 이 상황에서 그런 행동은 현명하다고 보기 어렵다.
잘못된 선택의 대가는 죽음이다. 그가 준 시간 덕분에 내 꼬리가 그의 귀를 찌를 수 있었기에.
상대의 귀를 관통한 내 꼬리가 천천히 뽑혔다. 뇌와 가까운 부위에 마비 독이 주입된 그는 즉사했다.
그가 바닥에 쓰러지는 것과 함께 화장실 문이 닫혔다.
키사라기가 죽은 지 몇 분 지나지 않은 사이, 낯선 경비원도 죽음을 맞이했다.
밖은 조용했다. 사람 두 명이 죽은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둘러야 해.’
곧 동료가 돌아올 거다. 나는 환풍 통로의 철망을 원래대로 돌려놓고 서둘러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혹시 내가 예상하지 못한 추적 수단이 있을지도 몰라서 바로 둥지로 가지 않고 빙빙 돌아서 갔다.
둥지에 도착한 나는 텍스트 박스를 활성화했다.
「‘해츨링->유체’ 진화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진화하시겠습니까?」
기다리고 기다리던 진화의 시간이 왔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주변을 살펴본 뒤 승낙했다.
몸에서 진화를 위한 점액이 물처럼 흘러나왔다.
전신을 감쌀 정도로 쏟아진 점액이 딱딱한 고체로 굳어졌다. 고체가 된 점액이 차곡차곡 쌓여서 껍데기가 되었다.
아마 누군가가 나를 본다면 고치나 알 속에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겠지.
‘특이하네.’
고치 속에 들어가니 형언키 어려운 기묘한 감각이다. 어떻게든 말로 설명하자면 뭔가 ‘다르다’라는 느낌이다.
나 자체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고 있다는 감각.
고치 안에서 분비되는 점액들이 나를 이질적인 무언가로 재조립하고 있다.
만약 태아 시절의 기억을 갖고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닐까? 어머니의 자궁이 나라는 존재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내가 자각할 수 있다면 분명히 이런 기분일 것이다.
눈을 떠서 직접 보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고치에 들어간 이후부터 몸에 대한 통제력을 완전히 상실했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는 이 감각도 육신의 감각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나의 정신체 같은 것이 존재해서 육체의 변화를 인지를 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고민해 봐야 알 수 없지. 느긋하게 기다리자.’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다. 나는 진화가 끝날 때까지 이 아늑한 고치 속에서 쉬기로 결심했다.
-
냉각실 위의 환풍 통로.
그곳은 얼마 전까지 오염된 공기와 역겨운 액체를 쏟아 내는 포자들이 한가득한 곳이었다.
불결한 습기로 가득한 공간이었지만, 지금은 습기는커녕 예전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건조한 상태였다.
포자들은 모두 말라비틀어졌고 벽에 거미줄처럼 달라붙어 있던 점액 줄기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바스러졌다.
망가진 둥지 가운데 어린 소년만한 크기의 고치가 있었다.
냉각실로부터 올라오는 찬 공기에도 불구하고 고치 표면은 사막화된 땅처럼 거칠기만 했다.
마치 이 주변의 습기를 흡수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때 고치가 흔들렸다.
껍데기 안쪽에서 무언가가 나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몇 번 더 흔들리자 고치의 겉면에 금이 생겼다.
껍데기가 바닥에 떨어지고 안쪽에서 검은 무언가가 뻗어 나왔다.
인간의 팔뼈에 검은색 키틴질 외피를 덮은 이질적인 형태였지만 그것은 분명 팔이었다. 팔 끝에는 맹금류의 발 형태를 닮은 4개의 긴 손가락이 달려 있었다.
첫 번째로 튀어나온 팔을 시작으로 고치에서 여러 개의 팔들이 껍데기를 부수고 튀어나왔다.
마침내 모든 고치가 벗겨지고 그것이 모습을 드러냈다.
4개의 긴 팔과 가슴팍 부근에 작은 2개의 팔, 굵고 단단한 다리, 몸의 크기에 비해 1.5배는 될법한 긴 꼬리를 가진 그것이 눈을 떴다.
검은색의 그것은 잿빛으로 빛나는 눈으로 몸을 내려봤다.
「그르르르르르」
그것은 만족스러운 듯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