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5
반투명한 보라색의 채찍이 대리석 블록으로 이루어진 도시의 표면을 도려낸다.
나는 발을 굴러 뒤쪽으로 크게 뛰었다.
채찍이 공기를 가르며 내 발밑으로 지나간다.
나 또한 뒤로 물러나면서 꼬리를 털어서 반격했다.
화살비처럼 쏟아지는 가시털들.
그녀가 들고 있는 채찍이 자유의지를 지닌 것처럼 스스로 방향을 틀어 가시털들을 쓸어 버렸다.
그 사이 땅에 착지한 나는 잘리지 않은 위쪽 왼팔에서 흡혈 촉수를 뽑았다.
촉수가 창처럼 쏘아져서 그녀의 발아래에 꽂혔다.
나의 공격을 예측한 것인지 그녀는 어느새 옆으로 피한 뒤였다.
그녀가 채찍으로 촉수를 잘라 내기 전에 나는 재빨리 촉수를 회수했다.
‘강하다.’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차례 공수를 교환했지만 만만치 않은 적이라는 것이 여실히 느껴진다.
‘보유 능력이 한두 개가 아니야.’
현재 보여 준 능력은 두 가지뿐이지만 저게 전부는 아니리라.
‘야크 뿔이 생기는 것을 봤을 때 컬트는 아닌데.’
컬트에게는 뿔을 인위적으로 깎아서 없애는 것 말고는 달리 숨길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즉, 적은 컬트 유전자를 이식받은 유전자 개조 인간.
나는 그녀와 비슷한 존재를 안다.
스페이스독과 함께 연구선을 습격한 자이자, 이 우주도시에 테러를 가하려고 했던 여자.
‘시현 유진.’
그녀는 죽어서 내 몸의 양분이 되었지만, 이제는 유진 가문이 나타나 나를 공격하고 있다.
‘하긴 지금은 이사회 중이니까.’
노블캐피탈 유진 가문 사람들이 이곳에 온 것은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물론 이 넓은 도시, 그것도 모뉴먼트도 아닌 일반 주택 구역에서 만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나를 포획한다고 했지.’
왜 나를 노리는지는 모르겠지만 대략 짐작은 간다.
해부팀장 집 앞에 온 것도 아마 나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이리라.
‘좀 더 몸을 사릴 걸 그랬나.’
잠깐 후회가 들었지만, 나는 고개를 털어서 상념을 떨쳐냈다.
지금은 전투에 집중해야 할 때다.
‘당장 확인되는 것은 변신 능력하고 사이킥 윕. 그리고 내가 모르는 추가 능력이 있어.’
나는 잘려 나간 팔의 단면을 슬쩍 살펴봤다.
재생력 특성 덕분에 단면 자체는 아물고 있는 상태지만 팔이 새로 돋아나려면 시간이 제법 걸릴 거다.
‘사이킥 윕치고는 너무 강력해.’
내 유령 발톱의 재료로 쓰인 특성인 사이킥 윕은 보통 중거리 견제기로 사용된다.
수십 미터 밖에서 내 팔을 자르고 도로를 걸레짝으로 만들 만큼 강력한 기술이 아니다.
‘특성과 기술을 강화시키는 보조능력이 있어.’
그리고 그 수준은 내가 가진 유일 특성에 버금갈 정도로 강력하다.
이 정도로 강화시키려면 일반적인 보조능력으로는 어림없으니까.
‘이대로는 안 돼.’
아무래도 ‘통찰’을 써야할 것 같다.
전에 윌리엄을 잡아서 얻은 통찰 특성은 적이 보유한 장비, 기술, 특성 등 중 일부를 무작위로 보여 준다.
하루 5회 제한이라 아껴 쓰려고 했지만 내가 상대하는 적은 강적이다.
나는 통찰을 활성화했다.
내 눈에서 보라색 안광이 피어오르고, 적이 가진 정보가 반투명 텍스트박스로 정리되어 내 앞에 떠올랐다.
「이름: 코드 블랙(본명 ■■ ■■)
종족: 인간(유전자 개조 상태)
상태: 강화(사이킥 마스터, 용인화(龍人化), ■■ ■■)
착용 장비: ■■ ■■■■(유일급)
보유 기술: 사이킥 윕, 사이킥 마스터, 신체 변형, ■■■■, 용의 심장, ■■ ■■■, 이외 다수…)
정보가 떠오르는 동안 적, 아니 코드 블랙으로부터 보라색 채찍이 날아왔다.
바닥에 바짝 엎드려 채찍을 피해낸 나는 그 자세 그대로 입을 크게 벌렸다.
내 목 안쪽에 있는 발화기관이 활성화되며 거대한 불길을 쏟아냈다.
“불이라. 이런 것으로는 저를 해칠 수 없습니다.”
도로 위를 태우는 화염 너머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나도 알아.’
불과 연기는 눈속임.
나는 시꺼먼 연기 속에 가시털을 쏘아낸 뒤,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내달렸다.
그녀의 채찍이 가시털을 튕겨 내는 동안 나는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나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코드 블랙도 시현 유진과 똑같이 갤러곤의 유전자를 이식받았어.’
그것도 화이트 갤러곤보다 더 상위에 있는 존재인 블랙 갤러곤의 유전자를 말이다.
그녀가 가진 기술 중 용의 심장은 블랙 갤러곤 이상의 갤러곤에게서만 나오는 특별한 기술이다.
용의 심장 기술을 보유하면 ‘용인화’ 라는 특수 상태가 되는데, 효과는 내가 가진 사냥의 표상 효과랑 비슷하다.
‘보유한 사이킥 파워 기술 효과 강화, 급속 충전.’
사이킥 파워 기술만 강화시킨다는 부분만 봐서는 사냥의 표상보다 별로인 것처럼 보이지만, 중요한 것은 급속 충전 부분이다.
용의 심장이 있다면 막대한 정신력과 에너지가 소모되는 사이킥 브레스 같은 기술을 난사할 수 있다.
‘사이킥 마스터에 용인화라. 어쩐지 지나치게 세다고 생각했는데.’
사이킥 마스터는 야크 뿔을 가진 컬트에게 자동으로 부여되는 일종의 패시브 효과다.
근접 계열, 원거리 계열, 버프 계열, 군중제어 계열의 사이킥 파워 특성과 기술을 강화시켜주는 효과가 있다.
두 가지 기술로 이중으로 강화된 상태니까 저 말도 안 되는 위력도 납득이 간다.
또한 블랙은 한 번에 두 가지 이상의 기술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다.
‘용인화 상태에서 사이킥 파워 기술을 쓰고 있으니까.’
시현 유진과 싸울 때 나는 그녀가 여러 능력을 한 번에 쓸 수 없다는 점을 노려 승리를 거두었다.
그 전략을 블랙에게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
‘게다가 통찰로 안 보이던 강화 상태에 유일급 장비도 있었어.’
강화 상태는 모르겠지만 유일급 장비는 뭔지 짐작이 간다.
검은색 상복 모양에 유일 등급의 장비라면 내가 아는 바로 딱 하나밖에 없다.
‘블랙 슈라우드.’
컬트만 얻을 수 있는 유물급 강화복 중 하나로 착용자는 3일에 한 번은 죽음을 회피할 수 있다.
전신을 가루로 만드는 공격을 맞아도 쿨타임 상태만 아니면 무조건 살아난다.
‘즉 내가 블랙을 이기려면 두 번 죽여야 한다는 거지.’
보유한 기술이든 장비든 이 몸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적이다.
시현 유진이랑 싸울 때처럼 사이오니움이 있으면 모를까, 이곳에는 그 용액이 없다.
‘사냥의 표상이 필요해.’
지금은 후유증을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인근에 있는 아무 집의 문을 따고 들어간 나는 서둘러 사냥의 표상을 활성화했다.
‘통찰로는 못 봤지만 추적 능력도 있을 거야.’
몸이 전투에 최적화된 모습으로 변하는 중에도 나는 보조기관으로 주변을 끊임없이 살폈다.
‘온다.’
벽 너머로 블랙이 가까워지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그녀의 몸에서 강렬한 사이킥 파워가 뿜어져 나오는 것도.
‘이런!’
채찍이 벽을 후려치자 집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이킥 윕은 집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모자라 가구들을 박살 내며 내게 쇄도했다.
‘큭!’
아슬아슬하게 변이가 완료된 내 머리를 채찍이 강타한다.
플라즈마 런처를 맞았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었다.
다른 점이라면 그때는 사냥의 표상 상태가 아닌 채로 맞았다는 것.
지금은 아니다.
‘버틸만해.’
맞은 자리의 외피가 뜯겨나갔지만 치명상은 아니다. 이 정도 상처는 강화된 재생력 효과로 금방 치유된다.
나는 다리에 힘을 준 다음 바닥을 강하게 박찼다.
내 몸이 무너지는 집을 뚫고 나가 적을 향해 날아간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였는지 그녀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린다.
그녀의 오른손이 우아하게 흔들리고 채찍이 나의 옆구리를 노린다.
나는 사냥의 표상 효과로 팔의 손목 부분에 생긴 방패 모양의 외피로 사이킥 윕을 방어했다.
팔에서 금속판을 긁는 소리가 나며 불꽃이 튄다.
강화된 사이킥 윕이라 해도 타입, 특성, 사냥의 표상 이렇게 세 가지 효과로 강화된 내 외피를 뚫을 수는 없었다.
“…제법.”
내 뿔이 그녀의 복부를 꿰뚫기 직전, 그녀의 왼손이 활짝 펴졌다.
그와 동시에 내 몸이 허공에 고정된 듯 멈추더니 뒤로 크게 퉁겨져 나갔다.
무형의 힘에 튕겨지면서도 나는 촉수를 뻗어내 그녀를 후려쳤다.
그녀는 내가 반격할 것이라 짐작했는지 몸을 옆으로 띄워 내 촉수를 간발의 차로 피해냈다.
한차례의 격돌 끝에 손해를 본 것은 내 쪽이었다.
나는 무너지는 중인 집 안에 처박혔다.
내 머리로 부서진 목재 가구의 잔해와 천장의 콘크리트 더미가 쏟아졌다.
‘쯧.’
야크의 뿔을 갖고 있어서 짐작하긴 했지만, 그녀는 방어용 초능력 기술도 갖고 있었다.
방금 그녀가 사용한 기술은 리플렉션.
바라보는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반사시키는 사이킥 파워 기술이다.
모든 공격을 반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고, 사이킥 파워 공격은 막을 수 없다.
문제는 적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쉽지 않겠는데.’
리플렉션을 뚫으려면 사이킥 파워 공격으로 정면을 노리거나, 사각을 노려야 한다.
현재 내가 가진 초능력 계열 특성 중 공격 특성은 단 하나.
괴물의 촉수로 쓰는 사이킥 브레스뿐.
‘쉽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나는 폐허더미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블랙이 내가 있는 위치를 정확히 노리고 채찍을 휘둘렀다.
추적 능력을 갖췄다고 확신한 나는 채찍을 피한 뒤, 무너진 더미 속에 있는 목재 테이블을 들어서 그녀 쪽으로 던졌다.
“잔재주는 소용없습니다.”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두 동강 나는 테이블.
‘잔재주라니.’
다 필요한 작업이다.
나는 건물 폐허를 빠져나와 달렸다. 내 뒤에서 그녀가 채찍을 소환한 상태로 쫓아왔다.
블랙 슈라우드의 강화 효과 때문인 것인지 신체 능력을 상승시키는 기술이 있는 것인지 그녀는 무리 없이 나를 쫓아오고 있었다.
긴 채찍이 뱀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내 등을 후려친다.
도망치는 중에도 보조기관에 감각을 최대한 집중하고 있었지만 역시 완전히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외피가 부서진 바람에 피가 줄줄 흘렀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버텨야 해.’
유인하려면 약해 보이는 모습이 가장 효과적이다. 죽거나 전투에 불리할 정도의 치명상만 아니라면 문제없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맨정신에 등이 찢어지는 통증은 참기 힘들었지만.
‘고통 경감이 있어서 다행이야.’
특성이 없었다면 꼴사납게 비명을 질렀을 거다.
“이것으로는 부족합니까?”
그렇게 말한 블랙이 이번에는 왼손에서도 사이킥 윕을 뽑아 들었다.
머리가 두 개 달린 뱀이 쉭쉭 거리며 위협적인 소리를 낸다.
‘이런.’
저건 예상 못 했다.
원래는 지구 내의 지하철역까지 달리려고 했다.
하지만 저 공격을 연달아 맞는다면 유인 작전이 시작하기도 전에 내 몸은 완전히 만신창이가 될 거다.
‘지하실로 가자.’
나는 방향을 틀어 근처에 있는 집으로 돌진했다.
벽을 부수고 안에 들어가자 있던 컬트가 나를 보고 소리를 빽 지른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내 뒤에서 비명을 지르며 야단법석을 떨던 컬트는 블랙이 날린 사이킥 파워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계단 위로 피가 후드둑 쏟아지고 이어서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결국 짐승은 짐승입니까? 도망쳐도 하필 막다른 곳을 택하다니.”
계단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 나는 꼬리를 털어서 가시털을 위에다 쐈다.
“소용없습니다.”
그녀는 날아드는 가시털을 리플렉션으로 튕겨 냈다.
목표를 잃은 가시털들이 그녀 머리 위에 있는 천장을 비롯해 이곳저곳에 박혔다.
“데려가기 전, 약간의 교육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녀가 계단을 밟고 내려온다.
어두컴컴한 지하실에서도 그녀의 머리에 있는 뿔은 보랏빛으로 선명히 빛난다.
마치 그 어떤 것도 자기를 손상시킬 수 없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듯 말이다.
‘그 오만함, 과연 어디까지 갈까.’
지하실 구석에서 미리 자리를 잡고 있던 나는 준비했던 사이킥 브레스를 발사했다.
“?!”
괴물의 촉수로부터 모인 보라색 태양이 섬광을 발한다.
순수한 사이킥 파워의 정수가 구체 형태에서 길게 당겨지면서 열선이 된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열선이.
“큿!”
그녀가 사이킥 윕을 해제하고 양손을 들어 급히 열선 쪽을 향한다.
그녀의 손에서 검은색 구체가 생기더니 내가 쏜 사이킥 브레스와 동일한 형태의 열선이 되었다.
보라색 용의 힘과 검은색 용의 힘이 지하에서 격돌했다.
지하실뿐만 아니라 행정 지구 전체의 지반이 크게 흔들렸다.
엄청난 사이킥 파워의 집중에 지하실을 둘러싼 콘크리트와 철근들이 그대로 먼지로 화했다.
‘으윽!’
격돌로 인한 파장만으로도 내 외피가 벗겨지고 있다. 산성피는 흘러내리자마자 사이킥 파워의 영향에 의해 증발해 버리고, 괴물의 촉수 끝부분은 갈라지다 못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크으윽!”
나뿐만 아니라 그녀도 극심한 통증을 느끼는 것인지 표정이 크게 일그러졌다. 블랙 슈라우드로 보호되는 몸은 멀쩡했지만 브레스를 쏘고 있는 양손은 피투성이었다.
그렇게 나와 그녀가 쏜 사이킥 브레스는 누구 하나가 우열을 점하지 못하고 그대로 공멸했다.
하지만 누군가가 엉망이 된 지하실 폐허 위에 서 있는 우리를 보면 필시 그녀가 이겼다고 생각할 거다.
온몸의 외피가 거의 다 뜯겨져 나간 나와 손바닥을 제외하고 멀쩡한 그녀.
누가 봐도 우열에 있는 쪽이 그녀라는 것이 명확했으니까.
“예상외였습니다만 아무래도 제 승리인 것 같습니다.”
그녀는 여유로운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무너진 건물 파편을 그녀에게 던졌다.
파편은 그녀의 머리 위에 있던 남은 천장 부분을 맞혔다.
부서진 천장 부분이 크게 흔들리고 먼지들이 그녀 어깨 위로 쏟아졌다.
“이제는 눈도 멀었습니까? 애초에 눈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어 보이지만.”
눈이 멀었다니 설마 그럴 리가.
사냥의 표상 상태가 되면 눈으로 보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각이 훨씬 강화된다.
즉, 방금 내 공격은 의도한 것.
그녀 머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가시털이 그녀의 목 위로 떨어진다.
리플렉션의 단점은 자기가 보고 있는 방향에서 날아온 공격이 아니라면 튕겨낼 수 없다는 것.
‘그렇다면 사각을 노리면 돼.’
가시털이 무방비한 그녀의 목에 꽂혔다.
계단을 내려오던 중 따끔한 느낌이 든 그녀가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가시를 만진 그녀가 두 눈을 부릅뜬다.
“으, 으윽? 이, 이건…?”
최근 에저튼의 기사처럼 온몸을 꽁꽁 싸매고 있는 적이 많아서 그렇지 원래 내 가시털의 진정한 힘은 다른 곳에서 나온다.
막을 수 없는 신경독이 그녀의 몸 속에 빠르게 퍼져나가 옭아맨다.
비틀거리던 그녀는 벽을 짚으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녀의 팔과 다리는 주인의 명령을 거부했고, 그녀는 볼품없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
어느새 그녀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됐다.
나는 마무리하기 위해 그녀에게 다가 갔다.
‘두 번 죽여야 끝나.’
전투용 팔로 그녀의 머리를 내리치려는 순간, 그녀의 몸이 보라색으로 빛났다.
‘빛? 설마?’
나는 급히 몸을 틀었다.
내가 피하는 순간, 보라색 창이 내 허리의 끄트머리를 찢고 지나갔다.
‘윽!’
만약 내가 제때 몸을 피하지 않았다면 사이킥 파워로 구성된 흉기가 내 장기와 심장을 꿰뚫었을 거다.
나는 피가 흘러나오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물러났다.
내 뒤에는 어느새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블랙이 서 있었다.
“훌륭합니다. 코드 레드가 없었다면 전 그대로 당했을 겁니다.”
나는 그녀를 향해 불을 뿜었다.
불과 연기로 연막을 친 나는 무너진 천장 틈을 통해 지하실을 빠져나왔다.
방금 블랙에게 발생한 현상은 ‘영체 조율’ 기술의 효과로 인한 것이다.
영체 조율은 술자가 피술자 한 명에게 걸어 주는 보조 계열의 사이킥 파워 기술인데 매우 강력한 효과를 갖고 있다.
바로 술자가 피술자를 임의로 순간이동시킬 수 있다는 것.
순간이동할 때 피술자는 강력한 초능력에 의해 몸이 일시적으로 영체화되기 때문에 신경독에 의한 중독 효과가 완전히 해제된다.
물론 순간이동이 가능한 거리가 짧고, 영체 조율 효과가 발동 중일 때는 술자가 움직일 수 없다는 단점이 있지만 지금처럼 적의 허를 찌를 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술이다.
‘적이 둘이라니!’
통찰로 블랙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 해금되지 않는 강화 상태가 있어서 설마 했는데 그게 영체 조율 상태였을 줄이야.
영체 조율은 다양한 사이킥 파워 기술 중에서도 고급에 속하는 기술이다.
희귀도로 치면 용의 심장에 준할 정도로.
‘게다가….’
나는 도망치는 도중, 피가 흐르는 옆구리를 확인했다.
순간이동한 블랙이 내 뒤를 찌를 때 쓴 기술은 ‘페인 스피어’라는 기술.
관통 효과가 높은 사이킥 파워 기술로 공격당한 적의 회복력을 일정시간 악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때문에 내 상처는 평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회복되고 있었다.
‘큰일인데.’
블랙 한 명만 해도 강적인데 그녀에 버금가는 적이 이곳 어딘가에 있다.
영체 조율 범위는 최대 반경 1km. 피술자에게 영체 조율을 건 상태에서는 술자가 완전히 무력화된다.
‘술자가 어디 숨어 있을지는 짐작이 가지만….’
거기까지 가도록 블랙이 내버려 두지 않겠지.
‘도망치는 것도 좋은 선택은 아니야.’
여기서 계속 도망쳐봐야 시간 끌기에 지나지 않는다. 나를 순식간에 추적하는 블랙을 보면 내가 아무리 도망쳐도 쉽게 찾아낼 거다.
‘사냥의 표상이 끝나면 그때는 정말 끝이야.’
저쪽의 목적은 포획이니 나를 죽이지 않을 거다. 사살이었으면 나에게 사이킥 브레스를 난사하면 되니까.
‘저쪽도 나에 대해 경계하고 있어.’
이미 내게 한번 된통당했으니 잠깐동안은 소극적으로 싸우겠지.
물론 그 시간도 길지는 않을 거다. 내가 가진 밑천이 다 드러나면 그때는 정말로 끝장이다.
‘어떻게 돌파해야 할까.’
그것 하나만 생각하는데 내 머리 뒤 괴물의 촉수 부분이 찌르르 하고 떨렸다.
「■■기야.」
‘어떻게 공략해야….’
「큰애기야!」
익숙한 파장에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괴물의 촉수를 간질이는 파장은 26호가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서 있던 바닥이 흔들렸다.
도로에 깔린 콘크리트가 갈라지고 그 안에서 길고 굵은 촉수들 수십 개가 솟아오른다.
「우리가 왔어.」
폭발한 콘크리트 구멍에서 튀어나온 것은 5m를 훌쩍 넘는 거대한 크기의 분홍색 해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