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74화 (75/400)

Ep. 74

이런 말을 하기 좀 그렇지만 난 게임에서 인기가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인지도는 높지만, 인기인은 아니었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플레이어들은 나를 ‘모프박이’라 불렀다.

오죽하면 외국 커뮤니티에서도 저 모프박이가 일종의 고유 명사가 되어 나를 지칭하는 별명이 되었다.

물론 나도 할 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캐릭터 디자인이 원래 이런데 나한테 욕하면 안 되지.’

에이모프 자체가 기습과 사냥에 특화된 종족이다.

그러니 나만큼 게임사가 정해준 대로 정석적인 플레이를 하는 유저는 없을 거다.

아무튼 내가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내 몸에 적용된 그리운 특성 때문이다.

‘가사(假死)상태라.’

에이모프는 충분히 성장하기 전까지 살아남는 일 자체가 쉽지 않다.

설령 무사히 진화한다고 해도 다른 종족처럼 동료나 클랜에게 등을 맡길 수 없어서 늘 혼자 싸워야만 한다.

그런 에이모프에게 가장 필요한 특성은 무엇일까?

살아남고, 잡아먹고, 진화하는 것 중 에이모프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첫 번째다.

‘생존하는 것.’

바퀴벌레처럼 죽지 않고 끈질기게 살아남는 것이야말로 에이모프 플레이의 핵심이다.

살아남아야 나머지 것들, 먹이 사냥, 진화 등이 가능하니까.

하지만 다른 플레이어들도 바보가 아닌 이상, 잠재적 위협요소를 그대로 둘 리가 없다.

에이모프만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플레이어도 존재하고, 그들 말고 대부분의 유저들도 에이모프를 발견하면 어떻게든 죽이려 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저들은 내가 죽기를 원하지.’

여기서 나는 발상을 전환했다.

역으로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걸로 말이다.

나는 종종 죽음을 위장해서 적의 감시에서 벗어나곤 했다.

‘가사상태’ 특성은 이름 그대로 시전자를 반쯤 죽은 상태로 만드는 특성이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에서 플레이어가 사망하면 부활하기 전까지 시체가 제자리에 남는다. 그래서 내 시체가 남아도 적들은 이상한 점을 느끼기 어렵다.

시스템상 사망한 것과 동일한 판정을 받기 때문에 NPC들의 시야로는 영락없이 죽은 걸로 보인다.

예를 들어 메가콥의 정찰 용병 같은 경우는 내가 특성으로 죽은 척 위장한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하지 못한다.

그저 내 시체를 발견했다고 플레이어에게 보고할 뿐.

‘사실 시스템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으니 NPC 잘못만은 아니지.’

가사상태가 발동되면 시전자의 체력이나 상태가 전부 거짓으로 표시된다.

정보를 읽어내는 능력을 지닌 플레이어도 내가 진짜 죽었는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다.

시전자를 제외하고 가사상태를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은 특성을 무효화시키는 장비나 기술, 특성 등을 이용하는 것뿐이다.

해제 수단을 보유하지 않은 적들이 내 시체를 봤을 때 반응은 보통 두 가지로 나뉜다.

대부분은 그냥 자리를 뜬다.

나를 죽인 것으로 만족하고 가거나, 아니면 내가 뭔가 수작을 부릴 것이라 판단해 재빨리 자리를 벗어나려 한다.

경계하고 떠나는 자들이 딱히 소심하거나 겁쟁이인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도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평소 나는 언제나 적과 싸우기 전, 전장에 여러 가지 준비해둔다.

예상치 못한 곳에 둥지를 설치해 두고, 그곳에서 튀어나와 덮치거나 등등.

‘둥지 관련 특성 중 리젠 장소를 둥지로 바꾸는 특성이 있으니까.’

이런 여러 방법을 활용해서 역전승을 거둔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다 보니 나한테 많이 당한 플레이어일수록 더 신중해진다.

물론 시체에 인성질을 시도하려는 용감한 유저가 없던 것은 아니었다.

복수심에 차서 이성을 잃고 나를 괴롭히려 하는 유저들도 분명 존재했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

‘이에는 이, 인성질에는 인성질로.’

아무튼 내게는 적이 많았고, 그중에는 랭커에 준하거나 나보다 순위가 높은 플레이어도 있었다.

언제나 위험 속에 살아가던 내게 있어서 가사상태는 가장 유용한 특성 중 하나였다.

‘좋은 특성을 얻다니 운이 좋네.’

돼지고기 맛이 나던 기사에게 감사를 표한 나는 여기사와 플라즈마 런처를 짊어지고 이동했다.

내가 향하는 곳은 처음 내가 기사들을 유인해서 싸웠던 곳.

기사의 시체 4구가 남아 있으니 챙겨야 한다.

‘여기사는 애들한테 주고 나머지는 내가 먹자.’

가는 김에 숨겨뒀던 신호칩으로 새 미끼를 만들면 좋겠지만 하수도 상태가 이러니 어려울 것 같다.

주변 벽들 중 상당 부분이 붕괴하는 바람에 신호칩도 망가졌을 테니까 말이다.

‘어차피 사이킥 브레스의 영향 때문에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겠지만.’

장소에 도착한 나는 무너진 잔해를 치워서 시체들을 꺼냈다.

확실히 상급 강화복에 의해 보호받고 있다 보니 시체들의 상태는 양호했다.

나는 여기사를 근처에 던져두고 시체들을 들고 씹었다.

‘느긋하게 먹으면 좋겠지만 시간이 없어.’

언제 다른 적들이 이곳에 올지 모르니 서둘러야 한다.

‘같은 유전자를 썼나? 다 돼지고기 맛이네.’

돼지고기를 좋아하긴 하지만 연달아 똑같은 맛이다 보니 좀 질리는 느낌이다.

‘하나 남았는데 이건 그냥 애들 줄까?’

차라리 여기사를 내가 먹고 이 시체를 애들한테 갖다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시체를 두고 고민하는데 보조기관이 내게 신호를 보냈다.

‘이쪽으로 누가 오고 있다.’

나는 여기사와 남은 시체를 들고 물속에 잠수했다.

바닥에 바짝 몸을 붙이자 아슬아슬하게 등 부분만 빼고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주변에 잔해물이 많아서 다행이네.’

무너진 폐허로 위장해 숨어 있으니 멀리서 말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기사님들을 우리가 구하러 갈 필요가 있습니까?”

“기사가 뭐 만능인 줄 아냐? 걔네도 밥 안 먹으면 배고파 뒈지고, 건물 무너지면 깔려 뒈지고 똑같아.”

새로 나타난 사람들은 총 6명.

전부 방독면과 중급 강화복을 착용했고, 가우스 소총을 들고 있었다.

‘방위군이네.’

이곳은 티앤씨과 관리하는 우주 도시. 도시 치안과 방어를 담당하는 자는 당연히 방위함대 소속의 군인이지 기사단이 아니다.

‘역시 두 부대가 합동 작전을 펼치고 있어.’

고용인 수십 명을 부릴 때부터 그럴 것이라 짐작했는데 이제 확실해졌다.

저 군인들은 이 주변의 있던 기사들을 찾으러 이곳에 왔다. 하수도가 무너졌기 때문에 괜찮은지 확인하러 온 것이리라.

그들은 내가 옆에 있는지 모르고 지나갔다.

‘두 가문의 공동 작전이라.’

메가콥의 7대 가문들은 서로 사이가 나쁘다고 설정되어 있다.

권력의 정점인 CEO 자리를 두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CEO 후보를 낼 권리를 지닌 계급은 노블캐피탈 뿐이지만, 프라임캐피탈도 그들과 경쟁한다.

프라임캐피탈은 투표권만 지니고 CEO 후보를 낼 권리가 없기에, 언제나 노블캐피탈로의 승급을 꿈꾼다.

그러기 위해서는 위에 있는 5개의 가문 중 하나를 끌어내리고 자기가 올라가는 방법밖에 없다.

이렇다 보니 당연히 서로 피터지게 싸울 밖에.

‘이사회를 앞두고 모종의 이유로 협력하는 것이라 봐야겠네.’

에저튼은 프라임캐피탈, 티앤씨는 노블캐피탈.

아마 에저튼이 티앤씨에게 투표하는 대가로 둘이 뭔가의 계약을 맺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사회 개최지인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에 중대한 치안 문제가 생기면 밀약을 맺은 둘에게 불리해지니까 일부러 합동 작전을 펼치는 것일 터.

‘이 상황, 적절하게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사실 내가 처한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지금까지 기사 한 조를 전멸시키고 고용인 수십 명을 잡아먹었지만, 전황 자체는 여전히 내게 불리한 상황이다.

나의 존재는 저쪽에 이미 들켰고, 저쪽에게는 나를 단숨에 죽일 수 있는 무기들이 즐비해 있으니까.

‘기반 시설인 하수도 특성상 저쪽도 함부로 공격하지 못하겠지만….’

티앤씨 가문에서 나의 존재를 내버려 두는 것이 하수도를 파괴하는 것보다 더 손해가 된다고 판단하면 방위함대를 동원할 거다.

‘함포 사격은 사냥의 표상으로도 막을 수 없어.’

함선과 직접 싸우려면 특별한 특성이 필요하다. 안타깝지만 그것은 여기서 얻을 수 없다.

‘상황과 조건들을 한번 정리해 보자.’

하수도에서 내가 얻은 정보들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현재 나를 위협하는 적은 티앤씨와 에저튼, 두 가문이야.’

내가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이유는 빅이벤트에 앞서 치안을 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불안 요소인 나를 최대한 빨리 제거하기 위해 하수도에서 함께 작전을 펼치고 있다.

‘그 협력 관계를 파탄내야 해.’

애초에 메가콥 구조상 싸움이 없을 수 없다.

약간의 갈등만 생겨도 에저튼 가문과 티앤씨 가문의 우정은 크게 흔들릴 터.

물론 둘이 밀약 관계에 있는 이상, 나 하나로 인해 갈등의 골이 크게 깊어질 것이라 보기는 어렵다. 나 역시 거기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저들을 혼란에 빠지게 만드는 것으로도 충분해.’

그렇다면 어떻게 둘의 사이를 흔들어 놓을 수 있을까?

‘통신 상태가 불안정하니 정보 전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거고….’

마침 내게 방위군과 기사단을 이간질시킬 수 있는 도구가 있다.

‘런처랑 기사의 시체가 있지.’

나는 작은 팔로 런처를 작동시켰다.

1m가 넘는 길쭉한 총신 위에 달린 작은 단말기에 불이 들어왔다.

‘런처는 문제없고.’

기사의 시체도 확인해 보니 목이 부러진 것말고 다른 부분은 멀쩡했다.

가까이 와서 자세히 보지 않는 이상, 이상하다는 것을 못 느낄 정도였다.

‘좋아. 먹이는 여기에 두고.’

작전에 들어가기 앞서 나는 여기사의 팔과 다리를 모두 부러뜨렸다.

“으읍!”

투구 안에서 얕게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지만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았다.

죽여도 되는데 굳이 그러지 않은 이유는 하나다.

‘내가 죽이면 혹시 애들 성장 조건으로 카운트 안 될 수 있으니까.’

현실이지만 게임의 법칙을 따르고 있는 나와 달리 26호와 아드하이는 이 세계의 생물이다. 그래서 나와 동일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래도 모른다.

여기사를 물속에 잘 숨겨둔 뒤, 기사 시체와 런처를 들고 방위군을 따라갔다.

가는 길에 26호에게 미리 연락을 취해 놨다.

나의 ‘죽음’ 뒤에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예상보다 26호는 내가 죽는다는 사실에 매우 격렬하게 반응했다.

녀석은 내가 죽도록 내버려 둘 바에는 자기도 죽겠다고 했다.

‘의외로 죽음에 민감하네.’

정신적으로 성장해서 그런 것일까. 26호가 이렇게까지 싫어할 줄은 몰랐다.

나는 대신 녀석에게 맛 좋은 먹이를 갖다주겠다고 설득했다.

녀석은 먹이보다 내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는 것에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큰애기 안 돌아오면 나 정말 화낼 거야.」

26호는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파장을 보내지 않았다.

‘당연하지.’

다 죽지 않으려고 이러는 것인데 죽으면 무슨 소용이겠나.

그렇게 26호에게 계획을 설명한 나는 속도를 내서 군인들과의 거리를 좁혔다.

‘멀리는 못 갔네.’

상급 강화복을 입은 기사와 달리 저들의 이동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그들은 뒤에서 뭔가가 쫓아오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었다.

‘이쯤이면 되겠지?’

나는 그들과의 거리를 계산한 뒤, 기사의 시체를 적당히 세워 놨다.

갑주 형태의 강화복인 덕분에 서 있는 것처럼 꾸미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기사 뒤에서 나는 반쯤 잠수한 상태로 런쳐를 가동시켰다.

「Charging 10…20…」

반쯤 폐허가 된 하수도, 허리까지 오는 구정물들, 어둠.

그리고 그 안 어딘가에 숨어 있을 수수께끼의 괴물까지.

‘제정신 못 차리기 딱 좋은 환경이지.’

적들이 서로 반목하게 만드는 것으로만 끝낼 생각은 없다.

‘중요한 것은 행동, 그리고 결과야.’

난전을 유도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있어야 한다.

‘난전 중이라면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는 법.’

「Charging 40…70…」

가령 서로 런처를 난사하는 상황에 내가 나타난다면?

서로 싸우는 중에 내가 런처에 맞아 ‘죽는다’면?

‘나에 대한 추적은 그걸로 끝.’

하수도 합동 작전의 원인인 나는 소거되고, 기사단과 방위군 사이에 지울 수 없는 간극만 남게 된다.

게다가 적들에게 내가 죽었다는 확신을 준다면 나의 행동반경은 한층 더 넓어지리라.

‘옛날 기억이 떠오르네.’

예전에 밀림 행성에서 4개의 클랜과 싸웠을 때도 이랬었다.

적들의 전력은 끝을 모를 정도로 강대했고, 나는 그들에 비하면 나약한 개인에 불과했다.

내가 불리한 전투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은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전부 써먹었기 때문이다.

그 요인 중에는 나 자신의 죽음도 포함되어 있다.

「Charging 90…100%」

단말기의 숫자가 100이 되었을 때, 함선조차 파괴할 수 있는 첨단 병기가 군인들을 향해 불을 뿜었다.

-

“방독면을 썼는데도 냄새가 올라오는데 실화냐?”

“쿨럭, 게다가 왠지 분위기가 좋지 않습니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오한이 나는 것 같고….”

“야이 씨, 이런 엿같은 상황에서 꼭 그런 소리 해야겠냐?”

“저 이번 작전 끝나면 약혼녀한테 결혼하자고 할 겁니다.”

“저 또라이 새끼 또 지랄한다.”

“새벽마다 나가서 VR티비로 딸딸이나 치는 새끼가 약혼은 니미.”

“진짜입니다! 이곳 특수무역중심지는 아니지만 다른 행성에….”

병사들이 서로 잡답하던 중, 갑자기 뒤에서 녹색 빛이 날아왔다.

시리도록 창백한 녹색의 빔은 병사의 상반신뿐만 아니라 통로의 벽까지 가루로 만들었다.

“적습이다! 모두 엄폐!”

“엄폐하라!”

지휘를 맡은 군인이 외치자 다른 병사들도 민첩하게 무너진 하수도의 잔해 뒤로 몸을 숨겼다.

“씨발! 방금 그거 뭐야?”

“부, 분대장님! 플라즈마 런처입니다!”

“뭐? 아군 오사야?”

“그럴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런처는 소형 컴퓨터의 관리를 받으니까 말입니다.”

그 말은 즉 저쪽에서 노리고 그들을 쐈다는 뜻.

분대장은 엄폐물에서 살짝 고개를 빼서 적의 모습을 확인했다.

어둠 속이지만 은색의 갑주는 확실히 티가 났다.

바라지 않던 최악의 상황을 마주한 그는 욕지기를 내뱉었다.

“…저 애미 없는 기사 새끼들이 미쳤나? 왜 우릴 쏘는 거지?”

“괴물로 잘못 봤거나 아니면….”

“기다려 봐.”

부하의 말을 끊고 분대장이 엄폐물 뒤에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봐! 이쪽은 방위함대 소속이다! 아군이라고!”

그의 목소리가 하수도에 메아리치며 울렸다.

그의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저쪽의 어둠 속에서 다시 녹색 빛이 번뜩였다.

“니미씹!”

분대장이 급히 하수도의 구정물 속에 엎드렸다. 간발의 차로 그의 등 위로 플라즈마 빔이 스쳐 지나갔다.

“분대장님!”

“개씨발놈들이!”

그는 죽지 않았지만 대신 함께 엄폐하고 있던 부하는 그렇지 못했다. 부하의 몸은 고열의 에너지에 의해 엄폐물과 함께 산산이 분해되었다.

“기사와 싸우기에는 화력이 부족하다! 내가 엄호할 테니 모두 후퇴하라!”

“알겠습니다!”

분대장이 가우스 소총을 적에게 난사하는 동안 다른 군인들이 엄폐물에서 튀어나와 어둠 속으로 뛰어갔다.

“어느 팀이든 상관없으니 가서 알려! 여기 기사가 미쳤…아악!”

뒤에서 들린 비명 소리.

병사들은 그들의 리더가 어떤 꼴이 됐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았다.

“부, 분대장님!”

“씨발, 분대장님은 틀렸어! 빨리 달려 이 새끼들아!”

남아 있는 병사들 중 가장 높은 계급을 가진 이가 동료들을 이끌고 통로를 달렸다.

고요한 폐허에 물이 튀는 소리, 병사들의 헐떡이는 소리로 가득 찼다.

동료 둘에 분대장의 죽음으로 그들의 감각은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알 수 있었다.

자기들의 발소리 중에 뭔가 이질적인 소리가 섞여있다는 것을.

“악!”

비명 소리에 뒤이어 물이 크게 튀는 소리가 들렸다. 동료들 중 맨 뒤에 있던 자가 넘어졌다.

동료들이 급히 돌아봤지만 그는 순식간에 물속에 빨려 들어가서 보이지 않았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가우스 소총만 주인을 잃고 둥둥 떠 있었다.

“씹!”

“달려!”

“씨발씨발씨발씨발!”

도망치는 병사들은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둠, 기습, 동료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좋지 않은 몸 상태.

이 모든 요건이 어우러져서 잘 훈련된 병사들을 오합지졸로 만들었다.

정신없이 달리는 그들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래서일까.

분대장의 비명 소리 이후로 플라즈마 빔은 더 이상 날아오지 않았지만, 그들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던 그들은 마침내 다른 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누구냐!”

“사, 살려 줘!”

“응? 네가 왜 여기 있어? 어어? 너희 다 3팀 캠프잖아?”

도주한 그들이 마주한 팀은 1팀 소속의 혼성 수색대였다.

방독면과 중급 강화복을 입은 병사들의 중간마다 은색의 갑주를 입은 기사들의 모습이 보였다.

“히익?!”

“얘네가 단체로 미쳤나? 갑자기 왜 이래?”

기사들의 모습을 본 도주자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혼비백산한 그들을 두고 1팀의 방위군들이 난처해하고 있을 때, 수색대의 리더인 위기관리부팀장이 나타났다.

“무슨 일이지?”

“이들은 3팀의 탐사대원들입니다. 갑자기 이곳에 와서….”

“부, 부팀장님! 살려주시기 바랍니다!”

“음? 놈을 발견했나? 진정하고 말해 봐라.”

위기관리부팀장이 침착하게 그들을 다독였다.

도주한 병사들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는지 그들 중 제일 계급이 높았던 자가 기사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저들이! 저 기사들이 플라즈마 런처로 우리를 공격했습니다!”

“뭐?”

“여섯 중에서 세 명이 전사했습니다! 모두 기사의 공격으로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부팀장이 기사들의 리더인 비커스 부단장을 쳐다 봤다.

비커스는 서둘러 표정 관리를 했지만 부팀장은 놓치지 않았다.

비커스의 얼굴에 떠올랐다가 금세 사라진 감정. 그것은 놀라움보다는 난처함에 가까웠다.

마치 숨겨놨던 비밀을 들켰을 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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