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72화 (73/400)

Ep. 72

‘무서워라. 무서워.’

적들이 플라즈마 볼터를 마구 쏴댔지만 물속이라 그런지 제대로 맞추는 사람이 없었다.

플라즈마탄의 포화를 무사히 피해 도망친 나는 흡혈 촉수를 회수하면서 기사를 끌어당겼다.

“…큭!”

촉수에 붙잡힌 기사는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반대편 왼팔로 블레이드 클로를 뽑았다.

‘그렇게는 안 되지.’

손등에 있는 저 예리한 발톱이라면 강화된 내 촉수라고 해도 뭉텅이로 잘려 나갈 터.

내 흡혈 촉수가 나의 의지에 반응해 적의 부서진 장갑 속으로 파고들었다.

“아악!”

안쪽 면에 톱날처럼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나 있는 촉수가 갑주 안으로 들어가 상대의 몸을 헤집었다.

팔이 떨어져 나간 자리에 톱질을 당하는 셈이다 보니 기사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물을 좀 먹으면 진정하려나.’

어썰트팩 때문에 기사는 물속에 있어도 팩과 연결된 투구로 산소를 공급받고 있다.

나는 기사를 확 끌어당긴 다음 전투용 팔로 투구를 벗겼다.

투구 안쪽에서 적당히 긴 금발이 흘러내렸다.

‘뭐야, 여자네?’

당연히 남성인 줄 알았는데 여성이다. 유전자 개조 덕분인지 외모도 제법 뛰어나다.

“젠장…!”

여기사는 극한의 통증 때문에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게임에서 여자 용병을 뽑으려고 하는 메가콥 플레이어가 많았는데.’

에저튼 가문 특전으로 제공되는 기사단은 이름도 외모도 전부 무작위로 정해진다.

우락부락한 근육질 흑인 남성이 뜰 때도 있고, 내 앞에 있는 기사처럼 금발 백인의 여성이 뜰 때도 있다.

그래서 예쁜 기사들로 용병을 꾸리고 싶어 하는 사람이 메가콥 플레이어 중 꽤 많았다.

커뮤니티에 어떻게 하면 미소녀 기사들만 뽑을 수 있는지 공략이 올라올 정도였으니까.

‘난 에이모프를 더 좋아했지만.’

물론 나도 평범한 남자이기에 아름다운 여성을 보면 호감을 느꼈다.

그런데 지금은 몸이 이래서인지 미인의 얼굴을 봐도 별다른 감정이 들지 않았다.

‘아무튼 여기사라.’

그녀를 보고 있으니 재밌는 생각이 났다.

여자라면 써먹을 여지가 있다.

나는 입을 벌려 그녀의 목덜미를 살짝 물었다.

“윽?!”

진저리치는 그녀.

살살 물었으니까 아파서 저러는 것은 아닐 거다. 에이모프에 대한 생리적 혐오감이나 뭐 그런 것 때문이겠지.

내 타액 속에 들어 있는 신경독이 효과를 보이는지 그녀의 표정이 빠르게 풀렸다. 아마 잘려 나간 팔 부분의 고통도 느껴지지 않겠지.

그녀가 마비된 것을 확인한 나는 그녀에게 좀 전에 벗겼던 투구를 씌워줬다.

‘어썰트팩하고 연결하려면…아, 여기 있네.’

목과 어깨에 있는 튜브를 서로 연결하자 투구에서 다시 빛이 들어왔다. 전력이 들어왔으니 투구 안에 있는 정찰 칩도 다시 작동할 거다.

‘너는 미끼란다.’

내 경험상 여성 동료는 미끼로 쓰기 제격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자보다 여자가 죽는 것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우주 시대에도 과연 여성을 구하려고 달려드는 신사가 있을지, 한 번 실험해 봐야겠다.

-

‘신호기는 미끼였나?’

야넥은 신호를 재확인했다.

그들이 이곳에 오기 전 30m 떨어져 있던 신호는 다시 빠르게 멀어지고 있었다.

‘이곳에 다른 생물이 있다?’

그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야생 동물이 놈의 의도를 이렇게까지 잘 따라줄 가능성은 희박하다. 놈에게 분열 능력이 있다고 상정하는 쪽이 더 가능성이 있어.’

자기의 몸을 분열시키는 생물은 희귀하지만 엄연히 존재한다.

‘분열 능력으로 몸을 쪼개서 신호칩을 넣어 교란. 놈은 전략가다.’

그것도 제법 실력이 탁월한 전략가.

야넥은 놈에 대한 추정치를 넓힐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불을 뿜는 능력에 가시를 쏘는 능력, 투명화, 분열, 그리고 높은 지능. 과연 전하께서 바라실 만하군.’

수백 마리가 넘는 야수를 사냥한 야넥도 이렇게 다양한 능력을 지닌 생물은 처음 본다.

현존하는 헐크 뮤턴트 제작 기술로도 저렇게 여러 종류의 특성을 하나의 육체에 집어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나마 유진 가문의 유전자 개조 인간 정도가 다양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하지만, 놈의 외형은 아무리 봐도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까 봤을 때 놈의 외형적 특징은 뱀.’

병원과 역에서 사용했던 투명화 능력을 쓰지 않은 것은 물이 많이 흐르는 이 장소 때문이리라.

“야넥 조장님! 캐서린의 바이탈 신호가 아직 유효합니다!”

“뭐?”

단원 중 한 명이 외친 말에 야넥은 손목의 단말기를 조작했다.

곧 투구의 바이저 안쪽 면에 4조의 단원들의 바이탈 신호와 사라진 동료, 캐서린의 시야 카메라의 화면이 출력되었다.

‘아직 살아 있다고?’

캐서린의 신호는 미약하긴 하지만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녀의 시야를 보니 그녀는 통로 어딘가의 벽에 몸을 기대고 있는 것으로 추측되었다.

“조장님, 캐서린이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빨리 구하지 않는다면 늦을지도 모릅니다.”

“…….”

단원의 말에 야넥은 침묵했다.

‘함정.’

신호기를 이용해 교란 작전까지 펼치는 놈이다.

뭔가 꿍꿍이가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놈은 지능이 매우 높다. 아무 이유 없이 부상자를 내버려 뒀을 리가 없어.”

“캐서린이 저항했을 수도 있잖습니까? 어썰트팩으로 강화된 신체 능력으로 블레이드 커터를 사용했다면 놈의 몸체 따위는 쉽게 벨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하수도로 들어온 그들은 괴물에 대해 아무런 정보 없이 무턱대고 들어온 것이 아니다.

병원과 역에서 놈과 싸우다가 전사한 동료들의 무장 수준, 전장에 남은 흔적 등 여러 종류의 정보를 토대로 현재 은사자기사단은 괴물의 방어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 알고 있었다.

수집한 정보들을 컴퓨터로 시뮬레이션한 결과, 놈의 외피는 어썰트팩 효과로 신체 능력이 향상된 기사가 휘두르는 블레이드 커터를 버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조장님. 저희는 비밀리에 놈을 포획하러 이곳에 왔습니다. 늦어서 방위군과 마주치면 일이 꼬입니다. 더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그 말도 맞다.

적이 예상보다 훨씬 지능적이어서 골치가 아픈데 거기다 방위군까지 끼어들면 상황이 훨씬 복잡해질 것이다.

단원의 말대로 최대한 빨리 놈을 처리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동료도 구하고 말이다.

“알겠다. 제이콥 님께 바로 보고하고….”

그가 통신기를 든 순간, 통로 뒤쪽에서 뭔가가 날아왔다.

얇고 길쭉한 그것은 야넥이 들고 있던 통신기에 그대로 꽂혔다.

‘가시침!’

그의 시선이 통로 뒤쪽으로 향하자 어깨에 있던 오토 플라즈마 건이 작동했다. 녹색 에너지 탄이 통로를 밝히며 날아갔다.

그 짧은 순간, 구렁이 같은 것이 수면 아래로 숨는 모습이 보였다. 수면 위에 잠깐 비치던 검은 그림자는 곧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조장님!”

“난 괜찮다.”

영악스러운 놈은 그가 통신기를 드느라 주의가 헤이해질 때를 노렸다.

‘젠장!’

야넥은 손 위에 부서진 통신기의 잔해를 조심스럽게 뒤졌다.

‘칩만 부서지지 않았다면!’

다행스럽게도 통신기의 칩 자체는 손상되지 않고 남아 있었다.

‘휴, 망가지지 않아서 다행이군.’

그는 통신 칩을 팔목의 단말기 안에 집어넣었다.

곧 단말기에서 파일과 메시지를 보낼 수 있는 기능이 활성화 되었다. 야넥은 제이콥에게 짧은 경고 메시지와 그의 카메라에 기록된 데이터들을 함께 보냈다.

‘이렇게 되면 증거가 남지만….’

비밀 작전을 수행 중이라 일부러 독립된 통신망과 연결된 통신기를 쓰고 있었다.

단말기를 통해 데이터를 전송하면 무조건 방위함대의 통신망을 거친다. 저쪽이 바보가 아닌 이상, 이쪽이 비밀 임무를 수행했다는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이 틀림없다.

‘적이 상정했던 수준보다 한참 웃돌고 있으니 어쩔 수 없어.’

그들의 주인인 덴버가 어떻게든 무마해 줄 것이라 믿을 수밖에.

“그럼 이동하겠다.”

제이콥에게 무사히 정보를 전달한 야넥은 다시 부하를 이끌고 출발했다.

강철의 전사들이 거체를 이끌고 통로를 질주했다.

통로를 반쯤 채운 구정물들도 2m를 한참 넘는 18명이나 되는 기사들의 돌격을 막을 수 없었다.

그들의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어설트팩과 강화복 효과로 강해진 신체 때문일까. 그들이 걸을 때마다 하수도 통로의 딱딱한 바닥이 푹푹 파였다.

“캐서린까지 15m.”

“모두 속도를 늦추고 주위를 경계하라.”

캐서린의 위치가 가까워지자 기사들이 속도를 줄였다.

경계심이 극도로 치솟은 상태인 기사들은 면밀하게 주변을 살폈다. 오토 플라즈마 건도 주인이 지정한 목표에 언제든지 발사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움직였다.

“놈은 이 주변에 없는 것 같습니다.”

물살을 제외하고 다른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야넥이 고갯짓을 하자 단원 중 두 명이 캐서린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상반신만 수면 위에 내놓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꼭 죽은 것처럼 보였지만 기사들 모두 바이탈 신호를 계속 체크하고 있었기에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아직 살아 있다.

“이봐, 캐서린. 괜찮아?”

“…….”

단원 중 한 명이 그녀에게 가까이 가 왼쪽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러자 그녀가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뭐라고?”

“…!”

투구 안쪽에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 강하게 소리치고 싶은데 무언가에 의해 억눌려서 말을 못 하는 것 같았다.

“위, 험? 위험하다고?”

그가 중얼거린 순간 그녀의 반대편, 다시 말해 기사들의 후방에서 붉은색 촉수가 두 개가 튀어나왔다.

“컥?!”

“억!”

촉수가 후열에 있는 기사 둘의 목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아무리 강화복으로 보호받는다고 해도 인간인 이상 목은 취약한 부위다.

웬만한 성인 남성의 허벅지만한 두께의 촉수에 목이 직격으로 맞았는데 멀쩡할 리 없다. 기사 둘의 목은 본래의 자리에서 이탈해 이상한 방향으로 꺾였다.

“적이다!”

야넥의 고함 소리와 함께 기사들의 시선이 일시에 후방으로 향했다. 오토 플라즈마 건으로부터 녹색 에너지탄이 발사되어 촉수 하나를 맞췄다.

플라즈마탄에 맞은 촉수가 절반쯤 떨어져 나갔다. 그사이 다른 하나는 그대로 물속으로 숨어 버렸다.

“놈을 사살하라!”

기사들이 볼터를 촉수가 있던 방향으로 조준했다.

하지만 놈의 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사들의 시선이 후방에 향해 있을 때, 촉수의 본체가 캐서린의 발아래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왔다.

「그것」이 진짜로 노리던 목표는 바로 캐서린의 용태를 살피기 위해 가까이 왔던 기사 두 명이다.

“어?”

멍청하게 중얼거리는 기사.

고개를 돌린 그의 앞에 작고 하얀 칼날들, 그리고 어둠이 보였다. 짙은 암흑이 그의 머리를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런 씹…억?!”

「그것」이 순식간에 옆에 있던 동료의 머리를 통째로 씹어 버린 것을 본 기사가 급히 블레이드 클로를 휘두르려고 했다.

그의 다리를 뭔가가 휘감지만 않았어도 그는 성공적으로 괴물의 머리를 베었을 것이다.

기사의 자세가 급격히 흐트러졌지만, 그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

게다가 어설트팩의 강화 효과까지 받고 있었기에 그는 자세가 무너진 와중에도 클로의 방향을 수정할 수 있었다.

덕분에 그의 블레이드 클로는 괴물의 어깨를 베는 데 성공했다. 괴물의 상처에서 핏줄기가 솟구치면서 그의 투구에 튀었다.

괴물도 지금 공격은 고통스러웠는지 동료의 머리를 물고 있던 입을 쩍 벌렸다.

「그르르르!」

“성공…억?”

거기까지는 좋았으나 그다음 벌어질 일은 기사도 예측하지 못했다.

피가 묻은 투구가 급격히 녹아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 어어억?!”

“놈이 주변에 있다! 투구를 벗으면 안 돼!”

그대로 뒀으면 머리까지 같이 녹아내릴 것이 뻔했기에 기사가 재빨리 투구를 벗었다.

뒤늦게 놈의 본체가 후방이 아닌 전방에 숨어 있었다는 것을 안 야넥이 그 모습을 보고 소리쳤다.

그러나 그의 경고는 너무 늦었다.

기사의 다리를 걸었던 「그것」의 꼬리가 수면으로 튀어나와 그의 뒤통수를 관통했다.

“컥.”

머리에 구멍이 난 기사가 쓰러졌다.

“젠장! 놈의 본체가 뒤에 있다! 사격 개시!”

야넥과 기사들이 서둘러 볼터를 쏴댔다. 「그것」의 머리에 몇 발 꽂혔지만 놈은 개의치 않고 통로 너머로 뛰어갔다.

“한 명은 남아서 부상자를 보호! 나머지는 모두 날 따라와!”

13명의 기사가 빠른 속도로 괴물을 뒤쫓았다.

놈의 움직임은 여전히 빨랐지만 머리를 맞은 게 제법 치명적이었는지 기사들과의 거리를 좀처럼 벌리지 못하고 있었다.

조금씩 가까워지는 놈에게 연달아 볼트와 오토 플라즈마 건을 갈기던 야넥은 이를 악물었다.

‘내가 잘못 판단했다! 그냥 대기하고 지원군을 불렀어야 했어!’

몇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 4명이 죽었다. 게다가 부상자 1명까지.

놈에게도 부상을 입히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쪽의 손해가 훨씬 크다.

“놈은 좁은 통로로 이동 중!”

“지도를 보니 통로 끝이 막혀 있는 곳입니다.”

“좋아!”

그나마 희소식은 저 괴물이 당황했다는 점이다.

놈은 부상이 익숙하지 않은지 스스로를 막다른 곳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허둥대고 있었다.

‘하긴 저렇게 똑똑한 괴물이 부상에 익숙할 리 없어.’

태생부터 강대하게 태어나는 생물은 남을 짓밟는 것은 익숙해도 자기가 다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다.

은사자기사단이 상대했던 강력한 위험생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그랬다. 그들은 기사단에게 큰 피해를 입혔지만, 자기가 입은 작은 피해 때문에 결국 토벌당했다.

그리고 야수들로부터 획득한 전리품들이 그들의 몸 안에 흐르고 있고.

‘지금이 기회다.’

놈이 제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 제압해야 이 이상 피해가 나지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하며 야넥과 기사들은 좁은 통로에 진입했다.

-

‘어우씨, 엄청 아프네.’

나는 몸에 난 상처를 살폈다.

재생력 효과 덕분에 머리의 외피 쪽은 거의 회복되었지만 어깨 쪽은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았다.

또한 왼쪽 팔의 흡혈 촉수는 절반가량 뜯어져서 회복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다.

‘확실히 사냥의 표상이 아니면 힘들어.’

내 외피가 단단하긴 하지만 블레이드 커터나 플라즈마 공격은 막기 어려웠다.

‘완전한 유기체 특성만으로는 부족한가.’

육체 강화 타입에 완전한 유기체 효과가 겹쳐서 배 이상으로 강해진 외피지만 아직은 부족한 면이 많다.

‘일부러 방심을 유도하려고 한 것도 있긴 한데.’

플라즈마 공격은 머리의 외피를 믿고 덤빈 것이 맞지만, 블레이드 클로에 맞은 것은 예상외였다. 생각보다 많이 아파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정도였으니까.

‘앞으로 싸워야 할 적이 많으니까 좀 더 조심해야겠다.’

어차피 이제 거의 다 끝났다.

지금 나는 내 몸이 간신히 들어올 정도로 좁은 통로의 막다른 곳에 있다.

보조기관에 집중하지 않아도 적들이 나를 쫓아 통로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화났네.’

수면이 거칠게 흔들리는 것을 보니 적들이 어지간히 분노했나 보다.

‘전투 중에 이성을 잃는 것은 위험하지.’

나는 물속에 반쯤 잠긴 상태로 자세를 잡았다.

이 좁은 통로는 그야말로 외길.

2m를 한참 넘는 적들은 잘해 봐야 2열, 그렇지 않으면 1열로 서서 통로 안에서 움직일 거다.

그 말은 즉, 여기서 강력한 범위 공격이 가해져도 엄폐할 곳이 없다는 뜻이다.

‘초능력 강화 타입, 그리고 타입 효과를 향상시켜 주는 완전한 유기체.’

이 두 개로부터 시너지를 받은 괴물의 촉수가 쏘는 사이킥 브레스.

과연 얼마나 강할까?

‘실험해볼까.’

처음 초능력 강화 타입을 얻었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타입 덕분에 사이킥 브레스의 제한이 늘어나서 최대 2번까지 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래라면 한 번 쓰고 정신을 잃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물살의 흐름이 강해지는 것을 보니 놈들과 남은 거리가 이제 얼마 안 남았다.

‘적들은 충분히 들어왔어.’

혹여 그들이 등을 돌려 도망칠 것을 대비해 최대한 타이밍을 맞춰야 한다. 두 번까지 쓸 수 있다고 해도 헛되이 귀중한 사이킥 브레스 능력을 낭비할 수는 없으니까.

“놈과의 거리 10m.”

적의 목소리가 들린다. 어둠 속에서 선두에 선 기사의 윤곽이 보인다.

나는 통로 바깥쪽을 몸을 향한 뒤, 괴물의 촉수를 활성화했다.

내 뒷머리에서 나온 보라색 촉수 다발이 파르르 떨며 움직였다.

길고 굵은 보라색 촉수들이 용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일제히 내 머리 앞쪽을 향했다.

“놈이 보입…잠깐! 뭔가 이상합니다!”

“이건? 모, 모두 실드 활…!”

기사 중 지휘관으로 보이는 자가 급히 외친다.

나쁘지 않은 판단이지만, 과연 실드로 이걸 막을 수 있을까.

내가 에이모프가 된 이후, 한 번도 보지 못한 막대한 사이킥 파워가 내 머리 앞에 집중된다.

좁은 통로 안에 있는 더러운 오물들이 에너지를 견디지 못하고 들끓는다.

전에는 내 몸 안에 모든 생명력과 머릿속 정신력이 다 빨려 나가는 기분이었는데, 지금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대신 매우 뜨거웠다.

마그마나 용광로를 앞에 둔 것처럼 외피가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우주의 위대한 용들만이 다룰 수 있는 보라색 태양이 발사되었다.

물이 증발하고, 하수도를 구성하는 금속 벽이 먼지가 된다.

기사들이 꺼낸 실드의 보라색 빛은 통로를 태우는 순수한 에너지 앞에서는 그림자에도 미치지 못했다.

보라색 열선이 닿자마자 실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사그라졌다.

기사들의 튼튼한 갑주도, 비싼 어썰트팩도, 다양한 유전자가 든 육신도, 전부 열선이 집어삼켰다.

사이킥 브레스가 끝난 뒤, 내 앞에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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