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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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키라 님. 곧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에 도착합니다.”
신체를 조율하는 특수 캡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아키라 유진은 하수인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캡슐이 열리고 그가 몸을 일으키자 젊은 여인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지만 눈에 어떠한 감정도 담겨 있지 않은 여성.
그녀는 유진 가문의 그림자 중 코드 블랙의 지위를 받은 자로 아키라의 최측근 중 한 명이다.
블랙이 아키라에게 수건과 검은색 음료를 건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항해를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예정일보다 하루 늦겠구나.”
중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왜 늦었는지는 묻지 않았다.
어차피 그림자들이 알아서 잘 처리했을 테니까.
그들이 타고 있는 이 함선, 유진 가문의 기함 ‘천검’에는 아키라를 호위할 그림자가 셋이나 탑승하고 있었다.
곁에 있는 코드 블랙 말고도 코드 레드, 코드 블루가 배 안 어딘가에서 경계 업무를 수행 중이었다.
아키라는 입을 닦은 수건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캡슐이 있는 방을 나섰다.
다른 시종들에게 뒤처리를 맡긴 블랙이 아키라의 뒤를 따라갔다.
블랙과 함께 함교로 향해 걷던 그가 문득 입을 열었다.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 내가 가주가 되기 전에도 한창 부흥하는 곳이었지.”
“그렇습니까?”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달이 차면 기울기 마련이니라.”
아키라 유진이 CEO를 세 번씩이나 연임하기 전, 메가콥의 왕좌를 가장 오랫동안 차지했던 가문은 두 곳이었다.
안드로이드와 AI 개발로 유명한 베다 가문과 강화복으로 유명한 가르멜다 가문.
메가콥 초창기에는 베다 가문이 CEO 자리를 독점했지만 스타유니언의 태동 이후 급격히 몰락해버렸다.
현재의 베다 가문은 노블캐피탈의 말석을 겨우 유지하는 형국이었다.
반면 당시 가르멜다는 에저튼 가문 장로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그 성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가르멜다 다음으로 강대한 힘을 가졌던 가문이 티앤씨였다.
우주 개발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가문이다 보니 티앤씨는 노블캐피탈에서 상위권 지위를 놓친 적이 없었다.
“당시 유진 가문은 그리 영향력이 있지 않았단다. 하층민들의 먹을 거리나 챙겨 주는 가문이라고 폄하하는 자들도 있었다.”
약간의 과장이 섞여 있긴 했지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낮은 캐피탈들의 생계 부문에 유진 가문이 파는 값싼 유전자 조작 식품이 미치는 영향은 결코 작지 않다.
실제로 메가콥 식량 공급률 중 유진 가문의 점유율은 거의 절반에 달할 정도로 높다.
다만 메가콥에서의 중요도와 별개로 유진 가문은 다른 노블캐피탈을 대상으로는 영향력이 부족한 편이었다.
상위 캐피탈로 올라갈수록 유전자 조작 식품 소비량이 급격히 줄어들기 때문이다.
덕분에 CEO를 뽑는 이사회에서 유진 가문은 번번이 고배(苦杯)를 마실 수밖에 없었다.
그런 유진 가문이 다른 가문들을 치고 나간 시점이 헐크 뮤턴트를 전선에 투입하기 시작했을 때부터였다.
전대 가주들은 유전자 개조 병사의 가능성에 주목해 전쟁에 적극 활용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그리고 아키라 바로 앞 세대의 가주에 이르러 마침내 그 결실을 본 것이다.
그 상황에서 새 가주가 된 아키라는 헐크 뮤턴트를 다른 가문에 판매한다는 전략을 내세워 CEO자리를 얻어냈다.
물론 비밀병기나 다름없는 헐크 뮤턴트를 판다는 아키라의 결정에 가문 내에서 반발이 적지 않았지만, 그는 걱정하지 않았다.
유진 가문의 유전자 조작 기술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라 해도 무방했으니까.
다른 가문에서 독자적으로 헐크 뮤턴트 개발을 시도했지만 전부 기술 부족으로 실패했다.
“최근 에저튼의 겁쟁이가 장난질을 하는 것 같지만 어림없지.”
아키라는 그림자들을 활용해서 메가콥 내 여러 가문을 정찰하고 있었기에 에저튼의 가주가 무엇을 계획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은사자기사단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겨우 유전자 두, 세 가지를 섞고 유전자 기술의 정수니 뭐니 하고 떠드는 꼴이 참 우습지 않느냐?”
덴버가 듣는다면 몹시 분개할 만한 말이었지만 아키라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었다.
애초에 지금 그의 앞에 서 있는 코드 블랙만 해도 그렇다.
그림자에 소속된 자들은 전원이 수십 종류 이상의 유전자가 합성된 궁극의 생물 병기니까.
“티앤씨의 뱀 녀석은 에저튼을 통해 알맹이만 빼먹을 생각인 것 같지만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다. 차라리 우리 유진 가문을 지원했으면 오히려 나았을 것을.”
물론 CEO의 자리를 누구보다 탐내는 사담이 아키라와 결탁할 가능성은 낮았다.
설령 그가 요청한다고 해도 아키라가 들어줄 리도 없고 말이다.
그렇게 대화 아닌 대화를 나누는 동안, 둘은 함교에 도착했다.
함교에서 업무에 집중하던 군인들이 아키라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큭큭큭, 이번 이사회는 참으로 즐거울 것 같구나.”
함교의 옥좌에 앉은 아키라는 기대된다는 듯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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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보관소라. 여기도 오랜만에 오네.’
푸른색 조명 아래, 곳곳마다 해부된 생물의 시체들이 보인다.
일부는 스테인리스강 테이블들 위에 쌓여 있었고, 사람의 시체처럼 보이는 것들이 비닐로 진공 포장된 상태로 천장에 달린 갈고리에 걸려 있었다.
특유의 서늘한 느낌의 조명과 오싹한 풍경은 게임에서 보던 그대로였지만, 두 가지 차이점이 있었다.
벽마다 달린 냉방기로부터 나오는 차가운 바람, 그리고 시체들로부터 흘러나오는 냄새.
그 감각은 게임에서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실제로 보니까 이런 느낌이구나.’
예전에 여기서 시체 속에 숨어 있다가 유저들을 습격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유저들이 나보고 그랬다.
왜 매번 무서운 장소에서만 튀어나오느냐고.
그때는 뭔 시답잖은 항의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까 확실히 항의할 만한 분위기다.
“지, 지시하신 유전자 목록입니다.”
감회에 젖어 있는데 기생충의 지배를 받는 해부팀장이 나에게 단말기 패드를 내밀었다.
유전자보관소에 뭐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이곳에 오기 전 그에게 요청했다.
‘제일 먼저 먹어야 할 것부터 골라야 해.’
만에 하나 내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발생해서 유전자 샘플을 획득하기 어렵게 될 수도 있다.
그러니 필요한 것부터 먼저 골라서 섭취해야지 나중에 불상사가 발생해도 손해가 적다.
‘어디 보자.’
나는 작은 팔을 이용해 패드에 출력된 목록을 확인했다.
‘흠.’
생각보다 보유한 생물종 자체가 다양하지 않다. 동일한 생물로부터 채취한 샘플만 많을 뿐.
‘그게 꼭 나쁜 것은 아니지만.’
내가 인간만을 통해 얻은 특성만 해도 한 두 개가 아니다.
다른 생물들도 마찬가지다.
생물의 가짓수가 적다고 해도 하나의 생물에게서 얻은 수 있는 특성은 여러 가지다.
‘좋은 특성을 가진 생물의 샘플을 노려야겠네.’
나는 목록을 천천히 내리며 꼼꼼히 확인했다.
처음에 목록을 봤을 때는 영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도중 내게 필요한 특성을 보유한 생물 두 종류가 눈에 띄었다.
‘메탈릭 그렘린이 있네? 그리고….’
내 주의를 사로잡은 이 생물의 샘플은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이곳에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샘플이다.
‘메탈릭 그렘린은 이해가 간다만.’
우주 도시에게 큰 위협이 되는 생물의 샘플을 왜 보유하고 있는지는 얼추 짐작할 수 있었다.
메탈릭 그렘린은 종족 전체가 ‘왜소화(矮小化)’라는 부정적 특성을 갖고 있다.
에이모프가 타종족과 교류할 수 없다는 핸디캡이 있듯이 메탈릭 그렘린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키가 1m 이상 자라나지 못한다.
그나마 킹 그렘린이라는 상위종의 키가 1m 50cm 정도 될까.
‘아마 고용인들에게 왜소화 특성을 주입시켜서 약하게 만들려는 의도겠지.’
메탈릭 그렘린은 그렇다 치고, ‘그것’의 샘플은 티앤씨가 어떻게 구했는지 의아할 정도다.
「이·거·어·떻·게·구·했·어·」
“그건 밀수한 동물을 해부하면서 채취해 둔 샘플입니다.”
세상은 넓고 기인은 많다더니.
‘그것’을 밀수하려고 한 사람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녀석의 덩치를 생각해 보면 항만 지구의 컨테이너보다 족히 5배 이상 큰 컨테이너를 준비해야 할 거다.
‘하긴 마운틴크롤러에 갤러곤까지 밀수하는 사람이 있는 마당에.’
나는 대충 납득하고 나머지 목록도 살펴봤다.
두 생물 이외에 딱히 중요한 특성을 보유한 생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그것의 유전자를 얻는다면 어마어마한 성과야.’
그도 그럴 것이 해당 생물은 새 타입 해금과 관련된 특성들을 지니고 있다.
그 타입을 얻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아진다.
‘우주비행이 가능하게 해주는 특성이니까.’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샘플 30개 정도를 뽑아서 해부팀장에게 지시했다.
역시 내 예상대로 ‘그것’의 유전자 샘플을 본 해부팀장이 난색을 표했다.
“이, 이 생물 말씀입니까?”
「그·래·」
“희귀 생물종 샘플 5개면 허, 허가가 필요합니다. 차라리 다른 것을….”
「안·돼·」
다른 것을 다 포기하더라도 ‘그것’만은 반드시 뽑아야 한다.
결국 해부팀장은 울상이 된 채 냉동보관소를 나섰다.
“저, 저희는 뭘 하면 됩니까?”
「대·기·」
아무 일도 안 해도 된다는 말에도 연구원 3명의 얼굴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안타깝지만 그들에게 남은 미래는 하나밖에 없다.
사냥의 표상 후유증을 잠재우기 위한 제물.
‘그나저나 연락 온 컬트는 어떻게 꾀어낼까.’
먹는다면 표상의 효과가 지속되고 있을 때 먹는 것이 좋다.
귀한 초능력 계열 특성을 얻을 기회니까 말이다.
‘내 기억에 각 감시팀마다 정원이 총 3명이었는데.’
셋 다 동시에 끌어낸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그렇게 될 가능성은 낮다.
‘한 명은 반드시 관리실에 대기하는 것이 원칙이니까.’
원래 생각했던 방법은 연구원을 이용해 냉동보관소로 유인, 찾아온 컬트에게 기생충을 주입할 계획이었다.
그랬는데 목록을 보고 나니 생각이 약간 바뀌었다.
‘메탈릭 그렘린의 특성들을 얻는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갈 수 있어.’
메탈릭 그렘린에게는 EMP 같이 주변에 있는 기계를 고장 내는 특성이 있다.
그 특성을 얻는다면 컬트 한 명만이 아니라 관리실 하나를 장악하는 것도 어렵지 않으리라.
그래서 일부러 좋은 특성을 뽑을 확률을 올리기 위해 한 생물당 샘플을 여러 개씩 요청했다.
메탈릭 그렘린과 ‘그것’의 샘플은 제일 중요하다 보니 있는 것을 다 가져오라고 했다.
메탈릭 그렘린의 샘플이 8개, ‘그것’의 샘플이 8개. 둘이 합쳐 16개의 샘플이 보관소에 저장되어 있었다.
즉 내게 해당 생물들의 특성을 획득할 기회는 각각 8번이다.
‘물론 전부 왜소화만 뜨면 말짱 꽝이지만.’
물론 왜소화 특성을 획득해도 다양한 전략을 펼칠 수 있다.
해츨링 시절 했던 것처럼 환풍구를 통해 돌아다니거나 인간 시체 속에 숨어 있다가 기습하거나 등등.
이곳 모뉴먼트에는 작은 몸집으로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이 많으므로 이 건물을 공략하는 데 왜소화 특성은 나쁘지 않다.
‘문제는 이 게임 특성상 한 번 획득한 특성은 버릴 수 없다는 거지.’
초월 시스템으로 왜소화 특성을 없애지 않는 이상, 승천 때까지 나는 1m의 크기를 넘을 수 없게 된다.
앞으로 수많은 적과 맞닥뜨려야 하고 개중에는 힘 싸움으로 제압해야 할 적도 존재한다.
작은 키로 혼자 해쳐나가기에는 결코 쉽지 않다.
‘어차피 획득할 생각도 없지만.’
“가져왔습니다.”
그렇게 컬트를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마침 해부팀장이 돌아왔다.
그가 샘플이 담긴 캡슐을 스테인리스강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좋아. 그럼 시작해볼까.’
나는 사냥의 표상을 활성화했다.
“히익?!”
내 몸이 급격히 자라나자 냉동보관소 안에 있던 연구원들이 숨을 삼켰다.
외피가 눈을 덮고 머리의 뿔이 더 크게 자라났다.
신체는 크게 부풀어 올라서 발부터 머리까지의 크기가 3m에서 5m에 가깝게 거대해졌다.
꼬리도 신체 변화에 맞춰서 거대해진 덕분에 몸과 꼬리의 길이를 합치면 거의 10m에 육박했다.
전투용 팔에는 인간으로 치면 손목 부분에 방패와 비슷한 외피가 자라났고, 등에서는 뼈 칼날이 달린 팔 2개가 새로 튀어나왔다.
「그르르르르」
변화를 마친 나는 몸 전체에서 느껴지는 고양감에 작게 으르렁거렸다.
내 변신에 압도된 연구원 중 한 명이 졸도할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신음했다.
“으으으….”
그리고 피어오르는 암모니아 냄새.
하지만 그를 탓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의 반응을 무시한 나는 작은 팔을 이용해 샘플이 담긴 캡슐을 집어 들었다.
캡슐의 표면에는 ‘스카이웨일’이라는 글자가 작게 인쇄되어 있었다.
‘그럼 새 타입을 해금해볼까?’
내게 가장 필요한 특성을 가진 ‘그것’, 스카이웨일의 유전자 샘플을 캡슐째로 입에 털어 넣었다.
캡슐이 입안에서 깨지고, 샘플에 담긴 유전자 정수가 내 몸으로 스며든다.
이어서 평소 새로운 특성을 얻었을 때 느껴지는 특유의 열기가 느껴졌다.
‘좋아. 성공….’
「포식 효과 발동! ‘우주비행(0.5)’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스카이웨일’의 생물 특성 중 ‘우주비행(0.5)’를 탈취.」
「‘우주비행(0.5)’을 적용하시겠습니까?」
「추신: 치트는 허용하지 않습니다.」
「긴급 메시지가 도착했습니다.」
포식 효과가 뜰 때마다 항상 나타났던 반투명 텍스트박스.
거기에는 새로운 말이 추가되어 있었다.
‘뭐? 치트는 허용 안 한다고? 설마?’
나는 서둘러 긴급 메시지를 열람했다.
「‘사냥의 표상’ 적용 중 샘플에 대해 포식 효과가 발동하면 0.5 분량의 유전자 정수만이 획득됩니다. 특성을 완전히 얻기 위해서는 동일한 샘플에서 동일한 특성을 대상으로 포식 효과가 2회 발동해야 합니다.」
「추신: 초월 시스템의 밸런스 조정을 위함이니 참고 바랍니다.」
‘미친.’
이곳에 온 이후 여러 위기가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신체 때문에 당황하기도 했고, 초반에 만날 리 없는 강적을 만나는 바람에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 치기도 했다.
또한 처음 보는 시스템의 등장에 당황하거나, 게임과 다른 상황이 닥쳐서 위험에 빠진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에이모프 중 유일하게 랭커에 진입한 플레이어다.
나는 오랜 시간 동안 에이모프를 플레이하면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적극 활용해서 난관을 돌파해 왔다.
그래서 망각하고 있었다.
원래 스페이스 서바이벌이 아주 지랄 맞은 게임이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