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64
스페이스 서바이벌에 존재하는 모든 특성, 기술들은 특정 계열의 카테고리에 소속된다.
예를 들면 내가 가장 처음 얻었던 날개라든가 키틴질 외피 같은 특성은 육체 계열, 키사라기를 잡아먹고 얻은 초능력 기관은 초능력 계열이라는 식으로 구분된다.
그렇다면 가장 강력한 특성들이 집중적으로 모여 있는 계열은 어떤 계열일까?
나를 포함해 랭커들에게 물어본다면 주저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답할 것이다.
볼텍스원 전용 특성이 모여 있는 심연의 힘 계열.
그리고 레드 갤러곤만 사용할 수 있는 드래곤 파워 계열, 이렇게 두 가지라고.
두 계열이 강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볼텍스원은 아웃스페이서 최종 미션에서 보스로 등장하는 종족이다. 보스 전용기다 보니 당연히 압도적인 힘을 자랑한다.
레드 갤러곤은 게임에 존재하는 가장 강력한 생물 중 하나로 랭커들도 상대하기 벅차하는 NPC다.
그래서 이 둘의 힘은 일반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없다.
그나마 레드 갤러곤의 드래곤 파워는 컬트가 특정 유물을 통해 제한적으로 사용할 있는 게 전부이다. 그마저도 컬트의 후반 퀘스트에서 낮은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유물이라 극히 일부만 사용해봤을 정도다.
그렇다면 질문을 살짝 바꿔보자.
플레이어들이 사용할 수 있는 특성, 기술이 모여 있는 계열 중 가장 강력한 계열은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랭커마다 다르겠지만 대부분은 사이킥 파워를 다루는 초능력 계열을 꼽을 것이다.
초능력 계열에는 다양한 상황에서 응용할 수 있는 범용성을 가진 특성, 기술들이 많다.
이는 육체 계열도 마찬가지지만 육체 관련 기술, 특성에는 결정적인 한계가 있다. 물리적인 공격과 방어에 치중해 있어서 비물질적 공격에 취약하다는 점이다.
반면 사이킥 파워는 강력한 물리력도 행사하면서 정신, 영혼 등에 대한 파괴력도 갖추고 있다.
이런 불합리한 게임 구조 때문에 사이킥 파워 능력을 아예 획득할 수 없는 아웃스페이서, 몸의 반쯤 기계이다 보니 오로지 장비에만 의존해서 사이킥 파워에 대응해야 하는 스타유니언의 사이보그는 후반으로 갈수록 불리해졌다.
메가콥 같이 생물 종족을 택한 플레이어는 유전자 개조로 사이킥 파워를 후천적으로 얻을 수 있다. 초능력 없이 그들과 경쟁해야 하니 당연히 힘들 수밖에.
그나마 초능력 계열 특성과 기술의 단점이라면 얻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 있지만, 그것도 컬트를 플레이하면 해결된다.
‘게임에 컬트 유저가 30%쯤이었나?’
랭커의 경우는 일반 유저에 비해 컬트 비중이 훨씬 높다. 랭커 20명 중 9명이 컬트였으니까. 랭커의 거의 반수에 살짝 못 미치는 것을 보면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참고로 아홉 명의 컬트 중 1명은 한국인이다. 어떻게 아냐면 내가 그와 직접 겨루어 봤기 때문이다.
‘강적이었지.’
랭커니까 당연히 강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잘 싸우던 플레이어였다.
‘컬트는 성능이 좋지만 정말 잘하는 플레이어는 별로 없어.’
사이킥 파워는 흔히 우리가 말하는 염력, 텔레파시 같은 초능력에 모티프를 얻어 만들어진 것.
그렇다 보니 직관적이기보다는 추상적인 경우가 많고, 술자의 높은 이해도가 필요한 복잡한 구성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해 유저가 사이킥 파워를 얼마나 창의적으로 사용하는지에 따라 그 위력이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고 할 수 있다.
나와 싸웠던 한국인 컬트는 창의적인 플레이어의 부류에 들어가는 사람이었다.
‘아주 고이다 못해 화석 같은 놈이었는데.’
그는 내가 전혀 상상도 못했던 사이킥 파워 활용법을 보여줬고, 덕분에 그랑 싸울 때 대응법을 떠올리느라 머리털이 다 빠지는 줄 알았다.
‘덕분에 많이 배웠다만.’
최후에는 내가 이겼지만 그와의 싸움을 통해 새롭게 배운 지식도 많았다.
나도 초능력 특성을 많이 써먹는 편이었지만, 그 한국인 컬트와 싸운 뒤로는 사이킥 파워에 대한 이해도가 많이 늘었다.
아무튼 그때 얻었던 경험을 이제 슬슬 써먹을 때가 왔다.
‘초능력 관련 특성을 제대로 써먹으려면 타입이 필요해.’
초능력 강화 타입을 확보하면 완전한 유기체의 적용 대상이 된다. 완전한 유기체 효과가 보유한 타입의 효과를 강화시켜 주는 것이니까.
즉 내가 가진 사이킥 파워 특성들이 전부 이중으로 강화된다는 것. 아직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사이킥 파워 관련 특성이 부족하니 당장은 출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
‘오래 기다렸네. 타입 해금.’
나의 허가를 받은 텍스트박스가 허공에 녹아들 듯 사라지고, 몸에서 변이가 시작되었다.
내 몸에서 사이킥 파워를 사용하는 외부기관은 총 2개. 턱 아래에 달린 보조기관과 머리 뒤에 있는 촉수 다발이다. 보조기관에는 딱히 큰 변화가 없었고, 대신 ‘괴물의 촉수’ 특성과 관련한 촉수 다발과 그 주변 부위에서 큰 변화가 이루어졌다.
먼저 머리를 덮고 있는 갑각의 형태가 변했다.
기존에는 뿔이 솟아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매끈하고 단조로운 디자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머리 뒷부분을 보호하는 갑각이 촉수를 보호하기 위해 더 넓게 퍼졌다.
또한 겉면에 굴곡과 문양이 생겨 전보다 복잡한 외형으로 변했다.
전의 머리 갑각이 뿔이 난 투구에 비유할 수 있다면 지금은 왕관이다. 그것도 아주 거대한 왕관.
‘사냥의 표상’ 효과가 끝나면 지금의 크기에서 줄어들겠지만 전보다 멋진 외형이 되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머리를 덮은 갑각이 변한 것과 함께 촉수 다발도 많이 달라졌다.
전에는 머리카락에 가까울 정도로 얇고 긴 형태인 촉수들이 훨씬 굵고 길어졌다. 이제는 내 어깨 위로 흘러내릴 정도였다.
색깔도 달라져서 전에는 외피 색과 동일한 검갈색이었는데 지금은 사이킥 파워를 머금어서 그런지 선명한 보라색이었다.
촉수의 변이가 끝나자마자 몸 전체가 근질거렸다. 초능력 내성이 강화 효과를 받으며 외피에 드러났다.
덕분에 검갈색 일변도의 외피에 선명한 보라색 문신이 생겼다. 보라색 문신은 핏줄을 따라 가듯 몸 전체에 새겨져 있었다.
현재 나는 사냥의 표상 효과 때문에 눈이 가려져 있다. 하지만 그만큼 발달된 보조기관 덕분인지 몸에서 일어난 변화가 직접 보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모든 변화가 끝났다.
‘뭔가 달라졌어.’
내가 보고 느끼는 감각이 전과 다르다. 보조기관도 타입의 효과를 받아서 감지의 영역과 폭이 넓어진 덕분이다.
이제는 컬트가 직접 사이킥 파워를 쓰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사이킥 파워를 감지할 수 있다.
이 병원, 이 공간에 흐르는 미세한 보라색 에너지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다.
‘이런 느낌이구나.’
게임에서는 단순히 미니맵에 사이킥 파워 사용자의 모습을 보라색으로 체크해주는 것에 그쳤지만 역시 현실이라 그런 것일까?
내가 해츨링이 되어 처음 느꼈던 놀라움과 신선함을 다시 맛볼 수 있었다.
‘이 정도로 예민하면 컬트랑 싸울 때도 공격하기 전에 감지할 수 있겠는걸.’
원래도 보조기관으로 사이킥 파워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지금처럼 정밀하게 잡아내지는 못했다. 향후 컬트나 사이킥 파워를 사용하는 적과 싸울 때 훨씬 수월하리라.
타입을 얻은 나는 만족감을 느끼며 병원 1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아직 금속 흡수 효과는 끝나지 않은 상태. 이제 애들이 기다리는 둥지로 돌아갈 일만 남았다.
로비를 막 나서려는 순간, 내 감각에 이상한 느낌이 잡혔다.
「은색 강화복을 입은 기사 20명이 골목에서 나온다.」
「맨 앞 갑주에 비키니를 입은 여자 그림이 그려져 있는 기사가 말한다. 7명, 7명, 6명 이렇게 3개조로 나누도록 하겠네. 1조는 내가, 2조는 테네시, 3조는 패리스가 맡도록.」
「나머지 기사들이 합창한다. 알겠습니다. 제이콥 님.」
「제이콥이라 불린 기사가 말한다. 테네시, 병원에 도착하면 2조를 이끌고 후문으로 진입하도록. 3조는 페리스의 지시에 따라 역에서 대기하다가 필요하면 지원할 것. 1조는 나와 함께 정문으로 간다.」
「독수리가 그려져 있는 기사가 답한다. 알겠습니다. 2조, 이쪽으로.」
「방패가 그려진 기사가 말한다. 제이콥 님. 병원 주변으로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제이콥이 말한다. 기자로군. 저들의 처리는 경찰에게 맡기면 된다.」
그 말을 끝으로 영상을 배속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의 감각은 뚝 끊겼다.
‘포식자 감각?’
영상을 빠르게 보여주는 방식만 동일하고 나머지는 전부 차이가 난다.
포식자 감각은 죽을 위기가 닥칠 때에만 발동한다. 또한 곧 다가올 안 좋은 미래를 단편적으로 구현하는 것이지 현실 그대로를 보여 주지는 않는다.
반면, 방금 내가 본 것은 평소보다 훨씬 상세했다. 누가 말하는지, 어디서 오고 있는지 전부 보여줬으니까.
‘포식자 감각도 사냥의 표상 효과에 영향을 받은 건가?’
사냥의 표상 효과는 내가 보유한 모든 특성을 강화시켜 주는 것.
추측하건대 초능력 강화 타입과 사냥의 표상 효과가 삼중으로 겹쳐져서 포식자 감각이 평소보다 훨씬 미래에 있을 위기를 정밀하게 구현한 것이리라.
‘그렇다면 저들이 이곳에 오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다는 건데.’
그사이에 도망치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랬다면 포식자 감각이 발동할 일도 없었을 거다.
‘저들이 오는 길목 근처에 역이 있어.’
아직 은폐 효과는 유효하지만 문제는 저들이 나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 이대로 나갔다간 바로 들킨다.
‘싸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적들의 수가 너무 많다. 어떻게든 전멸시킨다고 해도 현재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싸우는 도중 은폐 효과가 해제될 가능성이 높다.
‘우회해서 간다고 쳐도 대기하는 놈들이 있어.’
기사들 중 6명이 역 앞에서 대기하고 있으므로 어떻게 가든 싸움은 피할 수 없다.
‘문제는 역시 시간.’
사냥의 표상 상태니까 6명 정도는 쉽게 죽일 수 있지만, 아무에게도 안 걸리고 죽이는 것이 문제다.
애초에 도시에게 나의 정체를 걸리지 않기 위해서 병원에 온 것이다. 무사히 빠져나가겠다고 하면서 대놓고 모습을 드러낸다면 그야말로 본말전도다.
‘애들을 부를까?’
지금 시간은 밤 10시 30분.
이 시간대에는 이사회 준비 때문에 역 내에서 점검을 한다. 아직 이사회가 시작되기 전이니까 오늘도 점검할 가능성이 높다.
‘지난번 여기자도 이 시간대에 잡아먹었지.’
여기 오기 전 26호에게도 설명해 놨다. 내가 연락을 줬을 때 역내가 어둡다면 나오라고 말이다.
씨 데몬은 심해에 사는 생물이라 빛에 민감하다. 아마 26호도 나보다도 넓은 스펙트럼의 빛을 감지할 수 있을 테니 작전을 따르는데 어려움은 없을 거다.
‘하지만 말과 실제는 또 다른 법. 내가 신호를 줄 타이밍을 잘 잡아야 해.’
나와 녀석들 간의 양동 작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성공하려면 내가 적절하게 신호를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보조기관 성능이 올라갔으니 집중만 한다면 역내의 상황 파악도 어렵…아니, 잠깐.’
그때 순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나는 26호에게 평소에 쏘던 파장을 쏴봤다.
[즈·즈즈·즈(들, 려?)]
「…큰애기?」
[즈즈·즈·즈(나, 야, 들, 려?)]
「큰애기야 왜 그래?」
‘역시!’
안 되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한 번 해봤는데 성공이다.
내가 26호와 대화할 수 있는 수단은 내 뒷머리에 달린 이 촉수, 초능력 기관 덕분이다.
이 기관이 없었을 때는 26호가 말하는 것은 들을 수 있었지만 내가 녀석에게 말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현재는 융합해서 괴물의 촉수로 재탄생했지만 전에 있던 소통 능력은 잔존했다. 덕분에 나도 26호와 대화할 때 잘 써먹고 있었다.
워낙 자연스럽게 쓰고 있던 터라 잊고 있었다.
녀석과 소통하도록 도와주는 기능 또한 초능력 강화 타입의 효과의 적용 대상이라는 것을.
「둥지로 오는 중이야?」
[즈즈·즈즈즈·즈즈(아, 니 다른 것, 때문, 에)]
「뭔데? 도와줄까?」
이렇게 되면 내가 굳이 타이밍 맞춰서 26호에게 전화를 걸 필요가 없다. 그냥 직접 말하면 되니까.
나는 26호에게 곧 신호를 줄 테니 준비하라고 말했다. 녀석이 준비하는 동안 나도 준비가 필요하다.
‘혹시 모르니까 지금 얻어 놨던 특성들을 다 확인해 보자.’
텍스트박스가 지나갈 때 ‘통찰’처럼 당장 필요한 특성은 없어서 넘겼었다. 둥지에 가서 확인해도 될 만큼 시간이 넉넉했으니까.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둥지에 늦을 수도 있으니 지금 얻어놔야겠다.
내가 병원에서 획득한 특성의 개수는 윌리엄을 제외하고 5개. 기사 3명과 민간인 2명으로부터 얻었다.
사냥의 표상은 포식 확률을 올려주는 것이지, 100% 획득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지는 않는다.
내가 잡아먹은 사람이 이보다 많아도 포식 효과가 전부 발동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그래도 평소에 비하면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많은 특성을 짧은 시간에 얻었다.
‘빠르게 적용하고 전력으로 간다.’
나는 텍스트박스를 띄운 뒤, 내용들을 빠르게 스캔했다.
「‘인간’의 생물 특성 중 ‘우주 박테리아’를 탈취.」
「‘우주 박테리아’을 적용하시겠습니까?」
「‘마그마게이터’의 생물 특성 중 ‘불의 숨결’을 탈취.」
「‘불의 숨결’을 적용하시겠습니까?」
「‘인간’의 생물 특성 중 ‘지구력’을 탈취.」
「‘지구력’을 적용하시겠습니까?」
「‘나이트스토커’의 생물 특성 중 ‘가시털’을 탈취.」
「‘가시털’을 적용하시겠습니까?」
「‘인섹트맨’의 생물 특성 중 ‘페로몬 강화’를 탈취.」
「‘페로몬 강화’을 적용하시겠습니까?」
‘더 물어볼 것도 없지. 전부 적용해.’
완전한 유기체를 얻었을 때 텍스트박스는 내게 이런 말을 남겼다.
진화에는 끝이 없다고.
새로 들어온 유전자 정수에 의해 몸이 또다시 진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