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30
SF게임인 스페이스 서바이벌에는 판타지적 요소가 많지 않지만 몇 가지 예외가 있다.
대표적으로 우주판 엘프라 불리며 마법에 가까운 힘을 쓰는 컬트, 사이킥 생명체 볼텍스원, 우주의 용 갤러곤이 판타지적 성향을 강하게 띤다.
사이킥 파워를 쓸 수 있는 생물은 이들 이외에도 존재하지만, 이 세 종족은 사이킥 파워를 ‘마법’처럼 쓴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각각 엘프, 악마, 드래곤 정도로 비유할 수 있겠지.’
우주에 사는 드래곤이라는 별명을 가진 갤러곤은 수가 매우 적고 희귀해서 일반 플레이어들은 만나는 것조차 힘들다.
그렇다 보니 별명처럼 모습도 드래곤처럼 생겼다고 착각하는 초보도 많았다.
‘실제로는 전혀 다르지만.’
파충류를 베이스로 한 거대한 몸집, 등에 달린 날개, 뿔이 달린 머리 등은 드래곤과 유사하지만 입이 있어야 할 자리에 촉수 다발이 달려 있다는 점에서 다르다.
갤러곤은 피와 사이킥 에너지를 주식으로 삼기 때문에 구강구조가 일반 동물과 달리 촉수로 이뤄져 있다.
그리고 흔히 드래곤의 색은 성향을 나타낸다고 하는데, 갤러곤의 색은 성장 수준을 나타낸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시현 유진이 내게 준 ‘갤러곤의 발톱’ 특성은 화이트 갤러곤의 유전자. 화이트면 딱 중간, 에이모프로 치면 아성체급이다.
‘갤러곤의 발톱을 이렇게 빨리 얻은 적은 한 번도 없는데.’
해츨링급인 블루 갤러곤만 해도 준성체는 되야 무리없이 잡을 수 있을 정도다. 그보다 두 단계나 높은 화이트면 말할 것도 없겠지.
지금 내가 갤러곤의 유전자를 얻은 것 자체가 엄청나게 파격적인 일이다.
‘그 귀한 것을 어디서 구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야 감사할 따름이다.
갤러곤의 발톱 다음으로 내가 얻은 특성은 ‘위장 피부’.
사실 이 능력이야말로 시현 유진이 준 특성 중 대박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강력한 특성이다.
‘솔직히 갤러곤보다 자이언트 카멜레온을 어디서 잡았는지가 더 궁금하네.’
자이언트 카멜레온은 초식 생물이기 때문에 전투력 자체는 별 볼일 없다. 에이모프 유체 상태로도 어렵지 않게 사냥할 수 있을 정도로 허약하다.
문제는 녀석을 발견하는 일 자체가 엄청나게 어렵다는 것.
자이언트 카멜레온은 피부 표면에 있는 돌기로부터 특수한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이 자기장에는 장비나 특성으로 관측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내 보조기관 같은 특성이나 카메라 같은 전자기기, 사이킥 파워 등등 전부 안 통한다.
오로지 맨눈으로만 자이언트 카멜레온을 볼 수 있으므로 발견하는 것부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일일이 찾아다니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녀석은 서식지가 불명이다. 게임 내 행성이 수천 개가 넘는데 어디서 나올 줄 알고 뒤지고 다니겠는가.
내가 에이모프를 플레이하면서 자이언트 카멜레온 정수를 획득한 적이 딱 3번 밖에 없을 정도니 말 다 했다.
에이모프라서 유전자를 사고 싶어도 거래가 안 된다. 정수를 얻으려면 직접 사냥을 해서 포식 효과로 얻어야 한다.
물론 샘플을 대량으로 섭취한다거나 이미 죽은 시체를 먹어도 포식 효과를 띄울 수 있다. 문제는 이 방법으로는 획득률이 너무 낮아서 비효율적이라는 것.
그러니 몸소 노가다를 뛰는 방법이 최선이다.
‘그 노가다 덕분에 귀한 정보를 얻었으니까 오히려 이득일지도.’
나는 위장 피부와 관련해서 랭커들도 모르는 정보를 하나 알고 있다.
바로 흉내 내기와 위장 피부를 융합시킬 수 있다는 것.
둘이 융합하면 완전히 새로운 특성이 된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게임에서 이 융합 특성을 소유했던 자는 나밖에 없었다.
흉내 내기와 위장 피부를 융합해서 만드는 특성의 이름은 의태(擬態) 기관.
타인이 나를 볼 때 내가 잡아먹은 희생자의 모습으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특성이다.
작동 방식이 약간 복잡한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먼저 의태 기관이 먹이가 된 희생자의 유전 정보를 분석한다. 그리고 피부 전체에서 분석한 정보로 만든 특수한 페로몬을 내뿜어 다른 생물의 감각을 교란시킨다.
다른 생물들이 내 페로몬의 영역 안에 있는 한 나를 희생자라고 인식한다. 게다가 흉내 내기 효과도 남아 있어서 희생자의 목소리를 따라 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다.
페로몬의 영역 자체도 꽤 넉넉한 편이어서 거리가 떨어져 있어도 효과를 볼 수 있다.
그야말로 잠입이나 기습, 난전에 최적화된 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뭐 단점도 적지 않지만.’
이렇게만 보면 사기 특성 같지만 단점도 적지 않다.
일단 의태 기관은 내 몸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페로몬으로 생물을 속이는 것이므로 페로몬이 먹히지 않는 카메라 등의 기계에 고스란히 찍히고, 거울에도 본모습이 그대로 비친다.
의태 효과 자체도 완벽하지 않다. 희생자의 모습 그대로 복사하지만 단순한 행동 말고 기쁨, 슬픔 등의 복잡한 감정 변화는 묘사할 수 없다.
그렇다보니 불쾌한 골짜기 현상이 매우 심하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한 공간에 있으면 이질감과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말이다.
그 외 흉내 내기와 단점도 공유한다. 의태 효과 도중에는 길고 복잡한 대사를 말할 수 없다거나 새로운 희생자를 먹으면 전의 희생자는 묘사할 수 없다거나 등등.
장단점이 확실하지만 상대의 시각을 일시적으로 혼란을 준다는 점에서 유용하게 써먹을 여지가 많은 특성이다.
‘마지막으로 투시.’
앞에 두 특성은 대박이지만 투시는 사실 좀 미묘한 특성이다.
‘좋은 특성이긴 한데….’
스페이스 서바이벌에서 투시는 이름만 투시고, 현실에서 우리가 아는 개념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일종의 초(超)공간지각능력에 가깝지.’
벽 뒤에 실제로 무엇이 있는지 보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이나 요소들의 정보를 종합해서 무엇이 있을지를 ‘재구성’하는 능력에 가깝다.
다만 그 재구성 효과가 현실과 거의 같기 때문에 투시(透視)라는 명칭이 붙었을 뿐. 어떻게 보면 미래 예지 계열 능력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여기까지 보면 무언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 거다.
바로 에이모프의 초감각 특성과 유사하다는 것.
‘쩝. 에이모프만 아니었으면 좋은 특성이었겠지만 아쉽네.’
에이모프의 초감각이 투시의 상위호환에 가깝다 보니 투시는 계륵이다.
‘그래도 투시는 초능력 타입에 카운트되니까.’
당장은 쓸모는 없지만 귀한 초능력 관련 특성이다. 게다가 나중에 융합용으로 쓸 수 있으니까 없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특성에 대한 점검은 끝났다. 아까부터 텍스트창이 나의 응답을 기다리고 있다.
나는 특성 적용을 모두 수락했다.
「‘갤러곤의 발톱’ 특성이 적용되었습니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초능력 기관’과 융합 가능.」
「‘갤러곤의 발톱’과 ‘초능력 기관’ 특성이 융합. ‘괴물의 촉수’ 특성으로 진화!」
「괴물의 촉수: 기존 ‘초능력 기관’ 특성을 계승, 강화합니다. 사이킥 파워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추신: 용의 힘은 조심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위장 피부’ 특성이 적용되었습니다.」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흉내 내기’와 융합 가능.」
「‘위장 피부’와 ‘흉내 내기’ 특성이 융합. ‘의태 기관’ 특성으로 진화!」
「의태 기관: 사냥한 희생자의 모습을 모방할 수 있습니다. 하루 1회 제한.
*추신: 인간의 몸은 숨기에 가장 따뜻한 곳입니다.」
정신없이 떠오르는 반투명 텍스트창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괴물의 촉수?’
의문을 제기할 틈도 없이 내 몸이 변이를 시작했다. 갑자기 뒷골이 확 당기는 느낌이 드는 것과 함께 온몸에서 가려움이 밀려왔다.
작은 촉수다발이 급속도로 길게 자라났다. 급격한 성장 때문인지 머리가 무거워지고 어깨 위에서 촉수들의 끄트머리가 느껴졌다.
몸에서는 피부를 덮고 있는 키틴질 외피에 미세한 구멍들이 생기고 있었다. 아마 환공포증이 있는 사람이 돋보기로 내 피부를 봤다간 기절하겠지.
송송 뚫린 구멍들 위에는 막 같은 것이 새로 생겨서 외피가 기하학적 문양을 새긴 것처럼 변했다.
다음 단계로 진화한 것이 아니다 보니 변이는 짧게 끝났다.
나는 문어의 다리처럼 길게 늘어진 촉수를 만져봤다. 아무리 봐도 갤러곤의 입에 달린 촉수와 똑같이 생겼다.
내가 알기로 갤러곤에게는 초능력 기관이 없다. 그리고 입에 있는 촉수도 특성으로 획득이 불가능하다. 사람으로 치면 손가락이나 발가락을 특성으로 얻으려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영문은 모르겠지만 발톱보다 좋은 무기를 얻은 것은 분명해.’
사이킥 에너지로 구성된 칼바람을 날리는 능력도 좋지만, 괴물의 촉수는 공격 말고도 활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다. 예상치 못한 결과지만 결코 나쁘지 않다.
‘의태 기관은 내 예상대로일 거고.’
마지막으로 투시는 적용이 되었지만 딱히 변하는 느낌은 없었다. 그래도 덕분에 초능력 관련 타입을 얻기까지 얼마 안 남았다.
‘이제 초능력 관련 특성이 4개.’
포식자 감각, 인간성, 괴물의 촉수, 투시 이렇게 4개가 된 상황. 여기서 아성체로 진화하면 특전으로 ‘초능력 내성’을 받아 5개가 된다.
즉 1개만 더 얻으면 초능력 관련 타입을 확보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떠오르는 게 있었다.
나는 기절했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린 26호를 바라봤다.
‘설마 씨 데몬이었을 줄이야.’
많은 해양생물 매니아들이 씨 데몬의 생태를 추적했지만 씨 데몬이 어떻게 탄생하는지에 대해서는 밝혀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다들 게임적 허용으로 받아들였고, 나 또한 그랬다.
적어도 오늘까지는 말이다.
‘버블아메바 중 돌연변이가 씨 데몬으로 진화하는 게 아닐까?’
둘은 크기를 제외하고는 생긴 것도 유사하고 생태도 비슷하다. 그리고 씨 데몬은 바다의 폭군이라 불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존재지만, 버블아메바는 잡아먹지 않는다.
어쩌면 둘이 동족이라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26호가 씨 데몬, 혹은 씨 데몬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는 돌연변이냐 아니냐는 현상황에서 매우 중요하다.
‘…씨 데몬에게는 초능력 관련 특성이 있지.’
‘심해의 공포’라 불리는 특성으로 일정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을 미치게 만드는 특성이다. 레드미스트의 환각 특성과 비슷한데 범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패시브 특성이라 상시 발동이다.
매우 강력한 특성이지만 씨 데몬은 랭커들 다수가 함께 사냥해야 할 정도로 위험한 괴물이기에 특성을 얻기가 쉽지 않다.
‘어찌 보면 갤러곤의 발톱만큼 희귀한 특성이야.’
그리고 그 특성을 보유했을지도 모르는 존재가 눈앞에 있다. 씨 데몬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 상태로 말이다.
‘아니야.’
아주 잠깐 고민했지만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26호가 정말 씨 데몬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있는 돌연변이일지 확실하지 않다. 설령 맞는다고 해도 포식 효과가 발동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정도 들었고.’
혼자서 사냥하고 진화하는 것도 충분히 즐거운 일이지만, 다른 존재와 같이 다니는 것도 또한 새로운 경험이다.
사냥꾼은 늘 배움을 추구해야 하는 법이다. 넓은 마음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여야 시야가 넓어지고 강해질 수 있다.
나는 26호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나에게 도움이 되는 유용한 존재. 내 생명에 위험이 생기기 전까지는 최대한 도와줄 생각이다.
26호에 대한 생각을 털어 버린 나는 조종석으로 가서 수동에서 자동으로 항해를 변경했다.
「목적지를 설정해주십시오.」
‘목적지라.’
작은 손으로 계기판에 있는 버튼을 누르니 몇 개의 후보가 홀로그램으로 떠올랐다.
기본으로 설정된 곳은 메가콥 휘하의 어떤 행성으로 원래 유성의 연구선이 목표로 하던 곳이었다.
‘굳이 거기로 갈 필요는 없지.’
메가콥의 행성들에는 대규모 병력들이 배치되어 있다. 어느 행성이냐에 따라 조금씩 다르긴 하지만 지금 내 상태로 그들을 상대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곳이 어디더라.’
나는 기억을 더듬어 우리가 갈 만한 곳을 살펴봤다. 그러던 중 내게 익숙한 곳이 보였다.
‘티앤씨(T&C) 특수무역중심지.’
우주 공간에 떠 있는 거대한 스페이스 콜로니로 나도 잘 아는 곳이다.
‘여기가 괜찮겠네.’
게임에서도 다수의 플레이어가 거래를 위해 모이던 유명한 곳이었다. 온갖 유전자 정수들이 모이는 곳이라 나 또한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곳이기도 했다.
‘덕분에 욕은 진짜 많이 먹었지.’
비겁한 모프박이 새끼라고 원성이 자자했지만 원래 에이모프가 그런 종족인데 어쩌겠는가. 그렇게 억울하면 자기들도 에이모프를 하면 될 일이다.
물론 상대가 에이모프라고 안 먹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다양한 종족이 모이는 콜로니라면 나의 성장에 좋은 양분이 될 거다.
「항로를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로 재설정합니다. 도착까지 남은 시간은 3시간입니다.」
3시간이라. 나는 도착하기 전까지 잠깐 쉬기로 했다.
식사를 통해 에너지를 채웠지만 연달아 싸우느라 정신력을 많이 소모했다.
나는 침대에 가서 26호 곁에 누웠다. 품속에 파고드는 녀석을 쓰다듬으며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
스타유니언의 수도성(首都星) 작스-01.
빛이라고는 한 줌도 찾아볼 수 없는 검은 스모그로부터 오염된 비가 쏟아진다.
떨어지는 빗방울을 따라 내려가 보면 쉴 새 없이 매연을 뿜어나는 공장들이 보인다.
행성 어딜 가도 보이는 것은 공장, 스모그, 그리고 건물마다 붙어 있는 사진이었다.
기계눈을 달고 있고, 팔짱을 낀 상태로 근엄한 표정을 짓는 남자의 사진이 집, 상가, 공장을 가리지 않고 붙어 있었다.
사진 속 남자의 이름은 주바카. 스타유니언의 대수령이자 모든 사이보그들이 어버이로 여기는 자다.
거리를 걷는 사이보그들은 사진을 볼 때마다 경례를 했지만, 그 모습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는 없었다. 이곳, 스타유니언에서는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기묘한 풍경이 이어지는 가운데, 사진이 없는 건물이 하나 있었다.
버려진 건물처럼 보이는 곳.
그곳 지하에는 사이보그들이 모르는 시설이 존재했다.
어두운 지상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먼지 하나 없이 깨끗한 의료실에 메디컬 캡슐이 있었다.
마치 순백의 관처럼 생긴 캡슐이 기계음을 내며 천천히 열렸다.
캡슐이 열리자마자 안쪽에서 새하얀 팔이 튀어나왔다.
“허억! 컥, 커헉….”
팔의 주인은 여성이었다. 검은 머리카락에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여인. 그녀가 몸을 일으키며 기침했다.
그녀의 이름은 시현 유진.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클론’이었다.
시현 유진은 유진 가문의 ‘그림자’인 만큼 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존재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유전자 개조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던 시절, 그녀는 미래를 위해 보험을 들어 놨다.
자신이 죽는다면 복제인간이 본인을 대신하도록 안배해 놓은 것이다.
메가콥에서는 다른 것은 몰라도 인간 복제 기술만큼은 일종의 금기였다. 그래서 그녀는 메가콥의 적대국에 자신의 클론을 숨겨놨었다.
“클론이 될 줄은 몰랐는데….”
시현은 자기 몸을 내려다 봤다. 갓 태어난 것처럼 새하얗고 뽀얀 살결과 매끄러운 몸매가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육신이지만 그녀는 낯설기만 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클론에는 원래 갖고 있던 유전자 중 일부가 업데이트되지 않았다. 그녀가 갖고 있던 갤러곤의 발톱이나 레드미스트의 환각 능력, 그 밖에 무수히 많은 유전자 능력들이 전부 손실되었다.
괴물놈 때문에 잃어 버린 유전자를 복구하기까지 얼마나 더 걸릴지 알 수 없었다. 계획하고 있던 대계(大計)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나 다름없기에 그녀는 이를 갈았다.
“…그 빌어먹을 개새끼, 다음에 만나면 뇌를 뽑아주마.”
시현 유진의 눈이 원한으로 깊게 물들었다.
-
빛이 잠들고 별빛이 눈 뜨는 시간,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의 항만 지구는 여전히 북적거렸다.
작업복을 입은 노동자, 양복을 입은 비즈니스맨, 관광 온 외계 종족 등등 온갖 종류의 지성체들이 화려한 네온사인 아래에서 부지런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항만 지구에서 일하는 카펜터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야근 중이었다.
쉬는 시간이어서 소형 단말기로 웹소설을 보고 있는데 그의 통신기에 불이 들어왔다.
삑
「야, 카펜터. 바쁘냐?」
“하워드냐. 왜?”
「메가콥 탈출선이 들어왔어.」
“어디서 왔어?”
「관제탑에서 연락했는데 답이 없다더라. 자동 항해로 설정된 것을 보니까 뭔가 문제가 있나 봐.」
“또 애미없는 애새끼들이 왔나보네. 확인해 볼게.”
「7번 구역이야.」
동료가 가르쳐 준 곳에 가 보니 화려하게 장식된 탈출선이 눈에 들어왔다. 돈을 엄청 처바른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작은 우주선을 보며 카펜터는 휘파람을 불었다.
“어휴, 또 어떤 도련님이 이렇게 몰래 도망치셨을까.”
이곳에는 상위 캐피탈 출신 자제들이 가출하려고 탄 탈출선이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 확신한 카펜터는 탈출선의 문을 두드렸다.
“안에 계신 분들 나와 봐요.”
잠시 기다렸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카펜터는 한숨을 쉬며 해킹 장비를 꺼내 들었다. 케이블을 문 옆 단말기에 연결한 뒤 장비를 조작하자 탈출선의 문이 쉽게 열렸다.
“아니 뭘 하셨기에 불까지 끄고 그러시나?”
탈출선 안은 불빛 하나 없이 어두컴컴했다. 안전모에 달린 랜턴을 킨 카펜터는 탈출선 내부를 둘러봤다.
“어디 갔지?”
바닥에 있는 술병, 부서진 조종석 등 누군가 있었던 흔적은 남아 있는데 정작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응?”
신발 바닥에 무언가가 끈적거리는 것이 붙었다. 바닥을 확인해 보니 이상한 액체가 고여 있었다.
“이게 뭐지?”
손으로 만져 보고 있는 중, 위에서 액체가 떨어졌다. 떨어지는 액체를 따라 카펜터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천장에 「그것」이 있었다.
-
“야, 카펜터 어디 갔냐?”
“어? 걔 오늘은 일찍 퇴근한다더라.”
“그래? 집 사려면 돈 벌어야 한다던 놈이 일찍 간다고?”
“어. 저기 가네.”
하워드는 동료의 말에 고개를 돌렸다. 한 20m쯤 떨어진 곳에 카펜터가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어이, 카펜터!”
“…….”
하워드가 부르자 카펜터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공교롭게도 그가 서 있는 자리는 가로등의 빛이 비추지 않은 어두운 골목길이었다.
어찌나 어둡던지 거리가 멀지 않음에도 상반신은 그늘에 가려 윤곽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저 새끼는 왜 저런 곳에 서 있지?’
하워드는 카펜터를 보자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걸음걸이나 입고 있는 옷을 보면 그가 맞는데 왠지 다른 존재를 보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야, 너 오늘 야근한다며? 그냥 가려고?”
“어. 바빠.”
“작업소장이 뭐라 안 해?”
“어. 바쁘다니까 가래.”
그렇게 말하고 카펜터는 골목길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신기하게도 카펜터가 사라지자 머리 한구석에서 느껴지는 불쾌함도 싹 사그라졌다.
“…씨발, 저 새끼는 말을 해도 저딴 식으로 하냐.”
“내버려 둬. 생리하나보지. 큭큭.”
하워드는 킬킬거리는 동료와 함께 다시 일에 복귀했다.
다음날, 카펜터는 항만 지구에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