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6
‘적은 어떻게 나올까.’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병사들을 보낸 자들, 그리고 더 많은 병사들이 남아 있으니까.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6명이 죽었으니까 저쪽에 남은 병사와 장교는 합해서 90명. 내 경고를 받은 저쪽은 전력을 다할 가능성이 높다.
이 배에 강화복이 부족하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문제는 무기다. 적들이 레이저 장비 이상의 무기들, 이를테면 플라즈마 무기를 들고 오면 내가 이길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플라즈마급은 아성체가 되도 못 막아.’
육체 강화 타입을 얻으면 딱 두 번까지 버틸 수 있고, 그 전이면 무슨 수를 써도 막을 수 없다. 맞으면 바로 즉사니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플라즈마 무기의 설정을 보면 함대전을 상정해서 개발된 고화력 무기다. 함선이나 전차를 파괴하는데 쓰는 무기라서 화력 하나는 굉장하다.
다만 대다수의 플라즈마 무기는 혼자서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겁다. 경량화한 플라즈마 무기도 있긴 하나, 그런 것들은 값이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비싸다.
‘여기 있을 만한 건 플라즈마 런처 밖에 없어.’
플라즈마 런처는 메가콥에서 분대 단위로 하나씩 보급하는 중화기다. 솔직히 형편없는 보급 상황을 보면 플라즈마 런처도 없을 것 같지만 혹시 또 모른다.
‘이 이상 적을 속이는 것은 어려울 거야.’
내가 가진 카드 중 상당 부분 노출되었으니까 똑같은 방법으로 적을 속일 수 없었다. 덜 떨어진 녀석들 몇 명 정도는 처리할 수 있겠지만 90명에 달하는 병력을 다 속여 넘기기는 힘들었다.
‘내 죽음을 확인하기 전까지 아놀드는 멈추지 않겠지.’
여러 가지로 아마추어스러운 면모를 보이는 유성과 달리 아놀드는 철두철미한 군인이다. 그것도 음모를 꾸미는 군인. 그의 계획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C-08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나를 반드시 죽이려고 들 거다.
‘그렇다면 여기서 머리를 노린다.’
지금이야말로 속도전이 필요할 때다. 나에 대한 정보를 정리하고 전열을 정비하기 전에 수뇌부를 치자.
마침 팀장급 이상의 인원들이 상황실에 모여 있다. 상황실을 습격해 팀장들을 줄여놓으면 적들의 지휘체계는 완전 엉망이 될 거다.
결정을 내린 나는 시체를 내버려 두고 함교 쪽으로 뛰었다.
가는 도중 바닥에 뚫린 환풍구를 통해 병사들이 반대편으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그들의 목적지는 A1이 보고했던 곳, 즉 농업 구역이었다.
적들은 내가 농성을 준비한다고 생각한 것 같은데,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다. 적들이 엉뚱한 곳을 뒤지고 있는 동안, 나는 그들의 코앞에까지 와 있었으니까.
벽에 설치된 환풍구의 철망 너머로 새하얀 바닥이 보인다. 함선에서 실험실 다음으로 깨끗한 공간, 상황실이다.
대리석 같은 바닥에 대비되어 벽에는 묵빛의 우주 공간이 펼쳐져 있다. 함선 외부에 달린 카메라를 통해 실시간으로 외부의 풍경을 반영하고 있어서 저렇게 보이는 거다.
상황실에 있는 사람들은 수많은 별들이 춤추는 저 아름다운 광경이 보이지 않는지 그저 소란스럽게 떠들고 있었다.
“위기관리팀장! 저 미친 괴물은 어디서 온 겁니까! 아니 그보다 놈의 정체가 대체 뭡니까?”
여기서는 안 보이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유성이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서 아놀드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르겠습니다. 물자관리팀장 목록을 확인해 보니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생물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그놈이 아닐까 합니다만.”
“그런 무책임한 발언이 어디 있습니까! 팀장용 강화복까지 빌려 줬는데 얻은 것이 아무것도 없잖습니까!”
그게 팀장용이었구나. 우주에서 강화복은 생명줄인데 돈 좀 더 쓰지.
중급 강화복이 조금만 더 많았어도, 아니 하다못해 상급 강화복만 있어도 내가 이렇게까지 쉽게 사냥할 수 없었으리라. 지출을 줄이려다가 본인의 삶을 줄이게 생긴 유성이었다.
나랑 생각이 비슷했는지 위기관리팀장 아놀드의 목소리에도 분노가 섞였다.
“장비가 조금만 더 좋았다면 이런 참사는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선장님.”
“뭐요?!”
“그리고 얻은 것이 없다는 말은 틀렸습니다. 저희는 적이 고도의 지능을 가진 위험 생물, 동시에 인간의 목소리를 따라 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었으니 말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전장에서 정보 수집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적에 대한 최소한의 정보를 얻었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움직여야합니다.”
“…쯧.”
짜증이 살짝 섞였지만 아놀드의 음성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유성은 대꾸할 말이 없는지 혀만 찰 뿐이었다.
“그래서 방법이 있습니까?
“이미 병사들을 보냈습니다만 추가로 요청드릴 것이 있습니다.”
“뭡니까?”
“병기고에 있는 플라즈마 런처 사용을 허가해주십시오.”
“뭣!”
플라즈라 런처라. 혹시나 했는데 진짜로 갖고 있나 보다. 뉘앙스를 보면 전 분대에게 보급된 것은 아닌 듯하지만 말이다.
플라즈마 런처는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마법의 요술봉이지만, 팀장들은 탐탁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미쳤소? 그 무기는 해적과 싸울 때 쓰기로 하지 않았잖소!”
“여기는 배 안이오! 아무리 전함을 연구선으로 개조했다고 해도 선내에서 플라즈마 런처를 쓰다니! 자살할 생각이면 혼자 우주 밖으로 나가 뒈지시오!”
“시끄럽습니다!”
항해팀장과 기술팀장이 꽥꽥거리자 아놀드가 고함을 치며 그들을 윽박질렀다. 그들은 잠깐 주춤하는 것 같더니 다시 아놀드에게 덤벼들었다.
“지금 우리한테 소리를 지른 거요?”
“배에서 플라즈마 런처를 쓰는 것은 절대 찬성할 수 없소!”
이전까지 아놀드는 어떤 일을 맡아도 훌륭한 성과를 냈지만 이번 작전은 대실패했다. 그 결과, 그의 카리스마는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추락했다. 역시 성과가 전부인 메가콥 소속다운 반응이었다.
‘슬슬 나갈 타이밍인데.’
상관들은 이성을 잃고 떠드는 중이고 부하들은 저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갈팡질팡하는 중이다. 적들이 혼란에 빠진 이 상황, 먹잇감의 숨통을 끊기에 최적의 순간이다.
에이모프의 섬세한 보조기관이 수색을 시작했다. 대상은 상황실 내부에서 발생하는 모든 움직임이었다.
턱 끝의 촉수가 움찔거리며 대기를 더듬었다. 그러자 소용돌이치는 은하수와 같은 정보의 물결이 나를 쓸어 담듯이 쏟아져 왔다.
컴퓨터와 전자기기들이 내는 전자파와 열기, 함선AI가 동작할 때마다 정밀한 부품들이 움직이며 만드는 미세한 기계음, 인간의 숨소리,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 땀 냄새, 근육의 떨림, 심장의 맥동, 혈관 속 피가 흐르는 소리.
그것은 인간은 결코 인지할 수 없는 세계였다. 나는 초감각의 차원을 엿보며 습격할 목표를 물색했다.
아놀드가 최우선 목표이긴 하지만 그는 내 위치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환풍구로 내가 다닌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위치를 먼 곳으로 잡은 것이 분명했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자는….’
감지된 정보는 내가 전에도 몇 차례 봤던 익숙한 자의 정보였다.
반쯤 벗겨진 머리에 소심한 인상의 남자의 이름은 웨이.
키사라기 유진을 대신해 임시 연구팀장이 된 자이자 지금도 매일 26호를 고문하는 자였다.
‘저자를 노린다.’
저자도 언젠가는 죽일 생각이었다. 때마침 좋은 기회가 왔으니 마다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환풍구의 철망을 전투용 팔로 부쉈다. 유체가 되면서 강화된 내 팔에 의해 얇은 합금망이 산산조각이 났다.
AI가 경고 신호를 보내겠지만, 대응은 사람이 해야 한다. 저들이 AI의 보고를 보기 전에 모든 일이 끝난다.
‘각력 강화’ 특성으로 강화된 다리에 힘을 줬다. 내 몸이 스프링이라도 밟은 것처럼 높이 뛰어올랐다. 내가 허공에 체류하는 동안, 아놀드가 철망이 부서지는 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그의 시선이 망가진 환풍구로 향했다.
그의 눈이 커진다. 습격을 인식한 그가 입을 크게 벌린다. 곧 그의 입에서 고함이 튀어나오겠지만 그때는 이미 한 사람이 죽은 뒤가 될 거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웨이의 머리 위에 있으니까.
내 몸이 그를 덮친 뒤에야 그가 반응했다. 어깨 위에 올라탄 나는 그의 얼굴을 깨물었다.
면도칼처럼 예리한 나의 이빨들에 의해 그의 얼굴이 삽시간에 피투성이가 되었다. 얼굴 가죽은 너덜너덜해졌고 눈과 코는 제 기능이 불가능할 정도로 손상되었다.
“끄아아아악!”
맨 정신으로 얼굴이 갈려 나간 웨이가 고통섞인 비명을 내지르자 그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던 다른 팀장들도 대경실색했다.
“으, 으아아아악! 괴물이다!”
바닥에 엎어지는 웨이를 내버려 두고 나는 옆에 있던 다른 팀장에게 달려들었다. 메가콥 특유의 화사한 제복이 피와 살점으로 얼룩졌다.
“아아아악!”
“사, 살려 줘!”
“토, 통신병! 선내에 알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나는 팀장을 회 뜨는 것을 멈추고 통신병에게 고개를 돌렸다.
“히익?!”
환풍 통로로 쳐들어온 병사들과 달리 그는 전투 경험이 많이 부족한 것 같았다. 피범벅된 내 모습을 본 그는 얼어붙어서 아무 행동도 못 했다.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그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아아아…컥!”
몸에 힘을 실어 그를 넘어뜨린 뒤 나는 꼬리로 마무리했다. 이제는 단검만큼 커진 꼬리의 침이 그의 눈을 찌르고 안쪽의 뇌까지 파괴했다.
머리에 바람구멍을 낸 꼬리를 회수하는데 어디선가 에너지탄이 날아와 내 등을 때렸다.
돌아보니 아놀드였다. 그의 손에는 작은 레이저 권총을 들려 있었다.
‘장교용 권총인가 보네.’
도망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난 꼬리를 크게 흔들어서 묻은 피를 털어냈다.
믿는 구색이 있는 것인지 그는 물러나지 않고 재차 권총을 발사했다. 나는 가볍게 몸을 틀어 피한 뒤 그에게 접근했다.
‘강화복도 안 입었는데 무슨 깡이지?’
그의 복장은 다른 팀장과 마찬가지로 제복이었다. 군인이라 그런지 색깔만 흰색이 아니라 붉은색일 뿐 어떠한 방어 기능도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내가 팔을 휘두르면 그는 그대로 상하체가 분리되어 하얀 바닥을 피로 적실 것이라는 뜻이었다.
“끄, 그그그극….”
옆에서 신음하고 있던 웨이를 꼬리로 마무리한 나는 그대로 아놀드에게 도약할 준비를 했다.
다리를 박차려는 순간, 보조기관이 크게 진동했다.
「나의 몸이 공중에 떠올랐다.」
「아놀드가 뒤늦게 권총을 발사했지만 모두 빗나갔다.」
「내 꼬리가 아놀드를 복부를 관통했다.」
「그가 품속에서 플라즈마 피스톨을 꺼냈다.」
「나는 피하려고 했지만 꼬리가 그의 몸에 박혀 있어서 피할 수 없었다.」
「플라즈마탄이 내 머리를 파괴했다.」
「나는 죽었다.」
‘이런!’
동영상을 수십 배 빠르게 돌린 것처럼 엄청난 속도로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포식자 감각을 통한 미래 예지 효과였다.
‘플라즈마 피스톨이라니!’
아놀드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무기를 갖고 있었다.
플라즈마 피스톨은 경량화에 성공한 몇 안 되는 플라즈마 무기다. 살상력은 뛰어난데 무게는 권총만큼 가벼워서 굉장히 좋은 무기라고 할 수 있지만 단점이 하나 있다.
가격이 어마어마하게 비싸다는 것. 저 피스톨 하나가 이 함선 3척의 가격과 맞먹는다. 노블캐피탈, 프라임캐피탈 정도의 재력이 아니라면 평생 구경도 못하는 장비다.
‘젠장, 유진 가문하고 관계가 있는 것 같더니.’
저 돈 먹는 하마, 플라즈마 피스톨이면 나를 죽일 수 있다. 머리나 흉부를 맞으면 즉사, 빗맞아도 최소 치명상이다. 그러니 신중히 움직여야 한다.
내 움직임이 조심스러워지자 아놀드가 눈썹을 찌푸렸다.
“역시 알아차렸는가.”
그가 품속에서 은색의 얇은 권총 형태의 플라즈마 피스톨을 꺼냈다. 구석에 숨어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유성과 다른 팀장들이 비명과 같은 탄성을 내질렀다.
“플라즈마 피스톨?!”
“저 비싼 무기를!”
아놀드는 좀 전의 긴장하던 얼굴이 연기였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네 녀석, 정체는 모르겠지만 기시감이 드는군.”
「그르르….」
“다양한 능력을 쓰는 괴물이라. 나의 주인, 시현 유진님을 닮았어.”
말과 함께 그의 총구가 나를 향했다. 보조기관을 극도로 활성화시켜서 그의 몸을 미리 읽고 있던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내가 있던 자리에 녹색 광탄이 작렬했다. 우주 공간에서 날아다니는 암석 파편에도 끄떡없는 합금판이 저 한 방에 박살이 났다.
“그분께서 오시기 전에 변수는 배제한다.”
놈의 무기를 피해 나는 컴퓨터 뒤에 엄폐했다.
우리가 서 있는 위치는 함교. 중요시설인 만큼 그도 함부로 쏠 수 없겠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시간은 나의 편이 아니었다.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가 적이니까 시간을 오래 끌수록 불리해지는 것은 나였다.
‘상황이 좋지 않아.’
화물칸에서 태어난 이후 내가 겪는 최대의 위기다.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는 여러 가지 있었지만 지금처럼 죽음이 가까워진 적은 없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에이모프의 몸에 빙의한 이후’부터 말이다.
‘이보다 더한 위험도 수없이 겪었어.’
스페이스 서바이벌에서는 최악의 상황을 정말 밥 먹듯이 겪었다.
그렇다고 내가 포기했는가? 아니면 패배했는가?
전부 아니다. 마지막에 서 있는 자는 언제나 나, 에이모프였다.
‘날 배제한다고?’
아놀드는 틀렸다.
그의 주인이고 나발이고 누가 오든 간에 그들을 맞이할 자는 아놀드 따위 아니라 바로 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