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7
곰, 사자, 늑대.
우리가 매체를 통해 쉽게 접하는 육식동물들이다. 미디어에서 그들은 살인병기 혹은 어떠한 싸움도 두려워하지 않는 폭력의 화신으로 묘사된다.
그야말로 살육만을 목표로 하는 기계.
‘과연 그럴까?’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대부분의 육식동물은 손해가 클 것이라 판단되는 싸움은 피한다. 야생에서는 가벼운 부상도 치명적일 수 있으니까.
현실에서의 포식자는 무자비한 터미네이터가 아니라 겁쟁이에 가깝다.
폄하하는 것이 아니다. 겁쟁이처럼 보이는 신중함이야말로 육식동물을 진정한 사냥꾼으로 만드는 요소니까.
에이모프를 즐겨 플레이하던 나는 자연이 내린 가르침을 가슴 깊이 새겼다.
내가 아무리 강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누구보다 많은 정보를 손에 쥐고 있다고 해도.
‘신중함이 없으면 무용지물.’
그 사실을 기억하며 나는 적들을 탐색했다.
아놀드의 심장 소리는 안정적이었다. 좀 전까지 긴장한 척했던 것은 역시나 연기였다.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동안 나에 대해 얼추 분석하고 행동한 거겠지. 내가 보조기관과 시각으로 사물을 감지한다는 사실까지는 몰라도 생체 레이더 비슷한 걸 지니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제법이야.’
일부러 겁을 주기 위해 병사들을 잔인하게 죽였지만 그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나와 비슷한 사냥꾼의 냄새가 난다. 노련한 포식자의 냄새.
자연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나와 달리 그의 스승이 과연 누구일지 궁금하다.
플라즈마 피스톨이 재차 불을 뿜었다. 고열의 에너지 덩어리가 방금 전까지 내가 있던 자리를 불태웠다.
나는 야생마처럼 탄탄한 다리로 함교를 내달리며 적을 어떻게 공략할지 생각했다.
‘우선 놈의 가장 큰 약점은 장소야.’
이곳은 예민한 전자기기들이 가득한 함교 상황실이다. 플라즈마 피스톨이 화력이 약하다고 해도 플라즈마 무기 중 ‘상대적’으로 약한 것일 뿐. 두터운 합금판에 구멍을 뚫을 정도로 강력한 무기다. 뭐 하나 잘못 맞췄다간 어떤 우발사태가 터질지 모른다.
‘원래는 안 쓰려고 했던 것 같지만.’
포식자 감각이 보여 준 미래에서도 아놀드는 죽기 직전에 피스톨을 뽑아 들었다. 그 역시 선내에서 피스톨을 사용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위기관리팀장! 여긴 상황실인 것을 잊지 마시오!”
“기계에 안 맞도록 조심하시오!”
“…주의하겠습니다.”
호들갑을 떠는 유성과 그에 동조하는 팀장들. 아놀드는 대답과 달리 피스톨을 도로 집어넣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배보다 내가 먼저라 이거지?’
아무래도 그가 생각하는 위험순위에서 선내의 안전보다 내가 더 위로 올라간 것 같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다. 그의 계획에서 유일한 걸림돌이 바로 나니까. 배가 좀 망가지더라도 여기서 나를 잡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거다.
다만 강력한 무기를 가진 것과 별개로 아놀드에게는 불리한 점이 적지 않다.
현 시점에서 그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선장과 팀장들을 지키는 것. 혼자서 C-08에 갈 수는 없으니 그들 중 일부는 항해상 반드시 필요했다.
‘약점이 많긴 하지만….’
내 경우도 조건이 좋지 않다. 탁 트인 장소다 보니 사격각이 잘 나오기 때문이다. 컴퓨터 같은 엄폐물이 없었다면 진작 피스톨에 맞았으리라.
지금도 내가 팀장이나 선장에게 접근하려고 할 때마다 아놀드가 피스톨로 견제를 했다. 내가 컴퓨터 뒤에 몸을 숨기면 그도 사격을 멈췄다.
“쥐새끼 같은 놈.”
멀리서 아놀드가 욕설을 내뱉었다. 그 모습은 초조해하거나 짜증을 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의 심장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건 기만이야.’
아놀드는 대치가 지속되는 상황을 바라고 있다. 그는 나를 견제하는 한편, 통신기로 함선 내의 병력들을 호출했다.
“여기는 함교 상황실. 괴물이 이곳을 습격했다. 활동 가능한 모든 병력은 이곳에 집결하라.”
‘과연 그렇게 나온다 이거지?’
저 곰 같이 생긴 여우는 비장의 무기를 시간 끌기 용도로 쓰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나를 잡으려는 것은 맞지만, 실제로 나를 해치우는 일은 본인이 아니라 병사들에게 맡길 심산인 게 틀림없었다.
확실히 저 피스톨 하나 때문에 내 움직임이 소극적으로 되었으니까 그의 의도는 잘 먹히고 있다고 봐야겠지.
‘하. 날 속이다니 재밌네.’
저 정도의 판단력이면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유저 중에서도 중위권 이상이다. 순한 양들만 잡아먹다가 그들 사이에 섞인 늑대를 보니 확실히 긴장된다.
유체가 된 이후 처음으로 겪은 위기, 그리고 까다로운 적까지.
오랜만에 이런 상황을 겪으니까 투쟁심이 끓어오른다.
‘병력이 오기 전에 끝내야 하는데….’
나는 총구를 떠난 에너지 덩어리를 피해 기계 뒤편에 숨었다.
어떻게 빠져나갈지 고민하던 중 소화기가 눈에 들어왔다. 외형은 지구의 것과 다르지만 하얀색 연기 같이 생긴 소화제를 내뿜는 것은 동일했다.
‘쓸 만하겠는데.’
나는 재빨리 소화기를 꺼내 들고 가슴팍에 있는 작은 손으로 안전핀을 뽑았다.
그때 플라즈마 피스톨을 든 아놀드가 내 뒤에 나타났다. 피스톨이 발사되기 전, 한 발 먼저 소화기를 작동시켰다. 호스 끝에서 흰색 소화제가 뿜어져 나오며 그의 시야를 가렸다.
“큭?! 이런 잔재주를!”
하얀 기체 너머로 녹색 에너지 덩어리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땅에 바짝 엎드려서 피해내고, 4개의 전투용 팔과 다리로 6족 보행을 시작했다. 그 와중에도 가슴 쪽 작은 팔은 쉬지 않고 소화기 내에 있는 내용물들을 사방에 뿌려댔다.
“콜록! 콜록!”
“아무 것도 안 보여!”
밀폐된 상황실 안이 소화제로 가득 찼다. 여기저기서 생존자들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 네 녀석들이 차고 있는 무기는 장식인가!”
“죄, 죄송합니다!”
상황실에 남아 있던 통신병들이 부랴부랴 레이저 권총을 뽑아 들었다. 하지만 이미 소화제 때문에 시야 확보가 안 되는 상황에서 그들이 쏘는 레이저는 내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놈이 어디 있지?”
“설마? 젠장! 모두 선장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
내 의도를 어느 정도 읽어낸 아놀드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내가 함선의 핵심, 유성을 노릴 것으로 생각했나보다.
눈치가 제법이었지만 그는 고른 것은 오답이다.
내가 노리는 목표는 선장이 아니다.
내 앞에는 취사팀장이 쓰러져 있었다. 그의 배에 꽂힌 꼬리가 독침을 회수하며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맹수가 초식동물의 목을 노리듯 내 이빨이 그의 경동맥 부근에 박혔다. 인간의 피와 살점이 몸 안으로 흘러들어오고, 내 목에 있는 작은 기관이 그에 반응했다.
이제 나는 취사팀장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다.
“그쪽이 아니야! 선장님은 이쪽에 있다!”
“네?”
앞이 안 보이는 적들은 내 목소리에 당황했다. 분명 선장이 가까운 곳에 있는데 갑자기 다른 사람이 아니라고 하니까 황당할 수밖에.
“속지 마라! 놈이 교란 전술을 펼친다!”
“네, 넵!”
아놀드가 병사들을 다그쳤지만 혼돈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저들도 통신 너머로 A, B팀이 전멸당하는 것을 들었지만, 자기들이 당하게 될 줄은 몰랐겠지.
적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나의 손은 또 다른 희생자의 피로 물들었다. 그가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제복은 그의 지위가 보통 높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로 외쳤다.
“속으면 안 된다! 놈이 팀장을 죽였다!”
“하, 항해팀장님?”
목소리의 주인은 항해팀장, 직급상으로는 선장 다음에 있는 자다. 즉 위기관리팀장 아놀드보다 높은 위치에 있다.
“놈이 팀장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
“이런 빌어먹을 개자식! 속지 마!”
“난 항해팀장이다! 내 말을 믿어라!”
“젠장! 멍청한 놈들! 저놈이 괴물이다! 당장 놈을 쏴 죽여!”
아놀드는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느껴진다. 동요한 통신병들의 총구가 그가 있는 방향과 내가 있는 곳 사이를 정처 없이 오가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안개라도 낀 듯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공간 속에서 병사들은 믿음을 시험받고 있다. 한쪽은 하늘과 같은 팀장님, 다른 한쪽은 우주의 심연에서 날아온 괴물. 그들은 과연 어떠한 선택을 할까?
“으, 으아아아악! 씨바아아알!”
통신병 중 한 명이 마침내 결정을 내렸다. 그가 든 레이저 권총의 총구가 의심이라는 안개 속에 있는 적에게 향했다.
붉은빛 섬광이 소화제를 갈랐다. 인간의 눈으로 쫓을 수 없는 빛의 궤도가 지나간 뒤, 고기가 타는 냄새가 기체 사이에 스며들었다.
“컥!”
아놀드가 고통이 섞인 신음을 내뱉었다.
그의 오른쪽 어깨 부분은 레이저를 맞아 시꺼멓게 타들어간 상태였다. 플라즈마 피스톨을 든 그의 손은 바닥을 향해 축 처져 있었다. 제대로 맞았다면 오른팔이 날아갔겠지만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수확이었다.
‘기회다.’
아놀드가 아닌 통신병을 대상으로 한 교란작전은 성공이다. 전투 중에 인원이 다수인 쪽이 반드시 유리하다고 볼 수는 없다. 호흡이 맞지 않는 아군은 적보다 못한 법이다.
그는 나를 공격하는 것보다 다른 자들과 함께 상황실을 빠져나가는 길을 택했어야 했다. 나를 직접 죽여야겠다는 생각으로 전투를 시작한 것이 그의 가장 큰 실책이었다.
“비, 빌어먹을…!”
그가 포기하지 않고 왼손으로 피스톨을 고쳐 잡았다. 피스톨은 아직 남아 있으니 끝까지 저항할 생각인 듯했다. 사지가 망가져도 기세를 잃지 않는 그 모습은 참군인의 표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상대를 잘못 골랐다.
선내의 환풍 설비 덕에 소화제가 서서히 흩어졌다. 얼마 남지 않은 백색의 엄폐물 속에 몸을 숨기고 달렸다.
“크윽! 거기냐!”
어깨에 심각한 부상을 입어서일까. 그는 나를 제대로 조준하지 못했고, 플라즈마탄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겨우 스친 것에 불과했지만 초고열의 에너지가 내 전투용 팔에 긴 화상자국을 남겼다.
순간 비명을 지를 정도의 고통이 뇌리를 가득 채웠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적은 나를 기다려 줄 만큼 한가하지 않다.
아놀드의 손에 들린 플라즈마 피스톨의 에너지가 충전되면서 발생한 미세한 진동이 감지된다.
저 작은 사신이 내게 죽음을 선고하기 전까지 몇 초가 채 남지 않았다. 반면, 내 꼬리가 그의 몸을 찌르기에는 거리가 아직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마지막 카드를 쓰기로 했다.
내 뜻을 전달받은 등에 있는 근육이 움직인다. 인간으로 치면 승모근이라 불릴 만한 부위가 쩍 갈라진다. 갈라진 틈 사이에서 검고 거대한 무언가가 서서히 튀어나온다.
유체가 된 이후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그것.
내가 에이모프가 된 이후 처음으로 획득했던 특성.
거대한 날개 2장이 펼쳐지고 내 몸이 순식간에 그에게 가까워졌다.
그의 얼굴이 급격히 확대된다. 나를 주시하고 있던 그의 동공에 날개를 펼친 에이모프의 모습이 보인다.
적갈색의 눈동자에 비치는 에이모프는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플라즈마 피스톨에 걸려 있던 검지에 힘이 들어가고, 인간이 만든 죽음의 신이 마침내 포효했다.
그러나 흉흉한 총탄이 목표에 도달할 일은 결코 없었다.
등 뒤에서 목표를 잃은 플라즈마탄이 합금 벽에 충돌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승리를 축하하는 축포 같았다.
개선식의 한가운데 서 있는 내 입에는 아놀드의 머리가 물려 있었다.
“팀장님!”
통신병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나에게 레이저건을 겨눴다. 나는 아놀드의 머리를 입에 문 채 그를 노려봤다.
“…히익!”
느긋하게 고기를 뜯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다. 보조기관이 병사들이 몰려오고 있으니 서둘러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으니까.
만찬은 아무래도 다음으로 미뤄야할 것 같다.
나는 통신병의 옆을 지나쳤다. 그는 호랑이를 앞둔 사슴처럼 완전히 얼어붙어 있었다. 내가 환풍구로 기어들어갈 때까지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