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9
검은색 도화지 위에 피안화가 피어난다.
머리에 구멍이 난 시현 유진이 피를 흩뿌리며 우주 공간으로 날아가려 하고 있다.
‘놓칠 수야 없지.’
기껏 강적을 해치웠는데 보상이 없다고 하면 참 슬플 것 같다.
나는 위의 팔을 그녀에게 향해 뻗었다. 톱날 촉수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뻗어 나가 그녀의 허리를 휘감았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며 그녀의 허리가 반쯤 접혔지만 어차피 죽은 몸. 나는 신경 쓰지 않고 그녀의 시체를 회수했다.
「애기야! 도와줘!」
‘아차.’
26호가 버티지 못했는지 날아가려고 한다. 녀석이 검은 심연에서 영원히 떠돌기 전에 나는 급히 다른 팔로 녀석을 붙잡았다.
녀석의 몸에는 그동안 보지 못했던 가느다란 촉수가 한 가닥 솟아 있었다.
나는 저 촉수의 정체가 뭔지 안다. 그리고 26호의 ‘진짜’ 종족이 무엇인지도.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이 자리부터 벗어나야 한다.
[즈즈즈 즈(놓으면 안 돼)]
「응.」
연구선에는 구역마다 차폐문이 존재한다. 지금 내가 있는 곳은 둥지, 즉 함선의 원자로와 관련된 시설이 밀집한 동력 구역. 이 구역을 봉쇄하는 차폐문이 멀지 않은 곳에 있다.
나는 한 팔에는 시체를, 한 팔에는 26호를 끌어안고 차폐문까지 걸어갔다.
작은 팔로 문 옆의 단말기를 조작하자 공기가 빠지는 소리가 나며 차폐문이 닫혔다. 문 반대편에서부터 환경 유지 장치의 경보음이 작게 들려왔다.
‘이 배는 이제 끝장이구만.’
배에 사람 사이즈만한 구멍이 생겼다. 환경 유지 장치가 선내의 환경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사람이 있다면 구멍이 난 구역을 차폐해서 안정화시키겠지만 배에 남아 있는 선원은 해적들을 제외하고는 극소수다. 게다가 그들은 나를 피해 숨어서 나오지 않고 있으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고 있을 터.
「애기야? 팔이 왜 그래?」
‘응?’
26호의 말을 듣고 아래쪽 팔을 보니까 가시뼈 발사 기관이 변하고 있었다. 총구 부분에서 4개의 손가락이 튀어나오고 길이도 다른 팔과 동일한 크기로 줄어들었다. 이외에도 몸 전체를 압박하던 무게도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사이오니움 효과가 끝난 것이다.
‘아쉽네.’
그래도 해제될 때는 고통스럽지 않아서 다행이다. 시현과 싸우느라 부상도 적지 않은 상태에서 진화의 통증까지 겹치면 바로 기절하지 않을까?
‘그래도 그보다 더 중요한 보상을 얻었어.’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의 결과물이 내 앞에 있다.
게임에서 메가콥 랭커가 보유한 유전자는 평균적으로 100가지가 넘는다. 별로 많지 않다고 보일 수 있지만, 이 유전자들은 모두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만나기조차 어려운 희귀 생물의 유전자다. 숫자가 적다고 해도 그 가치는 절대로 작지 않다.
물론 시현 유진은 랭커에 들지 못하는 상위권 플레이어 수준이지만 그래도 그녀의 몸 안에는 적지 않은 유전자가 들어있으리라.
‘샘플 섭취랑 다르지 않으니까 이번에도 많아봐야 3개 정도 되겠지.’
차이점이라면 그 어느 것을 뽑아도 꽝이 없을 것이라는 것. 솔직히 한 개만 뽑아도 좋으니까 갤러곤의 발톱을 뽑으면 좋겠다.
‘그럼 잘 먹겠습니다.’
빨리 먹어 치우고 상황실의 사이보그도 정리하러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입을 대려는 순간.
「나는 시체를 먹던 중이었다.」
「하반신만 남았을 때, 거대한 에너지 폭발이 나를 휩쓸었다.」
「나는 죽었다.」
‘아! 폭탄!’
급작스럽게 발동한 포식자 감각을 보며 그제야 나는 잊고 있던 사실을 떠올렸다. 강적과 싸우느라 신경을 끄고 있었지만, 두목이 원자로에 설치해 뒀던 폭탄의 타이머는 아직 작동하고 있었다.
‘얼마나 남았지?’
포식자 감각이 보여 준 미래에서는 시현의 시체를 하반신만 남긴 상태에서 폭탄이 터졌다. 내가 성인 남성의 시체를 남김없이 먹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분에서 길어봐야 15분 사이. 시현은 여성이다 보니 남성에 비해 몸이 작으니까 더 빨리 먹겠지.
그렇다면 남은 시간은 얼추 5분.
지금이라도 원자로에 달려가 폭탄을 해제해야 하는가, 아니면 서둘러 이 배를 떠나야 하는가.
나는 두 가지 선택지를 두고 고민했다.
‘폭탄을 해체하기는 시간이 부족해.’
에이모프 플레이 중 폭탄은 여러 번 해체해 봤지만, 내가 모르는 형식의 폭탄이면 해체하는데 시간이 걸린다. 기껏 시현까지 잡았는데 또다시 목숨을 걸고 모험을 할 생각은 없다.
더 고민할 시간이 없다. 지금도 폭탄 안에 내장된 시곗바늘은 계속 째깍거리며 파멸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나는 결정을 내렸다.
‘배를 버리자.’
상황실에 있을 사이보그나 내가 먹지 못한 두목의 유전자는 아쉽지만 목숨을 걸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여기 있는 시현 유진의 유전자가 압도적으로 더 좋고, 사이보그야 먹을 기회가 언제든지 있으니까.
탈출선은 활주로에 정박되어 있다. 활주로는 원자로와 정반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복도를 통해 활주로까지 가는데 5분은 걸린다. 복도가 복잡하게 꼬여 있기 때문이다.
활주로에서 탈출선을 작동시키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지만 나는 빠르게 갈 수 있는 방법을 안다.
‘그걸 써야겠네.’
나는 26호를 품에 안고 냉각실의 둥지로 뛰었다.
금방 냉각실에 도착한 나는 구석에 세워져 있던 플라즈마 런처를 집어 들었다.
「번쩍번쩍!」
[즈 즈즈즈즈즈(그래. 번쩍한 거야)]
26호가 플라즈마 런처의 에너지탄 색에 맞춰 몸의 색깔을 초록색으로 변형시켰다. 녀석은 플라즈마 런처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녹색 빛이 번뜩일 때마다 사람들이 폭발하는 것은 잊지 않은 것 같았다.
플라즈마 런처.
고전 FPS게임에 등장하는 최종병기 총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길이가 1m를 넘고 중량은 50kg이 넘는다. 당연히 일반인이 맨손으로 쏘는 것이 불가능해서 거치대가 달려 있지만, 나는 그럴 필요가 없으니 거치대를 떼고 사용 중이다.
‘물론 지금은 사람을 향해 쏠 생각이 없지만.’
나는 런처를 들고 복도로 나갔다. 그리고 외벽과 제일 가까운 부분을 조준했다.
「Charging 10…20…50…80…100%」
런처 위에 달린 단말기를 조작하자 런처가 에너지를 충전하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고 있던 26호가 내 어깨 위에 올라탔다.
몇 초 만에 충전이 완료된 런처. 나는 방아쇠를 당겼다.
막대한 반동이 내 팔에 전해지고 런처의 총구에서 녹색의 빔이 뿜어져 나왔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에너지 광선이 복도의 벽은 물론이고 외벽까지 뚫고 지나갔다.
청소기가 공기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배에 생긴 거대한 구멍이 우리를 빨아들였다. 나는 그 흐름에 몸을 맡겨서 공기와 함께 우주선 밖으로 빠져나왔다.
거리가 멀어지기 전, 나는 촉수를 쏴서 함선 외벽을 붙잡았다.
함선 밖이지만 격납고가 어디에 위치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촉수를 당겨서 함선 위에 착지한 나는 목표를 향해 달렸다.
「와! 재밌다!」
끝없이 이어지는 밤을 목격한 26호가 탄성을 내뱉는다. 산소도 중력도 모두 존재하지 않은 검은 바다에 떠 있는 하얀 종이와 같은 배 위에 우리가 있다.
6개의 다리를 가진 짐승이 허리춤에는 여자의 시체와 플라즈마 런처를 끼고, 어깨 위에는 분홍색 풍선을 달고 배 위를 내달린다.
마약을 빨고 상상할 법한 초현실적인 여정은 길지 않았다.
2분이 채 지나지 않아 격납고에 도착한 나는 플라즈마 런처를 작동시켰다. 녹색의 빔이 두터운 외벽을 토치로 얼음을 녹이듯 쉽게 녹여버렸다.
반탄력에 튕겨 나가기 전에 나는 양손 모두 촉수를 쏴서 외벽에 고정했다. 그사이 임무를 다한 플라즈마 런처는 우주 공간 너머로 날아갔다.
‘수고했어.’
강력한 무기지만 그다지 아깝지는 않았다. 앞으로도 얻을 기회는 충분히 많으니까 말이다. 나는 런처가 만든 구멍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격납고에 정비된 함재기와 탈출선이 보인다.
「재밌다.」
우주에서의 뜀박질을 마음에 들어 하는 26호를 들고 탈출선으로 다가갔다. 누가 타려고 했는지 탈출선의 문이 열려 있었다.
‘뭐 귀찮음을 덜어서 잘됐네.’
[즈즈즈 즈즈즈즈(아무거나 잡고 있어)]
「응응.」
고급 장교나 수뇌부를 위한 탈출선인지 내부 시설은 호화로웠다. 화려한 장식을 구경하는 26호를 두고 나는 조종석에 앉았다.
‘어디 보자.’
메가콥 소형 우주선은 몇 번 조종해봤다. 다행히 탈출선의 조종방식은 무난한 편이었다.
‘꼬리 때문에 앉기 불편한 것을 빼고는 말이지.’
나는 불편한 의자를 부숴 버리고 계기판에 있는 스위치들을 눌러 운행을 위한 조정을 마쳤다. 그러자 격납문이 열리고 활주로에 불이 들어왔다.
‘그럼 가 볼까.’
조종간을 당기자 탈출선이 쏜살같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강화유리로 보이는 광경이 싸늘한 금속 벽 대신 알록달록한 무지개의 별들이 박혀 있는 먹지로 전환되었다.
내가 처음 이 세계에 발을 디딘 곳.
성장과 진화의 밑거름이었던 연구선과는 작별이다.
-
“씨, 씨발 뒤지는 줄 알았네.”
엘첸은 좀 전 원자로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몸서리쳤다.
그가 마비가 덜 풀린 몸을 이끌고 간신히 원자로에 도착했을 때, 타이머는 정확히 2분을 남기고 있었다. 폭발까지 5초를 남기고 간신히 해체할 수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늦었다간 그는 자신이 설치한 폭탄에 폭사했으리라.
‘그 빌어먹을 괴물 놈들….’
이곳까지 오는 도중 엘첸은 살면서 처음으로 함선이 비명을 지른다고 생각했다. 직경 200m를 넘는 강철의 배가 100분의 1도 안 되는 크기의 작은 두 존재에 의해 작살나고 있었다.
평생 자신이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는 엘첸이었지만 저 둘은 예외였다.
그래서 엘첸은 직접 둘을 죽이는 것을 포기했다. 물론 악랄한 스페이스독 중에서도 특히 잔악하다고 소문난 자인 만큼 둘을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큭큭, 씨발 새끼들 같이 뒈져라.”
그는 폭탄을 자동 폭발 모드로 설정하고 타이머를 다시 10분으로 맞춰 놨다. 그가 탈출선을 타고 빠져나갔을 때, 그 괴물 놈들은 함선과 함께 우주의 유령이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벌써 5분 전.
그는 격납고에 거의 도착한 상태였다.
‘빌어먹을. 다리는 감각이 돌아왔는데 눈이….’
개량된 헐크 뮤턴트다 보니 독은 이미 모두 해독했지만, 파괴된 심장이 문제였다. 보조 심장이 파괴되면서 뇌에도 영향을 줘 시각, 청각 등의 오감에 크게 손상이 갔기 때문이었다.
특히 시각이 이상하게 망가지는 바람에 지금 그는 극한의 원시(遠視) 상태에 있었다. 정해진 버튼 몇 개만 누르면 되는데 눈이 보이지 않아 하마터면 폭탄을 터뜨릴 뻔했다.
아무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그는 부지런히 걸었다. 아까까지 시끄럽게 싸우던 놈들이 지금은 조용했다. 둘 중 하나가 패배한 것이 분명했다.
‘누가 뒈졌던 남은 새끼도 무사하지 못할 거다.’
기분 탓인지 우주에서 바람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자기가 잘못 들은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갔다. 그렇게 계속 걷던 중, 그의 귀에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응?’
부하인가 싶었는데 복도 끝에서 나타난 것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었다.
“히익! 해, 해적?!”
“어라? 선장이잖아?”
놀랍게도 상대는 이 배의 선장 유성 사뮤엘이었다.
진작 도망친 줄 알았는데 갑자기 선장이 튀어나오자 엘첸은 당황했다.
유성의 모습은 엘첸이 마늘에게 들었던 외양과 많이 달랐다. 머리는 산발이었고 눈 밑에는 다크서클이 진하게 생겼다. 게다가 술이라도 마신 것인지 몸에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다.
그의 비참한 몰골을 보고 어떻게 된 일인지 대충 이해한 엘첸이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원래는 탈출선으로 도망치려고 했는데 배를 버리자니 아까워서 숨어 있었던 거군.’
메가콥의 고위층 중 탐욕스럽지 않은 자가 없다. 노블캐피탈에 가까워질수록 그련 경향이 심해진다. 사뮤엘 가문은 메가콥에서 세 번째로 높은 계층인 서드캐피탈. 생명보다 돈을 우선시 할 만했다.
‘배가 조용해지니까 확인하려고 나온 것이겠지.’
유성은 엘첸이 본인의 생각을 낱낱이 읽고 있는 것을 전혀 짐작 못했다. 위압감이 넘치는 엘첸을 앞을 두고 그가 벌벌 떨며 품에서 작은 물건을 꺼냈다.
그것이 권총이라는 것을 안 엘첸은 코웃음을 쳤다.
“하. 그걸로 날 쏘게?”
“가, 가까이 오지 마라! 이건 플라즈마 피스톨이다!”
“어이. 플라즈마고 나발이고 안전장치나 풀고 말하지 그래?”
“어, 어? 아, 안전장치?”
당황한 유성이 확인하려고 총구를 돌렸을 때, 엘첸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의 거구에 부딪친 유성은 맥없이 피스톨을 놓치고 말았다.
“하, 씹새끼가 사람 겁나게 만들고 있어. 병신 새끼, 플라즈마 피스톨에는 안전장치가 없어.”
방금 그것이 해적이 친 블러핑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유성의 얼굴이 절망에 물들었다.
엘첸이 그를 비웃으며 피스톨을 주워들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바람에 원래 있던 금이 한층 더 선명해졌지만 그는 원시 증상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이 많으면 가죽을 벗길 텐데 내가 지금 시간이 없네.”
“히, 히익! 사, 살려주게! 부, 부하가 되라고 하면 부하가 되겠어!”
“필요 없고. 그럼 잘 가라.”
그가 방아쇠를 당기자 피스톨이 녹색 불빛을 내뿜었다.
만약 엘첸이 심장을 파괴당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피스톨에 문제가 있음을 알아차렸을 거다. 하다못해 유성을 죽이려 하지 않고 그대로 격납고만 갔어도 그는 무사했을 거다.
오만함, 그리고 잔혹함.
그가 가진 결점 때문에 그는 두 번 연달아 잘못된 선택지를 택했다.
플라즈마 피스톨은 그 강력한 플라즈마 무기를 극단적으로 경량화한 무기인 만큼 내구도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이미 괴물에 의해 한 차례 바닥에 떨어져 금이 갔는데 거기서 추가로 충격을 받았으니 피스톨은 이미 한계를 넘은 지 오래였다.
그 결과, 피스톨에 충전된 플라즈마 에너지가 총구를 통과하기도 전에 총열이 부서졌다. 오갈 데 없는 에너지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폭발하고 말이다.
상반신 전체가 날아가 버린 엘첸의 잔해가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
해적의 시체를 멍하니 내려다보던 유성.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이어서 그가 미친놈처럼 웃었다.
“어? 하, 하하, 하하하하!”
그는 생각했다. 역시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고.
유성은 결코 배를 버린 것이 아니었다. 그는 병사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탈출선을 타고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런데 막상 탈출선에 오르고 보니 아쉬움이 그를 지배했다.
이 연구선은 결코 저렴하지 않다. 목숨 값보다야 싼 배지만, 그래도 조금만 더 기다려보면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다.
‘병사들이 괴물을 죽이는 데 성공할지도 몰라. 아니면 지나가던 다른 배가 도와주러 올 수도 있어.’
사실 유성은 공포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본래 미친 자는 자기가 정상이라 생각하는 법. 그는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병사들을 사지로 내몬 그는 탈출선 안에 비치된 술을 탕진하면서 기다렸다. 누군가 그들을 구해 줄 것이라는 헛된 믿음을 가지며 말이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배 안에서 비명과 진동이 멈춘 것이다.
나갈까 말까 고민하던 그는 겨우 마음을 정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마침내 유성 사뮤엘은 살아남았다.
괴물의 습격에서도, 해적의 습격에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생존했다.
타이탄의 위대한 자손, 사뮤엘 가문의 장자 유성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나는 무적이다!”
그 말과 함께 원자로에서부터 시작된 하얀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
‘어이쿠.’
「으앙! 애기야!」
[즈즈즈(진정해)]
마침내 원자로가 폭발했는지 어마어마한 충격파가 탈출선을 뒤흔들었다. 탈출선이 울리는 경고음에 따라 나는 조종 장치들을 조정했다.
내가 한 일이 성과가 있는지 경고음이 잦아들고 탈출선도 안정을 되찾았다.
[즈즈즈(괜찮아?)]
돌아보니 26호는 벽에 부딪쳤는지 기절한 상태였다. 딱히 생명에 위험이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녀석을 탈출선 내에 있는 침대 위에 올려놨다.
‘뭐야. 누가 술이라도 마셨나?’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술병을 발로 치우고 탈출선 내부를 정리했다.
지금까지 미뤄왔던 식사를 하려면 주변을 깨끗히 해야하니까.
구석에 처박혀 있던 시현 유진의 시체. 마침내 저것을 먹을 시간이 왔다.
나는 탈출선을 자동 조종으로 돌려놓고 그녀의 시체를 꺼냈다.
그리고 그녀의 탐스러운 다리를 쭉 뜯어내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
지금까지 내가 먹은 생물들은 수백 명이 넘는다. 그래서 나는 대충 어떤 생물이 맛있다는 느낌을 주는지 알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먹었던 것 중 가장 맛있는 생물은 키사라기 유진. 그녀는 고급 한정식처럼 정갈하고 잘 계산된 맛이 났다.
아마 유전자를 개조해서 그럴 거다. 그렇다면 이쪽 시현 유진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착각이었다.
단언컨대 시현 유진은 내가 먹은 생물, 앞으로 먹을 생물 중에서도 최상위권을 놓치지 않을 정도로 맛이 훌륭했다.
‘…나중에 지구에 한번 가 봐야 하나.’
원래 메가콥 수도는 한참 나중에 갈 생각이었는데 시현 유진의 고기를 먹으니까 결심이 흔들린다.
나는 고개를 털고 다시 한 번 베어 물었다.
신기했다. 보통 첫 번째 먹을 때가 제일 맛있다고 느낄 텐데 그녀는 반대였다. 먹으면 먹을수록,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넘쳐났다.
이곳에는 나와 기절한 26호 뿐. 누구도 내 식사를 방해할 자는 없다. 나는 프랑스의 고급 코스 요리를 즐기듯 느긋하게 그녀의 고기를 맛봤다.
영원할 것 같은 행복이 끝날 무렵, 반투명 텍스트창이 연회의 종료를 알려왔다.
「포식 효과 발동! ‘갤러곤의 발톱’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시현 유진’의 생물 특성 중 ‘갤러곤의 발톱’을 탈취.」
「‘갤러곤의 발톱’을 적용하시겠습니까?」
「포식 효과 발동! ‘위장 피부’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시현 유진’의 생물 특성 중 ‘위장 피부’를 탈취.」
「‘위장 피부’를 적용하시겠습니까?」
「포식 효과 발동! ‘투시’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시현 유진’의 생물 특성 중 ‘투시’를 탈취.」
「‘투시’를 적용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