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6
‘26호?’
도로에 깔린 아스팔트를 뚫고 올라온 분홍 해파리의 정체는 26호였다.
‘안 본 사이에 뭐 이리 많이 변했지?’
한순간 못 알아볼 정도로 녀석의 모습은 전과 많이 달라졌다.
먼저 분홍색 몸통에 은은하게 흐르는 저 알록달록한 색체들은 이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온갖 색으로 빛나는 기운이 몸 위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요동치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주변을 감시하기 위한 수많은 눈처럼 보였다.
씨 데몬의 고유 특성 중 하나인 ‘심해의 공포’ 로 인해 발생한 효과다.
저 특성 때문에 정신 공격에 내성이 없는 사람이 씨 데몬에게 접근하면 정신이 나가 버리거나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게다가 주변의 적들이 사용하는 보조계열 사이킥 파워 기술을 약화시킬 수 있어.’
설정상 씨 데몬은 매우 강력한 초능력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래서 초능력 에너지가 가끔씩 몸 밖으로 새 나가기도 한다.
이때 빠져나간 초능력 에너지는 주변 생물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는데, 이러한 현상을 특성화한 결과물이 바로 심해의 공포 특성이다.
그래서 사이킥 파워 능력자가 씨 데몬 근처에서 소울링크나 영체 조율 같은 원거리 보조 기술을 쓸 경우, 제대로 발동하지 않는다.
‘그뿐만 아니라 저 섬뜩한 비주얼도 유명한데.’
심해에서 덩치 20m가 넘는 괴물이 수백 개가 넘는 눈으로 자기를 주시한다고 생각해 보라.
너무 무섭다 보니 해외 커뮤니티에는 심해의 공포가 활성화된 씨 데몬의 모습을 혐짤로 사용할 정도였다.
물론 26호는 몸에 두른 기운이 원본만큼 흉악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아마 내 앞에서는 일부러 조절한 거겠지.
‘그러고 보니 외형도 많이 변했네.’
심해의 공포 특성이 워낙 인상적이어서 그렇지 다른 부분도 제법 바뀌었다.
몸통 아래에는 20개의 길고 가느다란 촉수다발이 뻗어 있었고, 촉수 사이에는 다리 역할을 하는 굵은 두께의 지느러미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촉수 모양은 내가 전에 지니고 있던 톱날 촉수과 비슷했다.
나의 것보다는 가느다란 편이지만 촉수 전체에 빽빽하게 돋아난 날카로운 톱날은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도로 위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녀석이 내게 파장을 쐈다.
「큰애기야!」
26호가 반갑다는 듯 촉수를 뻗어 나를 쓰다듬는다.
사냥의 표상 효과 덕분에 나도 덩치가 커졌지만 26호도 만만치 않았다.
지느러미를 굽히고 있어서 그렇지 쭉 핀다면 거의 7m에서 8m쯤 될 정도였고, 촉수는 길이가 10m 이상이었으니까.
[즈즈즈(어떻게?)]
「큰애기가 가르쳐 준 대로 했어! 많이 먹고 열심히 컸어!」
이상하다. 나는 분명 숨어 있으라고 말한 것 같은데.
진화해서 그런 걸까. 26호는 내 예상보다 지능이 훨씬 올라간 것 같다.
「나만 커진 게 아니야. 작은애기도 많이많이 커졌어.」
[즈즈(뭐?)]
26호 뒤에 있던 구덩이에서 녹색 물체가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것은 우주도시 안의 대기를 가르며 선회하다가 내 앞에 사뿐히 착지했다.
「어른」「반가움」
아드하이가 내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그린 갤러곤으로 성장했어?’
26호도 많이 변했지만 아드하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대격변이었다.
비늘 색깔은 대부분 녹색으로 변했고 간간이 푸른색 비늘이 껴있었다. 몸의 길이는 1m를 훌쩍 넘게 자라났고 날개도 전에 비해 훨씬 커졌다.
몸체와 색깔뿐만 아니라 외형도 많이 달라졌다.
이전에는 통통한 몸매에 짜리몽땅한 다리 때문에 스킨크를 닮았었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길고 탄탄하게 뻗은 4개의 다리는 사슴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날씬하고 유연한 몸매는 요염함마저 느껴졌다.
반면에 꼬리는 날씬한 몸과 달리 상대적으로 굵고 통통한 느낌이었다.
머리의 경우 입 대신 촉수다발이 달린 것은 동일했지만, 두상(頭相)이 이전보다 좀 더 길쭉해졌고, 머리에 달린 뿔도 4개로 늘어났다.
‘그린 갤러곤에 비하면 굉장히 작지만 생긴 것은 비슷하네.’
게다가 성장하면서 꼬리가 두꺼워진 것을 보니 아드하이는 암컷이 틀림없었다.
갤러곤은 설정상 성적 이형성(性的異形性)을 띄는 생물이기 때문에 수컷과 암컷이 다르게 생겼다.
수컷은 꼬리가 가는 대신 뿔이 굵고 화려하고, 암컷은 꼬리는 굵은 대신 뿔이 단조롭게 생겼다.
‘수컷은 머리 뿔이 화려할수록 미남, 암컷은 꼬리가 통통할수록 미녀라는 설정이었지.’
저 탄탄한 꼬리를 보면 아드하이는 갤러곤 중에서 몸매가 좋은 편이라고 봐야겠지.
‘뭘 먹고 이렇게 빨리 자란 거지?’
짐작 가는 게 없지는 않았다.
하수도에는 내가 죽인 기사와 병사들의 시체도 많았고, 신호칩이 작동하면서 사망한 고용인들도 그대로 남아 있었으니까.
또한 상점 지구 지반이 붕괴하면서 하수도로 떨어져 죽은 자들도 적지 않을 거고.
‘그래도 그걸 다 잡아먹었다고?’
그것도 하수도를 순찰하는 군인들한테 걸리지 않은 상태로 말이다.
‘그렇다면 엄청난 성장인데.’
내 예상이 맞는다면 물리적인 성장뿐만 아니라 녀석의 전투 실력도 일취월장했다고 봐야 한다.
칭찬해 달라는 듯 으쓱거리는 26호.
급한 상황이지만 칭찬을 안 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녀석의 몸을 쓰다듬었다.
녀석은 기분이 좋은지 몸을 파르르 떨었다. 표면에 흐르고 있던 기운도 감정이 반영되어 몽실몽실한 색깔로 변했다.
심해의 공포라고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나」「성장함」「나」「멋짐」「어른」「칭찬」
아드하이도 칭찬해 달라고 몸을 드밀어서 나는 녀석도 쓰다듬어줬다.
꼬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아드하이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나의 사냥법을 습득했어.’
나랑 있었던 시간이 길지 않은 아드하이보다는 26호가 사냥을 주도했을 거다.
원래도 배우는 게 빠르던 녀석이었으니까.
내가 자주 쓰는 사냥법인 함정을 파고, 숨고, 기습하는 방식을 배운 거겠지.
‘어쨌든 그건 나중에 생각하자.’
코드 블랙이 금방 이곳에 올 것이다.
다른 때 같았으면 녀석들을 어딘가에 숨기고 싸웠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녀석들을 데리고 싸워야겠어.’
적은 둘. 나 혼자서 처리하기 어려운 부분도 많기에 26호와 아드하이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
[즈즈 즈즈즈 즈즈(잠깐 할 말이 있어.)]
「응?」
「?」
[즈즈즈 즈즈 즈 즈즈즈(강적과 싸워야 해. 나를 도와줘.)]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녀석들의 시선이 내 잘려 나간 팔과 옆구리의 상처로 향했다.
원래 26호는 눈이 없지만, 표면에 흐르는 사이킥 파워에 감정이 반영되는 것인지 녀석이 어디에 관심을 갖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큰애기 아프게 한 애들이야? 용서 못 해!」
「어른」「공격한 것들」「적」
26호가 크게 분노하면서 촉수를 바닥에 내리쳤다. 아스팔트가 푹 파이고 주변 도로가 쩍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아드하이도 뒷발로 땅을 거세게 차며 불편한 심기를 표현했다.
‘싸우는 건 문제없겠네.’
26호는 덩치만 커진 것이 아니라 힘도 강해진 것 같다.
씨 데몬은 준보스로 취급되는 강대한 생명체. 위험도만 따지면 블랙 갤러곤보다 반수 위에 있다.
‘아직 성장이 덜 끝난 것 같지만.’
나를 보조하는 것으로는 충분하다.
아드하이도 아직 푸른 비늘이 남아 있지만 몸 대부분이 녹색 비늘로 덮여 있으니까 그린 갤러곤의 힘을 지녔다고 생각해도 무방하리라.
‘내 예상이 맞는다면 그린 갤러곤의 힘으로도 적을 요격할 수 있어.’
그린 갤러곤은 유체 단계에 불과하므로 화이트 갤러곤이나 블랙 갤러곤처럼 압도적인 파괴력을 보여 주지는 못한다.
대신 전투 능력이 다른 방향으로 발달해 있다.
‘거기다 26호가 심해의 공포를 쓸 수 있으니 이 둘을 잘만 활용하면….’
그린 갤러곤과 씨 데몬. 그리고 에이모프.
이 자리에 있는 셋 모두 아직 미숙하고 덜 성장한 존재다.
그러나 서로 합을 맞춘다면 강한 적도 수월하게 사냥할 수 있다.
나는 녀석들을 진정시킨 뒤, 작전에 대해 설명했다.
-
코드 블랙은 전쟁 고아였다.
메가콥에서 고아는 구원받을 수 없는 밑바닥에 있는 존재이자 사회의 어두운 면 그 자체다.
거의 모든 고아가 고용인 신세로 전락하고, 그나마 운 좋은 아이가 스페이스독에 들어간다.
그런 점에서 코드 블랙은 독특한 케이스였다.
그녀는 유진 가문의 고용인으로 들어가 그림자의 재료가 되었다.
무수히 많은 실험체들이 그랬듯 그녀 또한 그렇게 사그라질 목숨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살아남았다.
그녀에게는 일반 인간에 비해 월등히 높은 사이킥 파워 적성이 있었다.
그 덕분에 그녀는 유진 가문의 컬트 유전자 이식 실험의 첫 성공작이 될 수 있었다.
프로토타입은 양산형에 비해 수준이 떨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그녀는 정상적인 범주에서 벗어난 존재였다.
이후에 만들어진 컬트와 인간의 혼종들 중에서도 그녀의 힘은 독보적인 수준이었으니까.
그림자로의 개조가 끝났을 때, 가주 아키라 유진은 그녀에게 이름을 하사했다.
코드 블랙.
그림자 중 가장 우월한 존재에게 부여되는 칭호를.
“코드 레드. 목표는 어디로 갔습니까?”
「주택단지 32번가. 주의 바람.」
“주의? 뭡니까?”
「사이킥 파워 흐름이 불안정. 정체불명의 존재가 사이킥 컨트롤 웹에 침투.」
“목표는 사이킥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놈이 한 짓입니까?”
「알 수 없음. 정체불명의 존재가 독자적인 사이킥 컨트롤 웹을 구축했기 때문.」
“일단 알겠습니다. 계속 감시하시길.”
「알겠음.」
정신으로 연결된 코드 레드와의 대화를 끝낸 그녀는 목표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방금 있었던 대화처럼 그림자들은 대부분 자아가 희미한 기계 같은 존재다. 끔찍한 실험 끝에 정신이 완전히 망가졌기 때문이다.
그림자 중 말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존재는 코드 블랙과 이미 죽은 코드 화이트뿐이었다.
‘이젠 내가 유일합니다.’
코드 화이트는 임무 도중 개죽음을 당했으니 그림자 중 가장 위대한 존재는 그녀뿐이다.
그 사실이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다.
사실 그녀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그림자들은 모두 정신적으로 불안한 요소를 갖고 있다.
코드 블랙은 자기가 가장 우월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
그녀가 싸울 때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대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본인의 특별함을 과시하기 위함이었다.
‘그 괴물의 유전자만 얻으면…!’
놈의 유전자를 이식하는 데 성공하면 그녀는 지금보다 고차원의 존재가 될 터.
오랜만에 기분이 고양됨을 느끼던 그녀의 눈에 목표물이 보였다.
목표물은 도로 한가운데에 큼지막한 구멍을 뚫어놓은 상태였다.
기껏 파놓은 구멍인데 놈은 도망치지 않고, 바닥에 4개의 큰 팔들을 모두 붙인 상태로 엎드려 있었다.
“도망치지 않는 겁니까?”
「그르, 그·럴·필·요·없·어·」
“…말할 수 있었습니까?”
놈이 말하는 것을 보고 코드 블랙은 놀랐다.
여성의 목소리를 기계에 녹음한 뒤 변조시킨 것처럼 이상하게 들렸지만 놈은 명백히 인간의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대단합니다.’
엄중한 감시를 받아야 할 괴물이 밖에 나와 있기에 감시를 피해 탈출할 만큼 높은 지능이 있다고 생각했다.
허나 사람과 의사소통을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지능이 뛰어날 줄은 몰랐다.
그녀의 임무는 놈을 포획하는 것.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머리를 가진 괴물이라면 자기가 처한 상황을 충분히 이해할 터.
그녀는 입을 열었다.
“머리가 좋다면 알 겁니다. 항복하시기 바랍니다.”
「글·쎄, 그르르, 과·연·어·떨·까·」
놈의 말에서 여유로움을 느낀 그녀는 인상을 찌푸렸다.
‘짐승 주제에 건방지긴.’
“머리와 몸통만 남겨서 데려가겠습니다.”
그녀는 손에서 사이킥 윕 두 개를 뽑아 들었다.
그녀가 막 휘두르려고 한 순간, 그녀가 서 있던 바닥이 갈라지더니 촉수가 튀어나왔다.
‘기습!’
바닥에 손을 붙이고 있던 이유가 이것이었나.
그녀는 급히 공중으로 몸을 띄웠다.
기습에 실패한 촉수는 그대로 땅속으로 다시 들어가 버렸다.
허공에서 그녀는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목표는 촉수가 아니라 괴물의 본체.
촉수는 팔과 연결되어 있으니 지금은 무력화된 상태다. 그녀의 예상대로 놈은 움직이지 못했다.
보라색 뱀이 놈의 몸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드는 순간, 괴물이 머리를 틀어 채찍의 경로를 가로막았다.
순수한 사이킥 파워로 이루어진 채찍이 괴물의 두꺼운 머리 갑각에 부딪치며 강렬한 스파크를 만들어냈다.
‘역시.’
그녀는 괴물의 몸에서 머리와 손목 부분의 방패 모양 갑각이 가장 단단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다른 곳을 노려야 합니다.’
그녀가 착지함과 동시에 왼손에 들린 뱀이 혀를 날름거리며 괴물에게 쇄도했다.
하지만 이미 촉수를 회수한 괴물은 뒤로 한참이나 물러난 뒤.
그녀가 날린 채찍은 도로의 아스팔트를 할퀴었을 뿐이었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괴물은 물러나면서 큼지막한 도로의 파편을 그녀에게 향해 던졌다.
‘리플렉션!’
그녀의 앞에 무형의 방어막이 생기고 파편들을 모조리 튕겨 냈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아직 일렀다. 파편과 미세한 시간차를 두고 가시털들이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물리적 공격을 한 차례 막아 낸 리플렉션이 잠깐 해제된 사이를 노린 공격이었다.
“쯧.”
그녀의 채찍이 급히 선회해서 가시털의 비를 휩쓸었다.
‘리플렉션이 해제된 틈을 노린 겁니까.’
리플렉션은 모든 종류의 물리 공격을 완벽하게 방어할 수 있다. 기관총과 같은 연발 공격도 리플렉션이 활성화된 상태에서는 전부 막아 낸다.
다만 리플렉션이 활성화된 중에는 정신을 집중하고 있어야 해서 항상 펼쳐두고 다닐 수는 없다.
그래서 이동하거나 다른 행동을 할 때는 해제할 수밖에 없는데, 해제 뒤 재사용까지 아주 짧은 쿨타임이 있다.
‘적은 컬트와의 싸움에 익숙한 것이 분명합니다.’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괴물은 리플렉션의 약점을 정확히 노렸다.
‘작전을 바꿔야겠습니다.’
원래는 사이킥 윕 선에서 정리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쉽지 않을 것 같다.
‘사이킥 브레스 난사로 정리하겠습니다.’
코드 블랙은 양손을 들어 앞을 향하고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손 앞에서 검은 구체가 나타나고, 이어서 길고 긴 검은 열선이 되어 대기를 갈랐다.
괴물도 이건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몸을 바짝 숙였다.
검은 열선은 왕관을 닮은 놈의 머리 갑각과 등 위에 있는 팔을 태우는 것으로 모자라 저 멀리 있는 건물들까지 산산이 파괴했다.
놈은 3개의 팔과 다리를 바닥에 붙인 상태로 빠르게 기어다니며 열선을 피했다.
열선이 도로와 주택들을 태우고 바닥에서 허공으로 파편들이 날아오른다.
기어다니던 괴물은 그 파편을 밟으며 허공을 뛰어다녔다. 중간마다 가시털을 쏘며 반격까지 하면서 말이다.
그녀는 사이킥 브레스를 쏘는 와중에 리플렉션을 동시에 시전해서 가시털을 막았다.
“그만! 장난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녀는 오른손으로 사이킥 브레스를 쏘면서 왼손으로 사이킥 윕을 빼 들었다.
사이킥 윕이 날아들어 공중에 있던 괴물의 다리를 휘감아 붙잡았고, 뒤이어 검은 열선이 놈의 꼬리를 태웠다.
「그으으으!」
괴물이 극심한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다.
놈의 주요 무기 중 하나인 꼬리는 이제 무력화되었다.
코드 블랙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놈을 확 끌어내 바닥에 처박았다.
열선으로 마무리하려는데 괴물이 포기하지 않고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놈의 길쭉한 팔로 그녀를 베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이미 리플렉션을 시전한 상태.
놈의 팔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그녀는 자세가 무너진 놈에게 사이킥 윕을 휘둘러 목을 휘감았다.
“끝났습니다. 항복하시기 바라…큭!”
그녀가 말하는데 놈이 입을 쩍 벌렸다. 놈의 입에서 고온의 화염이 튀어나와 그녀의 얼굴에 쏟아졌다.
“아악!”
리플렉션 덕분에 부상은 입지 않았지만 화염의 높은 온도는 막을 수 없었다.
엄청난 열이 그녀의 얼굴 앞에 밀어닥쳤기 때문에 그녀의 눈은 큰 화상을 입었다.
“이 빌어먹을 괴물 놈이…!”
그녀는 흐트러진 집중 속에서도 사이킥 브레스를 발사했다. 열선이 괴물의 한쪽 팔을 날려 버렸지만 놈은 아직 건재했다.
놈의 등에 달려 있는 낫을 닮은 손톱을 지닌 팔.
흉악스러운 외형의 생체 무기가 그녀의 어깨에 찍혔다.
‘이러다가 당한다!’
그녀는 급히 코드 레드에게 신호를 보냈다.
만신창이가 된 그녀의 몸에서 보라색 빛이 뿜어져 나오고 그녀의 몸이 빠르게 분해되었다.
괴물이 휘두른 팔은 그녀의 몸을 스쳐 지나가 바닥에 꽂혔다.
영체화 상태가 된 그녀는 괴물의 뒤에서 순식간에 부상 하나 없이 깔끔한 상태로 재조립되었다.
그녀는 몸이 실체화되자마자 사이킥 윕으로 괴물을 후려쳤다.
괴물은 그녀의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무력하게 나가떨어졌다.
“제게 이 정도로 큰 피해를 입힌 상대는 처음입니다.”
말투는 차분했지만 그녀는 이성을 반쯤 잃은 상태였다.
자기보다 약한 존재와 싸우다가 목숨을 한 번 잃을 뻔했기 때문이다.
“뇌만 적출해서 가져가도 아키라 님께서는 이해하실 겁니다.”
그녀가 양손을 뻗자 검은 구체가 다시 생겨났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놈에게 마무리를 하려는 찰나.
“쿨럭?!”
그녀는 입에서 피를 토했다.
그제야 복부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낀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이, 이게 무슨?”
그녀는 손으로 복부를 만졌다. 겉은 멀쩡했지만 안에서 딱딱한 철근 파편이 느껴졌다.
「영·체·화·에·는, 그륵, 약·점·이·있·지·」
당황해하는 그녀의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어느새 그녀에게 다가온 괴물이 중얼거린 말이었다.
“어, 어떻게…?”
「그르, 도·중·에·장·애·물·이·있·으·면, 그르르, 안·된·다·는·것·」
영체화 상태에서 다시 실체화할 때, 그 자리에 어떠한 물체도 있으면 안 된다. 그렇게 되면 그녀가 겪은 것처럼 몸 안에 물체가 그대로 박히기 때문이다.
물론 영체 조율 기술의 약점에 대해서는 그녀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철근 파편이 어떻게 그녀나 코드 레드의 인식을 피해 갑자기 나타났냐는 사실이었다.
‘아니야. 지, 지금은 영체화가 먼저….’
그녀는 급히 코드 레드에게 신호를 보냈다.
다시 영체화해서 놈과 거리를 벌려달라고.
하지만 돌아온 답변은 그녀의 예상을 벗어난 것이었다.
「정체불명의 적에게 습격을 당하는 중. 현재 방어에 집중 필요. 영체화 불가.」
‘뭐?’
정체불명의 적이라니.
문득 그녀의 시선이 아까 전 도로에 파여 있던 구덩이에 향했다.
보라색으로 빛나는 촉수 몇 가닥이 구덩이 밖으로 뻗어 나와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사이킥 파워!’
그러고 보니 코드 레드가 그랬다.
레드가 사이킥 파워로 만든 감시망에 누군가가 침투했다고. 독자적인 사이킥 컨트롤 웹을 구축해서 정확한 상태를 알 수 없다고 말이다.
당시에는 목표물이 감시를 피하려고 사이킥 파워를 이용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적은 한 마리가 아니었어!’
그녀의 생각에 답이라도 하듯 괴물이 말했다.
「우·리·는·하·나·가·아·니·다·」
괴물의 팔이 그녀의 목을 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