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운이 좋았어.’
내가 실험실에서 획득한 특성은 총 3개.
먹은 샘플만 500개가 넘는데 포식 효과는 3번 밖에 발동하지 않았다. 누가 봐도 운이 없는 결과였으나, 그래도 만족스러웠다.
‘타입 획득 조건도 만족했고, 게다가….’
유용한 특성도 확보했으니까. 가짓수 채우는 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전투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특성을 말이다.
새로 얻은 특성은 ‘자연회복’, ‘톱날 촉수’, ‘오염 기관’ 이렇게 3가지다.
이 중 자연회복 특성은 강인한 생명력과 융합해 ‘재생력(융합)’ 특성이 되었다.
‘초능력 관련 특성 다음으로 노리고 있었는데 잘 됐어.’
에이모프는 갑옷을 입거나 해서 몸을 보호할 수 없어서 치유 관련 특성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큰 부상을 입었을 때 금방 회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생력’ 특성이 있는 한 나는 뇌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죽지 않는다. 부상의 정도에 따라 시간이 좀 걸리지만 결국 회복된다.
예외라고 한다면 초능력을 이용한 공격이나 특수한 무기에 공격당했을 때뿐이다.
‘톱날 촉수, 오염 기관 이것도 모두 좋은 특성이야.’
나는 전투용 팔 중 위쪽 팔들에 힘을 줘봤다.
그러자 손바닥에서 채찍처럼 가늘고 긴 촉수가 튀어나왔다. 겉면에 톱날 형태의 돌기들이 나 있는 이 촉수는 휘감은 사람을 그대로 찢어발긴다.
‘원래라면 내구성이 약해서 잘 안 쓰는 특성이다만.’
타입을 얻는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육체 강화 타입에 의해 업그레이드되면 톱날 돌기가 함선 외벽에도 박힐 만큼 튼튼해진다. 일반 병사는 막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나는 손에서 뻗어 나온 촉수를 회수했다.
‘마지막으로 오염 기관.’
이번에는 위쪽 팔 말고 아래쪽 팔의 차례다.
몸을 숙여서 바닥에 손바닥을 댔다. 손바닥에 있는 구멍으로부터 검갈색 점액과 포자 덩어리가 흘러나왔다.
‘오염 기관’은 간단히 말해 나를 걸어 다니는 둥지로 만드는 특성이다. 내가 원할 때마다 지금처럼 둥지의 포자와 똑같이 생긴 것들이 배출된다.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오염 기관으로 만드는 포자에 내가 가진 특성 중 일부를 적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즉 신경독액을 내뿜는 포자를 생성하거나 산성액을 흘리는 포자를 만들 수 있다. 아니면 내 몸의 재생 효과를 늘려주는 포자를 만들거나.
이 능력만 있으면 함선 전체를 나의 요새로 만드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강력한 적과 싸울 때 안성맞춤인 능력이라고 해도 좋다.
촉수에 포자까지. 어느 하나 맨 정신의 인간이 본다면 기겁할 만한 능력뿐이지만 나는 아주 만족스러웠다. 새로 얻은 특성을 한 번씩 점검한 나는 어깨 위에 있던 26호를 잠시 내려놨다.
반투명 텍스트 박스가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응답은 오로지 하나.
‘승낙.’
승낙하자 몸에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몸 안의 뼈들이 뒤틀리며 키틴질 외피를 뚫고 나왔다. 겉에 있는 외피는 물을 먹은 것처럼 크게 부풀어 올랐다.
모두 자연스러운 변화이기에 피가 튀거나 아프거나 하지는 않았다. 겉피부랑 근육이 변화에 맞춰 당기는 느낌인데, 스트레칭을 할 때랑 비슷했다.
유체로 진화할 때와 달리 타입으로 인한 변화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변이가 완료되고 내 앞에 반투명 텍스트창이 다시 떠올랐다.
「종족: 미확인 적대적 우주생물
상태: 유체
목표: 생존하라(진화 1회 성공).
보유 특성
-육체 관련(타입 적용 중): 날개, 키틴질 외피, 재생력(융합), 신경독샘(융합), 강화 외골격, 산성피, 각력 강화, 흉내 내기, 톱날 촉수, 오염 기관
-초능력 관련: 포식자 감각(융합), 초능력 기관
타입: 육체 강화 타입」
「현재 특성화 가능한 타입은 1가지입니다.」
「초능력 강화 타입(2/6)」
첫 타입을 획득하면서 특성들이 타입 조건에 맞춰 전체적으로 재분류되었다. 육체 관련 타입을 획득한 덕분에 육체 관련 특성 옆에는 ‘타입 적용 중’이라는 메시지가 떠 있었다.
또한 아래를 보니 초능력 강화 타입을 확보할 때 필요한 특성 개수가 3개에서 6개로 증가했다.
‘쯧. 타입 페널티.’
알고 있었지만 막상 보니까 살짝 아쉽다. 에이모프는 타입을 획득하는데 제한이 없지만 가진 타입 수가 증가할 때마다 페널티가 있다.
새로운 타입을 얻는데 필요한 특성 개수가 두 배로 증가한다는 것.
예를들어 내가 초능력 강화 타입을 먼저 얻었다면 육체 강화 타입은 10개에서 20개로 필요 개수가 증가하는 식이다.
아니면 내가 지금 상황에서 다른 타입을 초능력 강화 타입보다 일찍 해금하면 초능력 강화 타입의 필요 개수는 12개가 된다.
‘그래서 타입 해금을 일부러 늦추는 경우도 있지.’
괜히 효율이 떨어지는 타입을 마구잡이로 해금하다가 정작 중요한 타입을 못 얻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까.
나도 게임이었다면 타입 획득 타이밍을 좀 더 고민했을 거다.
얻기 힘든 초능력 관련 특성의 제한 조건이 6개로 늘어나는 것은 부담스러우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는 현실이었고, 당장 해적과의 싸움이 기다리고 있다. 위기가 코앞인데 빨리 강해져야지 하고 뒤로 미루다가 죽으면 아무 소용 없다.
‘그건 됐고. 뭐가 바뀌었는지 한번 볼까?’
한동안은 육체 강화 타입에 의존해야 하니 얼마나 좋아졌는지 점검해 봐야겠다.
가장 먼저 느낀 감각은 무거움이었다.
전에는 날렵하고 유연하다는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다르다. 온몸이 육중하고 단단해진 기분이다.
이를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표범에서 코뿔소가 된 감각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하긴 무거울 수밖에 없겠지. 이런 것들이 생겼는데.’
현재 내 머리는 흉부의 외골격과 비슷하게 두터운 갑각으로 덮여 있었다. 팔과 다리도 관절 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 두껍고 단단한 생체 갑주를 둘렀다.
무거워진 몸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서인지 키도 조금 자랐다. 전에는 1m 언저리였던 키가 지금은 1m 50cm를 넘었다. 각력 강화 특성이 부여된 다리는 다른 부위에 비해 훨씬 두꺼워졌다.
벽에 손을 대보니 여전히 벽을 타거나 천장에 기어오르는 활동은 가능했다. 대신 쿵쿵 울리는 소리는 어쩔 수 없었다. 소리를 죽이고 적을 습격하는 전략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의 주력 무기 중 하나인 꼬리도 타입의 영향을 받아 성장했다.
꼬리의 길이는 2m에 조금 못 미칠 정도. 거의 두 배 정도 커진 셈이다.
‘중거리 공격 수단이라. 잘됐어.’
그동안 상대를 기습할 때 거리 때문에 위기에 처한 적이 몇 차례 있었다.
그런 내게 촉수랑 꼬리는 가뭄의 단비와 같았다.
「크다! 크다!」
몸을 점검하는데 옆에 있던 26호가 놀라움을 표시했다. 녀석이 보기에 내가 갑자기 자라난 것처럼 보였겠지.
[즈즈즈(성장한 거야)]
「성장? 무슨 뜻이야?」
[즈 즈즈즈 즈즈(새끼가 성체가 된 것)]
「새끼? 애기구나. 애기 크다! 애기!」
26호가 날 보고 ‘애기’란 단어를 연발했다.
‘날 보고 애기라니.’
뭐 틀린 말은 아니었다. 유체면 생물학적으로 미성숙 개체에 포함되니까 아기라는 정의에 충분히 부합했다.
물론 에이모프 아기를 키우는 부모는 죽고 싶은 심정이지 않을까.
나의 변화에 관해 자세히 설명해주고 싶지만 녀석의 부족한 어휘력에 맞추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언젠가 말을 다 배우면 그때 가르쳐 줘야지.
나는 다음 목적지로 가기 위해 통통 뛰어다니는 26호를 어깨 위에 다시 올렸다.
「애기. 어디 가?」
[즈즈(병기고)]
복도에 육중한 발소리가 쿵쿵 하고 울렸다. 이 자리에 승무원이 있었으면 과연 어떻게 행동할까.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괴물의 모습에 울음을 터뜨릴까? 아니면 서둘러 탈출선으로 달려갈까?
‘그건 이제부터 확인해 보자고.’
뭐가 됐든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그들은 우주가 낳은 악몽을 목도하고 후회할 것이다. 왜 자신들이 이 배에 탈 생각을 했었는지 말이다.
-
함교의 상황실에서 참사가 일어난 지 하루가 지났다.
다른 때 같았으면 승무원들 모두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이들을 애도했겠지만 지금 그들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소문으로 조금씩 퍼지고 있던 메탈릭 그렘린, 아니 그보다 무서운 존재가 배 안에 존재하는 생명을 빠르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인간은 강인한 동물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일을 접하면 정신을 놔버린다.
참사가 일어난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또다시 괴물의 습격이 발생했다. 이번에는 식당을 습격해서 비무장 상태의 병사들을 50명 넘게 학살했다.
연구선을 보호할 병력 중 절반 이상이 사망하자 선장 유성은 남은 병사와 수뇌부만 데리고 선장실에 틀어박혔다.
방어를 한곳에 집중해서 농성하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사실상 남은 인원들을 버리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실제로 방치된 사람들은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고.
우주 밖에서 온 것인지 아니면 실험실에서 탄생한 것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괴물 때문에 연구선 내부는 지옥 그 자체였다.
의료실 내 회복실.
그곳에 임시연구팀장 웨이가 있었다.
메가콥의 발전된 의료기술 덕분에 그는 빠르게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는 자신이 처한 상황을 원치 않게 마주해야만 했다.
시각과 후각에 영구적인 손실 발생, 얼굴 피부 중 절반 손상, 신경독 후유증으로 인한 미각 손실 및 심각한 발성 장애.
웨이는 자신이 꿈을 꾸는 중이라고 믿고 싶었다.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다고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그는 메가콥의 다른 사람들과 비슷한 삶을 살아온 선량한 인간에 불과하다. 물론 선임연구원의 자리에 오르기까지 그의 손에 죽어 나간 사람도 적지 않지만, 원래 다들 이렇게 산다. 경쟁에서 패하면 죽는 것이 당연하니까.
웨이는 자살하고 싶었지만 회복실의 생명 유지 장치들이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에게 허락된 유일한 행동은 본인의 비참한 몰골을 내려다보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매초, 매시간을 고통스럽게 보내는 그는 주변의 변화를 한 발 늦게 인식했다. 아까 전까지 그의 귀를 괴롭히던 의사들의 발소리가 싹 사라졌다. 바이탈 체크 중인 기계가 내는 시그널 음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의료실에 중환자가 있는데 이런 고요함이라니. 결코 좋은 신호가 아니다.
끝을 모르게 이어지던 불길한 정적은 무언가의 발소리에 의해 깨졌다. 웨이는 그것이 군화가 내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 발소리는 사람의 무게보다 훨씬 무거운 것이 움직일 때 나는 소리였다.
쿵, 쿵, 쿵 하고 의료실 전체를 울리는 진동.
회복실이 울릴 때마다 웨이의 몸도 거세게 떨렸다.
그에게 결코 우호적이지 않은 존재가 다가오고 있다. 그는 도망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생명 유지 장치에 의해 자동으로 투입되고 있는 진통제 때문에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발소리가 멈췄다.
웨이는 눈이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옆에 있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내뱉는 숨결, 으르렁거림. 그는 옆에 있는 것이 상황실에서 자신을 습격했던 괴물임을 직감했다.
놈이 그의 목숨을 끊으러 여기까지 온 것이다.
덜덜 떨고 있던 그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올라왔다. 이제 죽이려나 싶었지만 그의 예상은 빗나갔다.
그의 머리 위에 올라간 존재는 몽글몽글하고 부드러웠다. 그것은 동그란 빵 위에 뿌려진 초콜렛 시럽처럼 흘러내려 머리 전체를 덮었다.
분위기에 맞지 않는 이상한 촉감에 당황한 것도 잠시, 그는 얼굴 전체에서 끔찍한 통증을 느꼈다. 마치 누가 얼굴을 불로 지지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통째로 녹아내리는 감각에 그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끄, 끄아아악! 누가 좀! 누가 날 좀 죽여 줘!’
만약 그의 입에 달린 산소호흡기가 없었다면 웨이는 5분도 안 되어 질식해 죽었을 거다.
혹은 몸에 주입되고 있는 진통제와 회복제가 아니었다면 그는 바로 쇼크사했을 거다.
그의 머리 위에 올라가 있는 버블아메바, 그가 ‘26번 실험체’라 부르던 생물이 조금만 더 성장한 상태였다면 그의 목숨을 더 빠르게 거뒀을 거다.
공교롭게도 이 모든 요소가 그의 바람과 반대로 되어 있었다. 운명은 웨이에게 편한 죽음을 허락하지 않았다.
웨이는 1시간이 지나서야 영면을 허락받았다.
-
[즈즈즈(다 먹었어?)]
「응.」
나는 식사와 복수를 끝마친 26호를 손 위에 올려놨다. 하루 동안 배가 터지도록 먹여서 그런지 녀석의 몸에는 보기 좋게 살이 올라 있었다.
[즈즈 즈즈즈(복수한 기분은 어때?)]
「복수? 복수가 뭐야?」
[즈즈즈 즈즈즈즈(괴롭힌 사람을 먹은 거)]
「먹이. 맛있음.」
아무래도 26호한테는 복수 같은 고차원적 감정은 없는 듯하다.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인지 태생적으로 그런 사고가 불가능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여기는 현실이니까 또 모르지.’
원래 말도 못 하는 생물이 지금은 태연하게 나와 대화하고 있지 않는가. 게다가 연구원들이 유독 녀석에게 관심을 갖는 것을 보면 뭔가 분명 있지 않을까 싶다.
‘막 씨 데몬으로 진화하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씨 데몬은 버블아메바랑 마찬가지로 바다 행성에서만 사는 생물이다. 생긴 것은 버블아메바랑 비슷하게 생겼지만, 크기가 30m가 넘고 몸 안에 다수의 촉수를 숨기고 있다.
비슷한 생김새 덕분에 커뮤니티에서는 버블아메바와 씨 데몬이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니냐는 말이 종종 나왔다. 물론 이 게임에는 생긴 게 비슷한 생물이 한둘이 아니었기에 의미없는 주장이었지만.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26호가 나에게 파장을 쐈다.
「애기야. 나 배부름.」
녀석의 몸에서 빛이 은은하게 났다. 내가 알기로 저건 피곤하다는 표현이었다.
이제는 통통 보다는 빵빵 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녀석을 어깨에 올리고 의료실을 나섰다.
의료실 밖 복도에서는 이전처럼 깔끔하고 미래지향적인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복도에는 불결한 곰팡이 같은 검갈색의 줄기들이 가득했다. 천장과 벽에서는 포자들이 이 저주받은 생명이 넘치는 정원에 물을 주듯이 점액들을 뿌려댔다. 그 모습은 무기질의 금속 통로라기보다는 온갖 벌레가 들끓는 썩은 고목 내부에 가까웠다.
함선의 절반을 장악한 둥지 안에서 나는 다음 사냥감을 찾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