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20화 (21/400)

E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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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로 보이는 우주가 더는 신화가 아니라 현실이 된 시대.

우주에서 인류는 메가콥과 스타유니언이라는 거대한 두 세력으로 양분 되었다.

양자 모두 수십, 수백 개의 성계를 지배할 정도로 강성한 존재였지만, 넓고 방대한 우주에 비하면 티끌에 불과했다.

무수히 많은 은하와 천체로 채워져 있는 무한의 공간에는 그들의 발이 닿지 않는 곳이 넘쳐났다.

예를 들어 C-08도 그런 곳 중 하나였다.

메가콥과 스타유니언, 그밖에 다른 지성체의 발이 닿지 않은 그곳에는 인간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존재들이 똬리를 틀고 있었다.

C-08은 스페이스독, 그중에서도 특히 잔혹하다고 소문난 카르텔이 관리하는 영역이다.

드바라 카르텔.

악명 높은 약탈자들이 지금, 자기 영토에 들어온 먹잇감을 유린하고 있었다.

“아아악! 살려 줘!”

“꺄아아악!”

비통한 울음소리가 호화스러운 장식으로 치장된 여객선 안을 가득 채웠다. 선내에는 무장한 경비원과 무고한 희생자들이 쓰러져 있었다.

“놈들이 가진 것은 전부 뺏어라!”

“남자는 죽이고 여자는 범해라!”

무자비한 약탈자들의 모습은 평범하지 않았다. 어떤 자는 개미의 머리를 가졌고, 어떤 자는 몸의 절반이 기계였다. 그들 중 몇몇은 전리품을 들고 실실 거리고 있었고, 몇몇은 음흉한 얼굴을 한 채 귀부인들을 끌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약탈을 자행하는 자들의 생김새나 행동이나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들의 어깨 부근에 핏빛 클로버 문신이 있었다. 문신이 갖는 의미는 하나였다.

드바라 카르텔의 대부 엘첸 드바라의 비호를 받는다는 것.

드바라 카르텔은 구성원들 전원이 전직 군인, 용병, 범죄자다 보니 모두 한 덩치 하는 편이었다.

다들 평균 이상의 우락부락한 몸을 자랑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거대한 자가 한 명 있었다.

키 3m에 전신에는 근육으로 가득했으며, 머리는 사자를 닮아 붉은색 갈기와 짐승귀가 있었다. 눈과 오른팔은 기계로 대신했다.

인간과 짐승, 기계의 혼종인 그가 바로 50명의 대가족을 이끄는 가장, 엘첸 드바라였다.

그는 선장의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심드렁한 표정으로 부하들의 약탈을 지켜보고 있었다. 의자 옆에는 부하들이 바친 재화가 산더미처럼 쌓여있었지만, 그는 아무런 흥미도 없는 듯 보였다.

‘이깟 푼돈이라니. 헛수고를 했어.’

엘첸이 혀를 차고 있는데, 부하에게 끌려가고 있던 포로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포로, 아니 이 배의 선장이었던 그가 엘첸을 보고 소리쳤다.

“이보시오 단장! 어떻게 우리에게 이럴 수가 있소!”

“뭐가?”

“우리는 호위를 위해 당신네 용병단을 고용했소! 그런데 이런 경우가 어디 있단 말이오?”

메가콥의 헐크 뮤턴트 출신인 엘첸은 다른 카르텔 두목과 비교해도 비범한 축에 속했다. 그를 모르는 자는 유전자 개조로 만들어진 거구에 놀라겠지만, 엘첸이 가진 진정한 무기는 몸 따위가 아니다.

엘첸이 가진 무기는 바로 교활함.

그는 스페이스독의 카르텔이면서 대범하게 메가콥 소속 용병단으로 등록했다. 용병단으로 활동하다가 의뢰자가 만만하다 싶으면 뒤통수를 치는 것이 그의 주 수법이었다.

“멍청한 새끼. 용병한테 호위를 맡기는 놈이 병신 아닌가?”

“뭣?!”

“우리가 친구야? 생판 모르는 애한테 돈 몇 푼 쥐어 주고 일이 잘 풀릴 거라 기대하는 게 이상한 거지.”

“이런 뻔뻔한…!”

“왜 이러실까. 그쪽도 돈 아끼려고 그런 거잖아. 메가콥 돼지 새끼들은 늘 그렇지.”

“이 빌어먹을 개자식!”

패배자들이 짖는 소리에 일일이 대답할 의무는 없었다. 엘첸은 선장의 욕설을 귀를 후비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금쯤 메가콥 방위군에서 구조신호를 받고 출동했을 거다! 그들이 오면 네놈들은 모조리 다 처형이야!”

“오. 무서워라. 야, 끌고 가.”

“이익! 네놈들에게는 죽음도 아까워. 내가 직접 방위군에게 말하지. 네놈들을 모두 헐크 뮤턴트로 만들라고 말이야.”

“…잠깐.”

엘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의 불쾌한 심정을 대변하듯 갈기 사이의 짐승귀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헐크 뮤턴트로 만들겠다는 말을 가장 싫어했다. 본인이 메가콥에 ‘고용’되어 강제로 유전자 개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선장은 야수의 역린을 건드렸다.

엘첸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장에게 다가갔다.

그가 선장을 붙잡은 부하에게 손을 내밀자, 부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마체테를 뽑아 엘첸에게 넘겼다.

흔히 정글도라 불리는 마체테가 키 3m가 넘는 그의 손에 들리니 마치 단도 같았다. 그 모습은 꽤, 아니 매우 무서웠기에 선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뭐, 뭐야?”

“이봐 선장. 메가콥 용병법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가르쳐 주지.”

“응?”

“용병이 의뢰 중에 배신하면 중죄지만 그 사실을 증명할 증인이 없으면 무효인 거 아나?”

“뭐라고?”

“방위군을 불렀다니 헛고생을 했군. 설명해 줄 사람도 없는데 말이야.”

무슨 말인지 이해한 선장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우, 우리를 살인멸구할 생각인가!”

“그런 고상한 표현은 모르겠고. 적어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엘첸이 선장의 머리채를 우악스럽게 잡아챘다. 선장이 고통 섞인 고함을 지르며 엘첸을 발로 찼지만 저 괴물 같은 근육 앞에서는 아기의 발길질과 마찬가지였다.

“내 취미가 메가콥 돼지들의 가죽을 벗기는 일이라는 사실이지.”

엘첸의 손에 들린 마체테가 위협적으로 빛났다.

그의 취미 활동이 끝날 때쯤 여객선 안에 살아 있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약탈이 끝난 배에는 기분 나쁜 침묵만 남았다.

부하들이 뒷정리하는 사이 엘첸은 자기 강습함으로 돌아왔다. 배를 지키고 있던 해적들이 전부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오셨습니까.”

“야. 가져가서 하던 대로 처리해.”

“옙.”

부선장이 엘첸이 던진 얼굴 가죽을 들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 가죽은 적당한 처리를 거친 뒤 엘첸의 옥좌에 장식될 예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할 일이 더 있지 않냐?”

“무슨 말입니까?”

“넌 됐고. 마늘 불러와.”

잠시 후, 부하가 왜소한 몸집의 여인 한 명을 데려왔다.

검은색 머리카락에 안경을 쓴 그녀는 드바라 카르텔의 홍일점이었다. 동료들은 그녀에게서 마늘 냄새가 난다고 마늘이라 불렀다.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어깨를 움츠린 마늘은 누가 봐도 소심한 모습이었다. 마늘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엘첸에게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두목. 부, 부르셨나요?”

“어. 이 주변에 일거리가 있다며. 어떻게 됐어?”

“그, 그게 원래 오늘 만나기로 했는데 그쪽에서 갑자기 연락이 두절이 돼서….”

“뭐?”

“히익?!”

엘첸이 인상을 찌푸리자 마늘이 확 쪼그라들었다.

다른 부하였으면 골통을 바로 깨버렸겠지만 마늘은 카르텔 내에서 머리가 가장 좋은 인물이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여자인지는 모르겠지만 똑똑하고 말 잘 듣는 인재여서 아끼는 중이다.

엘첸은 화를 가라앉히고 그녀에게 설명을 요구했다.

“제대로 설명해 봐.”

“제, 제가 아는 지인이 유성 사, 사뮤엘이라는 선장이 이끄는 연구선에 있는데요. 거기에서 나온 시체를 처리해 달라고 요청이 왔어요.”

“사뮤엘 가문? 걔네가 와 있어?”

“아시나요?”

“타이탄의 서드캐피탈이잖아. 뭐 먹을 게 있다고 여기까지 왔지? 뭐 좋아. 그래서 그 시체는 누구인데?”

“노, 노블캐피탈이요. 유진 가문의 여, 여자라고….”

타이탄의 서드캐피탈이 지구의 노블캐피탈의 시체를 유기해 달라고 한다라. 둘의 격차를 생각하면 있을 수도,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미친 새끼들. 대가로 얼마나 준다고?”

“마, 마지막 통신 때는 배, 백만 크래딧을 줄 수 있다고 하던데요.”

“허, 100만?”

엘첸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노블캐피탈이 얼마나 편집증적으로 시신을 예우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1,000만, 아니 1억 크래딧을 줘도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음모가 있군.’

엘첸은 최근 메가콥 내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구의 오래된 왕 유진 가문에게 화성의 젊은 피 에저튼이 도전한다는 소문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기 때문이었다.

스페이스독 소속인 엘첸하고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지만 그는 돈 냄새를 맡았다.

에저튼 가문이 주력하는 사업은 함선 개발 쪽이지만, 남들 모르게 유전자 개조 쪽에 힘을 많이 기울이고 있었다.

에저튼 가문의 비밀을 엘첸이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바로 에저튼 가문에서 몰래 개발 중이던 신형 헐크 뮤턴트의 프로토타입이라서 그렇다.

‘잠깐. 시신을 가로챈 뒤 에저튼에 넘긴다면?’

시신의 정체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유진 가문 출신이라면 기상천외한 유전자 개조를 다 당했을 것이 뻔했다. 유진 가문의 정수나 다름없는 존재니까 에저튼 가문에서는 천만금을 줘서라도 손에 넣으려고 하리라.

물론 엘첸은 에저튼 가문을 매우 싫어했지만, 원한과 크래딧은 별개의 문제다.

‘오히려 이걸로 에저튼과 유진이 싸운다면 둘 다 좆될 테니 나야 좋지.’

시신을 강탈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엘첸은 다시 마늘에게 물었다.

“연락이 두절됐다고? 습격이야?”

“그,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만….”

“어떤 새끼인지는 모르겠지만 간도 크네. 우리 영역에서 설치는 돼지 새끼가 있다 이거지?”

엘첸이 자리에서 일어나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정리가 끝나는 대로 출발한다. 목적지는 유성 사뮤엘의 배. 통신 추적 준비하고.”

“넵!”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부하들을 두고, 엘첸은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해 생각했다.

마늘은 생각에 잠긴 두목을 두고 조용히 물러났다.

뒷정리를 끝내고 돌아온 부하들을 싣고 드바라 강습선은 초광속 이동을 통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아 있던 여객선은 곧 폭발과 함께 우주의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이곳에 한 무리의 불쌍한 영혼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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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휴식을 취하고 있던 나는 눈을 떴다. 함선 외부에서 미미한 충격이 발생했다. 우주쓰레기와 충돌했나 싶었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외벽에서 발생하는 충격과 진동이 인위적이었다.

마치 누가 함선 안에 들어오려고 문을 두드리는 듯이 말이다.

‘그들이구나.’

나는 둥지에 링크된 감각을 충격이 발생한 곳에 집중시켰다. 함선의 선체가 나의 몸처럼 느껴지고,  충격을 일으킨 장본인의 윤곽이 그려졌다.

둥근 타원형의 연구선과 달리 검이 연상되는 가느다란 디자인을 가진 전함이었다. 전함의 표면에는 붉은색 클로버가 페인트로 칠해져 있었다.

‘배에다 낙서하는 놈들은 스페이스독말고는 없지.’

전함은 연구선에 바짝 붙어 강제 도킹을 시도 중이었다. 플라즈마 커터에 의해 외벽이 파괴되자 그 틈으로 몇몇 인원이 연구선에 침입했다.

‘빠르네?’

확실히 함대전의 프로들답게 행동이 일사불란했다. 연구선에 침입하자마자 그들이 향한 곳은 함교였다.

‘똑똑한 것인지 멍청한 것인지.’

일반적인 지성체라면 이 배가 명백히 이상한 상태라는 것을 알 텐데도 그들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현재 유성의 연구선은 원래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변질되었다.

우주의 가혹한 환경에서도 견딜 수 있게 설계된 이 첨단공학의 결정체도 에이모프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틈 하나 없는 매끈한 합금판으로 이루어진 복도는 검갈색의 줄기가 침식해서 혈관이 튀어나온 것처럼 흉측해졌다. 천장과 바닥에는 포자들이 쉴 새 없이 신경독과 산성액의 혼합물을 쏟아 냈다. 녹아내린 합금판의 자리에는 둥지의 점액들이 대신해서 채워졌다.

사람들에게 이곳이 배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아무도 이곳을 인공적인 구조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겠지.

어찌 보면 이곳은 특정 존재를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점에서 보면 일종의 정원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 정원의 주인은 나, 에이모프고.

보물을 노리는 도굴꾼처럼 그들은 탐욕에 눈이 멀었다. 자신들이 어디에 발을 디딘 것인지도 모르고 있으니.

지금 나는 실험실에 설치한 제2둥지에 누워서 침입자들을 감시하고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침입자들은 함교에서 통신기를 조작하고 있었다. 둥지를 통해 강화된 초능력 기관이 전파의 흐름을 읽어냈다.

「함교 장악 완료.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뭐가?」

「배 안에 사람이 한 명도 없고 이상한 나무들이 자라나고 있습니다.」

「나무? 우주에 식물이 어디 있어?」

「진짜입니다. 두목.」

「씹새끼,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한다. 아니면 넌 대가리 깨질 준비해라.」

「…네.」

양아치 말투로 대화하는 자가 아무래도 두목 같다. 다른 자들과 비교할 수 없는 존재감을 가진 두목이 연구선으로 건너왔다.

‘헐크 뮤턴트네.’

그의 몸에서 고출력으로 개량된 심장 2개가 뛰는 소리가 들린다. 피부 위로는 미세한 전파가 흐르는 것을 보니 기계 장치도 여러 개 이식한 것 같다.

두목을 따라 다른 자들도 연구선에 속속히 침입해 들어왔다. 나는 건너오는 자들을 하나둘씩 체크했다.

‘몸에서 페로몬이 나오는 것을 보니 충인(蟲人)족 인섹트맨, 얘는 심장 박동 대신 기계음이 나네. 스타유니언 사이보그구나. 다종족 카르텔이라니. 잘 됐다.’

아성체 진화 조건은 유저가 플레이할 수 있는 종족 중 두 종족을 각각 10명씩 죽이고 유전자를 먹는 거다. 현재 인간으로 절반을 채웠으니, 나머지는 인간 말고 다른 종족 10명으로 때워야 한다.

그냥 아무 종족이나 먹는다고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 10명 모두 동일한 종족이어야 조건을 만족시킬 수 있다.

‘지금까지는 스타유니언이 12명으로 제일 많은데 어떻게 되려나.’

게임에서는 다른 종족 취급이라 상관없었지만 현실에서는 그럴지 모르겠다. 설정상 저들도 메가콥과 똑같은 인간이니까. 인간으로 취급할지 독립된 종족으로 취급할지는 먹어봐야 알 것 같다.

계속 기다려보니 연구선으로 들어온 자들의 수는 총 29명이었다. 그것으로 끝인 줄 알았는데 마지막으로 인간 한 명이 더 건너왔다.

‘응?’

상대는 극히 평범했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고 했는데 다시 보니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사람이 이렇게 평범할 수가 있나?’

여태까지 100명이 넘는 인간을 잡아먹었지만 개중에 정상적, 혹은 평균적이라고 할 만한 몸 상태를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모든 인간의 몸에는 지문처럼 고유의 움직임과 소리가 존재했다.

그런데 지금 들어온 저자는 그렇지 않다. 누가 인간 전체의 평균을 산정해서 기계에 입력한 뒤 찍어낸 것처럼 평범 그 자체다.

요약하자면 저자의 몸은 작위적이다. 머리 안에 뇌 대신 컴퓨터가 들어 있어서 철저히 평범함을 ‘연기’하는 것처럼 말이다.

‘…요주의 인물. 기억해 두자.’

수상한 인물을 끝으로 더 이상 이 배에 들어오는 자는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의 차례다.

나는 둥지와 링크를 해제하고 몸을 일으켰다. 옆에서 쉬고 있던 26호가 나의 움직임에 반응했다.

「애기야 어디 가?」

[즈즈(외출)]

「나도 같이 가.」

[즈즈즈 즈즈즈(위험하니 여기 있어)]

녀석이 싫다는 듯이 몸을 부풀렸지만 그래도 들어줄 수 없다.

이제부터 적의 전함에 갔다 올 생각이니까.

[즈즈 즈즈즈(대신 저걸 지켜줘)]

「저거?」

나는 구석에 놓여 있는 플라즈마 런처를 가리켰다. 인간이 만들었지만 인간을 학살한다는 아이러니함을 보여 준 저 중화기는 임무를 마치고 잠시 휴식 중이었다.

[즈즈즈(중요한 거)]

「응! 애기야 나만 믿어!」

믿는다니. 26호는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까. 아무튼 녀석은 내가 중요한 임무를 주자 좋아하며 폴짝 폴짝 뛰었다.

나는 녀석의 배웅을 받으며 냉각실 밖으로 나왔다.

적들의 경계가 약해진 상황이니 전함을 고장을 낼 수 있는 기회는 지금뿐이다. 전함의 동력원을 파괴해서 퇴각이 불가능하게 만들어야 적을 몰아넣을 수 있다.

그 이후 적의 선택지는 두 가지다. 연구선과 전함 둘 다 지키기 위해 인원을 둘로 나누던가, 아니면 어느 한 배에 인력을 집중하던가.

놈들은 탐욕스럽기 때문에 둘 다 놓치고 싶어 하지 않을 거다. 아마 약탈조랑 방어조로 나누겠지.

인원이 분산되는 그때, 나의 사냥이 시작된다.

늘 그래 왔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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