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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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의 항만 지구.
차폐문이 열리고 우주선 하나가 매끄럽게 비행해 지구 내로 진입했다.
선착장에 안정적으로 착지한 우주선의 겉면에는 유진 가문의 상징인 뫼비우스의 띠 마크가 프린팅되어 있었다.
우주선의 문이 열리자 금속 하드케이스를 든 승무원들이 빠른 속도로 내렸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준비하도록.”
“옙! 민석 님!”
부하들을 지휘하는 황인 남성의 이름은 민석 유진.
과거 정우 유진을 섬겼고, 현재는 시현 유진의 집사인 자다.
시현 유진을 섬기는 하수인들은 민석의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그들은 하드케이스를 열어 안에 있는 부품들을 꺼내 조립하기 시작했다.
“아가씨.”
부하들이 작업을 개시한 사이, 민석은 마지막으로 내린 여성을 보고 고개를 숙였다.
하얀색 바디슈트를 입고 있는 그녀가 바로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의 주인, 시현 유진이었다.
“5분 이내 작업이 완료되면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
시현은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봤다.
‘뭔가 이상해.’
항만 지구에는 이사회에 참여하기 위해 도시를 방문한 군함, 함선 등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사람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끔가다 보이는 안드로이드들도 평범하지 않았다.
팔이 3개인 것을 보니 전투용 안드로이드가 분명한데, 그들은 지금 일반 노동자들이 처리해야 할 작업을 대신하고 있었다.
‘내가 모르는 큰 사고가 터졌어.’
메가콥 내 안드로이드 혐오 정서가 만연한 것을 생각해 보면 사람 대신 기계가 이 정도로 많이 움직인다는 것은 결코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사람이 부족해질 정도라면 둘 중 하나다. 초대형 사고가 터져서 어마어마한 사상자가 나왔거나 아니면….’
미확인 전염병의 유행.
이곳에 오기 전, 그녀는 에저튼 기사단이 불미스러운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언론을 통해 접했다.
‘하나 은사자기사단의 파괴 행위일 가능성은 낮아.’
그녀 또한 그림자 출신이었기에 에저튼의 은사자기사단이 유전자 개조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강력하긴 하지만 이 우주도시의 인구를 이 정도로 크게 줄일 수준은 아니었다.
인원수가 부족하므로 방위함대의 육상병력에게 패배할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론에서도 대규모 살상에 대한 말은 나오지 않았다.
자오 가문은 에저튼과 앙숙이기 때문에 에저튼 기사들이 민간인을 대규모로 살상한 일이 발생했다면 가만히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이다.
“모두에게 전달해라. 강화복을 활성화하고 마스크를 착용하라고.”
“예?”
“전염병이 돌고 있다.”
그녀가 입고 있는 화이트메이든이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는 것을 보면 공기 중으로 전염되는 병은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임무 수행을 위해 특정 인간들과 불가피한 접촉을 할 예정이다. 그러니 전염을 피하려면 여기서 미리 준비해야 한다.
민석이 명령하자 작업 중이던 하수인들이 일제히 강화복을 작동시키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우리 말고 또 다른 세력이 테러를 감행한 건가?’
짐작 가는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나 그들 모두 생물학무기를 이용하는 테러리스트와는 거리가 있었다.
‘아키라 유진은 아직 이곳에 있어.’
유진 가문은 유전자 조작, 생명공학의 대가인 만큼 바이러스를 활용한 생화학무기에도 일가견이 있는 편이었다.
그런 가문의 가주가 도시에 전염병이 퍼진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 바이러스는 보통 위험한 수준이 아니다.
‘아니면 알고도 침묵하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 교활한 노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이사회를 통해 총괄관리자를 정신적으로 압박해서 도시에 관심을 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자기 목숨은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자니까 본인만은 어떻게든 바이러스에 감염되지 않게 수를 써놨겠지만.
“완료되었습니다.”
그녀의 상념을 깨운 것은 민석의 목소리였다.
어느새 그녀 앞에 부하들이 조립한 복잡한 기계 장치가 놓여 있었다.
스타유니언에서 제작한 그렘린 어뢰를 시현의 하수인들이 시한폭탄으로 개조한 물건이다.
본래 그렘린 어뢰는 타 세력 군함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물건으로 폭발 시 안에 있던 나노머신이 튀어나와 주변에 존재하는 모든 금속을 갉아먹도록 하는 구조다.
시현의 부하들은 이를 원본보다 훨씬 많은 나노머신이 광범위한 영역에 퍼져나갈 수 있도록 개조했다.
“수고했다. 그럼 이동하자.”
이제부터 그들은 이 폭탄을 이 도시의 심장, 지하 원자로에 설치하러 갈 것이다.
‘음?’
부하들과 함께 움직이던 중, 시현은 묘한 사이킥 파워의 흐름을 감지했다.
‘컬트? 아니야. 저건….’
도시 안쪽에서 한순간 매우 이질적인 사이킥 파워가 번뜩였다가 금세 사라졌다.
‘설마?’
“아가씨?”
시현이 멈춰 서자 민석이 주인을 불렀다.
그녀는 폭탄과 도시 중앙을 번갈아 바라봤다.
한쪽은 시현 유진의 숙원이다.
아키라 유진을 제거하는 것과 동시에 유진 가문의 적대자들을 일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그에 반해 다른 한쪽은….
“아가씨, 지금 당장 움직이셔야 합니다.”
“…….”
원래라면 흔들려서는 안 되는 선택지다.
그녀는 시현 유진이니까.
말이 없이 서 있던 그녀는 마침내 결정했다.
“…잠깐 생각할 것이 있었다. 이제 가지.”
움직이면서 그녀는 마지막으로 도시 중앙 쪽을 흘낏 쳐다봤다.
‘놈인지 아닌지 불확실해. 설령 놈이라고 해도 붕괴하는 우주도시에서 살아날 수는 없을 터.’
그녀를 죽였던 「그것」은 도시가 무너지면서 같이 매장될 것이다.
‘…만약 그래도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그녀가 직접 자신을 옭아매는 사슬을 끊어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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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간 동안 연달아 사이킥 브레스를 2회 쓴 나는 희미해져가는 정신을 간신히 다잡았다.
화이트 갤러곤이 쏜 브레스에 버금가는 힘이 작렬했음에도 네크로펙터는 쓰러지지 않았다.
“나, 나는 가장 위대한….”
겉피부가 모조리 찢겨나가 뼈와 근육 밖에 보이지 않는 그것은 몇 발자국 비틀거리다 쓰러졌다.
그것의 심장 박동이 천천히 느려지다가 곧 정지했다.
그것의 몸을 감싸고 있던 블랙 슈라우드도 검은 상복 같은 모습으로 돌아왔다.
‘휴.’
보조기관에 집중하고 있던 나는 놈의 죽음이 확인되고서야 겨우 안심했다.
‘무서운 적이었어.’
나 혼자였다면 이길 수 없었을 거다.
‘26호가 큰 힘이 됐어.’
또한 나 대신 코드 레드를 상대하러 간 아드하이도 제 역할을 다해줬다.
나는 26호를 쳐다봤다.
녀석은 시체가 된 블랙이 또 살아나는 것은 아닌지 경계의 끈을 놓지 않고 있었다.
내 시선을 느낀 녀석이 나에게 괜찮으냐며 걱정스러워하는 파장을 쏘아 보냈다.
[즈즈즈 즈즈 즈즈즈(나는 괜찮아. 너는?)]
「나는 멀쩡해. 이 정도 상처는 금방 나으니까.」
언제나 그렇듯 자기 자신보다 나를 먼저 걱정해주는 녀석이다.
녀석에게 고맙다는 파장을 쏘려고 하는데 몸에서 변화가 느껴졌다.
‘사냥의 표상이 끝났어.’
블랙을 죽이기 전에 끝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감정과 시체를 먹지 못했는데 끝나서 아쉽다는 생각이 공존했다.
‘그래도 블랙의 유전자들 중 하나라도 얻으면 이득…어?’
나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엄청나게 강렬한 본능이 내 머리를 완전히 지배했기 때문이다.
‘뭐, 뭐야?’
완전히 미쳐 버리게 만들 정도로 무시무시한 식욕이 내 뇌리를 강타했다.
몇 번 겪어서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것은 차원이 달랐다.
‘설마 사이킥 브레스로 인한 피로감과 부작용이….’
갑자기 모든 것이 쓸데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배고팠다.
「큰애기야! 빨리 먹어!」
옆에서 누가 말하는데 잘 모르겠다.
이상한 느낌이지만 목소리에서 식욕을 자극시키는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내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 향기로운 고기가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단숨에 고깃덩어리를 꿀꺽 삼켰다.
‘부족해.’
눈앞에 텍스트박스들이 떠오르며 뭐라 뭐라 씨불이지만 뭔 말인지 모르겠다.
그보다 나는 배고프다.
왜 내가 이리 굶주려야 하는가.
‘필요하면 쟁취하면 돼.’
어렸을 때부터 항상 듣던 말이다.
필요한 게 있으면 뺏으면 된다고. 그게 승리자의 삶이라고.
「■■■, ■■ ■■ ■■■■■!」
‘마침 저기 있네.’
쫑알거리는 목소리. 저걸 먹으면 이 끔찍한 허기도 가실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또다시 음식이 앞에 나타났다.
좀 전의 음식과 비교해 보면 냄새가 이상했다. 배가 고픈데도 영 안 끌릴 정도로 말이다.
‘닥치고 처먹어.’
문득 어린 시절 생각이 난다.
지금 먹지 않으면 앞으로도 먹을 수 없다. 무조건 먹어야 한다.
나는 억지로 맛없는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먹었다.
배가 좀 차니까 정신이 오락가락한다.
당장 다 처먹어. 아니, 내가 무슨. 아니다. 아직 부족해. 잠깐 기다려. 기다릴 수 없어!
‘좋은 냄새를 풍기는 진미가 앞에 있어.’
아니, 잠깐.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저 진미에는 가시가 있다.
저 진미는 먹으면 안 된다. 아니다. 먹어야 한다. 먹으면 내가 바라는 정수를 얻을 수 있다. 저건 먹으면 안 돼. 기다릴 시간이 없다니까.
나는 진미를 덮쳤다.
아찔할 정도로 먹음직스러운 향기가 내 보조기관을 간질인다.
‘가시는 무슨.’
역시 가시 따위는 없었다.
「■■■■, ■■ ■■!」
녀석이 시끄럽게 구는 바람에 뒤통수가 가렵다. 아니다. 먹이에 무슨 입이 있다고 떠들겠는가. 당장 그만 둬. 전부 착각이다.
‘잘 먹겠습니다.’
나는 입을 벌리려가다 말았다. 녀석이 먹이라고?
‘잘 먹겠습니다!’
아니야.
녀석은….
「■■■야, 괜찮아.」
녀석이 쏜 파장이 내 머리 뒤에 있는 촉수를 타고 흐른다. 무형의 신호가 내 뇌에 전달되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해석해낸다.
‘빨리 처먹으라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몸에서 돋아난 촉수 한 가닥이 내 턱을 쓰다듬는다.
그리고 나의 보조기관과 녀석의 촉수가 부드럽게 얽혔다.
그러자 보조기관 끝에서 작은 스파크가 튀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내 눈앞에 텍스트박스가 떠오르며 강렬히 빛났다.
두 가지 빛이 나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실을 일깨웠다.
‘26호?’
내가 짓누르고 있는 것이 누구인지 깨달은 순간, 세상이 확 밝아졌다.
안개가 낀 것 같은 머리가 확 개이고, 내 몸에 대한 감각이 돌아왔다.
뱃가죽이 아려올 정도로 배가 고팠지만 좀 전처럼 정신을 놓을 정도로 심한 허기는 아니었다.
나는 26호를 붙잡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방금 전 내 행동은 내 의지에서 한참 벗어난 것이었다.
‘사이킥 브레스의 피로감과 사냥의 표상 부작용이 겹쳐서 그런 건가?’
사이킥 브레스는 정신력을 한계까지 소모시킨다.
전에 아파트에서 싸울 때, 사이킥 브레스를 쓴 나는 정신을 잃었다.
완전한 유기체에 초능력 강화 타입 효과 덕분에 내가 사이킥 브레스를 쓸 수 있는 한도는 2회로 늘어났다.
게다가 원래라면 2회를 연달아 쓴 뒤 기절해야 했겠지만 특성과 타입 효과 덕분에 맨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이킥 브레스로 인한 피로감과 사냥의 표상 부작용인 이성 상실이 겹치면서 안 좋은 쪽으로 시너지를 낸 것 같다.
평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정신적인 악영향이 심해진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악영향 수준이 아니라 본능이 나를 완전히 잠식한 수준이었지만.
‘맙소사. 다시는 이렇게 하면 안 되겠어.’
두 특성의 부작용이 이중으로 겹친 결과물은 내 상상을 한참 뛰어넘을 정도로 심각했다.
「큰애기야?」
내가 정신을 차렸다고 생각한 것인지 26호가 나를 불렀다.
하마터면 26호를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잡아먹을 뻔했다.
나는 즉시 녀석에게 사과했다.
「나는 괜찮아. 큰애기야말로 어디 안 다쳤어?」
[즈즈즈즈 즈즈즈즈(방금 내가 미쳤어. 정말 미안해.)]
「사과하지 않아도 돼. 큰애기가 멀쩡해졌으면 됐어.」
녀석은 괜찮다는 듯 몸을 빛냈지만, 나는 녀석의 몸을 꼼꼼히 살펴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내가 26호를 공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녀석을 잡아먹으려고 공격했다면 문제가 훨씬 심각해졌으리라.
‘26호에게는 치유 능력이 없으니까.’
나와 달리 녀석은 부상이 생기면 낫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치명상이라도 입으면 그걸로 끝이다.
몇 번이나 다시 살펴봤지만, 녀석의 몸에는 블랙과 싸울 때 당한 부상을 제외하고는 딱히 새로운 부상은 보이지 않았다.
몇몇 촉수가 피범벅이어서 깜짝 놀랐지만 냄새를 감지해 보니 그것은 녀석의 피가 아니라 컬트의 피였다.
‘블랙 다음에 이 주변 폐허에 있던 컬트의 시체를 주워서 준 거구나.’
녀석은 나를 돌려놓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사실에 고마움과 알 수 없는 감정을 느끼던 중, 나는 문득 허공에 떠 있는 다수의 텍스트박스를 떠올렸다.
텍스트박스를 쳐다보니까 그중 유독 빛나는 것이 있었다.
「인간성 발동!」
그것은 예전에 내가 해적을 잡아먹으며 획득했던 인간성 특성이었다.
여태까지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특성이 결정적일 때 중요한 역할을 해줬다. 정확히 무엇이 촉매가 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분명 26호의 촉수와 맞닿았을 때, 특성이 발동했었지.’
나는 좀 전의 상황을 재연해 보기 위해 다시 26호의 촉수를 만지려고 했다.
「큰애기야, 저기 작은애기가 왔어.」
[즈(응?)]
26호가 슬쩍 촉수를 빼더니 하늘을 가리켰다.
녀석의 말대로 아드하이가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이런.’
뒤에 초계함 몇 대를 달고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