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62화 (63/400)

Ep. 62

-

문득 윌리엄은 잠에서 깨어났다.

누군가가 그를 일부러 깨운 게 아니었다.

몸을 덮고 있는 무언가로부터 진동을 느꼈기 때문이다.

‘여긴?’

눈을 뜨자 미지근한 액체가 그의 눈을 간질였다. 몇 번 눈을 깜빡이자 눈도 서서히 익숙해졌다.

현재 그는 호흡기를 착용한 채로 회복 캡슐 내 치료제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죽지 않았군.’

자살 시도할 당시 윌리엄은 죽음을 각오했다. 노블캐피탈이 프라임캐피탈을 환영하는 자리를 엉망으로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이 도시의 주인 라일라 쳄벌린은 합리적인 인물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자비롭지만은 않았다.

원래라면 윌리엄은 지금처럼 회복 캡슐에서 눈을 뜨는 것이 아니라 산 채로 뇌가 적출되어 있어야 했다.

그런데도 그가 멀쩡히 병원에 있는 것은 덴버가 그를 보호한 덕분이었다.

그 말은 즉 그의 계획이 반쯤 성공했다는 뜻.

‘과연 전하께서는 내 뜻을 알아주…음?’

또다시 그를 둘러싼 치료액이 요동쳤다. 무언가에 의해 치료액, 아니 그가 들어가 있는 힐링 캡슐 전체가 흔들려서 그런 것이었다.

‘뭐지?’

지진일 리는 없다. 무중력의 우주 공간 위에 떠 있는 인공 구조물에 지각 활동이 존재할 리 없으니까.

이것은 병원 안에서 발생한 진동이다. 무게가 무거운 무언가가 병원을 뒤흔들고 있다.

‘설마?’

윌리엄은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이 야밤에 병원을 뒤흔들 정도로 큰 물체가 돌아다닌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그것」이 그를 찾아왔다.

진동이 점점 커진다. 놈이 그에게 가까워지고 있다.

그때 중환자실 문이 열리고 은색 갑주를 입은 자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갑옷 때문에 표정이 보이지 않았지만 정신없이 방 안을 두리번거리는 것을 보면 그가 어떤 심정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기사가 힐링 캡슐 속에서 눈을 뜨고 있는 윌리엄을 보고 가까이 왔다. 그가 단말기를 조작하자 치료액이 캡슐 내부의 구멍으로 빠져나갔다.

“정신이 드나?”

캡슐에서 나온 윌리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알몸인 그에게 환자용 가운을 건넸다.

“이 병원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것인지 모르겠네만 정체불명의 생물이 우릴 습격하고 있네.”

“…….”

그 괴물이 누굴 쫓아온 것인지 윌리엄은 알고 있었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머리 안에 아직 기생충이 남아 있다. 기생충은 「그것」에 대해 불경한 행동이나 생각을 하면 고통을 준다. 불경한 수준이 높을수록 고통의 강도는 배로 늘어난다.

만약 여기서 그가 기사에게 기생충의 존재를 말한다면 지금까지 준 고통은 장난이라 봐도 좋을 수준의 고통을 줄 것이 뻔했다. 이 상황에서 기생충 때문에 기절이라도 했다간 상황이 악화할 뿐이었다.

애석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는 침묵하는 것이다.

“…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내 전우들은 모두 놈에게 살해당했지. 아마도 이 병원에 있는 자들은….”

뒷말은 하지 않았지만 윌리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중앙AI가 위기를 감지하고 경찰을 불렀을 걸세. 나 또한 이미 지원을 요청했지. 그들이 올 때까지 버텨야 하네.”

“…그렇군요.”

윌리엄은 데자뷰를 느꼈다. 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아파트에서의 전투. 그때도 그와 안드로이드는 큰 어려움 없이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그 결과는? 동료를 모두 잃고 꼭두각시가 된 경찰 하나만 남았다.

그때 문 건너편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놈이 문 앞까지 왔다.

은빛 기사는 윌리엄 앞에 서서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한 손에는 플라즈마 볼터를 들고, 다른 손에는 블레이드 클로를 착용한 상태였다.

군인 출신인 윌리엄은 블레이드 클로가 어떤 무기인지 잘 알고 있었다.

블레이드 클로는 소닉 블레이드의 강화판 무기로 두 개의 초진동 톱을 손등에 부착한 형태의 무기다. 소닉 블레이드에 비해 훨씬 무겁지만 대신 내구도, 절삭력이 매우 우세하여 강화복을 입은 병사나 헐크 뮤턴트가 주로 사용한다.

다른 생물이었으면 윌리엄도 걱정하지 않겠지만 문제는 기사가 상대할 적이 「그것」이라는 점이다.

‘놈과 근접전을 하는 것은 자살 행위다.’

괴물과 싸워 본 적이 있는 윌리엄은 기사가 절대 이기지 못할 것이라 확신했다.

‘차라리 밖으로 나가면 놈도 마구잡이로 날뛰지 못할 터. 놈은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니까.’

그는 한동안 괴물의 노예로 살았기에 괴물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영악한 괴물은 도시와 전면전을 벌이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몰래 활동했다. 평소에는 윌리엄이 바친 먹이만 먹고, 가끔 자기를 공격하거나 뒤쫓는 사람만 죽였다.

그 끔찍한 먹이사냥이 사람이 없는 시간대, 새벽에만 이루어진 것은 물론이다.

그렇기에 윌리엄은 기사를 불러 창밖으로 뛰어내리자고 하려 했다.

분명 시민들이 많이 다치겠지만 그가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나았다. 윌리엄이 죽으면 더 많은 피해가 발생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모르는 것이 있었다.

현재 괴물의 상태가 어떤지 말이다.

굉음과 함께 강철로 된 문짝이 바람에 날린 종이마냥 퉁겨져 나갔다. 벽도 반쯤 무너져 내리고 그 자리에서 먼지가 치솟았다.

“왔군!”

먼지 때문에 윌리엄은 눈을 가늘게 떴다. 무너진 잔해 위에는 은빛 기사와 동일한 갑주를 착용한 자가 서 있었다.

‘뭐야?’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는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뭔가에 붙잡힌 듯 상대는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찰리!”

“도, 도망…으갸아아악!”

찰리라 불린 그는 뭔가 말하려고 했지만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의 몸이 기괴하게 비틀리더니 갑주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처절한 비명을 지르던 찰리의 몸이 이윽고 세 갈래로 찢겨졌다. 새빨간 피와 내장, 뼛조각들이 섞여서 후드득 떨어졌다.

‘맙소사….’

시체에서 나온 핏물 중 일부가 허공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타고 바닥에 흘러내렸다. 그제야 윌리엄은 왜 기사가 밖으로 도망가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모르겠지만, 놈은 현재 투명화 상태였다.

그것도 아주 고도의 기술력으로만 구현할 수 있는 수준으로 말이다.

눈썰미가 좋은 윌리엄도 저 핏물 때문에 간신히 놈을 인지했다. 밖으로 나가 봐야 일반인들은 저것의 존재를 알지 못할 것이다.

“이런! 엎드려!”

“!”

기사가 윌리엄의 머리를 잡고 힘을 줬다. 덕분에 윌리엄은 간신히 늦지 않게 머리를 숙일 수 있었다. 간발의 차로 그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뭘 휘둘렀는지 몰라도 놈의 무기는 어마어마한 크기였던 것 같았다. 중환자실의 힐링 캡슐들은 물론이고 벽 전체가 잘려 나갈 정도였으니까.

놈의 공격 때문에 다른 힐링 캡슐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도 죄다 반쪽이 됐다. 피가 섞인 치료액 때문에 바닥이 분홍색 액체로 가득 찼다.

“젠장! 내가 놈을 막을 테니까 지원이 오기 전까지 어떻게든 살아남게나! 전하께 반드시 말씀드려야 해!”

“나, 나는…!”

“부탁하네!”

기사는 윌리엄의 대답을 듣지 않고 보이지 않는 괴물에게 달려들었다.

-

‘제법인데.’

방금 윌리엄을 죽이려고 꼬리를 휘둘렀는데 기사가 방해했다. 강화복에 내장된 감지 장비 덕분인지 기사들은 나의 움직임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어디든 좋으니까 빨리 도망치게!”

“큭! 빌어먹을!”

기사의 말에 윌리엄이 무너진 벽 사이로 뛰쳐나갔다. 도망치도록 내버려둘 생각은 전혀 없다. 나는 그의 다리를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어딜!”

윌리엄의 사지를 찢어놓으려 한 내 의도는 기사가 쏜 플라즈마탄에 의해 좌절되었다.

내가 꼬리를 휘두르는 것에 맞춰 그가 볼터를 쏘는 바람에 꼬리의 궤도가 다른 곳으로 틀어졌기 때문이었다.

꼬리 끝의 독침이 윌리엄의 옆구리 대신 복도의 벽에 박혔다. 윌리엄은 화들짝 놀라며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도망쳐 버렸다.

“흐아아아압!”

꼬리가 실패했으니 가시뼈로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또다시 방해가 들어왔다. 기사가 기합성을 내지르며 어깨에 힘을 실어 나를 들이받은 것이다.

수백 kg이상의 강화복의 무게, 거기에 소형 우주선의 동력원에 버금가는 출력을 내는 동력원으로 만들어낸 추진력.

이 두 가지 힘이 합쳐진 결과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했다. 강화복보다 배 이상 무게가 나갈 내 몸을 쓰러트릴 정도로 말이다.

기사의 돌진 때문에 나는 복도를 부수는 것으로 모자라 중환자실 반대편에 있는 환자실까지 밀려났다.

방의 벽이 무너지자 안에서 숨어 있던 환자와 당직 의사들이 화들짝 놀라 밖으로 뛰쳐나왔다.

“꺄, 꺄아아악!”

“사람 살려!”

현재 내 모습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지만 저들을 그대로 도망치도록 둘 수 없다. 내 아래쪽 왼팔 끝에서 가시뼈가 발사되어 등을 보이는 자들을 꿰뚫었다.

“켁!”

“악!”

안타깝게도 내가 가시뼈로 한 번에 죽일 수 있는 수는 최대 세 명밖에 안 된다.

생존자 한 명이 환자가 저렇게 빨리 달릴 수도 있나 싶을 정도의 속도로 달아났다.

‘윌리엄은 어디 갔지?’

내가 생존자들을 잡고 있는 사이, 윌리엄은 이미 나로부터 멀어진 뒤였다. 그가 비상계단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기사와 마주했다.

기사는 딱히 환자들까지 보호할 생각은 없는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를 방해된다는 듯 발로 차서 밀기까지 했다.

“무고한 희생자를 내다니. 이 사악한 괴물놈!”

기사의 행동은 말과 전혀 일치하지 않았지만 딱히 이상한 것은 아니다.

에저튼의 기사단은 이름만 기사지 실제로는 메가콥 상류층들로 구성된 특수 부대.

그들이 말하는 명예는 대외적으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것이지 현실하고는 하등 상관없다.

이 병원에 머무는 환자들이 낮은 계급인 것을 알고 있을 테니 저렇게 막 대하는 것이겠지.

‘그래도 저게 다 식량인데.’

밥상머리 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것 같은 기사를 보며 나는 남은 시간을 계산했다.

‘효과가 끝날 때까지 남은 시간은 8분쯤.’

시간이 많이 지나서 윌리엄부터 죽이고 가려 했는데 기사가 자꾸 귀찮게 군다. 내 시선을 느낀 기사가 팔에 장착한 블레이드 클로를 활성화했다.

‘블레이드 클로라.’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당연히 플라즈마 볼트가 훨씬 우위에 있는 무기지만 지금 같은 제한적인 상황에서는 블레이드 클로도 나쁘지 않은 무기다. 소닉 블레이드처럼 블레이드 클로도 높은 방어력을 갖춘 적의 갑주를 파괴하는데 특화된 무기라서 그렇다.

내 외피에 상처를 내려면 플라즈마 런처 이상의 화력을 가진 무기나 아니면 저런 블레이드 클로 같은 높은 절삭력을 가진 무기 말고는 선택지가 없다.

“죽어라!”

기사가 볼터로 견제사격을 하며 내게 달려들었다.

플라즈마탄이 내 턱 아래의 촉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노리고 쏜 것인지 모르겠지만 보조기관은 따로 강화되지 않은 상태. 나는 위쪽의 전투형 팔을 교차해서 플라즈마탄을 막아 냈다.

그사이 내게 접근한 기사가 블레이드 클로를 아래에서 위로 베어 올렸다.

그가 노리는 부위는 머리가 아니라 내 전투용 팔. 두 개의 톱날이 흉악스러운 소리를 내며 공기를 가른다.

나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거리를 벌리고, 날아드는 두 줄기의 톱날에 맞서 팔을 방패 삼아 휘둘렀다.

초진동 톱날과 합금 이상의 내구력을 갖춘 외피가 부딪치면서 스파크가 튄다.

그는 딱히 놀라는 기색 없이 침착하게 근거리에서 볼터를 내게 겨눴다.

그 침착성은 훌륭했지만 그의 의도가 성공할 일은 없다. 나에게는 아직 남아 있는 무기가 많으니까.

내 꼬리가 어둠과 먼지를 뚫고 그의 허리를 노렸다.

“큭?!”

기사는 볼터를 쏘는 대신 허리를 틀어 간신히 피해냈다.

나는 그가 뒤로 빠지기 전에 재빨리 전투용 팔로 볼터를 쥔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감히!”

내가 힘겨루기를 하려는 줄 알았는지 그가 볼터를 쥔 팔에 힘을 줬다. 강화복 효과로 근력이 향상되어 그의 힘은 나 못지않았다.

둘이 합쳐 1톤이 넘는 무게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병원 바닥을 짓눌렀다

우리 둘의 싸움 때문에 콘크리트 바닥이 갈라지는 와중에 그가 다른 팔로 내 팔을 붙잡았다. 아마도 나를 밀어낼 셈이겠지.

하지만 그가 착각하는 것이 있다. 나의 의도는 그와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내 등의 팔이 그의 양어깨로 날아들었다.

“크억!”

등의 팔에 달린 뼈 칼날이 기사의 몸을 꿰뚫었다.

칼날의 길이는 못해도 50cm 이상. 그 칼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박혔으니 기사의 몸속은 완전 걸레짝이 되었을 거다.

나는 등의 팔을 몇 번 흔들어서 그의 상처를 더 악화시킨 뒤 뽑아냈다. 적은 더 이상 서 있을 기력도 없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전하께서 널 용서치….”

그의 유언을 끝까지 들어 주기에는 시간이 없다. 나는 무릎을 굽히고 있는 그의 머리를 걷어찼다.

전신을 두터운 장갑으로 무장한 강화복이라고 해도 목이나 관절 부위까지 합금으로 덮을 수는 없다. 고무공이 터졌을 때 나는 소리와 함께 기사가 뒤로 자빠졌다.

쓰러진 기사의 시체는 살아 있을 때보다 목 부분이 두 배 이상 길어져 있었다.

‘여기 있는 것들을 다 먹어 치우고 가야 해.’

사냥의 표상 효과를 최대한 뽑으려면 유전자 정수들도 남김없이 먹어야 한다.

‘어차피 기생충이 있는 이상 윌리엄은 도망칠 수 없어.’

그 기생충이 말하고 있다. 윌리엄은 이 병원 밖으로 벗어나지 않았다고.

나는 그의 움직임을 체크하면서 시체들을 부지런히 입속에 집어넣었다. 맛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시간이 많은 것이 아니기에 식사의 즐거움을 느끼기는 어려웠다.

다 먹을 때마다 텍스트박스가 계속 떠올랐지만 무시했다.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 나중에 확인할 계획이다.

‘당장 새로운 특성이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특성을 획득하지 않았을 때 자동으로 취소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10분. 특성 선택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다행히 일반인 시체는 환자 가운만 입고 있어서 그런지 술술 넘어갔다. 덕분에 식사는 생각보다 일찍 끝났다.

‘2분 밖에 안 걸렸네?’

금속 흡수의 남은 시간은 많으면 10분 정도 될 거다. 윌리엄을 잡아먹고 돌아가기 충분한 시간이다.

‘그럼 가 볼까.’

신호는 위층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나는 거대한 몸체를 이끌고 배신자를 찾아 나섰다.

-

“헉, 헉, 헉….”

윌리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캐비닛에 거의 들이받듯이 몸을 기댔다. 그 바람에 안에 있던 청소 도구가 밖으로 쏟아졌다.

윌리엄은 안드로이드들이 사용하는 고압력 세척기를 손에 쥐었다. 저 괴물을 상대하기에는 무척이나 초라한 무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초에 괴물에게 이걸 휘두를 수 있을지도 불분명했다. 그의 머리에는 아직 기생충이 멀쩡히 살아 있었으니까.

“젠장….”

윌리엄은 자조했다.

그동안 그는 메가콥에 충성했다.

그렇기에 그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나쁜 짓을 하는 사람을 잡는 사람에 가까웠다.

물론 메가콥은 많은 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부패한 사회, 정의와는 거리가 먼 집단이었다.

그런 조직에 충성하는 자를 과연 정의롭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윌리엄은 본인의 신념이 지킬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신념도 일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재난 앞에서는 무력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군인이었지만 저 괴물은 별개였다. 가공할 공포가 그를 옥죄이고 그의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원초적인 감정을 일깨웠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

윌리엄은 덜덜 떨리는 허벅지를 다잡았다.

좀 전까지 밖에서 안드로이드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돌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는데 지금은 조용했다.

그는 숨을 죽이고 문에 귀를 가져다 댔다. 복도에서 환자가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문으로 막혀 있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무슨 망가진 라디오에서 나오는 소리처럼 뚝뚝 끊겼다.

생존자가 있는 것을 보니 필시 놈은 다른 층으로 간 것이리라. 그 근거로 놈의 무거운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이 기회야.’

윌리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도구실에서 나온 그를 반기는 것은 폐허가 된 복도였다. 천장에 있는 전등들은 모조리 파괴되었고, 일부에서는 간간이 스파크를 튀기며 빛났다.

복도에 배치되어 있던 환자용 침대들은 뭔가에 의해 강한 충격을 받았는지 통째로 휘어 있거나 부서져 있었다.

병원의 깨끗한 이미지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복도 위에 있는 사람은 오직 그밖에 없었다.

「찾·았·다….」

그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는 자기가 들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다. 그는 문에 막혀서 소리가 잘 안 들리는 줄 알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원래 그런 목소리였다.

망가진 라디오에서 나오는 것처럼 잡음이 낀 기괴한 목소리.

「그것」이 문 앞에서 그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윌리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의 눈이 감기자마자 투명한 무언가에 의해 그의 몸이 두 동강 났다.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