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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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처음 눈을 떴던 세계는 춥고 무거운 세계였다.
연약한 살갗을 옥죄는 압력, 온몸에 칼을 찬 것처럼 낮은 온도.
어떤 지성체들이 해저(海底)라고 정의하는 곳. 그곳이 그녀의 고향이었다.
가혹한 환경이지만 그녀는 자기 고향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곳에는 그녀를 지켜 주는 존재들이 있었으니까.
그녀와 비슷한 분홍색 구체의 존재들은 어두컴컴한 세계에서 가장 나약한 생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둡고 푸른 세계의 다른 생물들과 다른 생존방식을 택했다.
무리를 짓는 것. 그리고 어리고 나약한 새끼들을 성체들이 돌보는 것.
지성체가 ‘가족’이라고 분류할 만한 사회구성체를 그들은 자연적으로 이루고 있었다.
물론 그녀의 동족들을 먹이로 삼는 위험한 생물들이 지천에 깔린 이상, 그들은 언제나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야만 했다.
원래라면 말이다.
자라면서 그녀는 자신이 다른 분홍색 구체들과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녀는 특별했다.
지성체에 버금가는 지능, 그리고 몸에 한 가닥 자라 있는 가느다란 촉수. 모두 동족들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들이다.
평소에는 몸속 안에 넣고 다니는 촉수로 위험한 생물들을 가리키면 녀석들은 자리를 피하곤 했다.
그녀는 미지의 힘을 이용해 동족들을 지켰다.
시간이 흘러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무리를 이끄는 가장이 되었다.
모두가 그녀를 무리의 어미로 여겼지만 그녀의 삶은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동족들과 함께 먹이를 먹고 밤에는 서로 몸을 맞대고 자는 것이 그녀에게 가장 큰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위에서부터 내려온 존재가 그녀의 동족을 끌고 가려한 것이다.
그녀가 본 어떤 생물보다 단단하고 또 차가운 피부를 가진 존재. 그 존재들이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을 것 같은 발톱으로 동족을 마구 붙잡았다.
고통에 찬 동족들의 비명 소리를 들었을 때, 그녀는 간절히 희망했다.
가장의 의무를 다하고 싶다고.
소중한 이들을 지켜달라고.
촉수가 그녀의 기도를 들은 것일까. 촉수 끝에서 뿜어져 나온 거대한 보라색 에너지가 단단한 존재를 붙잡고 으스러트렸다.
그걸로 모두를 지키는데 성공한 줄 알았지만, 안타깝게도 그렇지 않았다.
차가운 피부를 가진 동료들이 위에서 계속 내려왔다. 위에서 온 것들은 분홍빛 구체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들였다.
그녀는 또다시 기적이 일어나길 바랐지만 기적 대신 그녀에게 찾아온 것은 감당할 수 없는 탈력감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정신을 잃었다.
소임을 다하지 못한 가장이 눈을 뜬 곳은 역겨운 냄새가 나는 액체의 감옥 안이었다.
그곳에서 그녀는 지켜봤다. 성체에게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비참히 죽어가는 것을.
이상한 털이 달린 동물을 안고 있는 새하얀 존재가 그녀를 26번이라고 불렀을 때, 감옥에 남은 동족은 아무도 없었다.
지옥의 밑바닥에서 그녀는 기도했다.
누구든 좋으니까 도와달라고.
만약 도와준다면.
그때는 지키지 못한 아이들을 지키는데 헌신하겠다고.
그렇게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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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에서 가장 귀찮아하는 적은 둘이었다.
하나는 에이모프 동족전이었고, 또 하나는 유전자 개조까지 끝마친 메가콥 유저였다.
둘의 공통점은 무슨 특성을 가졌는지 전혀 예측이 안 된다는 점이다. 적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으므로 작은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로 돌아오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다 보니 나는 시현 유진이 어떤 특성을 지니고 있는가에만 집중했고, 그녀가 플레이어와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지는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게임에서는 유전자 기술을 쓰는데 제약이 없으니까.’
그녀도 당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가 플레이어급 스펙을 가졌기에 나도 모르게 플레이어와 싸우는 것으로 간주하고 전투에 임했던 것. 그게 오판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시현은 처음부터 한 번에 한 능력만 사용하면서 싸우고 있었다. 블러핑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플레이어와 근본적으로 다른 그녀는 유전자 능력 사용에 치명적인 제약이 있다.
“너 자꾸 귀찮게 구네? 죽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시현의 말투가 이제까지와 달리 서늘하다. 아마 위협하려고 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약간 다르게 들렸다. 미숙함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고.
‘능력을 바꿀 때마다 얼마나 딜레이가 있는지를 알아야 해.’
아무리 빠르게 바꾼다고 해도 능력을 바꾸는 사이에 틈이 있을 거다. 그녀가 무방비한 일반인이 되는 틈 말이다.
그렇다면 전략을 바꿀 필요가 있다.
‘정신없이 몰아친다.’
사이오니움 효과도 얼마 남지 않았다. 기껏 해야 2분 정도.
2분 안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말아야 한다. 팔다리가 잘려 나갈 정도의 치명상이 아니라면 재생력 특성을 믿고 가자.
코뿔소의 뒷발처럼 굳센 두 다리가 힘차게 땅을 박찬다. 복도를 질주하면서 그녀의 머리카락이 변하는 것을 예의 주시했다.
“정말 질리지도 않네.”
그녀의 머리끝이 붉게 물든다.
나는 달리면서 왼쪽 팔로 그녀를 겨냥했다. 인간이었으면 달리는 중에 총을 조준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에이모프의 뛰어난 감각이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내 팔 끝에서 가시뼈가 발사됐다. 키틴질로 강화된 뼛조각이 그녀의 복부를 찢어발기기 위해 공기를 가르며 날아갔다.
“!”
그녀는 표정을 굳히며 환각 능력을 취소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다시 검은색으로 돌아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손등에서 백색의 칼날이 살을 가르며 삐져나왔다.
‘역시 틈이 있어.’
초 단위 이하로 짧은 시간이지만 보조기관의 활약 덕택에 그녀에게 틈이 있다는 것은 확인했다. 그녀가 갤러곤의 발톱으로 내 가시뼈를 방어했지만 나는 이미 그녀의 앞에 도달했다.
“잔재주를!”
짜증을 내는 그녀였지만 난 그녀의 눈가에 스며든 초조함을 읽었다. 펜싱 선수가 칼을 뻗듯 내 꼬리가 절도 있게 그녀를 찔렀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녀의 대처는 여전히 매서웠다. 그녀는 발톱으로 침착하게 내 꼬리를 흘려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추가로 반격을 가해 꼬리 끝에 있던 독침을 잘라냈다.
‘윽!’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직접 겪으니 만만치 않은 고통이다. 수족이나 다름없는 부위가 잘린 것이니 당연하겠지.
그러나 여기서 머뭇거리면 안 된다. 나는 잘린 꼬리를 손을 털듯이 크게 흔들었다. 꼬리의 상처와 독샘에서 산성피와 신경독이 뒤섞여서 사방에 튀었다.
“칫!”
시현은 혀를 차며 능력을 전환했다. 갤러곤의 발톱이 들어가고 그녀의 몸의 일부가 은빛으로 변했다. 배를 구성하는 합금의 배 이상으로 단단한 피부가 산성피와 신성독으로부터 주인의 안전을 지켰다.
‘방어 능력이 있을 거로 예상했지만 초합금 피부라니.’
‘초합금 피부’는 메탈릭 그렘린의 상위종 볼프람 고블린의 유전자 특성이다. 저 능력을 획득하면 방어력만큼은 최상급 고유 강화복 수준으로 튼튼해지지만 대신 몸이 엄청 무거워진다.
내 예상대로 그녀의 움직임이 느려졌다. 나는 아직 은빛으로 변하지 않은 부분을 손톱으로 할퀴었다.
“큭!”
처음으로 그녀의 몸에 상처를 냈다. 말도 안 되는 괴물 같은 시현이었지만 피는 인간과 동일한 붉은색이었다.
“버릇없는 개새끼에게는 교육이 필요하지!”
인상을 확 찌그러트린 그녀가 무거워진 발로 내 흉갑을 걷어찼다. 거리를 최대한 좁혀서 싸워야했기에 나는 피하지 않았다.
공성추에 맞은 것처럼 무거운 충격이 전신에 퍼져나갔다. 인간이었다면 아마 피와 내장 조각을 토했겠지. 흉갑은 머리랑 함께 내 몸에서 특히 단단한 부위인데도 통증은 결코 적지 않았다.
‘겨우 이걸로 질까 보냐!’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흉부에 꽂힌 그녀의 발을 잡았다. 4개의 팔에 모든 힘을 다 쏟아부어 그녀를 번쩍 들었다.
“무, 뭣!”
‘엄청 무겁네.’
나도 모르게 욕이 나올 정도의 무게다. 적을 기껏 들어서 뭘 할 것이냐면 이렇게 할 생각이다.
나는 그녀의 다리를 잡은 채로 야구방망이를 휘두르듯 크게 휘둘렀다.
목표는 복도의 벽. 정확히 말하면 산성피에 반쯤 녹아내린 벽이 목표였다.
굉음과 함께 복도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크게 흔들렸다. 충돌한 지점 주변의 벽에 금이 생기며 쩍 갈라졌다.
합금으로 이루어진 벽에 얼굴 자국을 남긴 그녀는 극도로 분노한 표정이었다. 자신을 내동댕이친 내 행동에 모욕감을 느낀 것 같았다.
그녀가 갤러곤의 발톱을 뽑은 뒤 팔을 X자로 모았다. 백색의 칼날에 보라색이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대량의 사이킥 에너지가 모였다.
이건 위험하다. 피하기에는 너무 거리가 가깝다.
‘막아야 해!’
나는 급히 4개의 팔로 머리와 흉부를 보호했다. 그녀가 교차한 두 팔을 펼치면서 휘두르자 이제껏 본 적 없는 거대한 검기가 내 몸을 베고 지나갔다.
상대적으로 굵기가 얇은 뿔은 부러졌고 팔과 다리도 무사하지 못했다. 오른쪽 위의 팔은 반 이상이 잘려나갔고, 허벅지는 뼈가 보일 정도로 부상이 심각했다.
‘조금만 더!’
나는 마지막으로 힘을 끌어내서 그녀에게 다시 돌진했다.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녀는 놀라울 정도로 민첩한 몸놀림으로 내 돌진을 피해냈다. 나의 머리가 그대로 벽을 들이받았다.
“어딜 보는 걸까나?”
공격이 빗나간 나를 조롱하는 그녀.
빠르게 내 몸을 훑어본 그녀가 미소를 짓는다. 내 몸의 부상은 빈말로라도 괜찮다고 하기 어려우니까 그녀는 자신이 승기를 잡았다고 확신하는 것 같다.
글쎄, 과연 정말 그럴까.
‘미안한데 난 빗나가지 않았어.’
내가 머리를 벽에서 뽑아내자 벽이 마침내 무너졌다. 산성피에 녹아내린 상태로 연달아 강한 충격을 받았다. 아무리 합금으로 제작되었다고 해도 견딜 재간이 없다.
‘내 의도는 애초에 시현 유진, 네가 아니었다고.’
부서진 벽 너머에는 내가 기다리는 그것이 있다.
무한에 가까운 별들과 한없이 깊은 어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이런…!”
복도 전체의 기압이 확 낮아지면서 저 검은 블랙홀 같은 우주가 산소와 함께 우리를 빨아들였다. 함선 내 환경 유지 장치가 심각한 선내 손상을 경고하며 시끄럽게 울어댔다.
승리를 확신하며 미소를 짓고 있던 시현도 이런 상황을 상정하지 않았는지 얼굴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그녀는 갤러곤의 발톱을 복도에 꽂아서 밖으로 날아가지 않게 버티고 있었다.
이 순간을 기다렸다.
나는 상처 입은 왼팔을 들어 그녀를 향했다.
총구가 향하는 곳은 그녀의 머리.
그녀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정확히는 그녀가 머리를 초합금 피부로 감싸기 전에 가시뼈가 그녀의 이마를 뚫고 뇌를 파괴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였다.
내 의도를 알아차린 그녀의 안색이 하얗게 질린다.
“크아아! 이런 곳에서 당할까 보냐!”
죽음의 위기 앞에서 한계를 넘은 것일까.
그녀가 눈과 코에서 피를 흘리며 두 가지 능력을 발휘하려고 하고 있었다. 검은색 머리카락 끝부분부터 초합금 피부 특유의 은빛이 머리를 보호하기 위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더 늦기 전에 가시뼈를 발사했다.
얼음송곳을 닮은 가시뼈가 내 팔 끝을 떠난다.
레이저와 플라즈마 등 온갖 기상천외한 병기가 날뛰는 시대에 원시적인 형태의 탄환이 그녀의 머리를 노리고 허공을 질주한다.
그사이 초합금 피부가 이미 그녀의 머리의 절반 이상을 덮고 있었다.
가시뼈와 그녀의 이마에 도착하기까지 5cm도 안 남았던 그때.
그녀가 덜컥 움직임을 멈췄다. 초합금 피부 또한 전개되는 모양 그대로 정지했다.
그녀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떴다. 그 시선이 향하는 곳은 내 뒤였다.
「애기를 괴롭히지 마!」
‘26호?’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내게는 보였다. 26호의 몸에서 보라색의 에너지 줄기가 솟아나 그녀의 머리를 꽉 얽매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런 씹….”
26호가 그녀를 붙들고 있던 시간은 아주 찰나였지만 가시뼈가 목표에 도달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가시뼈가 시현 유진을 뚫고 지나갔다.
지휘부를 상실한 육신이 힘을 잃고 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