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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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한산했던 선내 격납고가 기술팀원들로 인해 북적였다.
기술팀원들은 요 며칠 사이 급격히 늘어난 업무량 때문에 몸이 두 개가 되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위에서 함재기들을 전부 정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봐. 스콧. 저녁 시간이야. 빨리 밥 먹으러 가자고.”
“어. 이것만 끝내고.”
금발의 남자가 함재기 옆에서 일하는 흑발의 남자를 불렀다. 스콧이라 불린 그는 들고 있던 렌치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남았냐?”
“야근할 정도로.”
“하아, 씨발.”
둘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식당으로 향했다.
“난 아직도 이해가 안 돼.”
“뭐가?”
“우리가 싸울 일이 뭐가 있다고 비행기를 깡그리 까뒤집냐고.”
지우개 같은 식감의 인공고기를 씹고 있던 금발의 남자, 핀처가 인상을 찌푸렸다.
“스콧 이 새끼야. 넌 밥 먹는데 일 얘기를 꼭 해야겠냐?”
“아니 그렇지 않아? 핀처 너도 생각을 좀 해 봐.”
또 시작이다.
매번 질리지 않고 요상한 음모론을 펼치는 스콧을 보며 핀처는 한숨을 쉬었다.
“이번에는 또 뭔데?”
“내가 들은 게 있는데 말이야. 위에서 메탈릭 그렘린을 잡으려고 그러는 거라더라.”
“메탈릭 그렘린?”
핀처는 말도 안 된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야. 우리가 메탈릭 그렘린을 만나면 바로 털릴걸? 상급 캐피탈 놈들이 좆같기는 하지만 병신은 아니야. 싸우기는커녕 도망치려고 할 거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지. 사실 메탈릭 그렘린은 이미 배 안에 있어. 위에서도 그걸 알고 잡으려고 혈안이야.”
“뭐?”
“요즘 공기 중에 이상한 냄새 나는 거 알지? 그게 메탈릭 그렘린 냄새래.”
“무슨 말도 안 되는….”
핀처는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스콧 말대로 요즘 선내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정말 공기가 오염되고 있으면 함선AI가 진작 보고했을 것이다. 핀처는 지금까지 공기 문제가 생겼다는 얘기는 들은 적이 없다.
“좀 들어 보라니까. 취사팀에 아는 애가 그랬는데 지난주부터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 사라지고 있다더라.”
“허. 무슨 개소리를.”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였다. 스콧의 헛소리를 들은 핀처는 어이가 없었다.
함선 내 인원은 222명이다. 많다고 하기 힘든 숫자인데 사람이 하루에 한 명씩 줄어든다면 눈에 안 뜰 리 없다.
그리고 위에 있는 사람이 바보인가? 부하들이 사라지는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핀처가 말했듯이 팀장급에 있는 캐피탈들은 좆같은 놈들이긴 하지만 병신은 아니었으니까.
핀처는 스콧의 망상으로 치부하려고 했지만, 그들 대화에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옆자리에 있던 캐머런이었다.
“나도 비슷한 얘기를 들은 게 있어. 물자관리팀에서 팀장님이 실종됐다더라고.”
“진짜?”
“어. 덕분에 화물칸 관리인이 승진해서 임시 팀장이야.”
“봐봐! 핀처 내 말이 맞지?”
스콧은 동조자가 생기자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반면 핀처의 표정은 뭐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그래. 사람들이 실종됐다고 치자. 그러면 윗대가리들은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위에서도 다 알고 있는데 승무원들이 동요할까 봐 감추고 있는 거라더라.”
“역시 메탈릭 그렘린 때문이라니까!”
“메탈이고 나발이고. 걔네가 사람들을 조지고 다니는데 전투기 정비랑 무슨 상관이야?”
캐머런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건 모르지. 나는 사람들이 사라진다는 얘기만 들었어.”
“어…애들을 굴려서 기강을 잡으려고?”
“쯧, 또라이 새끼. 네가 그렇지 뭐.”
멍청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은 스콧을 보며 핀처는 혀를 찼다.
그렇게 식사 시간이 끝나고 기술팀원들은 다시 일자리로 돌아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밤이 되었다.
팀원들도 하나둘씩 퇴근했고, 넓은 격납고는 아까 전까지 시끌벅적했던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듯 한산해졌다.
스콧과 핀처는 구석에서 함재기 하나를 두고 씨름하고 있었다.
“스콧. 야식꺼리 챙기러 갈 건데 뭐 먹을래?”
“난 됐어. 합성주 있으면 그거라도 챙겨 와.”
스콧은 전투기 아래에서 렌치로 나사를 풀고 있었다. 주변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것을 보니 그 말고는 다들 퇴근한 것 같았다.
“스콧.”
“응?”
부품을 갈아 끼고 있는데 누가 그를 불렀다.
“캐머런?”
“잠깐 이리로 좀 와봐.”
“나 지금 작업 중이야.”
“잠깐이면 돼.”
스콧은 바빠 죽겠는데 자신을 부르는 캐머런이 귀찮았다.
그는 중요한 일이 아니면 욕 한 사발 먹여주겠다고 다짐하며 함재기 아래에서 빠져나왔다. 탁 트인 공간에는 전투기랑 공구상자만 보였지, 캐머런은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불러놓고 어디로 간 거야?”
“여기야. 빨리 좀 와봐.”
스콧에게 알려주려고 하는 것처럼 적절한 타이밍에 캐머런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정비실?”
사람을 참 귀찮게 만드는 친구였다. 스콧은 투덜거리며 정비실로 향했다.
정비실에 도착하니까 불이 꺼져 있었다.
‘여기서 들렸는데?’
착각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안쪽에서 캐머런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콧. 이쪽이야.”
“불도 안 켜고 뭐 하는데?”
“찾는 게 있어서 그래. 빨리 좀 도와줘.”
스콧은 정비실 스위치를 눌렀지만 켜지지 않았다. 시간이 늦어서 중앙 관리실에서 내린 듯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허리춤에 찬 손전등을 꺼내 들었다.
환한 빛이 컴컴한 정비실 내부를 비추었다. 그는 손에 들린 빛에 의지한 채 정비실 안에 들어갔다.
어둠에 잠긴 정비실은 그리 유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철제 선반에는 부품과 공구들이 가득 쌓여 있어서 조금만 흔들려도 쏟아질 것만 같았다. 바닥에는 몰래 피고 버린 담배꽁초와 말라붙은 합성주 자국이 있어 심히 불결해 보였다.
게다가 정비실에서는 냄새가 났다. 공구들에 들러붙은 오일 냄새, 인두기에 나는 납의 냄새, 제대로 씻지 못한 남자들의 땀 냄새 등 온갖 역한 냄새들이 공간 전체에 스며들어 있었다.
스콧은 그 익숙하면서도 역겨운 냄새 속에서 뭔가 낯선 느낌을 받았다.
‘이게 무슨 냄새지?’
매일 같이 금속 부품을 만지는 그였기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비실의 공기 속에는 쇠 비린내랑 비슷한데 뭔가 다른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 새끼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쪽이야. 이쪽.”
이상했다. 좀 전까지 문가 쪽에서 들렸던 목소리가 지금은 안쪽에서 들리고 있다.
목소리를 따라 그는 철제 선반을 사이를 지나갔다. 빛 한 점 없는 우주 공간이라 그런지 손전등 없이는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손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의지하며 걷다가 넘어질 뻔했다.
“씨발?!”
스콧이 밟은 것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나사였다. 간신히 몸을 추스른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손전등을 들고 있는 그조차도 어둠 때문에 앞을 제대로 보지를 못하고 있다. 그렇다면 캐머런은 암흑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아까 식당에서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선내를 돌아다니고 있는 메탈릭 그렘린. 그리고 실종자들.
스콧은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캐머런를 불렀다.
“캐, 캐머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스콧이 도망치려고 몸을 돌리는 순간, 그의 앞에 그것이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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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콧?”
야식꺼리를 챙겨 온 핀처는 함재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여겼다.
스콧이 좀 이상하긴 해도 일만은 성실하게 하는 친구였다. 일이 남았는데 자리를 비우는 경우는 없었다.
“스콧!”
핀처가 스콧을 큰 소리로 불렀다. 동료의 이름이 조용하던 격납고에 메아리쳤다.
“여기야.”
답신이라도 하듯, 그의 목소리가 저쪽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어디 있어? 합성주 가져왔어.”
“나 정비실에 있어. 이쪽으로 좀 와봐.”
“정비실? 거긴 또 왜 갔어?”
“뭐 좀 찾을게 있어서. 나 좀 도와줘.”
정정하겠다. 스콧은 일은 잘하지만 사적으로는 참 귀찮은 친구였다. 핀처는 투덜거리며 정비실로 향했다.
“불도 안 켜고 뭐 하냐?”
“옮길게 있어. 도와줘.”
“어휴 병신 새끼 진짜.”
핀처는 손전등을 들고 시커먼 정비실 안에 들어갔다. 선반 너머로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스콧의 손전등이 만들어내는 빛이었다.
“야, 뭘 하는데…어?”
그 자리에 스콧은 없었다. 주인을 잃은 도구만이 홀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핀처는 스콧의 손전등을 쥐었다. 주변 어디에도 스콧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의 뒷목 위에 물이 떨어졌다.
“뭐야?”
누수인가 싶어 그는 목 뒤를 어루만졌다. 위에서 떨어진 액체는 뜨겁고 끈적끈적했다.
그는 손전등으로 손바닥에 묻은 액체를 확인했다.
“피?”
손바닥은 새빨갛게 젖어 있었다.
천장에서 떨어진 액체는 핏방울이었다.
그 사실을 인지한 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손전등이 덜덜 떨리며 위를 향했다.
거기에 놈이 있었다.
1m는 될 것 같은 놈이 스콧을 붙잡은 채 천장에 매달려 있었다.
그 모습은 우주의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갤러곤 같았다. 신화 속의 용이 지금 스콧을 뜯어먹고 있었다.
용이 핀처를 향해 손을 뻗은 것이 그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그날 이후.
기술팀의 세 사람을 본 자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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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낚시에 소질이 있었나?’
나는 어두컴컴한 정비실에 앉아 사람의 다리를 오물오물 씹고 있었다. 다리의 주인은 목이 척추와 함께 뽑힌 채 널브러져 있었다.
“흉내 내기. 참 편리하단 말이야.”
내 입에서 다리의 주인, 핀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흉내 내기.
물자관리팀장이 밀수하려고 했던 생물 중 레드웜이라 불리는 녀석의 유충이 있었다.
레드웜은 사막형 행성에만 사는 초대형 지렁이인데 굉장히 희귀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다른 생물의 목소리를 흉내 내는 능력이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 다른 생물을 효과적으로 사냥하기 위해 진화한 결과라고 한다.
나는 컨테이너에 보관되어 있던 레드웜 유충을 잡아먹었고, 운 좋게 녀석의 유전자 정수를 획득했다. 덕분에 내 목 안에는 굉장히 복잡한 발성기관이 새로 자리를 잡고 있다.
‘단점이라면 내 능력이 원본에 비해 열화판이라는 거지.’
레드웜과 달리 나는 아무 목소리나 다 따라 할 수 없었다. 내가 가장 마지막으로 먹은 생물의 목소리만 흉내 낼 수 있었다. 이전에 먹은 스콧이나 캐머런의 목소리 흉내는 불가능했다.
그리고 복잡한 문장은 말할 수 없고 짧은 문장 혹은 단어만 가능하다. 말이 조금만 길어지면 으르렁거림이 섞여서 사람의 것도 괴물의 것도 아닌 이상한 소리가 된다.
‘뭐 그래도 충분히 좋은 능력이지만.’
낮은 저음의 으르렁거림 대신 걸걸한 성인 남성의 목소리가 입에서 나오니까 어쩐지 신기하면서도 어색하다.
나는 몇 번 정도 목소리를 시험해 보면서 다음 타깃을 떠올렸다.
‘내일은 취사팀의 사람을 먹어야겠다. 이름이 피에르였나? 핀처랑 친한 것 같지는 않지만 상관없겠지.’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기를 부른다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내일 저녁은 피에르라는 친구로 때워야겠다.
그는 모르겠지. 자기가 스콧에게 쓸데없는 말을 하는 바람에 죽는다는 것을 말이야.
식사를 마친 나는 활주로로 나와 벽면에 있는 환풍구로 들어갔다.
‘둥지에 가기 전에 잠깐 들렀다가 갈까?’
통로 위를 기어가던 중 방향을 틀어 실험실로 향했다.
버블아메바, 내가 26호라고 부르는 녀석을 보기 위해서였다.
실험실에 가까워지자 녀석의 파장이 나에게 전달되었다.
「안녕.」
뒤통수에 있는 촉수가 찌르르 하고 울렸다. 지금까지 초능력 기관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뜻밖에도 초능력 기관을 통해 파장으로 대화를 나누는 생물들과 교감할 수 있었다.
게임을 할 때도 매번 효율적인 플레이만 추구하다 보니 이런 식으로 자잘한 효과가 있는 특성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었다.
‘애초에 버블아메바랑 대화할 수 있게 해주는 특성을 내가 챙길 리가 없지만.’
나보다는 버블아메바 매니아들에게나 필요할 법한 특성이었다.
어쨌든 저쪽에서 인사를 했으니 이쪽이 화답할 차례다. 나는 뒤통수에 정신을 집중했다. 촉수가 꿈틀거리며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모았다.
[즈즈즈즈(안녕)]
「안녕. 오늘도 배고프네. 밥.」
26호를 보지 않고도 대화할 수 있게 되면서 새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전보다 어휘력이 늘어났어.’
내가 알기로 버블아메바는 진화를 하는 생물이 아니었다. 성체가 되면 덩치만 커질 뿐 진화라고 할 만한 변화는 없었다.
그런데 녀석은 자기 종족의 한계를 넘어서 불가능한 복잡한 내용의 의사를 전달한다. 게다가 어디서 공부라도 하는지 만날 때마다 말하는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사이오니움 실험을 한다더니. 내가 모르는 효과가 있는 건가?’
사이오니움 문제인지 녀석이 특별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차피 녀석이 똑똑해진다고 나한테 불이익이 오는 것은 아니니까 그 문제는 신경을 끄기로 했다.
[즈즈 즈즈즈즈(미안. 오늘 밥 어려움)]
「어려움이 뭐야?」
[즈즈즈즈즈(못 준다는 것)]
녀석으로부터 시무룩한 감정의 파장이 날아왔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온종일 실험만 당하는 녀석에게 유일한 낙은 내가 가져온 칼로리바를 먹는 것이었으니까.
‘몸이 커진 뒤에는 칼로리바를 못 주고 있지.’
현재 실험실 보안은 원자로, 냉각실 다음 수준이었다. 연구팀장이 실종된 후, 보안팀장은 실험실 보안을 최대로 끌어올렸다.
덕분에 그동안 안전했던 실험실 위 환풍 통로도 위험해졌다. 실험실 내부에 진동감지기를 깔아놔서 섣불리 움직이다가는 바로 걸릴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이라서 지금처럼 멀리서 26호와 대화를 나누는 것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즈즈즈(오늘은 괜찮음?)]
「힘들어. 아파.」
키사라기가 죽은 뒤 사이오니움 실험은 정체된 상태였다. 부하들이 매일 실험을 하고 있지만 전처럼 무식하게 많은 양을 주입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6호가 괜찮으냐고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소량이라 해도 사이오니움은 신체에 유독한 약품이니까.
[즈즈(떠남)]
「안녕. 잘 가.」
‘쯧, 힘내라.’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다. 내 손에 강력한 특성이 들어왔다고 해도 이 배의 승무원들과 전면전을 하는 것은 무리였다.
적어도 아성체 이상은 되어야 게릴라전이 가능하다. 아성체가 되면 강화복이 지급된 분대까지는 무리 없이 전멸시킬 수 있으니까.
‘문제는 아성체 진화 조건이 까다롭다는 거지.’
아성체로 진화하려면 유저가 플레이할 수 있는 지성체 두 종족을 각각 10명 씩 죽이고 그 유전자를 먹어야 한다. 이 배에는 조건을 만족시키는 대상이 인간밖에 없으니까 아성체 진화가 불가능하다.
‘해적이 있긴 한데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르지.’
이 주변에 있는 스페이스독이 어느 카르텔이냐에 따라 내가 진화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갈린다. 단일 종족으로만 구성된 카르텔도 있어서 혹여 인간 카르텔이 걸리면 아무 쓸모가 없다.
‘길어야 며칠.’
함선 내의 분위기를 보면 스페이스독과 조우할 시간을 얼마 남지 않았다. 내가 잡아먹은 기술팀원들도 밤을 새며 전투기를 손보고 있었고 말이다.
둥지로 가고 있는데 내 아래에서 사람 한 무리가 지나갔다. 병사들과 위기관리팀장이었다.
“난 볼일이 있어서 이만.”
“충성!”
병사들과 헤어진 위기관리팀장이 혼자서 어딘가를 향해 걸어갔다.
‘위기관리팀장도 잡아먹기는 해야 하는데.’
쉽지 않아 보이는 상대라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마침 잘 됐다. 당장 잡아먹지 않더라도 약점이나 생활패턴을 미리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나는 위기관리팀장의 뒤를 쫓았다.
그가 향한 곳은 체력단련실이었다. 안에서는 병사와 승무원들이 열심히 자기몸을 가꾸고 있었다.
‘뭐야? 운동하려는 거였어?’
순식간에 환복을 마친 그는 운동 기구 앞에 앉아 열심히 근력 운동을 시작했다. 10분 동안 뭔가 변화가 있을까 싶어 지켜봤는데 그는 쇠질만 열심히 하고 있었다.
‘쩝. 다른 사람한테 가 봐야겠다.’
굳이 먹잇감이 운동하는 것을 지켜볼 필요는 없었다. 자리를 뜨려는데, 마침 그가 기구를 내려놓더니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전화기?’
이어폰 형태의 소형 전화기였다. 그는 그것을 손에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귀에다가 전화기를 꼽고 다시 운동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흥미가 생긴 나는 보조기관을 그에게 집중했다.
“일…연락…니다. …는 C…근처….”
띄엄띄엄 들리던 그의 소리가 점점 선명해졌다.
“예. 계획대로 진행 중입니다. 네. 네. 예?”
‘계획이라고?’
“가문에서 명령이 내려왔다고요?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의문을 표하겠습니까?”
순간 위기관리팀장의 눈에 당혹감이 스쳐 지나갔지만 금세 회복되었다.
“어차피 잘 됐군요. 키사라기 아가씨는 이미 제거된 상태. 배는 예정대로 C-08에 도착할 겁니다. 예. 유성의 명령은 전부 녹음된 상태입니다.”
‘뭐?’
“예. 예. 괜찮습니다. 모든 것은 가문, 아니 정우 유진님의 의지를 따르기 위한 것. 감수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전화를 끊은 그는 다시 운동에 집중했다. 영락없이 운동광의 모습이었지만, 내 머리 안에서는 그에 대한 경계심이 최고 수준으로 치솟아올랐다.
‘이거 곰 같은 사람인 줄 알았는데 완전 여우였네?’
위기관리팀장이 선장에게 스페이스독과 접선하라고 바람을 넣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통화 내용을 보면 그것보다 훨씬 여러 가지를 계획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과연 내게 득이 될지, 혹은 실이 될지.
나는 어둠 속에서 조용히 그를 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