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35화 (36/400)

Ep. 35

‘나가기 전에 이것부터 처리하자.’

26호가 뇌를 빼먹고 있는 동안 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옆집 남자의 발목을 잘라서 냉장고에 넣었다.

‘라스의 역할이 끝나면 이 사람으로 의태해야 하니까.’

의태 기관은 살점을 먹어 유전자를 분석해 모방하는 특성이다. 포식 효과를 발동시킬 때처럼 굳이 모든 고기를 다 먹을 필요는 없다.

‘다 보관할 필요는 없으니 일부분만 보관해 두면 돼.’

냉장고에 넣으면 부패 속도를 조금은 늦출 수 있을 거다. 그렇다 해도 이틀을 넘기는 것은 무리겠지만.

시체를 처리한 나는 통신기를 꺼내 들었다.

‘다음은….’

누구를 불러낼까.

연락처를 보니 라스의 인간관계는 극히 협소했다. 브로커를 알법한 사람은 팀장 말고는 딱히 보이지 않았다.

‘팀장은 부담되는데.’

연구선에서도 그랬듯 우주 도시에서 관공서의 팀장이면 중간 이상의 캐피탈에 속한다.

아무리 낮게 잡아도 미들캐피탈, 거기서 더 높은 계층이라면 서드캐피탈 정도 될까? 얼마든지 대체가 가능한 라스 같은 사람과는 급이 다른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없어지면 바로 알겠지.’

지금은 내가 키사라기 유진을 죽였을 때랑은 상황이 다르다.

그녀는 연구선에 있는 사람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계층인 노블캐피탈.

메가콥은 경쟁지상주의 사회지만 동시에 계층 이동이 고착화된 경직된 피라미드형 사회라는 모순적인 조직이다.

상위 캐피탈일수록 아랫사람들이 위로 못 올라오도록 잔혹하게 구는 경향이 있다.

노블캐피탈은 메가콥 피라미드 최정상에 위치하니까 더 심할 것이고.

그렇다 보니 모두가 노블캐피탈의 보복을 두려워했고, 그녀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소극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소심한 대응이 결국 그들에게 큰 불행을 불러왔지만.

‘아이러니한 일이지.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죽음은 숨겨지고 낮은 사람의 죽음은 알려지는 게.’

게다가 밀수동물관리팀은 적지 않게 바빠 보였다. 그 와중에 책임자가 사라지면 난리가 날 터. 다른 사람을 골라야 한다.

‘이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얘도 아니고…응?’

통신기의 메시지들을 확인하던 중 유독 자주 보이는 연락처가 있었다. 오늘 일 끝나고 업소 갈 거냐는 메시지뿐이었지만 라스와 가장 많이 연락을 교환하는 상대였다.

‘알만하네.’

상대의 이름은 로이드. 라스와 함께 은밀한 취미를 공유하는 친구였다.

특수무역중심지에서 업소라고 하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유명했다.어두운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곳이었으니까.

윤리적으로 워낙 말이 많아서 뉴스에서 몇 번 언급되기도 했다.

아무튼 그런 비도덕적인 오락을 즐기는 사람이라면 브로커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라스랑은 친한 사이 같은데….’

어제까지도 서로 연락한 것을 보면 라스와는 나름 각별한 사이로 보인다.

나는 작은 팔을 이용해 로이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야 뭐 좀 묻자.」

「너 퇴사했다며? 미친개가 완전 날뛰는데 어떻게 된 거야?」

「일만 개좆같이 많아서 질렸어. 다른 곳에서 일하려고.」

「여기 일이 좀 씹창스럽긴 하지. 어디 갈 건데?」

「배운 게 이거밖에 없는데 다른 일 하겠냐. 비슷한 일로 해야지.」

「비슷한 일?」

「어. 밀수라든가.」

섣불리 화두를 꺼낸 것 같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라스가 평소에 어떤 말투와 느낌으로 의사 표현을 하는지 모르니까. 얘기가 길어질 수록 빈틈만 늘어날 뿐이다.

‘최대한 짧게 끝내는 게 차라리 나아.’

메시지를 보내는 대로 바로 답장을 하던 저쪽에서 이번에는 생각이 필요한지 답이 없었다. 몇 분 정도가 지나고 다시 통신기가 울렸다.

「너 전에 위험한 일은 안 한다고 하지 않았냐?」

로이드는 이전에도 라스와 한번 밀수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나 보다. 당시 라스는 거절했던 것 같고.

「그게 다시 생각해 보니까 마땅히 돈 벌게 없어서.」

「노답 새끼. 다른 사람도 다 해 처먹는 걸 이제 와서 한다고 되겠냐?」

「이제라도 해 봐야지.」

「알았어. 정보는 메일로 쏴줄게.」

「그러지 말고 오늘 만나서 얘기하면 안 되겠냐?」

「만나자고?」

「항만 지구에 내가 아는 술집이 있어.」

「너 그런 타입 아니잖아? 니가 술을 쏜다고?」

「기껏 퇴직했는데 동료한테 한 잔 살 수 있잖아.」

「씹새끼 퇴직하고 철들었네. 좋아. 몇 시에 볼래?」

지금 건 솔직히 덜컥했지만 로이드가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아서 잘 넘어갔다.

‘일이 잘 풀리는 걸.’

나는 그에게 장소와 시간을 담은 메시지를 전송했다.

장소는 항만 지구 경계에 있는 골목. 지하의 비밀통로와 연결된 맨홀하고 최대한 가까운 곳이다.

시간은 저녁으로 정했다. 이 도시에는 낮이나 밤이나 사람이 많이 다니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환한 빛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천지 차이다. 어둠 속에서 몸을 최대한 숨기며 다니려면 당연히 밤에 만나야 한다.

‘상대가 퇴근했을 때 먹어야 후환이 없겠지.’

메시지를 보내니 금방 답장이 왔다. 퇴직했으니 앞으로 업소 혼자 가면 심심하겠다는 그런 잡다한 내용이었다.

‘심심할 필요는 없지.’

어차피 저쪽도 라스와 같은 길을 걷게 될 테니.

‘확답은 받았고.’

저녁이 될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이 아파트에서 유전자 정수를 취하는 것은 일단 보류이니 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배불러.」

26호를 쳐다보니 녀석은 배가 터지도록 먹었는지 뚱뚱해졌다. 녀석은 뒤뚱거리며 푹신한 침대 위로 올라간 뒤 그대로 잠들었다.

‘아직 어릴 테니 많이 자야겠지.’

녀석에게 이불을 덮어 준 나는 다시 노트북을 열었다. 라스의 동료, 로이드를 만나기 전에 목록이나 살펴봐야겠다.

목록을 꼼꼼히 살피면서 나는 동일한 종류의 생물이 다수 압류된 건들을 체크했다.

‘포식 효과는 확률로 발동하니까 동종의 생물이 많을수록 좋아.’

체크하면서 보니까 정말 별별 생물이 다 있었다. 모두 게임에서 최소 한 번 이상 본 생물들인데, 몇몇 생물은 이걸 정말 밀수하려고 한 건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마운틴크롤러 새끼도 있네. 이걸 어떻게 잡았지? 그리고…오?’

밀수꾼들의 솜씨에 감탄하면서 목록을 보고 있는데 이색적인 이름이 보였다.

‘아웃스페이서를 잡았다고?’

급히 이름 옆의 항목을 확인해 보니 이송 항목이 공란이었다. 그 말은 아직 아웃스페이서가 이곳에 있다는 뜻.

‘숫자는 20마리.’

여왕이 있으면 좋겠지만 따로 쓰여 있지 않은 것을 보니 병졸만 있는 것 같지만 그것만 해도 내게는 큰 수확이다.

‘아웃스페이서 유전자는 유용하니까.’

아웃스페이서는 이름처럼 설정상 우주 밖에서 건너온 외계종족이다. 유전자를 모아 강화시키고 같은 종족이 아닌 다른 종족을 적대하는 등 에이모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차이점이라면 에이모프와 다르게 플레이어가 개체가 아닌 군체 단위로 운용한다는 점, 같은 아웃스페이서끼리는 협동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에이모프는 X일X언, 아웃스페이서는 고전 게임의 X그를 모티브했다.

내가 외계생물에 환장하다 보니 아웃스페이서도 상당히 오랫동안 플레이해봤었다.

‘사실상 에이모프의 상위호환이지.’

플레이어가 아웃스페이서를 선택하면 해당 종족의 군체여왕이 되어 군락을 성장 시키는 것이 주 목표가 된다. 다른 생물을 잡아서 유전자를 흡수하면 해당 생물의 유전자가 여왕이 낳은 병졸들에게 반영된다.

병졸들이 강해지면 더 강한 유전자를 모으고 군락이 커지는 식으로 운영하는 전형적인 왕귀형 메커니즘을 가진 종족이 아웃스페이서였다.

같은 왕귀형 종족인데 대우가 처참한 에이모프에 비해 아웃스페이서는 커뮤니티에서도 잠재력이 상당한 고난이도 종족으로 평가받았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형태의 군락으로 성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성능 면에서도 난이도 높은 초반만 견디면 빠르게 강해지는 종족이라 컨셉보다 성능을 중시하는 플레이어들한테도 꽤 사랑을 받았다.

‘그래도 난 에이모프가 더 좋지만.’

에이모프를 플레이한다면 아웃스페이서의 유전자는 기회가 된다면 무조건 얻는 게 좋다. 도움이 되는 특성도 많을뿐 더러 타입 획득과도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일 먼저 얘부터 챙기자.’

20마리라면 적은 숫자긴 하지만 샘플이 아니라 생물 그대로 잡아먹는 것이라서 포식 효과를 기대해도 좋으리라.

이외에도 다른 유용한 먹이들도 하나둘씩 체크했다. 안타깝게도 밀수는 밀수다 보니 10마리 이상씩 들여 온 경우는 딱히 많지 않았다.

‘다 털어도 특성이 많이 안 나올지도 모르겠네.’

이 부분은 아무래도 운에 기대야할 듯싶다.

그렇게 먹어야 할 것들을 고르고 있다 보니 어느덧 방 안에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먹이 사냥의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26호를 깨운 뒤, 함께 집을 나섰다.

칙칙한 어둠이 도시 전역에 내려앉았다. 어두운 주거 지구에 가로등이 환하게 빛이 들어왔다.

‘지난번에는 주변에 사람이 있어서 부셨다만….’

늦은 밤에는 주거 지구 주변을 순찰하는 경찰이 있다.

전에는 그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부득이하게 가로등을 부쉈지만, 계속 부수고 다니면 의심하는 사람이 나올 거다. 오늘은 가로등을 파괴하기보다는 되도록 피해서 가야겠다.

나는 옥상과 외벽을 통해 밀집된 아파트 사이를 뛰어넘으며 이동했다.

아파트 간의 간격이 상당하긴 하지만 각력 강화 특성의 효과 덕분에 먼 곳까지 뛰는데 큰 문제는 없었다. 착지할 때는 등의 날개를 펼쳐서 되도록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했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이라 사람이 적어서 다행이야.’

빠르게 이동하다 보니 맨홀 뚜껑까지 금방 가까워졌다. 맨홀이 눈앞에 있지만 나는 바로 달려가지 않고 몸을 숨겼다.

「애기야 왜 그래?」

[즈즈(적)]

「적?」

맨홀 주변에 안드로이드가 순찰을 돌고 있었다.

‘전투형 안드로이드네.’

지난번 해적선에서 봤던 안드로이드와 다르게 녀석은 팔이 3개였다. 인간의 팔을 닮은 두 팔 외에 가우스 소총을 장착한 전투용 오른팔이 허리 부근에 추가된 형태다.

‘이상한데. 가우스 소총을 안드로이드가 쓴다고?’

가우스 소총은 플라즈마 무기급 아래에 있는 고화력 무기로 중장갑의 적을 상대로 높은 효율을 발휘한다. 비유하자면 가격과 파괴력을 낮춘 플라즈마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플라즈마 무기가 매우 비싸다는 단점이 있는 것처럼 가우스 소총도 일반 병사나 안드로이드가 쓰기에는 고가인 장비다. 총 가격도 하급 강화복 이상이고, 무엇보다 탄약이 굉장히 비싸다.

‘텅스텐 탄약을 쓰니까 비쌀 수밖에.’

아무튼 내가 알고 있던 안드로이드 무장 수준은 결코 저 정도로 높지 않았다.

이 도시가 돈이 많다고 해도 고가의 텅스텐 탄약을 물처럼 쓰는 가우스 소총을 일개 안드로이드에게 장비시킬 정도로 부유하지는 않다.

순찰을 도는 안드로이드들에게 가우스 소총을 무장시켜야 할 정도로 특별한 상황이 아니라면 말이다.

‘혹시 이벤트나 축제가 있나?’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는 게임에서도 각종 이벤트가 열리는 곳이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몰리는 도시인 만큼 내가 모르는 축제가 열리는 것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축제가 열린다면 어중이떠중이들도 많이 들어올 테니 당연히 경계 및 보안 수준도 올라간다. 안드로이드가 평소보다 높은 수준으로 무장한 원인에는 축제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나쁘다고 해야 하나.’

들어올 때는 무사히 들어왔지만 하필 축제가 열릴 예정일 줄이야.

내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중무장한 안드로이드는 맨홀 주변을 서성이다가 어디론가 가 버렸다. 잠시 기다려서 주변에 아무도 오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나는 맨홀에 다가갔다.

인간의 힘으로는 들 수 없는 무거운 쇳덩어리를 가볍게 든 나는 26호부터 먼저 들여보냈다. 마지막으로 주변을 한 번 더 살펴보고 나도 맨홀 속으로 들어갔다.

맨홀 뚜껑을 닿자 블랙홀처럼 빛 한 점 없는 새까만 암흑이 우리를 반겼다.

「애기야 우리 어디 가는 거야?」

[즈즈 즈즈즈(왔던 길로 갈 거야)]

녀석이나 나나 빛이 없다고 앞이 안 보이거나 하지 않는다. 녀석은 몸 전체로 공기 흐름이나 파장 등을 감지하고, 나는 보조기관이 있다.

나에게는 보인다. 높이 5m가량 되는 작은 터널이 저 땅 끝까지 쭉 이어져 있는 것이 말이다.

터널 내부에는 과거 인부들이 버린 쓰레기들, 도시 위의 누군가가 맨홀 뚜껑 틈에다 버린 담배꽁초 등이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터널을 두르고 있는 벽면에서는 지하철이 이동하면서 만들어내는 진동에 의해 먼지가 주기적으로 쏟아졌다.

나는 26호와 함께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가는 길에 미리 포자를 깔아두자.’

원래는 둥지를 마련한 뒤에 포자를 깔려고 했지만 도시에 축제가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감시망을 미리 깔아놔야 예상외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수월하게 대처할 수 있다.

전투형 팔 중 오른쪽 아래에 있는 팔의 오염 기관을 활성화하자 끈적거리는 검갈색 점액이 포자와 뒤섞여 흘러나왔다. 내 몸에서 떠난 포자덩어리가 걱정하지 말라는 듯 터널 내부를 천천히 잠식해 갔다.

오염 기관도 강화 효과를 받는 특성인 만큼 이틀 정도 지나면 내가 직접 둥지를 만든 것만큼 포자가 성장할 거다.

‘감시망은 이걸로 됐고.’

주거 지구와 항만 지구를 잇는 길에 포자가 대부분 깔릴 때쯤 나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는 맨홀 뚜껑을 조심스럽게 열어서 밖을 확인했다.

‘역시 아무도 없어.’

이 주변은 지구간의 경계 부분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다. 다른 지구로 갈거면 지하철을 타지, 걸어 다니지 않으니까.

[즈즈즈 즈즈(여기서 기다려)]

「왜? 나도 같이 갈래.」

[즈즈 즈즈즈즈 즈즈(적이 너를 무서워 해)]

라스가 자신을 무서워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는지 녀석이 침울하게 쭈그러들었다. 미안한 얘기지만 사람들은 26호를 무서워하니 어쩔 수 없었다.

26호를 맨홀 아래에 숨기고 약속 장소에 갔다. 저쪽은 아직 오지 않은 상황. 나는 의태 기관을 활성화한 채,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몸을 웅크렸다.

‘온다.’

기다린 지 10분쯤 지났을까. 저 멀리서 누군가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