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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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어먹을 새끼들…!’
붕괴된 화물칸의 철골 더미.
그 안에 엘첸이 누워 있었다. 보조 심장은 부하였던 마늘에 의해 파괴되었지만, 그에게는 심장이 하나 더 있기에 죽지 않았다.
문제는 지금 그의 상태가 숨만 붙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
보조 심장은 온갖 유전자가 주입된 헐크 뮤턴트를 안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보조 심장이 없는 헐크 뮤턴트는 얼마 못 가 죽는다.
그가 개량된 존재라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육신이 붕괴하고 있었을 거다.
‘감히 나를 배신해? 씨발년,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마.’
사실 죽음의 위기만큼 그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배신자의 존재였다.
당장 잡아다가 사지를 뜯어놓고 싶었지만, 그보다 먼저 할 일이 있었다.
‘씨발. 하필 장치가 망가질 줄이야.’
머리가 좋은 마늘은 그게 충격식 격발 장치인 것을 알고 있을 텐데도 서슴없이 부쉈다.
덕분에 원자로에 설치된 타이머가 이미 작동한 상황. 정확히 10분 후면 이 함선에 있는 자들 모두 먼지가 될 것이다.
‘내가 여기서 죽는다고? 웃기지 마라! 내가 누군데? 엘첸 드바라다 이 말이야.’
그는 마비된 몸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도 열심히 기었다.
어떻게든 살아남겠다는 일념 하나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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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기야 안 아파?」
달리는 도중 26호가 말을 걸었다. 작은 손에 붙들린 녀석이 떨고 있는 게 느껴진다.
[즈즈즈즈(벌써 다 나았어)]
「진짜?」
내게는 ‘재생력’ 특성이 있으니까 외피가 조금 뜯어진 정도는 금방 수복할 수 있다. 다리에 상처가 남아 있긴 하지만 출혈은 멎었다.
작은 손으로 26호를 쓰다듬은 나는 시현을 어떻게 공격해야 할지 고민했다.
‘기습은 아마 힘들 거야.’
그녀가 가진 눈, 테러데블의 안구는 투시 능력이 있다. 내가 숨어 있다고 해도 그녀는 금방 꿰뚫어 보겠지. 그리고 내 예상이지만 눈 말고도 그녀는 보이지 않는 적을 감지하는 능력을 더 갖고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현재 내게는 제한 시간이 있다. 그런 상황에서 숨는답시고 시간을 끄는 것은 오히려 역효과다.
두목이 갖고 있던 격발 장치는 강한 충격을 받으면 작동하는 형식. 장치가 시현의 칼에 찔린 순간 타이머가 작동했을 거다.
‘제한 시간이 짧을 것 같지는 않다만.’
폭탄은 두목의 블러핑 카드. 그의 의지와 무관하게 작동하더라도 본인이 어떻게든 끌 수 있을 정도로 여유를 뒀을 터.
마음 같아서는 폭탄을 먼저 해제하러 가고 싶지만 그 일도 쉽지가 않다.
격발 장치와 두목의 심장을 함께 꿰뚫어서 폭탄을 작동시킨 시현이다. 이 배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은 진작 알고 있을 터. 그런데도 그런 위험한 행위를 한 것은 뻔하다.
‘내 행동을 유도하려는 거겠지.’
내가 폭탄에 신경을 쓰는 것도 그녀의 계산 범위에 들어갈 거다. 아마 내가 탈출선을 타려 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겠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걸.’
내가 해적과 싸울 때 적들의 행동을 유도했던 것처럼 시현도 똑같은 전략을 사용했다. 이런 것을 보면 플레이어와 싸우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아무튼 그녀가 나를 몰아넣어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하나다.
‘정공법.’
그녀가 의도한 장소에서 압도적인 힘으로 날 제압하려는 것.
그것이 시현 유진의 전략이다.
저쪽에서 나를 몰아넣고 있는 이상, 나 또한 거기에 따라갈 수밖에 없다.
‘일반적인’ 플레이어였다면 말이다.
‘먼저 내게 마이너스인 요소들부터 정리해 보자.’
나한테 불리한 조건은 현재 세 가지다.
시간제한, 적에 비해 약한 공격 능력과 방어 능력, 정보 부족.
여기서 내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문제는 시간제한이다. 폭탄까지 신경 쓰면서 싸울 적이 아니다. 폭탄에 신경을 끄고 오로지 적을 죽이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
‘정보 부족은 직접 맞닥뜨리면서 해결할 수밖에 없어.’
내가 다른 종족을 즐겨하던 플레이어였다면 그녀에게 깨졌겠지만, 나는 에이모프 플레이어다. 게임에서 나보다 유전자 특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제작진 밖에 없을 거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공격력과 방어력인데….’
지금이라도 상황실에 가서 사이보그를 잡아먹을까도 생각해봤지만, 그 방법도 문제가 있다. 다음 단계로 진화할 때 내 몸은 최소 수 시간 동안 완전히 무력화된다. 폭탄이 터지거나 도중에 발견되면 그걸로 끝.
‘진화는 보류…아.’
진화를 고민하다 보니 문득 생각이 났다.
실험실에 있던 그것. 그것만 있다면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이오니움!’
나는 실험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사이오니움을 먹는다면 짧은 시간 동안 아성체의 능력을 쓸 수 있다.
시현 유진은 갤러곤의 발톱 특성을 보유했다. 그래서 사이킥 파워와 기타 에너지가 섞인 칼바람, 게임에서는 흔히 검기(劍氣)라고 부르는 에너지를 방출할 수 있다. 현재 나는 사이킥 파워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으므로 갤러곤의 발톱에 대응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아성체가 된다면? 아성체가 되면 진화 특전으로 사이킥 파워 내성 특성을 얻는다. 그녀가 진짜 갤러곤이면 모르겠으나 발톱을 이식한 정도라면 내 외피로 견뎌낼 수 있다.
‘게다가 원거리 공격 수단도 생기지.’
내게 톱날 촉수가 있지만 이걸로는 기껏해야 중거리 견제 정도밖에 안 된다. 시현의 팔에 있는 갤러곤의 발톱에 맞서기는 역부족이다. 게다가 감각도 연결되어 있어서 무턱대고 촉수를 내밀었다가 베이기라도 하면 낭패다.
‘아성체의 원거리 공격은 그런 단점은 없으니까.’
굳이 따지자면 에너지 소비가 심하다는 점? 어차피 사이오니움 효과가 떨어지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에너지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다.
실험실 둥지에 도착한 나는 26호를 내려놨다.
[즈즈 즈즈즈즈(잠깐만 기다려)]
「어디가?」
[즈즈즈 즈즈(챙길게 있어)]
「애기야 안 돼.」
[즈즈즈(걱정 마)]
26호는 내가 별일 아니니까 괜찮다고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뭔가 할 말이 있지만 말하기 어려운 듯 녀석의 몸이 불안하게 깜빡거렸다.
[즈즈즈즈(왜 그래?)]
고민하던 녀석은 결국 말하지 않았다. 다른 때 같았으면 녀석이 담아두고 있는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겠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나는 녀석을 두고 실험실 냉장고에 다가갔다. 냉장고 안에 보관된 보랏빛 액체. 나는 그것을 꺼내 단숨에 들이켰다.
‘윽!’
몸이 불에 타는 듯 뜨거워진다. 약을 강제로 주입 당한 26호가 고통스러워할 때도 왠지 그럴 것 같았는데 생각 이상의 통증이다.
게임에서는 먹었을 때는 화면 상단 버프 효과가 뜨는 것으로 끝이었지만 여기는 현실. 신체가 약물에 의해 강제로 변이되는 과정을 고스란히 겪어야만 했다.
누가 골격을 억지로 잡고 늘리는 것처럼 뼈마디에서 통증이 밀려오고, 근육은 억지로 분 풍선처럼 탱탱해지다 못해 찢어졌다. 몸을 덮고 있는 외피도 급격히 무거워졌다.
엄청난 고통에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이를 악물고 간신히 참아냈다.
‘…이 정도로 기절할 수는 없어.’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잃을 정도의 통증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몇 년에 걸쳐 이뤄져야 할 성장통을 1분 안에 끝낸 것 같았다.
변화를 무사히 마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늘 그렇듯 반투명 텍스트창이 어김없이 나를 반겨줬다.
「종족: 미확인 적대적 우주생물
상태: 아성체(임시)
목표: 생존하라(진화 1회 성공).
보유 특성
-육체 관련(타입 적용 중): 날개, 키틴질 외피, 재생력(융합), 신경독샘(융합), 괴수 골격(임시), 산성피, 각력 강화, 흉내 내기, 톱날 촉수, 오염 기관, 가시뼈 발사 기관(임시)
-초능력 관련: 포식자 감각(융합), 초능력 기관, 인간성, 초능력 내성(임시)
타입: 육체 강화 타입」
‘성공이야.’
특성 중 변화한 몇몇 부분들이 눈에 띈다. 유체 특전으로 받은 강화 외골격이 괴수 골격으로 업그레이드됐다. 키틴질 외피 특성에 타입 효과까지 겹쳐져서 내 키는 이전에 비해 많이 자란 편이다. 대략 2m를 조금 넘을 정도? 꼬리는 더 길어져서 거의 4m에 육박했다.
‘그리고 뿔도 생겼지.’
머리를 덮고 있는 외피에 야크뿔을 연상시키는 멋진 뿔들이 자라났다. 외피와 동일하게 키틴질 재질에 강화 효과도 받아서 매우 단단하고 또한 날카로웠다. 이전까지 머리의 외피는 몸을 지키는 용도로만 썼지만 뿔이 생겼으니 적을 적극적으로 들이받거나 찌르는 용도로 쓸 수 있을 거다.
팔과 다리를 확인해보니 전보다 훨씬 굵어진 것이 보인다. 한 가지 눈여겨 볼만한 부분은 외피 겉면에서 미세하게 빛나는 보랏빛 광택이다.
‘초능력 보호막이라. 오랜만에 보네.’
특성이 유효하게 작용하는 동안에는 내 몸에 사이킥 파워를 방어하는 보호막이 쳐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시현이 가진 갤러곤의 발톱은 이걸로 막아 내면 된다.
‘마지막으로 가시뼈 발사 기관.’
왼쪽 아래팔이 이전과 다른 형태로 변했다. 손목 아래를 보면 4개의 손가락 대신 긴 막대기 같은 기관이 있었다. 그 모습은 총열과 비슷했는데 생긴 것 그대로 일종의 생체총 역할을 하는 부위다.
‘총알 대신 가시뼈를 쏘지만.’
몸 안에서 자동 생성되는 가시뼈를 총열 기관 끝에 있는 작은 구멍으로 발사하는 구조다. 이렇게만 보면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가시뼈 발사 기관이 갖는 장점은 결코 작지 않다.
‘가시뼈 관통 위력은 플라즈마 피스톨을 웃도는 정도니까.’
파괴력 자체는 약하지만 관통력이 어마어마해서 중장갑을 입은 상대와 싸우기 제격이다. 아마 내가 아성체 상대로 두목과 붙었으면 그는 싸움이 시작되자마자 벌집이 되어 죽었을 거다.
‘그리고 가시뼈에 특성 효과도 부여할 수 있지.’
오염기관과 마찬가지로 산성뼈나 독뼈를 쏠 수 있다. 즉 내가 원하는 탄환을 골라 쏠 수 있는 총을 얻었다고 보면 된다.
포자를 뱉는 오염기관이 하나로 줄어들었지만 둥지 특화로 갈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이득이라 봐야 한다.
그걸로 새 능력의 점검은 끝났다. 마지막으로 내가 확인해야 할 것은 제한 시간이다.
‘남은 시간은 아마 5분.’
게임에서 사이오니움 제한 시간은 5분이었다.
절대 긴 시간이 아니다. 최대한 빨리 승부를 내야 한다.
모든 준비를 끝마친 그때, 내가 감지하는 영역 내로 시현이 접근했다.
나는 둥지에 링크해서 그녀가 오는 길에 있는 포자를 전부 활성화시켰다. 그녀와 싸우기 전에 최대한 전력을 깎아내야 하니까. 다행히 아성체가 돼서 그런지 포자의 활성화가 이전에 시도했던 것에 비해 훨씬 빠르고 정확했다.
‘온다.’
폭음과 함께 함선 전체가 크게 떨렸다. 복도에서 그녀를 위협하는 점액이 흘러내리니까 한 번에 파괴한 것이리라.
나는 링크를 해제하고, 옆에 있던 26호를 바로 안아 들었다. 좀 전까지 알 수 없는 고민에 빠져 있던 녀석은 갑자기 커진 내가 신기한지 연신 불빛을 깜빡였다.
「와! 애기가 또 커졌어!」
[즈즈즈 즈즈즈즈(뛸 테니 꽉 잡아)]
「와아!」
내가 가려는 곳은 폭탄이 설치된 곳, 즉 원자로다.
조금이라도 잘못 건드렸다간 폭발할 만큼 민감한 곳이다. 그녀가 아무리 많은 유전자를 흡수했다고 해도 핵폭발에서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 원자로 주변이라면 그녀도 제대로 싸우기 어려울 거다.
26호를 품에 안은 채로 뛰고 있는데 저 앞 복도에서 그녀가 나타났다.
“어딜 가려고?”
산성 점액을 뒤집어쓴 그녀는 옷이 녹아내려 거의 반나체 상태였지만 몸에 상처 하나 없었다. 그녀가 나를 노려보며 양손에서 갤러곤의 발톱을 뽑아냈다.
‘위험!’
나는 26호를 재빨리 뒤쪽에 던졌다.
녀석에게 미안함을 느낄 겨를은 없다. 그녀의 공세가 이미 시작되었으니까.
백색의 칼날이 허공을 가르자 공중에서 초승달 모양의 검기가 생성되었다. 검기는 유도 미사일처럼 조금의 오차도 없이 내 몸에 꽂혔다. 보호막과 충돌하면서 보랏빛 스파크가 튀고, 뒤이어 맞은 부위에 생채기가 났다.
‘윽.’
보호막이 있긴 하지만 완전히 막아주지는 않는지 약간의 통증이 있다. 다행히 깊은 상처는 아니라서 이 정도는 재생력 특성으로 회복이 가능하다.
“어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시현. 의도와는 달리 내가 멀쩡한 것이 이상한가 보다.
나를 보고 놀란 그녀만큼이나 나 역시 놀라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안 보여야 정상인데.’
갤러곤의 발톱이 무서운 이유는 초능력 공격이라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공격 경로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이 휘두르는 것만 보고 어디로 공격이 날아올지 예측해야 하니까 까다로울 수밖에.
분명 그랬을 텐데 방금 나는 그녀가 가한 공격을 조금도 놓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영문인가 싶었는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설마 초능력 기관?’
게임을 할 때 얻은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이런 기능까지 있었을 줄은 꿈에도 상상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정보를 얻긴 했지만 지금은 싸우는 상황. 이 정보는 나중에 다시 곱씹어 보기로 하고 나는 그녀에게 돌진했다.
강화된 나의 두 다리가 복도를 박찼다. 타입, 특성, 진화 상태라는 세 가지 요소가 어우러져 내 돌진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사일로에서 발사된 미사일처럼 내 몸이 시현에게 쏘여져갔다. 내 움직임이 예상보다 빨랐는지 그녀의 동공이 살짝 확대되었다.
머리의 뿔로 그녀의 복부를 뚫어버릴 생각이었지만 역시 그녀는 만만치 않은 상대. 그녀가 다른 팔에서도 갤러곤의 발톱을 뽑은 뒤 내 뿔을 튕겨 냈다.
‘큭!’
“아까보다 빠르네?”
근력을 올려주는 유전자도 얻은 것인지 무지막지한 힘이다. 저 덩치 큰 헐크 뮤턴트의 힘을 가볍게 상회할 정도다. 아성체가 아니었으면 지금 반격으로 내 목이 부러졌을 거다.
그녀의 가느다란 다리가 번개처럼 내 복부로 날아들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뉘어 발차기를 피해내고, 바닥에 반쯤 누운 자세로 꼬리를 크게 휘둘렀다. 4m에 달하는 거대한 꼬리가 바닥을 쓸며 그녀의 허벅지를 후려갈겼다.
“하하하! 그 정도로는 안 돼!”
나도 안다. 그녀의 자세가 살짝 무너졌지만 얼굴에 고통의 흔적은 없다.
그러나 내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꼬리로 그녀를 휘감아 고정시킨 상태로 내 왼쪽 아래팔이 정확히 그녀의 머리를 향했다.
“응?”
‘발사.’
피아노줄을 튕기는 소리가 나며 손목 대신 달려 있는 총열 끝에서 가시뼈가 발사되었다. 가시뼈가 그녀의 머리를 뚫기 전 그녀가 급히 갤러곤의 발톱을 세위 막았다.
“제법인데? 나를 이렇게 몰아붙이다니.”
그렇게 말하며 그녀가 갤러곤의 발톱으로 내 꼬리를 벴다. 반격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나는 이미 꼬리를 풀고 있었다.
그 순간 그녀의 검은색 머리카락이 붉게 빛났다.
‘붉은 머리카락? 잠깐 설마?’
나는 서둘러 그녀와 거리를 벌렸지만 살짝 늦었다. 아주 잠깐, 1초도 안 되는 짧은 시간동안 몸살이라도 걸린 것 같은 몽롱함이 내 전신을 감싸안았다. 꿈속 같던 감각에서 깨어나자 꼬리로부터 끔찍한 통증이 엄습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꼬리를 회수했지만 거의 둘레의 3분의 1가량이 잘려나갈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
‘방금 그건 레드미스트의 능력이잖아!’
레드미스트는 밀림형 행성에서 서식하는 최상위 포식자다. 붉은색 갈기를 가진 재규어처럼 생긴 동물인데 갈기에서 환각을 유발시키는 페로몬을 내뿜을 수 있다. 말만 들었을 때는 별 볼일 없어 보이지만 저 페로몬에 걸리면 스스로 빠져나오는 것이 불가능해 굉장히 위협적인 능력이다. 거리를 벌려 환각 효과를 최소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일 정도로 말이다.
화이트 갤러곤만큼 희귀한 동물인데 도대체 어디서 저런 유전자를 구했는지 모르겠다.
“거리를 벌리다니. 레드미스트에 대해 잘 아나 보네? 역시 흥미가 생겨.”
마음에 든다는 듯이 미소를 짓는 그녀.
‘역시 쉽지 않은 상대다.’
레드미스트의 환각 능력까지 있다면 사이오니움 효과가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승부를 봐야 한다. 유체가 되면 내게 원거리 공격 능력이 사라지니까.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해.’
당황해봐야 바뀌는 것은 없다. 침착하게 기회를 노리는 것만이 내가 승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꼬리가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캬하하! 그렇게 나와야지!”
그녀가 웃으면서 내 팔을 발로 찼다. 내 팔이 허공을 허무하게 가르는 사이, 갤러곤의 발톱이 내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내 복부를 헤집으려고 하던 그녀의 공격은 내가 허리를 트는 것으로 좌절되었다. 그동안 내 아래쪽 팔이 놀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4개의 발가락 사이에 있는 구멍에서 점액질이 그녀의 눈을 향해 발사되었다.
“윽!”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생리적인 혐오감은 어쩔 수 없는지 그녀가 순간 눈을 감았다. 일시적으로 적이 무력화된 상황을 나는 놓지지 않았다.
날카로운 뿔로 그녀의 어깨를 노렸지만 아쉽게도 얕았다. 그녀가 급히 어깨를 빼는 바람에 그녀의 몸에 생채기를 내는데 그쳤다.
“자꾸 재미없게 할래?”
그녀의 머리카락이 다시 붉은색으로 빛나려고 해서 나는 급히 물러났다. 물러나면서 그녀에게 견제용으로 가시뼈를 쐈다.
“쳇!”
그녀가 혀를 차며 변신을 중단하더니 갤러곤의 발톱을 다시 뽑아 가시뼈를 튕겨냈다.
‘방금 그건?’
그녀가 내게 검기를 쏘아 반격했다. 나는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이는 것으로 검기를 피해내고 다시 그녀를 노려봤다.
‘과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그녀. 하지만 나는 그녀의 얼굴에 깔린 부자연스러움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녀의 문제가 뭔지 얼추 알 것 같다.
‘한 번에 두 개의 능력은 못 쓰는 거지?’
마침내 그녀를 어떻게 공략할지 단서를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