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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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팀장은 눈을 깜빡일 수 없었다.
스타유니언에서 운영하는 야수투기장이 이런 모습일까.
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괴수 두 마리가 지금 대치하고 있다.
그의 새로운 주인 엘첸 드바라는 마치 악마가 주조한 지옥의 기계 같았다. 기형적으로 길고 거대한 팔, 사납게 휘날리는 붉은색 갈기, 피와 살점이 말라붙어 있는 합금 장갑. 어느 하나 흉흉하지 않은 요소가 없었다.
지옥의 기계에 감히 맞서는 괴물은 누구인가. 그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향한다.
그곳에 유령이 있다.
검은색에 가까운 갈색으로 빛나는 외피, 머리와 흉부를 덮고 있는 갑주, 머리카락처럼 늘어진 촉수 더미, 인간의 뼈에 갑주를 씌운 느낌을 주는 4개의 팔과 몸의 두 배는 될 것처럼 보이는 긴 꼬리까지.
저 검은 유령이 얼마나 많은 영혼들을 집어삼켰는지는 의료팀장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단발마가 아직도 그의 귀에 선했다.
악마의 기계와 도살자의 유령.
거대하고 묵직한 괴수와 날렵하고 단단한 괴수가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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놈이 발자국을 땔 때마다 함선 복도가 진동했다. 금세 지척까지 다가온 두목이 팔을 크게 휘둘렀다.
팔을 감싸고 있는 뼈 방패가 나의 머리를 부수기 위해 날아든다.
맞아서 좋을 것은 없기에 고개를 숙여 피하고, 꼬리를 놈에게 쏘아 보냈다.
유연한 꼬리가 놈의 틈 사이를 파고들어 가슴을 찌르려고 한 그때, 나는 멈칫했다.
‘폭탄!’
전투 중에 망설임은 금물. 적의 빈틈을 두목은 놓치지 않았다. 합금판도 가루로 만드는 주먹이 내 머리에 작렬했다.
굉음과 함께 충격파가 발생했다. 내 머리의 두터운 외피가 흡수하지 못한 잔여 에너지가 내 몸을 타고 복도에 퍼졌다. 천장에 달린 전등들이 충격파에 버티지 못하고 차례차례 깨져나갔다.
“뭣?!”
놈도 나와 마찬가지로 잘못 판단했다. 내 몸에서 제일 단단한 부위는 흉부랑 머리니까. 지금의 공격이 내 팔이나 다리를 향했다면 바로 유효타였다.
놈은 내가 멀쩡하게 서 있으니 당황한 듯 보였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바닥에 몸을 바짝 숙였다. 4개의 팔과 2개의 다리를 이용해 놈의 다리 사이를 기어 빠져나갔다.
짐승의 으르렁거림에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놈이 욕설을 내뱉었다.
“그르르, 빌어먹을 벌레 새끼!”
코끼리 발을 연상시키는 묵직한 발바닥이 땅을 강타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몸을 뺀 뒤.
거리를 벌린 나는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충격을 완전히 흡수한 것은 아닌지 약간의 어지러움이 느껴진다.
‘과연 그런 계획이었나.’
폭탄 얘기를 왜 하나 싶었는데 이걸 노렸을 줄이야. 내 머리가 단단하지 않았다면 방금 일격으로 난 죽었겠지.
‘더티 플레이다 이거지?’
나도 많이 하는 짓이기는 하지만 당해 보니까 역시 짜증이 난다.
두목의 심장에 폭탄 격발 장치가 연결되어 있으니 흉부 부근을 노리는 건 위험하다. 심장을 잘못 건드려서 폭사 엔딩으로 끝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면 다른 부위를 노려야 하는데.’
“그으, 네놈의 공격은 소용없다. 벌레 놈.”
의기양양하게 웃는 두목. 본인에게 약점이 없다고 철석같이 믿는 것 같다.
현 상황으로는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가슴 공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내가 노릴 수 있는 부위는 그리 많지 않으니까.
팔과 다리를 감싸고 있는 뼈 갑옷의 단단함은 강화된 내 신체 이상. 플라즈마 무기를 쓰는게 아니라면 뚫는 것은 불가능하다. 뼈로 감싸지 않는 부분을 노리려고 해도 놈이 어떻게든 방어하려고 할 거다.
‘하지만.’
현재 놈이 모르는 것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내가 ‘신경독샘’ 특성을 갖고 있다는 것. 어디든 놈의 몸을 찌르는데 성공한다면 싸움은 끝난다.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다만.’
두목은 유독 내 꼬리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광화하기 전에도 꼬리로 녀석을 노렸을 때 녀석은 막지 않고 피하는 것을 택했다. 야생의 감인 것인지 상황실에서 정보를 얻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꼬리가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봐야 할 거다.
‘근데 이걸 어쩌나?’
놈은 모르겠지만 나는 이빨, 손톱에서도 독을 뽑아낼 수 있다. 외피를 부수고 공격하면 내 승리다.
그렇다면 두목이 굳게 신뢰하는 외피를 어떻게 뚫을까.
놈은 나의 4개의 팔과 꼬리에 집중하고 있지만, 실은 한 가지 무기가 더 있었다.
내 가슴 쪽의 작은 팔들이 꼭 쥐고 있는 얇은 막대기, 소닉 블레이드 말이다. 체력단련실에서 혹시 몰라 챙겼는데 이렇게 빨리 쓰이게 될 줄이야.
소닉 블레이드는 절삭력 하나만은 우수한 무기. 뼈 외피를 내리치는 순간 부러지겠지만 상관없다. 갑옷에 상처만 낸다면 그 뒤는 문제될 것 없다.
아무리 두껍고 거대한 댐이라 해도 작은 틈새 하나에 무너지는 법이다.
놈의 철옹성에 금이 가는 때가 바로 승리의 여신이 내게 미소를 짓는 순간이다.
“그와아아아아아!”
놈이 도약했다. 강화된 각력 덕분에 믿을 수 없는 높이로 뛰어오른 거구가 내게 닥쳐왔다.
나는 6개의 팔, 다리를 모두 활용해서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내가 있던 자리가 박살이 나고 복도가 흔들렸다.
‘빠르고 강해.’
유전자를 이것저것 뒤섞은 놈이다 보니 움직임이 굉장히 빠르다. 작은 팔을 제외한 나머지 수족을 전부 사용해서 피하고 있음에도 아슬아슬할 정도다. 보통 움직임이 빠르면 힘이라도 약해야 하는데 녀석은 힘과 속도 어느 쪽도 처지지 않는다.
‘물론 세상에 완벽이란 없지.’
헐크 뮤턴트에게는 고질적인 약점이 있다. 그 약점이 표면 위로 올라올 때까지 버텨야 한다.
함선의 배 속을 엉망으로 만들며 달리던 우리는 어떤 거대한 공간에 들어섰다.
컨테이너의 밀림이 녹슨 쇠의 꿉꿉한 냄새가 우리를 반긴다.
내가 눈을 뜨고 처음으로 마주한 세계, 화물칸이다.
6개의 다리에 일제히 힘이 들어가고 내 몸이 높이 솟구친다. 내가 컨테이너 위를 넘나들고 있는데 아래에서 고함 소리가 들린다.
“건방진!”
이딴 것으로는 자신을 막을 수 없다는 듯 놈이 컨테이너들을 그대로 들이받았다.
수 톤이 넘는 직사각형 금속 블록들이 우후죽순으로 쓰러진다. 바닥에 깔린 그레이팅 철판들도 그에 맞춰 공중에 날아다니며 춤을 춘다.
곳곳마다 숨어 있던 벌레들이 갑자기 들이닥친 종말에 후다닥 튀어나왔다. 도망가던 바퀴벌레 한 마리를 잡아서 입에 넣은 나는 컨테이너 뒤에 몸을 숨겼다.
저런 괴력 앞에서 정면승부는 어렵다. 여기서 내가 택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기다리는 것.’
지금까지 나는 단순히 도망치기만 한 것이 아니다. 헐크 뮤턴트는 에너지 소모가 심해서 중간에 짧은 ‘휴식기’가 있다. 저렇게 마구잡이로 힘을 쓰도록 유도하다 보면 놈이 원하지 않아도 몸이 강제로 공격을 중단한다.
‘얼마 안 남았어.’
보조기관이 밀접한 거리에 있는 그의 몸에서 일어나는 화학 작용과 에너지 조율 메커니즘을 읽어낸다. 최적의 타이밍에 내가 일격을 가할 수 있도록 말이다.
보조기관이 내게 말한다. 녀석의 몸 안에 있는 2개의 심장이 서로 출력을 적절하게 조절한다고.
‘그러고 보니 심장이 두 개였지.’
격발 장치는 어디에 연결되어 있을까. 헐크 뮤턴트의 메인 심장은 왼쪽에 있으니까 왼편에 뒀을 가능성이 높지만, 놈은 영악한 괴물이다. 어느 쪽에 있을지 확실하지 않다.
내가 심장에 잠깐 정신이 팔린 사이, 놈이 날 발견하고 달려들었다.
“버어어어러어어지이!”
‘이런.’
10톤이 넘는 컨테이너도 장난감처럼 내던지는 무지막지한 힘이 담긴 주먹이 어깨 부근을 스쳤다.
욱신거리는 통증이 밀려왔지만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즉시 반격했다.
꼬리가 창술의 대가가 내지르는 창처럼 놈의 관절 사이, 뼈로 감싸지 않은 부분으로 내질러졌다.
“벌레가!”
놈이 급히 팔을 굽히는 바람에 내 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녀석이 다시 달려들기 전 나는 서둘러 몸을 뒤로 뺐다. 내가 피한 자리에 바로 컨테이너가 내리꽂혔다.
“그와아아아! 도망이나 치는 겁쟁이 새끼!”
‘방금은 실수였어. 심장에 집착하지 말자.’
놈의 노림수에 말려들면 안 된다. 놈의 시야에서 벗어난 나는 보조기관에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분노한 곰처럼 거친 숨결을 내뿜는 녀석. 얼핏 봤을 때는 아무런 문제없이 정상적으로 가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나는 알 수 있었다. 놈의 육신을 구성하는 부품들이 과부하로 인해 휴식을 요구하고 있다.
조심스레 컨테이너 위로 기어 올라가니, 보이는 족족 다 때려 부수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그, 그그으으으….”
피부 위로 노출된 근섬유 사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몸 안의 열기를 식히면서 발생한 현상이다.
원래라면 활동을 정지한 채 휴식기를 맞아야 하지만 놈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아까에 비해서 둔해진 것은 맞지만 그 무지막지한 힘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였다.
‘개량된 헐크 뮤턴트라더니 약점을 줄였구나.’
그래도 휴식기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있는 힘껏 컨테이너 위를 박찼다.
내 몸이 한 발의 화살이 되어 공기를 찢는다. 어두침침한 화물칸과 내 피부색이 어우러져서 그런지 녀석이 나를 한 발 늦게 알아차린다.
“죽어!”
놈이 그 자리에 서서 양손으로 그레이팅 바닥을 뜯어냈다.
맨홀 뚜껑의 무게는 가볍게 뛰어넘을 만큼 무거운 투사체들이 나에게 날아든다. 에이모프 특유의 예민한 감과 보조기관이 저 위협적인 장애물들의 궤도를 계산한다.
나의 발이 꾸겨지고 찢어진 합금판들을 밟았다. 공중에서 만들어진 금속의 계단을 뛰어다니며 나는 녀석과 빠르게 가까워졌다.
“그우우우?! 감히!”
내가 보여준 신기에 가까운 몸놀림에 당황하면서도 녀석은 기세를 잃지 않았다. 내가 그의 앞에 착지한 순간, 그가 두 팔을 높이 쳐들었다. 코끼리 발처럼 커다란 양손으로 나를 내리찍으려는 거다.
보조기관이 내게 적의 힘이 만만치 않다고 경고한다. 나도 안다. 10톤이 넘는 컨테이너도 장난감처럼 내던지는 녀석이다. 두 손에 담긴 힘은 결코 범상치 않으리라.
찰나와 같은 시간 속에서 나는 선택했다.
‘강행 돌파.’
지금 피하면 다음 기회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른다. 놈은 교활한 적이다. 약점을 한번 노출시킨 이상 다음번에는 어떻게든 감추려고 들 거다.
따라서 기회는 지금 뿐. 플라즈마 무기도 두 번까지 버틸 수 있는 나의 머리를 믿고 가야 한다.
놈의 두 주먹과 내 머리가 격돌했다. 순간 중량, 속도, 힘 이 세 가지가 뒤섞인 막대한 에너지가 내 몸을 짓눌렀다. 머리가 미처 흘려보내지 못한 에너지 때문에 내 발이 바닥을 뚫고 들어가고, 다리의 외피 일부가 찢어졌다.
‘큭.’
내 몸에서 가장 두터운 부위로 막아냈지만 역시 어마어마한 힘이었다. 아찔한 통증과 충격이 나를 뒤흔들었다.
‘…그래도 참을 수 없을 정도는 아니야.’
놈이 두 손으로 나의 머리를 내리찍느라 현재 자세가 무너진 상황. 기다리던 기회에 맞춰 작은 팔이 소닉 블레이드를 작동시켰다. 얇은 세검형 칼날이 막대기에서 튀어나왔다.
베어야 할 것이 나의 바로 앞에 있다.
작은 팔이 칼을 휘둘러 놈의 팔뚝을 베어낸다. 종이에 베인 것처럼 얇은 사선을 만들어 낸 무기는 임무를 다 마치고 명을 다했다.
작은 팔이 소임을 다할 때, 전투형 팔이라고 놀지 않았다. 4개의 팔이 놈의 팔목을 굳게 붙들었다.
“큭?! 무, 무슨!”
무슨 짓을 하는 것이냐고 외치는 놈. 물어보니 대답해 줘야겠지.
입으로 말이다.
“크윽!”
상어의 이빨처럼 뾰족한 이빨이 놈의 팔뚝에 난 상처에 박혔다. 팔뚝을 감싼 뼈가 워낙 단단하다 보니 이빨은 거의 겉면만 긁는 수준이었지만 상관없다. 내 입에서 나온 타액이 저 얇은 상처 속에 스며들었으니까.
“그아악!”
놈이 팔을 크게 흔들어 나를 떨쳐냈다. 내 몸이 나의 의지와 통제를 벗어나 컨테이너 더미에 처박혔다.
“감히 나를 물어? 이 빌어머어어어어…어?”
놈의 목소리가 술에라도 취한 것처럼 말꼬리가 늘어졌다. 놈의 시선이 팔에 난 상처를 향한 뒤, 곧바로 내 얼굴에 향했다.
내 입가에 흐르는 침을 본 놈이 흠칫 놀란다.
“서, 서어어얼마아아?”
놈이 다른 팔로 상처 있는 부분을 강하게 내리쳤다. 아마 팔을 자르려고 한 것 같지만 그렇게 하기에는 신체를 덮고 있는 뼈 갑옷이 너무 단단했다.
자신을 보호해주던 성벽이 이제 그를 속박하는 감옥이 된 상황. 갑옷을 파괴하는데 실패한 놈이 비명을 지른다.
“내, 내가아아, 내가아아악!”
안색이 새하얗게 질린 헐크 뮤턴트이라니. 신선한 광경이다.
놈은 도망치려고 뒷걸음질했지만 얼마 가지 못했다. 신경독이 그의 몸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으므로.
광화로 인해 이제는 3m를 훌쩍 넘긴 거체가 차디찬 금속 바닥에 쓰러졌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동물의 것이었다.
자신보다 더 강한 포식자를 만나 두려워하는 눈빛.
“사, 살려줘어어어….”
확실히 인간이 아니다 보니 마비 효과가 약하다. 지금쯤이면 전신에 독이 퍼져야했을 텐데 말이다.
나는 그에게 다가가 꼬리의 독침으로 몇 번 더 찔렀다. 놈이 숨만 간신히 쉬는 상태로 만든 뒤, 흉부를 덮고 있는 금속들을 뜯어냈다. 오른쪽 가슴팍 위에 격발 장치가 붙어 있었다. 보니까 동기화가 아니라 강한 충격을 받으면 타이머가 작동하는 장치였다.
‘그럼 그렇지.’
교활한 놈이다 보니 왠지 그럴 것 같더라.
상대가 헐크 뮤턴트에 대해 어느 정도 아는 자였으면 먼저 오른쪽 심장을 파괴하려 했을 거다. 왜냐하면 헐크 뮤턴트는 보조 심장이 파괴되면 매우 약해지기 때문이다. 유전자 조작으로 생기는 부작용을 제어하는 부위다보니 보조 심장을 잃으면 그대로 육체가 붕괴하는 경우도 있다.
‘보조 심장을 잃을 정도면 이미 진 게임이니까.’
아마 같이 죽자는 심산이거나, 혹은 시간제한이 걸렸다는 것을 상대가 알고 동요하게 만들려는 생각이었을 거다. 폭탄이야 본인이 설치한 거니까 싸움을 빨리 끝내고 직접 가서 해제하면 되니까.
뭐 놈의 계획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격발 장치 정도는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내 작은 손으로 해제할 수 있다. 그 뒤에 남은 것은 헐크 뮤턴트의 몸 안에 담긴 유전자 샘플들을 만끽하는 일 뿐.
「애기야!」
누가 불러서 돌아보니 26호였다.
[즈즈즈즈(숨어있으라니까)]
「애기야 큰일 났어!」
[즈즈(왜?)]
26호의 반응이 뭔가 이상하다. 안절부절못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겁에 질린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러냐고 다시 물으려는데 갑자기 포식자 감각이 발동했다.
「칼바람이 26호를 벴다.」
「칼바람이 피할 수 없는 속도로 내게 날아들었다.」
「나는 죽었다.」
‘미친!’
나는 재빨리 26호에게 달려들어 녀석을 껴안고 바닥에 굴렀다. 그와 동시에 번개 같은 빛줄기가 26호가 있던 자리를 갈랐다.
“어라? 피했네?”
포식자 감각이 아니었으면 나와 26호 둘 다 죽었을 거다.
고개를 드니 화물칸 입구 쪽에 서 있는 사람이 보였다. 호리호리한 체형에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것을 보니 상대는 여성이었다.
‘저게 여성이라고?’
내 보조기관과 에이모프 특유의 감이 미친 듯이 경보를 울리고 있는 중이다.
저 ‘생물’과 맞서지 말라고.
‘…시현 유진.’
해적들과 함께 이 배에 올랐던 수수께끼의 존재. 가장 마지막에 상대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직접 날 찾아왔다.
“미래 예지라. 어느 유전자야? 나도 좀 듣고 싶은 걸.”
태평스럽게 지껄이며 화물칸 안으로 들어오는 그녀. 나들이라도 나온 듯한 말투와는 달리 그녀의 몸은 언제라도 날 벨 수 있게 준비를 끝낸 상태다.
그녀의 손, 아니 손등에는 백색의 칼날이 솟아나 있었다.
외형은 두목의 뼈 갑옷하고 비슷하지만 난 저 칼날이 어느 유전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알고 있다.
‘화이트 갤러곤 유전자하고 다른 상급 생물의 유전자를 섞었어.’
내가 준성체는 되어야 얻을 수 있을지 없을지를 고민할 정도로 획득하기 어려운 유전자다. 그것 말고 당장 보이는 유전자 특징만 해도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숫자만 많을 뿐 아니라 모두 희귀하고 유용한 특성들로 꽉 채웠다. 게임에서도 저 정도로 개조한 메가콥 플레이어는 랭커에 들어서기 직전에 있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지금의 나는 이길 수 없는 상대.’
당장 물러나서 전열을 정비하고 공략할 계획을 준비해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시간을 벌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너, 마, 마늘…?”
“그동안 수고했어.”
“컥!”
그녀가 무력화된 두목에게 다가가 칼날로 격발 장치를 꿰뚫었다. 심장까지 함께 찔린 그는 피를 한번 크게 토하더니 축 늘어졌다.
‘젠장.’
“도망치게 둘 수는 없지. 안 그래?”
폭탄 타이머는 이미 가동했을 거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남지는 않았을 터.
후퇴해서 시간을 벌고 공략할 준비를 한다는 내 의도는 좌절되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렇다고 무턱대고 맞서 싸우는 것은 자살행위다. 적의 전투 센스가 어느 정도이고 어떠한 전략으로 나설지 등 적에 대한 정보 없이 싸우면 패배만 남을 뿐이다.
조심스럽게 배회하며 적을 관찰하는데 그녀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제의할게 있는데.”
‘제의라고?’
여유로운 태도로 뜸을 들이는 시현. 아주 마음에 안 드는 태도지만 현재 나의 위치는 절대적 열세다. 짜증보다는 어떻게 그녀를 공략할지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다.
‘눈은 아웃 스페이서의 관찰자인가? 아니야. 테러데블일 가능성이….’
“너, 나랑 비슷한 것 같으니까 살려줄게.”
‘뭐?’
“나를 섬긴다면 말이야. 간단히 말하면 내 애완동물이 되는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싶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좀 전과 달리 진지했다. 보조기관으로 그녀의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엿봐도 딱히 거짓말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굳이 거짓을 말할 필요도 없고.’
내가 그녀에게 강하다고 느끼는 것처럼 그녀도 내가 본인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다. 그러니까 저렇게 여유로운 태도로 나오는 거겠지.
“너도 유전자를 다루는 생물이잖아. 나는 너에게 어울리는 주인이 될 수 있어.”
‘…….’
“그러니까 내게 와.”
압도적 강자, 시현 유진이 내게 말하고 있다.
자신을 섬기라고. 그녀의 노예가 되라고 말이다.
「애기야.」
솔직히 말해 시현의 말에 복종하는 것은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녀의 손목에 있는 저 칼날은 갤러곤의 발톱. 파괴력이 플라즈마 무기 이상이기 때문에 강화된 내 외피로도 막을 수 없다.
그것 말고도 그녀의 몸에는 나를 쉽게 죽일 수 있는 흉기들이 득실거렸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두 다리가 아닌 6개의 팔과 다리를 모두 사용해서 마치 애완견이 주인 앞에서 기듯이 말이다.
“그래. 올바른 판단이야.”
「무서워하지 마. 내가 있잖아.」
그러나 시현이 나에 대해 간과하는 것이 있다.
내가 왜 에이모프를 좋아하는지.
왜 이 구리고 쓸모없는 캐릭터에 몰입해서 커뮤니티에서 모프박이라는 멸칭으로 불리는지.
그녀는 모른다.
내가 에이모프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선택의 자유.’
나의 ‘선택’에 의해 자유롭게, 무한하게 강해지는 존재이기에 나는 에이모프를 사랑한다.
그렇기에 내 선택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다.
[즈즈즈(괜찮아)]
「애기야?」
만족스러워하는 시현의 얼굴이 세세하게 보일 정도로 거리가 좁혀졌을 때.
그녀의 얼굴을 향해 다리로 차올렸다.
“!”
그녀가 빠른 속도로 내 발을 피했지만 내 노림수는 그것이 아니다. 아까 뜯겨나간 외피에서 흐르던 산성피. 그 피가 그녀의 눈에 튀었다.
“큿?!”
잠깐의 틈이 생기면 그걸로 족하다. 어차피 산성피로는 그녀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을 거다.
[즈즈(꽉 잡아)]
「응!」
그녀가 잠깐 당황한 사이 나는 작은 팔로26호를 안은 채 달렸다. 6개의 다리를 모두 사용해서 도망치고 있는데 뒤로부터 화물칸이 박살 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 좋아! 나랑 놀자는 거지! 하하하!”
눈을 감고 미친년처럼 웃는 시현. 그녀가 양손에서 갤러곤의 발톱을 뽑아내서 컨테이너를 두부 베듯이 잘라냈다.
‘나랑 놀자고?’
시현 유진은 나보다 훨씬 강하다.
확실히 내가 에이모프가 된 이후, 처음 맞선 난적이다.
하지만 싸움이 꼭 강함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녀에게 알려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