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34화 (35/400)

Ep. 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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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의 행정 지구(地區).

그곳은 광고판들이 만드는 인공적인 빛으로 범벅이 된 다른 지구들과 완전히 다른 이미지였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

행정 지구를 상징하는 슬로건대로 잘 관리된 나무와 수풀이 대리석 보도블록 양측에 빼곡히 심어져 있었다. 나무 사이에서는 작은 새들이 날아다니며 지저귀었다.

싱그러움을 뽐내는 나무숲 너머에는 백색의 직사각형 고층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관공서 혹은 메가콥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회사들의 지사(支社)였다.

아름답지만 평면적인 빌딩들을 지나 지구의 중앙에 가면 주변의 그 어떤 건물보다 높고 독특한 외형의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꽈배기를 연상시키는 나선형 외관에 위쪽은 양손을 활짝 펼친 것같이 펼쳐져 있는 디자인의 건축물이 도시 전경을 오시한다.

위용 넘치는 건물의 이름은 모뉴먼트(monument).

효율성을 중시하는 티앤씨 가문답게 최초의 우주 도시를 상징하는 건물에도 기념비라는 단순한 이름을 붙였다.

모뉴먼트의 최고층에는 사담 쳄벌린의 막내딸이자 특수무역중심지의 총괄관리자 라일라 쳄벌린이 거주하는 중이다.

현재 그녀는 도시의 수뇌부들과 함께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마호가니 재질의 원탁에 라일라와 각 지구장, 관공서의 팀장들이 빙 둘러서 앉아 있었고, 개중 인적자원관리팀의 부팀장만이 긴장한 상태로 서 있었다.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아름다운 여인, 라일라가 보고서를 읽다가 입을 열었다.

“인적자원관리팀.”

“예, 옙!”

“이번에는 도착한 물자가 3% 감소했는데 원인을 알 수 있을까요?”

그녀의 질문에 부팀장이 딸꾹질했다.

“히끅! 그, 그게 Z-101 목장 행성, P-82 축산 행성에서 올해는 생산량이 떨어졌다고….”

“저희 특수무역중심지는 유흥 지구로 보낼 ‘고용인’의 20%까지는 다른 루트를 통해 대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공급량 3% 마이너스는 결코 적은 수치라고는 할 수 없죠. 허용 범위 내라고 안심할 수는 없어요.”

“그, 그렇습니다만 그게….”

“특수무역지구의 수입 중 40%가 유흥 지구에서 나온다는 것은 다들 아실 겁니다. 인적자원관리팀에서 공급량이 3%나 떨어져 나가면 그 부담은 유흥 지구 쪽에서 질 수밖에 없어요.”

라일라는 평온한 어조로 말하고 있었지만 다들 그녀가 뭘 말하는지 알고 있었다. 왜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루트를 새로 뚫지 않았냐는 경고였다.

“부팀장, 아니 피사로 씨.”

“네, 넵!”

“상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뭔지 아시나요?”

“크래딧이 아닐지….”

“물론 크래딧도 중요합니다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신용이랍니다. 이번에 사정이 있으니 공급이 어렵다고 변명할 수 있겠죠. 하지만 그것으로 신용이 깨진다면? 여기까지 어렵게 찾아오신 고객분들입니다. 그분들은 한번 실망하면 절대 돌아오지 않아요.”

“며,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때라면 저도 넘어가겠지만 지금은 중요한 시기입니다. 다들 이사회가 열리기까지 얼마 안 남았다는 것을 아실 겁니다.”

그녀의 입에서 ‘이사회’ 라는 단어가 나오자 자리에 있는 모두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티앤씨 가문 밑에서 일하는 자라면 모를 리 없었다. 티앤씨 가주가 메가콥 CEO자리를 얼마나 바라고 있는지 말이다.

“이번 1차 이사회는 이곳,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에서 개최될 예정이죠. 어마어마한 관광객들이 이 도시를 방문할 터. 한 치의 오차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두 행성 지도부에 연락해서 행성 전역에 발정제라도 뿌리던가 해서 어떻게든 할당량을 맞추라고 하세요. 아시겠어요?”

“넵!”

“자, 그럼 다음 분. 유흥 지구인가요? 항상 기대하고 있답니다. 시작하세요.”

“옙.”

부팀장이 자리에 앉아 식은땀을 닦고 있는 동안 다른 팀의 발표자가 보고를 시작했다.

그렇게 세 시간이 지난 뒤 회의는 끝났다.

모든 팀장이 나가고 홀로 회의실에 앉아 있던 라일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메가콥 CEO를 뽑는 1차 이사회가 열리기까지 한 달이 남았다.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총괄관리자인 그녀는 몸이 열 개가 되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래도 이 일만 잘 성사되면 후계자의 자리도 꿈이 아니야.’

티앤씨 가문은 다른 노블캐피탈들과 다른 독특한 특징이 있다.

티앤씨의 정확한 명칭은 톰슨&쳄벌린. 각 성씨 앞글자 T와 C를 따서 티앤씨라 부른다.

명칭대로 티앤씨 내에는 두 개의 성씨가 한 가문에 공존한다. 톰슨 성을 가진 일족과 쳄벌린 성을 가진 일족이 경쟁하여 승리한 자가 티앤씨의 가주가 되는 구조다.

현재까지는 쳄벌린 성씨가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만 다음 대에서는 누가 될지 모른다.

‘톰슨 쪽에서 벼르고 있으니까.’

가주가 되면 가문의 모든 권리와 메가콥 내 티앤씨 관련 이권을 독식할 수 있다.

쳄벌린은 수 대에 걸쳐 가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톰슨 쪽에서도 독이 오를대로 오른 상황. 다음 가주 자리를 톰슨에게 뺏긴다면 피바람이 불 것이 분명했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비서가 들어왔다.

“아가씨. 말씀하신 이사회 개최일에 방문 신청을 한 명사(名士)들의 명단입니다.”

라일라는 비서가 건넨 태블릿 패드를 확인했다.

쭉쭉 내리며 명단 속 이름들을 체크하는데 마지막에 있는 이름을 보고 그녀가 흠칫 놀랐다.

“…이 목록 정확한 건가요?”

“예. 무슨 문제라도?”

“아키라 유진이 참석한다고요?”

“예. 한 시간 전 유진 가문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이사회에는 참석하지 않고 도시 관광만 한다고 합니다.”

“하.”

라일라는 되도 않는 말에 헛웃음을 흘렸다.

족히 수백 살은 되는 노괴가 한가롭게 도시 구경이라니. 재미없는 농담이다.

‘현 메가콥 CEO 아키라 유진이 여기에 온다라.’

지구의 오래된 왕이라 불리는 그의 위업과 악명은 라일라도 잘 알고 있었다.

“찬탈자.”

라일라가 무심코 아키라 유진의 별명을 입에 올렸다.

찬탈자는 아키라 유진이 가장 싫어하는 단어이자 다른 노블캐피탈이 그를 조롱할 때 쓰는 표현이다.

별명처럼 원래 아키라 유진은 가주가 될 사람이 아니었다.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그에게는 가문을 이어받을 자격 자체가 없었다.

‘유진 가문은 혈통을 중시하니까.’

노블캐피탈의 5대 가문들은 각각 중시하는 요소가 있다.

티앤씨 가문은 경쟁, 유진 가문은 혈통, 강화복 개발로 유명한 가르멜다는 기술 등 각자 주관하는 분야에 걸맞은 개념을 가훈으로 삼는다.

유진은 핏줄을 중시하는 가문답게 전통적으로 그들의 뿌리였던 민족의 피가 흐르는 자가 가주가 되었다.

‘테라포밍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시대인데 민족이라니.’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아무튼 아키라의 혈통은 유진 가문의 뿌리와는 거리가 멀었기에 정식 계승자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가주가 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유진 가문, 아니 노블캐피탈의 역사 속에서 유일하게 쿠데타를 통해 가주가 된 인물이었다.

‘정우 유진이라고 했던가?’

본래라면 순탄하게 가문을 운영할 사람이었지만 아키라에 의해 제거된 비운의 가주. 그가 죽은 뒤 그의 혈족들은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심지어 아키라 그 미친 양반은 정우 유진의 딸을 그림자로 만들었지.’

아키라 유진이 잔인하다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가 사람을 마구 죽여서 그런 게 아니다.

같은 노블캐피탈, 같은 가문 사람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이거나 고문하므로 비판받는 것이다.

라일라도 매년 목장 행성에 가서 인간 사냥을 즐기지만 가문의 식솔을 이유 없이 해치지는 않는다. 그런 면에서 아키라는 노블캐피탈 중에서도 이질적인 존재라고 볼 수 있다.

노블캐피탈에 어울리지 않는 괴짜가 계속 가주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유능했기 때문이었다.

정우 유진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의 사후, 유진 가문은 유례없을 정도로 번창하고 있었다.

라일라 또한 사람을 부리는 입장이기에 공포로 사람을 지배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단기간이면 모르겠지만 상대는 1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유진 가문을 통치해 온 괴물. 아직 풋내기에 불과한 그녀가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강적.’

그녀의 아버지도 쩔쩔매는 상대인 만큼 그녀가 직접 대응했다간 아키라에게 무참히 깨질 가능성이 높았다.

‘…아니야. 실패는 성장의 밑거름. 그에게 패배해도 경험으로 삼으면 돼.’

티앤씨 가문의 후예답게 그녀는 경쟁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설령 지더라도 아직 살날이 많이 남았으니까 언제든지 복구할 수 있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과연 그녀는 알까?

그녀의 영지에 이미 끔찍한 위험이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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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즈즈즈(맛있어?)]

「응.」

사이보그의 집에 비해 옆집은 그래도 사람이 산다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가구도 깔끔했고 청소를 자주 하는지 집안 전체가 깨끗했다. 냉장고에도 인조고기로 만든 샌드위치나 건조채소 같은 음식들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나는 냉장고를 열심히 비우고 있는 26호를 흐뭇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도 배가 고프긴 하지만.’

꼬리에 의해 허리가 잘린 옆집 주인을 보면 당장 저 신선한 살점을 뜯고 싶다. 그러나 아직 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

나는 26호가 꺼내놓은 샌드위치를 금방 해치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잠깐 옆집 갔다 올게)]

「응. 조심히 다녀와.」

사이보그의 집에 들어온 나는 그의 통신기부터 찾았다. 침대 옆에 떨어져 있는 통신기를 켠 나는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어디 보자. 직장 번호가….’

저장된 연락처를 내리다 보니 인상적인 이름이 하나 보였다.

‘미친개. 이거 맞겠지?’

모든 직장인은 자기 상사를 증오하기 마련이다. 나는 ‘미친개’라는 이름을 꾹 눌렀다.

신호가 가자마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라스 이 또라이 새끼야! 바쁜 와중에 왜 안 오고 자빠졌어!”

“저 관둡니다.”

“뭐? 너 미쳤어?”

“수고하세요.”

“미친 개씨발새끼가 진짜…!”

의태 기관의 흉내 내기 기능으로 전화를 마친 나는 통화종료를 눌렀다.

이곳에는 매일, 매시간 수많은 외계 종족 노동자들이 들어온다. 한 명이 이유 없이 퇴사한다고 해도 그를 대체할 사람은 많다.

직장에서 동료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고 있으면 모르겠으나 내 목소리의 주인, 라스는 그런 케이스는 아닌 듯하다. 팀장의 반응도 그렇고 연락처와 통화 목록을 봐도 그는 외톨이에 가까웠다.

‘아마 오늘이 지나면 잊히겠지.’

이전에 잡아먹은 항만 노동자처럼 라스 또한 잊혀지리라.

‘그래도 일은 확실히 마무리하는 게 좋겠지.’

나는 거실에 있던 노트북을 펼쳤다. 그가 쓰는 업무용 노트북으로 직장에 사표 메일까지 보내놓으면 크게 문제 되지 않을 거다.

‘전화로도 처리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나중에 사람을 많이 먹은 뒤라면 모르겠지만 아직은 조심해야 할 때다.

부유한 우주 도시라 안드로이드들도 다수 존재하고, 적은 수지만 방위함대도 주둔하고 있다.

전에 있던 연구선에 비하면 훨씬 넓으니 숨을 곳도 많지만, 감시망 또한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밀하다.

‘아직은 몸을 사려야 해.’

내가 누군가를 잡아먹었다는 사실은 가능한 안 걸리는 게 좋다. 언제까지 숨길 수는 없겠지만 내가 충분히 강해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늦춰야 한다.

‘그럼 어떤 사람인지 한번 볼까.’

메일을 보내려면 대충 뭐 하는 사람인지는 알아야 하기에 노트북의 파일들을 하나씩 열람했다.

노트북의 주인 라스는 그다지 성실한 인생을 사는 사이보그는 아니었던 것 같다. 업무용 노트북인데도 일과 관련 없는 것들만 넘쳐난다.

‘우주 시대에 직박구리라니.’

사이보그의 성적 취향 따위에는 관심 없었기에 나는 해당 파일을 삭제했다. 그 뒤로도 계속 파일들을 열었다 닫으며 확인하는데 묘한 제목의 파일이 눈에 띄었다.

‘밀수동물감시팀 압류 목록?’

파일을 클릭하자 빽빽한 글자들이 작은 모니터 안이 가득 채웠다. 파일 이름 그대로 밀수를 목표로 들여온 생물들의 압류 건들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밀수동물이라.’

간단히 살펴봐도 종류가 굉장히 많았다. 대부분 다른 행성으로 이송 처리가 됐지만 아직 이곳 항만 지구에 남아 있는 생물 수도 적지 않았다.

‘이것들을 먹으면 꽤 많은 정수를 얻겠는데.’

이 아파트도 나름 맛집이라 할 수 있지만 항만 지구의 밀수동물만큼은 아니다. 저 동물들 중 반만 잡아먹어도 내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다만 감시가 만만치 않겠지.’

관리하던 동물이 중간에 사라지면 바보가 아닌 이상 금방 알 거다. 그들이 경찰에 신고해서 조사라도 시작되면 골치 아파진다.

그렇다면 방법은 두 가지.

‘직원을 매수, 아니면 밀수동물 브로커를 찾는 것.’

직원 매수는 크게 어렵지 않다. 아직 의태 기관으로 라스를 흉내 낼 수 있으니 이걸로 다른 직원을 부르면 된다.

그 직원을 잡아먹고 내가 대신 이송 서류를 작성하면 한두 마리는 쉽게 빼먹을 수 있을 거다.

‘그 이상으로 잡아먹고 싶으면 브로커가 필요해.’

목록을 보면 생물의 목적지가 공란으로 처리되는 등 모호하게 정리한 부분이 중간마다 있었다. 아마 이 부분은 브로커가 중간에 가로챈 것이리라.

내가 브로커와 직접 접선해서 생물을 빼돌리거나 아니면 브로커를 잡아먹고 브로커 흉내를 내 생물을 탈취하는 게 좋겠지.

‘라스의 신원을 잘 활용해야겠어.’

죽어서 참 많은 것을 남기고 가는 친구다. 맛만 좋았으면 훨씬 마음에 들었을 텐데 안타깝다.

나는 메일을 보낸 뒤, 노트북을 챙겨서 옆집에 돌아왔다.

「애기야 어서 와.」

[즈즈 즈즈즈 즈즈(나 저거 안 먹어)]

「먹는 거 가리면 안 돼.」

[즈 즈즈즈 즈즈즈(난 다른 거 먹을 거야)]

「다른 거?」

[즈 즈즈즈즈(응. 너가 먹어)]

26호는 내 말이 이해가 안 되는지 불빛을 깜빡거렸다. 내가 괜찮다는 뜻을 담아 고개를 끄덕이자 녀석은 조심스럽게 옆집 남자를 먹기 시작했다.

남자의 얼굴이 26호에 의해 녹아내리는 것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저것보다 더 맛있는 것이 나를 기다린다고.

유전자 정수를 포식할 때의 기쁨을 상상하며 입맛을 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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