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60화 (61/400)

Ep. 60

머리 위에서 발소리가 잦아들었다.

‘움직일 때가 됐어.’

나는 들고 있던 강화복에 있는 단말기를 눌렀다. 강화복 기능을 활성화시키는 동력 에너지가 거의 소실된 상태지만 어차피 내가 입을 것이 아니니까 상관없다.

은폐 기능만 활성화 되면 나머지는 내 외피가 알아서 할 테니까.

‘작동되네.’

오른쪽 팔목에 위치한 단말기를 조작하자 강화복이 은은하게 빛나더니 금방 눈앞에서 사라졌다. 잘 작동하니 이제 내 차례다.

나는 금속 흡수 특성을 활성화하고 강화복을 깨물었다. 질긴 합성섬유가 내 이빨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고, 그사이에 섞여 있는 금속 조각들이 내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이어서 특성 효과가 발동하며 내 몸이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어른?」

이윽고 내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아드하이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날 찾았다.

「작은애기야 왜 그래?」

「어른」「사라짐」

「저기 있는데?」

「느껴짐」「안 보임」

26호는 시각으로 주변을 감지하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내 몸의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반면 눈과 촉수로 주변을 인식하는 아드하이는 촉수로 내가 감지는 되는데 보이지는 않는 것이 이상한 듯했다.

[즈즈즈즈(나 여기 있어)]

「어른」「안 보임」

[즈즈즈(숨었어)]

「어른」「숨는 것」「완벽」

감탄의 의미를 담아 아드하이가 고개를 까딱인다.

‘효과는 검증된 것 같네.’

안심하고 둥지를 나서려는데 내 모습이 보이는 26호가 나를 따라왔다.

[즈즈즈 즈즈(이번에는 안 돼)]

「왜?」

[즈즈즈 즈즈즈 즈즈(혼자 가야 해)]

「도와주면 안 돼?」

[즈즈즈 즈즈 즈즈즈(이건 혼자 해야 할 일이야)]

「응….」

내가 단호히 거절하자 녀석이 침울해하며 쪼그라들었다. 뒤따라온 아드하이도 눈치를 보고 같이 몸을 움츠렸다.

나는 은폐가 가능하지만 녀석들은 아니다. 허리까지 오는 크기의 거대 해파리와 날아다니는 촉수 도마뱀을 보면 사람들이 결코 좋게 생각하지 않을 거다.

녀석들을 두고 그냥 가려는데 등 뒤로 시선이 느껴졌다.

‘…차라리 이렇게 할까?’

혹시라도 일이 잘못돼서 병원 내에서 큰 전투가 벌어질 수도 있다. 현재 이사회가 얼마 안 남았으니 새로운 적들이 병원에 방문할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실제로도 제이드 팀과 만나는 것은 예상외였으니까.’

만약을 대비해 녀석들을 가까운 곳에서 대기시키는 것도 딱히 나쁜 전략은 아니다.

결정을 내린 나는 녀석들을 불렀다.

[즈즈즈(따라와)]

나는 녀석들을 데리고 지하철 선로와 연결되는 구멍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는 녀석들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나는 너희와 함께 갈 수 없어)]

「응.」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대신 내가 말한 곳에서 기다려 줘)]

「전에 했던 것처럼?」

[즈(응)]

「알았어.」

나는 전에 여기자를 잡아먹으면서 챙겨뒀던 가방에서 통신기를 꺼내 26호에게 보여줬다.

여기자의 통신기를 녀석들에게 주고 나는 저격수가 지니고 있던 통신기를 쓸 생각이다.

저격수의 통신기에 여기자의 연락처를 입력한 뒤, 26호에게 여기자의 통신기를 건넸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이게 울리면 그게 신호야)]

「응.」

26호는 촉수를 뽑아서 통신기를 꽉 붙잡았다.

통신기를 준 이후 나는 26호에게 내가 어디에 있을지, 어떻게 나를 찾아오면 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지능이 전보다 올라간 덕분인지 녀석은 내 설명을 금방 이해했다.

설명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선로로 통하는 구멍에 도착했다. 나는 애들에게 이곳에서 대기하라고 한 뒤, 구멍으로 다가갔다.

‘몸이 커져서 좀 더 넓혀야겠네.’

힘이 훨씬 강해져서 그런지 구멍 주변의 벽들을 부수는 일은 매우 쉬웠다.

[즈즈즈즈(갔다 올게)]

「조심해.」

걱정해주는 녀석들을 뒤로한 나는 선로로 기어 나왔다.

간간이 지나가는 지하철을 피하면서 병원과 가까운 역 쪽으로 선로를 따라 뛰었다. 지하철 2개가 동시에 지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통로는 멀리서 지하철이 움직이는 소리와 내 발소리로 가득 찼다.

‘무게가 늘어서 그런지 소리가 시끄럽네.’

병원에 들어가면 벽이나 천장에 붙어서 다녀야할 듯싶다. 벽에 자국이 나면 안드로이드들의 의심을 사겠지만 소음 때문에 바로 걸리는 것보다는 낫다.

신체가 강화되어서 그런지 전이었으면 5분은 걸릴 거리인데 역까지 가는데 3분도 걸리지 않았다.

밤에 깊어지고 있지만 아직 승강장에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나는 선로 벽에 바짝 붙어서 기다렸다.

잠시 후 열차가 들어오고 승강장이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으로 꽉 찼다. 인파가 만들어 내는 부산스러움은 길지 않았다.

열차가 떠난 뒤, 승강장에 남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벽을 기어서 승강장 밖으로 나왔다.

역 내에 가게는 대부분은 이미 닫았거나 셔터를 내릴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도 사람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어서 나는 천장에 바짝 붙어서 기어갔다.

“어라? 어깨에 웬 먼지가 묻었지?”

“천장에 저거 뭐지? 금이 간 것 같은데?”

중간에 관광객 몇몇이 내가 지나가면서 만든 흔적을 보고 떠들어댔다. 다행히 고도의 광학위장 효과 덕분에 내 모습을 발견한 사람은 없었다.

역에서 빠져나온 나는 병원을 향해 달렸다.

거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내 발자국 소리를 듣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은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수월하게 병원 앞에 도착한 나는 정문의 로비 대신 후문 쪽으로 향했다. 후문에서 사람이 보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단숨에 들어가 바로 비상계단으로 올라갔다.

‘원래는 창문을 이용할까도 생각했지만.’

덩치가 커져서 창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다. 그렇게 벽을 기어서 2층을 넘어 3층으로 올라가려 하는데 계단 문이 열렸다.

“소음 감지.”

나타난 적은 안드로이드. 놈이 문을 닫는 순간, 내 꼬리가 벼락처럼 놈의 머리에 꽂혔다.

커진 덩치에 맞춰 독침도 이젠 거의 장창에 부착된 칼날 만한 크기가 됐다. 독침이 아니라 맹독검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무기에 당했으니 안드로이드의 머리는 그 자리에서 박살이 났다.

‘카메라에는 안 찍히니까.’

내게 죽기 전에 열 감지 시야로 전환했다면 모르겠지만 놈에게 그럴 기회는 없었다. 혹시 모르니 나는 놈의 몸 안에 있는 기억 저장 장치까지 파괴했다.

안드로이드의 잔해를 계단 구석에다 밀어 둔 나는 문을 열기 전 보조기관으로 밖을 살폈다. 안드로이드 하나가 복도를 지나 다른 병실에 들어갔다.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나는 문을 열고 복도로 나왔다.

‘윌리엄은…이쪽이네.’

보조기관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나는 왼쪽 복도 끝 편에 위치한 중환자실로 움직였다.

막 병실 문을 열려고 하는데 내 보조기관이 이상을 감지했다.

‘뭐지?’

아래층에서 뭔가가 느껴진다.

아주 강력한 에너지 덩어리. 안드로이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고밀도 에너지 집합체 4개가 1층 로비를 통과해 위로 올라오고 있다.

‘안드로이드보다 강한 에너지라면….’

하나밖에 없다.

‘상급 강화복!’

이렇게 먼 거리에서도 감지가 될 정도라면 그야말로 고출력, 고화력에 무게를 둔 강화복이다.

‘최전선에서나 볼 수 있는 강화복이 왜 여기 있지?’

적이 맞은편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다. 이쪽으로 올지도 몰라서 나는 재빨리 옆에 있는 수술실에 몸을 숨겼다.

“문이 열린 것을 감….”

수술실에는 청소하는 안드로이드만 남아 있었다. 나는 녀석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전투용 팔로 머리를 내리쳤다.

안드로이드를 제거한 나는 조용히 숨을 죽였다. 복도 너머에서 두껍고 단단한 아머슈트가 내는 기계음이 들려왔다.

“여긴가 보군.”

“이분이 어떤 분이시기에 부단장님께서 우리에게 호위를 명령하신 건지 모르겠네만.”

“전하께서 내린 엄명일세. 각별히 신경 쓰라고 하셨다더군.”

“우리는 전하의 검. 명령이 내려오면 따를 뿐.”

말투는 사극에서나 나올 것 같은 느낌인데 기계음 때문에 변조되어 참 묘하게 들렸다. 마치 고전 SF게임에 나오는 우주 제국 출신의 특전사들 같은 느낌이었다.

‘우주의 기사라.’

짐작 가는 세력이 두 곳이 떠오른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은 가르멜다.

메가콥 세력 중 강화복과 안드로이드 개발을 담당하는 노블캐피탈이다. 강화복은 유전자 강화와 함께 메가콥 플레이에 매우 중요한 요소다 보니 메가콥 유저들이 많이 선택하는 세력 중 하나다.

‘가르멜다는 아니야. 그쪽에서는 저런 식으로 대화하지 않아.’

내가 알기로 메가콥 안에서 봉건적인 정치 체제를 갖춘 세력은 화성의 귀족 에저튼 밖에 없다. 함선 개발을 담당하는 프라임캐피탈로 다른 가문과 달리 가주는 군주로, 장로나 가신은 영주라 칭하는 독특한 문화를 가진 곳이다.

‘에저튼이 강화복을 지원받아서 온 건가?’

원래 에저튼 가문은 우주에서 벌어지는 함대전에 특화되어 있지 지상전에서는 그다지 강하지 않은 편이다. 메가콥에서 지상전을 담당하는 가문은 유진 가문과 가르멜다 가문이지 저들이 아니다.

‘지난번 경찰의 무장도 그렇고. 적들도 진화하고 있어.’

게임에서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 계속 생기고 있다. 메가콥 내 상위층의 가문들은 서로 사이가 정말 안 좋기 때문에 유저가 아닌 이상 이렇게 협력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런 차이는 이곳이 현실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내가 초월 시스템을 받은 것처럼 새로운 시스템이 업데이트되어서 그런 것일까?

‘당장은 알 수 없는 문제야.’

나는 다시 옆방에서 들려오는 대화에 집중했다.

“안드로이드 말로는 이분께서 깨어나시려면 3시간 정도 걸릴 거라더군.”

“부단장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

“깨어나면 이분의 신체검사 자료와 의사 소견서를 함께 가져와달라 말씀하시더군.”

“정신 문제라 판단하신 겐가. 병적으로 깡마르긴 했지만 갑자기 총으로 자기를 쏠 때는 나도 정말 놀랐네만.”

얘기를 들어 보니 저들은 윌리엄이 깨어나면 데려갈 생각인가 보다.

‘여기서 정리해야 해.’

나는 턱 아래의 보조기관을 벽에 바짝 붙였다. 수술실 옆 중환자실에서 적들의 위치가 어떻게 되는지 파악하기 위해서다.

‘수는 4명. 두 명은 문가 쪽, 다른 하나는 윌리엄 옆. 그리고 한 명은 이쪽에 가까워지고 있어.’

보조기관을 댄 채로 나는 기습을 위해 꼬리를 바짝 세웠다. 적이 가까이 오면 바로 꼬리로 벽과 함께 적을 꿰뚫을 생각이었다.

그때 적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호위는 호위니까 감시 시스템은 활성화하겠네.”

“나도 그렇게 하지.”

“응?”

“어?”

이어서 적들의 두꺼운 갑주로부터 규칙적인 경고음이 흘러나왔다.

‘이런.’

나는 재빨리 벽에서 몸을 뗐다. 거의 동시에 벽이 부서지면서 포탄 같은 주먹이 나타났다.

먼지 너머에서 은색 갑옷의 기사 4명이 나를 향해 권총형 유탄발사기처럼 생긴 총을 겨눴다.

‘플라즈마 볼터!’

저건 위험하다.

나는 급히 벽을 부수고 복도로 뛰쳐나왔다. 내 등 뒤로 녹색 섬광이 번쩍이더니 수술실이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가루가 되었다.

플라즈마 볼터는 플라즈마 피스톨이 개발되기 전에 나온 일종의 과도기적인 무기다.

생긴 것은 권총형 유탄발사기 기반에 콘크리트 네일건의 특징을 적당히 섞은 것처럼 생겼는데, 총구에서 재래식 탄약 대신 응축된 플라즈마 에너지가 발사된다.

플라즈마 무기답게 파괴력은 매우 뛰어나지만, 경량화에 실패했기 때문에 엄청나게 무겁다.

그래도 무겁다는 점 말고는 딱히 단점이 없었기에 상급 강화복을 입는 전투부대가 범용무기로 쓰기 적당했다.

상급 강화복에는 근력 강화 기능이 있어서 볼트의 무게와 반동도 수월히 견뎌낼 수 있기 때문이다.

덕분에 플라즈마 피스톨이 개발되었지만 볼터는 아직까지 현역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정체불명의 괴생명체라.”

“나는 요인 호위를 맡지.”

“부탁하겠네.”

“그럼 가자고.”

은색의 상급 강화복을 입은 적 3명이 이쪽으로 온다. 정확히 내가 숨어 있는 방향으로 오는 것을 보니 적들의 감시 시스템에 내 생체신호가 잡히는 것 같다.

‘이래서야 은폐도 효과가 없겠는데.’

상급 강화복에 플라즈마 볼터라. 쉽지 않은 상대다.

지난번에서 상급 강화복을 입은 저격수와 싸웠지만 그 경우와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고출력, 고장갑 업그레이드면 방어력이 엄청 높지.’

아마 적의 방어력은 거의 군함의 외벽에 버금갈 정도일 거다. 내 손톱도 타입 효과와 완전한 유기체 효과로 강화되었지만 상급 강화복을 단번에 부수는 것은 무리일 거다.

그나마 관통 효과가 뛰어난 가시뼈 발사 기관이 적에게 바로 유효타를 줄 수 있는 무기다.

‘괴물의 촉수를 쓸까?’

잠깐 혹했지만 바로 고개를 저었다. 초능력 강화 타입을 얻지 않은 상황에서 무리하게 썼다가 반격당하면 돌이킬 수 없다.

‘…그 능력을 써야 하나.’

나는 적들의 움직임을 감지하는 중에 텍스트박스를 띄웠다.

「*‘사냥의 표상’: 적용 중에 포식 효과 확률이 대폭 증가합니다. 보유한 모든 특성의 효과가 강화됩니다. 모든 종류의 공격에 저항력을 갖습니다. 지속시간은 10분입니다.」

하루에 1회 사용 가능한 사냥의 표상. 제한 때문에 아직 써본 적이 없는 기술이다.

원래는 대량의 유전자 정수를 노릴 때 쓸 계획이었다. 상업 지구에 있는 컬트나 여러 관광객들을 몰래 잡아먹을 생각이었지만 윌리엄 때문에 모든 것이 어그러졌다.

‘아니야. 좋게 생각하자.’

어차피 한 번쯤은 시험해 봐야 하는 기술인데 마침 좋은 기회다.

여기 적당히 시연 상대도 준비되어 있겠다, 나는 사냥의 표상을 활성화했다.

활성화한 순간, 내 시야가 어둠에 물들었다.

‘뭐야?’

머리를 덮고 있던 외피가 급격히 성장하더니 내 입과 보조기관만 남기고 전부 가렸다. 시각이 사라지고 대신 보조기관의 감각의 정밀함이 극한까지 상승했다.

그 덕분에 나는 내 몸의 변화를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지금 내 육체가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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