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58
‘어째 심상치 않더니….’
내가 아는 그 어떤 특성도 이렇게 길고 복잡한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다.
‘이럴 때일수록 차근차근 확인해야 해.’
나는 계약서를 확인하는 심정으로 텍스트박스에서 변화한 사항들을 꼼꼼히 확인했다.
‘초월 시스템과 진화가 관련이 있다는 것은 내 예상대로야.’
아성체 옆 괄호 속에 초월 1단계라고 적혀 있었다. 자세한 것은 준성체로 진화한 뒤에 알 수 있겠지만 이후의 진화 조건과 초월이 관계되어 있을 것으로 추측되었다.
‘문제는….’
중요한 특성 2개가 봉인되었다는 점이다.
변화한 직후, 전신에서 느껴지는 무거움 때문에 앞으로 날개를 사용하기 어렵지 않을까 했는데 역시 그랬다. 내가 최초로 얻은 특성이면서 중요한 싸움에서 맹활약한 특성이 봉인되다니 많이 아쉬웠다.
‘게다가 의태 기관을 못 쓴다는 것도 뼈아프네.’
나는 의태 기관을 활성화했지만 몸에 있는 미세한 구멍들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구멍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두터워진 외피에 의해 구멍들 대부분이 막혀 있었다. 몇몇 구멍들은 남아 있었는데 모양이 전과 약간 달라졌다.
‘그러고 보니 완전한 유기체가 적용되고 있을 때 위압감을 준다는 표현이 있던데.’
완전한 유기체의 효과 중 위압감을 준다는 부분. 위압감을 주는 페로몬이 의태 기관이 만드는 페로몬을 덮어씌우는 형태로 작용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특성과 장비, 스킬들이 존재하지만 그중 다른 능력을 금제할 수 있는 것도 있다. 리얼리티를 강조하는 게임답게 무작정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논리로 금제가 작용한다.
예를 들어 AP탄에는 사이킥 파워의 흐름을 차단하는 물질이 담겨 있어서 일정 지역, 일정 시간 동안 상대의 사이킥 파워의 사용을 막는다는 식이다.
내가 완전한 유기체 특성을 얻으면서 기존에 보유한 특성들 중 일부가 봉인된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봐야 한다. 날개가 사용불가가 된 이유는 무게가 크게 늘어나서 그런 것이고, 의태 기관이 사용불가가 된 근거는 새로운 페로몬을 생성하기 위해 기관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목소리 흉내는 괜찮지 않을까?’
혹시 몰라서 입으로 목소리를 내봤다.
“아·아·되·「그륵」긴·하·는·데·「그르르」”
목소리가 나오기는 하는데 전처럼 완벽하지 않았다. 망가진 녹음기에서 나오는 목소리처럼 이상하게 들렸고, 중간에 에이모프 특유의 그르렁거리는 울음소리도 섞여 있었다.
이런 식의 편법은 용서할 수 없다는 듯 완전한 유기체는 몸 내부까지 완벽히 적용된 상태였다.
‘이런 목소리로 남을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겠네.’
적에게 공포심을 줄 목적이라면 모를까 기만하기 위한 용도로는 사용할 수 없을 것 같다.
‘보통 이런 제한이 생기면 제한을 푸는 방법도 따로 제시되는데.’
그러고 보니 새 메시지 알림이 와 있었다. 나는 메시지 열람을 수락했다.
「‘초월’ 시스템 2개에 관한 정보가 해금되었습니다.
‘유일 특성 합성’ 해금. ‘유일’ 특성을 아무 때나 융합할 수 있습니다.
‘초월(2단계) 돌파’에 대한 정보 해금. 정보를 열람하시겠습니까?」
‘초월 돌파라.’
나는 초월(2단계) 돌파를 확인했다.
「‘초월(2단계)’: 5개의 융합 특성을 합쳐서 신규 타입 관련 특성을 해금합니다. 재료로 사용되는 특성은 전부 다른 타입과 관련된 특성이어야 합니다. 신규 타입에 관한 정보가 해금됩니다.
사용 가능한 특성 목록: 재생력(융합), 포식자 감각(융합), 기생 군체(융합), ?(융합), ?(융합)
추가 보상: 초월 1단계에서 발생한 금제가 해제됩니다.
*추신: 돌파를 위해 사용할 재료 특성은 다른 특성으로 교체할 수 있습니다. 참고하시길.」
‘흠.’
해금 방법이 제시되고 있긴 한데 쉽지 않았다. 융합 특성을 만드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각각 다른 타입과 관련된 융합 특성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현재 내가 타입 획득 조건을 해금한 개수는 3개.’
거기서 추가로 아직 획득하지 않은 타입과 관련한 융합 특성 2개를 얻어야 한다. 이쯤 되면 거의 진화 조건에 필적할 정도로 난도가 높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타입과 관련한 융합 특성이라면 아무거나 재료로 써도 상관없다는 점이다. 만약 1단계처럼 ‘특정한’ 특성만을 요구했다면 2단계까지 가는데 한 세월이 걸리겠지.
‘쉽지 않네.’
내가 자주 써먹던 특성이 봉인된 것은 아깝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니 어쩔 수 없다. 환경이 바뀌면 그에 맞춰 전략을 바꿔야 한다.
‘숨어서 한 명씩 습격하는 것은 이제 힘들어졌어.’
그렇다고 이 도시와 정면으로 맞붙기에는 아직 내 힘이 부족하다. 특성 수도 부족하고, 타입 또한 하나밖에 없다.
‘새로 얻은 이 특성이 얼마나 강할지가 관건이야.’
나는 시험해 보기 위해 벽에 다가갔다.
‘전에는 산성피로 약화시킨 뒤 구멍을 뚫었지.’
도시의 지반을 담당하는 금속이다 보니 튼튼한 것이 당연했다. 완전한 유기체 효과로 진화에 가깝게 강화된 육체는 과연 얼마나 강해졌을까.
나는 전투용 팔에 살짝 힘을 줘서 벽을 향해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는 오싹한 소리에 이어서 굉음이 통로 전체를 진동시켰다.
‘과연.’
먼지가 쌓여 지저분했을 뿐, 특별한 흠집은 없었던 벽에 네 갈래의 상흔이 남았다.
깊이는 모두 동일하게 20cm 이상. 더 커진 내 손톱과 정확히 일치했다.
단단한 금속 벽에 균열을 냈음에도 내 손톱은 멀쩡했다.
‘다음은 내구도.’
나는 그 손톱으로 강화된 외피를 찔렀다. 살살 찌르니 손톱이 아예 들어가지도 않았다. 힘을 강하게 줘서 긁어야지 비로소 생채기가 날 정도였다.
‘힘, 속도, 외피의 강도, 손톱의 예리도. 전부 월등히 강해졌어.’
그리고 이 정도 방어력이면 플라즈마 무기의 화력도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 즉, 플라즈마 무기가 없는 무장경찰과 안드로이드는 나를 죽일 수 없다.
‘방위함대가 내 머리 위로 포격을 날리지 않는 이상 내가 죽을 가능성은 낮아.’
그 점은 분명 희소식이지만 문제는 사이킥 파워 능력을 지닌 컬트다.
내 육체는 물리적인 방어력은 매우 높지만 사이킥 파워에 대한 내성은 많이 떨어진다. 초능력 내성 특성을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타입 강화 효과를 받지 않기 때문에 완전한 유기체의 적용 대상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사냥의 표상을 쓰면 모든 공격에 대한 저항이 생기지. 이걸 쓰면 사이킥 파워도 어느 정도 막을 수…잠깐?’
나는 다시 사냥의 표상 항목을 읽어 봤다.
‘사냥의 표상. 하루 1회에 10분 제한이지만 포식 확률 증가.’
제한 조건이 제법 빡빡하지만 그 대신 얻는 효과가 보통 좋은 것이 아니다.
‘사냥의 표상을 쓰고 컬트를 죽이면 초능력 관련 특성도 쉽게 얻을 수 있어.’
초능력 강화 타입까지 남은 특성 개수는 1개다. 타입을 얻으면 완전한 유기체의 적용 대상이 되므로 초능력에 대한 방어력도 크게 상승한다.
또한 다수의 특성을 빠르게 확보할 수만 있다면 초월 때문에 생긴 금제를 푸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다.
초월 2단계를 돌파하는데 중요한 요소는 특성의 질보다는 양. 다수의 특성을 빠르게 확보, 융합한 뒤 돌파의 재료로 쓰면 되니까.
‘뭐든간에 공략의 핵심은 상업 지구야.’
마침 이사회가 열리기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다.
이사회가 열리면 다양한 외계 종족들이 관광을 위해 찾아온다. 관광을 위해 온 것인 만큼 소비와 오락의 중심지에 몰릴 수밖에 없다.
‘새 방문자들이 붐비는 시점을 노려야 해.’
새로운 유전자 정수들이 한 곳에 몰리는 상황이다. 적절한 타이밍에 그들을 노린다면 어렵지 않게 유전자 정수들을 확보할 수 있다.
또한 관람객들이 많으면 온갖 어중이떠중이 범죄자들도 따라 들어온다. 그에 맞춰 감시망도 삼엄해지겠지만 역으로 생각해 보자. 적들도 감시해야 할 대상이 많으니 나 하나에게 모든 인력을 집중할 수 없다.
내가 사람을 죽이고 다니면 나를 쫓기야 하겠지만 모든 전력을 내게 기울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언젠가는 나의 존재에 대해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하겠지만 그때는 내가 초월 돌파를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특성을 모은 뒤가 될 거다.
‘이사회 전까지 미뤄놨던 둥지 작업도 끝내놔야겠네.’
유흥 지구와 상업 지구 쪽에 있는 장소들. 그곳에 새 둥지를 짓자.
앞으로 어떻게 할 지에 관해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잠에서 깨어난 26호가 파장을 쐈다.
「방금 무슨 소리야?」
[즈즈 즈즈즈(별거 아니야)]
「어라?」
내가 괜찮다고 하니 녀석은 다시 잠들려고 하다가 내 모습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녀석은 자기 전에 봤던 내 모습과 지금의 내 모습이 다른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녀석의 몸에서 빛이 깜빡였다.
「내가 다시 작아졌어.」
현재 내 크기는 두 다리로 선 크기가 3m 이상이다. 2m에 훨씬 못 미치던 전에 비하면 1.5배에서 2배 정도로 자랐다고 볼 수 있다. 키에 비해 꼬리는 살짝 덜 자랐지만 그래도 4m를 훌쩍 넘는다.
잠든 사이에 내가 이렇게 커졌으니 녀석이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리라.
[즈즈 즈즈즈 즈즈즈(아니야. 내가 커진 거야)]
「벌써?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성장해서 똑똑해진 26호가 되물었다. 나는 녀석에게 간단히 답했다.
[즈즈즈즈즈 즈즈(아직 아기라서 그래)]
「큰애기는 빨리 자라네. 신기해.」
26호는 납득했는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우리가 대화하는 동안 아드하이도 잠에서 깨어났다.
녀석은 날 보더니 깜짝 놀랐다는 듯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놀람」「놀람!」
[즈즈즈(왜 그래?)]
「어른」「멋짐!」
[즈즈즈(고마워)]
내가 변화한 모습이 아드하이는 매우 마음에 드는가 보다. 녀석은 놀고 싶은 강아지처럼 나를 한번 보고 제자리를 돈 뒤 다시 쳐다보는 행동을 반복했다. 동시에 녀석의 등에 달린 날개가 하늘하늘 흔들리며 묘한 움직임을 보였다.
「어른」「알」「불필요?」
‘응?’
「나」「어른」「알」「필요」「알」「알」「알」
아무래도 아드하이는 내가 몹시도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내가 말없이 가만히 있자 옆에 있던 26호가 촉수를 뽑아 아드하이의 머리를 찰싹 때렸다.
「고통!」
「큰애기는 알 못 낳아.」
「나」「성장」「알」「가능」
「작은애기도 못 낳아.」
「아픔!」
26호는 그 말과 함께 아드하이를 한 대 더 때렸다. 두 대 맞고서야 겨우 정신을 차렸는지 녀석은 자리를 뱅뱅 돌던 것을 멈추고 얌전해졌다.
‘…갤러곤의 짝짓기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
방금 아드하이가 보여 준 움직임은 구애와 관련한 몸짓 같다. 갤러곤의 팬들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기절하지 않았을까.
솔직히 나도 갤러곤의 번식에 대해서는 제법 흥미가 있다. 진화하려면 갤러곤을 많이 죽여야 한다. 그들이 어떻게 번식하고 성장하는지에 대해 안다면 진화하는데 큰 도움이 될 테니까.
‘뭐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고.’
갤러곤을 잡는 일은 한참 뒤의 이야기다. 지금 당장은 둥지를 만드는 게 우선이다.
[즈즈즈즈(나갔다 올게)]
「둥지 만드는 거야?」
[즈(응)]
「나도 같이 가.」
[즈즈즈즈(심심할 텐데?)]
「괜찮아.」
26호 말고 아드하이도 같이 가고 싶은 눈치다.
‘딱히 두고 갈 필요는 없겠지?’
나는 녀석들을 데리고 둥지를 만드는 작업하러 갔다.
유흥 지구 2곳에 새로운 둥지를 막 완성했을 때, 내게 익숙한 파장이 감지되었다.
윌리엄에게 심어 놨던 기생충이 저 멀리서 파장을 보냈다.
‘뭐지?’
기생충을 바꿀 때까지 아직 몇 시간 남은 상태다. 그가 벌써 죽었을 리 없다.
내 예상대로 기생충이 전달한 파장은 윌리엄의 죽음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자살 시도?’
정확히 말하면 ‘아직은’ 죽지 않은 상태였다. 기생충의 파장에 따르면 현재 그는 혼수상태에 빠진 채로 상업 지구의 어느 곳을 향해 빠른 속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병원? 설마?’
그제야 나는 윌리엄이 뭘 노리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병원의 정밀검사를 통해 기생충의 존재를 밝히려 하고 있다.
샌더의 몸에서 기생충이 나왔다는 사실은 형사팀에 있는 경찰들 중 상당수가 알고 있다. 나는 윌리엄에게 기생충과 샌더의 죽음을 경찰들이 연관 짓지 못하도록 방해하라고 지시했다.
덕분에 경찰들은 기생충에 대해 관심을 끊고 보관만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윌리엄의 몸에서 똑같은 기생충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될까?
‘결코 가만히 있지 않겠지.’
기생충에는 내게 보내기 위한 파장을 생성하는 기관이 있다. 저들이 그 기관에 대해 안다면 행정 지구의 컬트를 동원해서 나를 추적하려 할지도 모른다.
‘컬트의 사이킥 파워 중에 추적 기술도 있으니까.’
윌리엄이 여기까지 알고선 자살 시도를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내게 어떻게든 저항하기 위해 저지른 것은 분명했다.
‘병원에 가 봐야겠네.’
상업 지구를 공략하기 위해 세운 새 계획, 좀 더 앞당겨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