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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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콥에는 공식적으로 수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전체가 기업화되면서 모든 용어가 회사에서 사용하는 단어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우주해병은 위기관리팀, 산업 전반을 관할하는 산업부는 자원관리팀이라는 명칭으로 불린다.
비록 수도라는 용어를 쓰지 않지만 메가콥에도 중심이라고 부를만 한 곳이 존재했다.
그곳은 지구. 그들이 본사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지구에는 메가콥의 중추가 자리를 잡고 있다.
메가콥을 세우는 데 공헌한 다섯 개의 기업. 그들이 지구의 왕이었다.
현재는 5대 가문이라 불리는 이들 중 유진 가(家)는 과거에 동아시아라고 불리던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대한민국이라는 작은 국가의 흔하디흔한 사업체로 시작한 유진농업은 은하계를 호령하는 거대기업체가 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근원을 잊지 않았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나라의 고도(古都)는 유진 가문의 저택이 되었다. 비유가 아니라 도시 전체가 유진 가문의 거주 공간이었다.
거대한 돔 형태의 ‘저택’ 내부에는 이동을 위한 자기부상열차, 소형 비행기가 존재했고, 돔 윗부분에는 내부 생태계를 위한 인공 태양까지 있었다.
다른 행성에 비해 족히 1세기 가량 앞서가는 이곳에는 유진 가문의 사람들과 그들에게 봉사하는 수천만 개의 ‘도구’들이 거주했다.
온갖 하이테크가 난무하는 저택 한가운데에 낡은 오두막과 정원이 있었다.
유진 가문의 가주, 아키라 유진이 거주하는 곳이다.
아키라 유진.
메가콥 CEO를 세 번씩이나 연임한 태양계의 맹주.
그런 그가 지금 작은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그의 나이는 200세가 넘지만 유전자 개량시술 덕분에 중년 정도의 외모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텃밭 근처에는 정장을 입은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하얗게 샌 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노인이었고, 다른 자는 젊은 사람이었다.
그들이 이곳에 온 지 벌써 한 시간째.
불만이 있을 법도 했지만,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르는 개는 주인이 명하기 전까지는 짖지 않는 법. 그들은 아키라가 볼일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
호미로 밭을 일구던 아키라가 마침내 몸을 일으켰다.
“많이 기다리게 했구나. 이리 오거라.”
아키라의 말에 둘 중 젊은 남자가 그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아가씨의 일입니다.”
“아가씨?”
아키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자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키사라기 아가씨입니다.”
“아, 셋째의 딸이었지.”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 듯 아키라가 웃었다. 그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노인의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그래. 키사라기가 어쨌다는 거지?”
“아가씨의 신호기가 파괴되었습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명백했다. 키사라기 유진이 죽었다는 것.
아키라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키사라기에게 부담스러운 일은 시키지 않았거늘.”
“마지막 신호는 C-08으로부터 왔습니다. 확인해 보니 스페이스독의 영토입니다.”
“흠흠.”
남자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아키라는 호미를 들고 있던 팔을 위로 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머리를 내리쳤다.
호미가 머리에 박힌 남자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쓰려졌다. 아키라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호미를 다시 뽑아 남자의 얼굴을 계속 내리찍었다.
고기다지는 소리가 텃밭을 가득 채웠다.
얼굴과 손에 뇌수와 피를 뒤집어 쓴 아키라는 호미를 시체 위에 내던졌다.
“치워라.”
“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듯 노인은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밖에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사람들이 정원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시체를 들고 금세 사라졌다.
“호미가 영 별로더구나.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도구란다. 알고 있지?”
“예. 주의하겠습니다.”
“그래.”
남자가 죽은 이유는 간단했다. 아키라가 묻지 않은 말에 두 번이나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키사라기를 키우는 데 든 돈이 10억 크래딧이다. 신형 전함 개발비에 맞먹는 액수지.”
“…….”
“심지어 몸이 허약하다고 해서 유전자 개량시술까지 시켰거늘. 겨우 해적 따위가 그 아이를 건드릴 수 있을까.”
아키라는 품속에서 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감히 누가, 유진 가문의 총아를 해칠 수 있을지 궁금하구나.”
“…….”
“키사라기가 탄 함선. 선장이 유성 사뮤엘이었지?”
“예.”
“사뮤엘 가문이면 위성 타이탄 쪽이지. 에저튼 녀석들이 관심을 갖는.”
에저튼은 화성에 영향력을 끼치는 프라임캐피탈이다. 노블캐피탈에 비하면 한 수 처지지만 그래도 엄연히 메가콥의 지배자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존재였다.
“그렇다면 에저튼이 계획한 걸까. 아니야. 에저튼의 애송이는 겁쟁이지. 유진 가문에게 이빨을 들이밀 정도의 담력은 없어.”
그가 말한 애송이는 현 에저튼 가주. 세간에서는 화성의 호랑이라 칭하고 있다. 그 정도로 대단한 위용을 떨치는 자를 아키라는 덜떨어진 아이로 취급하고 있었다.
집사는 에저튼 가의 가주가 두 번이나 암살당하는 동안 아키라가 유진 가문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집사는 감히 단언할 수 있었다.
눈앞의 노괴는 능히 그럴 말할 자격이 있다고.
“에저튼이 아니면 누구일까. 아이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티앤씨에서 개입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집사는 즉답했다.
그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아키라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었다.
“허허. 나랑 생각이 같구나.”
“…….”
“티앤씨와 에저튼은 목성의 지배권을 두고 다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통속이다. 에저튼의 크래딧이 티앤씨로부터 나오니까.”
집사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굉장히 놀랐다. 추측만 하고 있었지 실제로 둘이 밀약을 맺었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지구의 지배자 티앤씨와 화성의 귀족 에저튼이 결합했다는 사실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두 가문의 가주를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말이다.
두 가문에게는 불행한 일이지만 아키라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 뱀 같은 녀석은 이사회 전에 기선을 제압할 생각이겠지. 너도 알고 있겠지?”
아키라가 피에 젖은 수건을 집사에게 건넸다.
“예. 티앤씨의 가주 사담 쳄벌린은 CEO, 즉 가주님의 자리를 넘보고 있습니다.”
“그렇다. 그 건방진 꼬맹이. 작정하고 날 노리는 것을 보니 내가 무섭긴 한가보구나.”
상황이 제법 재밌는지 아키라는 웃음을 터뜨렸다. 피범벅 된 채 웃고 있는 그의 앞에서 집사는 잠자코 기다렸다.
집사는 아키라의 기행을 수십 년 동안 봐 왔기에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너털웃음을 치던 그가 돌연 웃음을 뚝 그쳤다. 방금 전까지 웃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그의 얼굴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명분은 우리에게 있으니 우리가 먼저 치도록 하지. 가문 내 모두에게 알리거라.”
“예.”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의 아키라의 눈에 처음으로 살기가 돌았다.
“내 자산을 망가뜨린 자는 죽어 마땅하다. 유성 사뮤엘과 그 배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있는 자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내 앞에 데려와라.”
“예.”
“C-08 주변에 그림자 한 명이 잠입해 있다. 그에게 연락해 처리해라.”
“…알겠습니다.”
그림자란 말에 집사는 흠칫 놀랐다.
'그림자'는 가주 직속의 특수 부대를 말한다. 극한에 달하는 유전자 개조를 받은 돌연변이 병사들인데 어마어마한 무력과 잔인한 손속으로 악명이 높았다.
‘피바람이 불겠군.’
그림자가 나선 이상 유성 사뮤엘과 그 부하들의 미래는 정해졌다.
차라리 죽음이 자비라고 생각할 정도로 참혹한 운명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우주 너머 어딘가에 있을 그들에게 약간의 위로를 보낸 집사는 조용히 물러났다.
지구 어딘가에서 거대한 전쟁과 무자비한 학살이 결정되고 있는 때.
유성 사뮤엘의 함선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재난에 난리가 났다.
“이게 무슨 개 같은 상황이야?!”
유성은 그대로 기절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의 앞에는 영안실, 아니 영안실이었던 것이 남아 있었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화재 때문에 영안실이 있던 자리에는 잿더미만 남았다.
위기관리팀장은 경계를 섰던 부하들을 불렀다.
“어떻게 된 일이지?”
“그, 그게….”
위기관리팀장의 날카로운 시선에 병사들이 바짝 긴장했다. 그들은 떠듬거리며 자신들이 봤던 상황을 설명했다.
“안에서 연기가 났다고? 이상해서 들어가 보니 불이 난 상황이고.”
“그렇습니다.”
병사들 말로는 경계 도중에 안쪽에서 이상한 냄새와 연기가 흘러나왔다고 했다.
원칙상 의사 말고는 들어가면 안 되기에 그들은 영안실에 들어가지 않고 교대할 의사를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도 연기가 그치질 않아 병사들은 어쩔 수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들을 맞이한 것은 의사가 아니라 거세게 타오르는 불길이었다.
“이해가 안 가는군. 시체밖에 없는 곳인데 불이 날 수가 있나?”
“이,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뒤늦게 도착한 의료팀장이 현장을 보고 경악했다.
사정을 설명해야 할 선장은 넋이 나간 상태라 위기관리팀장이 대신 간략히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들은 의료팀장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영안실에 비치된 화학약품을 생각해 보면 불이 날 수도 있습니다만 화재가 이렇게 크게 발생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 말은?”
의료팀장은 주변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인위적인 화재.’
의료팀장 말대로 승무원 중에 방화범이 있다면 사태가 심각해진다.
하필 연구팀장의 시신이 보관된 이곳에 불을 지른 의도도 명백하게 수상했다.
“…시신부터 먼저 확인하시죠.”
“그래야겠습니다.”
불을 끈 뒤 병사들이 시신들을 꺼내 놨다. 의료팀장은 불에 탄 시신들을 꼼꼼히 확인했다.
“이 사람은 야근한 팀원이군요.”
상체부터 머리까지 유독 심하게 타서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손에 낀 반지를 보고 오늘 야근이었던 부하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부하의 죽음에 씁쓸함을 곱씹으며 의료팀장은 남은 시신에 대한 검시를 마쳤다. 그리고 이 중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기 이 시신이 전부입니까?”
“예. 왜 그러시죠?”
“…….”
의료팀장이 선장을 비롯해 다른 팀장들을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다른 사람들이 못 들을 정도로 거리를 벌린 그는 시신 중에 몇몇이 빠졌음을 밝혔다.
“경비원이랑 연구팀장의 시신이 없다고요?”
“네.”
“시신이 걸어 나간 것도 아니고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의료팀장. 제대로 본 거 맞습니까?”
“몇 번이고 다시 확인했습니다. 정확히 두 명의 시신만 사라졌습니다.”
연구팀장의 죽음에 이어 이제는 수수께끼의 방화 사건까지 터졌다.
‘내부의 누군가가 우리를 공격하고 있다.’
그 사실이 전원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유령도 아니고 그럴 리가….”
“혹시 미확인 외계생물이 선내에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봐! 이게 농담 같나? 말 같지 않은 소리 그만두게!”
“아니 그냥 해 본 말인데 물자관리팀장은 뭘 그리 흥분하십니까.”
“크흠. 아, 아무것도 아닐세.”
“그보다 가장 큰 문제는 연구팀장의 시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C-08에서 해적들과 접선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누군가의 문제 제기에 유성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키사라기의 시신까지 잃어버리면 그에게는 남은 카드가 없었다
유성이 다급히 명령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신을 찾아야합니다! 아시겠습니까?”
“범인 색출부터 먼저….”
“빌어먹을! 이건 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노블캐피탈의 보복이 걱정되신다면 최대한 협조하세요!”
유성의 말이 옳았다. 키사라기 유진이 죽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시신도 못 챙긴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적어도 시신이라도 온전히 둬야지 안 그랬다간 죽음보다 끔찍한 미래가 그들을 집어삼킬 것이 분명했다.
“위기관리팀장.”
“예. 선장님.”
“혹시 연락 했는가?”
“예. 회의가 끝나자마자 바로 했습니다.”
“젠장. 이건 얘기하지 말고 시신은 정상적으로 넘길 것이라 하세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막상 찾았는데 처리할 방법이 없으면 그것도 문제입니다. 접선 전까지 찾기만 하면 됩니다.”
위험한 도박이었지만 위기관리팀장은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다. 유성은 모르겠지만, 그는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암살자가 품 안에 단검을 숨기듯,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유성은 위기관리팀장 다음으로 보안팀장을 불렀다.
엉망이 된 상황에 보안팀장의 책임이 없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는 상당히 주눅이 든 모습이었다.
유성은 그의 어깨에 양손을 얹었다.
“아시죠? 범인, 무조건 잡아야합니다.”
“이,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
“최선으로는 안 됩니다. 승무원 전원을 수색해도 좋으니까 범인을 찾아내세요. 관련해서는 전권을 위임하겠습니다.”
선장이 모든 권한을 넘기겠다고 했지만 보안팀장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잡을 수 있을까?’
솔직히 자신 없었지만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커흠,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믿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보안팀장은 당당한 척하며 대답했다.
그렇게 모두가 당황해하고 있을 때, 천장의 환풍구에서 이 사태를 만든 범인이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팀장들이 해산하자 ‘그것’은 그중 한 명의 뒤를 조용히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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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아주 잘 풀렸어.’
내 정체를 숨기고 적들을 교란시키는 방법.
그것은 화재였다.
영안실 내에 존재하는 화학 약품을 섞어서 불을 낸다니. 외계 생물이 할 짓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운 행위였다.
물론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이 없기에 저들도 수상하게 여기겠지만, 인간의 짓이라고 생각하지 나를 의심하지는 않을 터.
경비원의 시체를 싹 다 먹은 나는 영안실에 있는 약품들을 깡그리 긁어모았다. 유독성 물질 위에 산성피를 몇 방울 떨어뜨리니까 불길이 금방 치솟았다.
‘강화 외골격은 불에 강하지.’
불길이 내 몸을 휘감았지만 뜨거움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여유롭게 불 사이를 통과해 영안실의 천장으로 올라갔다.
영안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기다리니 사람들이 몰려왔다. 불은 금방 꺼졌지만 안에 있는 것들 대부분은 재가 된 뒤였다.
시체도 잘 처리됐고 순조로웠지만 딱 하나 위험할 뻔했던 때가 있었다.
‘설마 외계 생물 얘기가 나올 줄이야.'
감이 좋은 팀장 때문에 간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물자관리팀장이 역정을 내는 바람에 외계 생물 얘기는 그대로 묻혔지만 말이다.
그 이후, 선장과 팀장들은 내가 듣고 있는 줄도 모르고 중요한 정보를 마구 쏟아 냈다.
‘해적이라. 선장도 정신이 나갔구먼.’
스페이스독은 나도 잘 안다. 해적질을 하는 여러 종족들이 모인 연합체 같은 곳인데, 자칭 우주의 정복자, 타칭 우주쓰레기로 불린다.
가끔 의뢰를 받아 용병일도 하지만 수틀리면 바로 배신한다. 오죽하면 스페이스독을 믿을 바에는 차라리 말이 안 통하는 에이모프를 믿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이 나올까.
추측하건대 선장은 키사라기의 죽음을 해적 탓이라고 돌리기 위해 접선을 계획한 것 같다. 만약 그가 스페이스독에 대해 조금만 자세히 알아도 저런 선택은 절대 하지 않을 거다.
선장이 스스로 저런 멍청한 선택지를 골랐을 것 같지는 않고 누군가가 바람을 넣은 게 분명했다.
‘보니까 위기관리팀장이 주도한 것 같은데. 저 사람도 체크해야겠네.’
어쩌면 해적과 내통하는 자일지도 모른다.
‘해적이 이 배를 노린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해적의 습격이라. 마냥 좋기만 한 것도,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다.
장점은 스페이스독이 다종족으로 구성된 만큼 내가 확보할 수 있는 유전자 정수의 폭이 넓어진다는 점이다. 해적들이 연구선을 강습했을 때를 노리면 손쉽게 다양한 유전자들을 얻을 수 있다.
‘단점은 연구선에서 얻을 유전자 정수가 줄어든다는 거지.’
해적 측 인원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봤을 때 이 연구선이 승리할 가능성은 희박했다. 경계를 서는 병사들도 강화복을 돌려 입는 상황인데 약탈과 싸움을 밥 먹듯이 하는 해적들을 이길 리 없다. 승무원 대부분이 전투 중에 사망할 거고, 그러면 내가 섭취할 정수 수도 줄어든다.
‘이 부분은 보류하자.’
아무래도 해적들의 수준을 봐야 판단이 가능할 듯싶다.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회의가 끝났다.
다들 각자 맡은 일을 위해 돌아가는데 내 보조감각에 이상 징후가 포착되었다.
‘저 사람?’
나의 존재를 강하게 부정했던 물자관리팀장이 어딘가 이상했다.
겉으로 멀쩡한 척하고 있지만 속은 아니었다. 심장 박동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 배는 빨랐고, 옷에 가려진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긴장했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증상이었다.
‘왜 긴장하지?’
그는 이 사태에 아무 관련이 없을 텐데.
둥지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흥미가 생겼다. 나는 물자관리팀장의 뒤를 밟았다.
그는 가는 도중에도 연신 뒤를 힐끗 쳐다봤다.
‘무슨 꿀단지를 숨겨놨기에 저런 반응을 할까?’
주변을 경계하며 걷던 그가 멈춰섰다.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화물칸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