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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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뉴먼트가 정체불명의 적에게 공습당할 당시, 덴버 에저튼도 가신들과 함께 대피했다.
모두가 황망해하는 와중에 그는 이것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지금이라면 괴물 시체가 탈취되어도 아무도 모르겠지.’
총괄관리자를 비롯한 모뉴먼트의 수뇌부들은 적을 상대하느라 바쁠 테니까.
나중에는 알아차리겠지만 그때쯤이면 에저튼 가의 기함이 이미 도시에서 한참 멀어진 후일 거다.
마음을 정한 덴버는 신임 부단장 제이콥과 단원 몇 명을 불렀다.
“놈의 시체를 찾아오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무슨 수를 쓰더라도 찾아야 한다. 안 그러면 수지에 안 맞아.”
이사회가 이 꼴이 났으니 사담 쳄벌린이 CEO가 되는 일은 물 건너간 상황.
덕분에 티앤씨를 지지하던 덴버의 입장도 가문 내에서 난처해지게 됐다.
‘놈만 있으면 프로젝트 진척도가 몇 단계 이상 상승할 터.’
신형 헐크 뮤턴트 개발에 성공하면 더 이상 티앤씨에 의존할 필요도 없다. 그러면 가주의 입지도 굳건해질 것이고.
그렇게 덴버는 제이콥 일행을 남긴 뒤 수송기에 발을 옮겼다.
항만 지구에 도착해 보니 선착장에는 출항을 준비하는 배들로 가득했다.
이사회를 맞이해 이곳에 찾아온 자오 가문의 우주선 외, 행정 지구에서 근무하던 관리들 중에서도 도망치려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전하, 장로님들께서는 먼저 떠난다고 하십니다.”
“난 볼일이 있으니 먼저 가라고 하라.”
곧이어 장로들을 태운 군함이 도시를 감싸는 차폐문 너머로 떠났다.
덴버는 기함 사령실의 옥좌에 앉아 제이콥 부단장의 소식을 기다렸다.
시종이 가져온 와인을 거의 다 마셨을 때쯤, 그가 기다리던 연락이 왔다.
“발견했는가?”
「이곳에는 놈의 시체가 없습니다.」
“뭐? 연구소 말고 다른 곳도 확인했는가?”
「예.」
연구소에 없다는 말에 덴버는 놀랐다.
‘이런 상황인데 시체를 치웠다고?’
그가 보기에 이 도시는 질서가 붕괴했다. 도시를 지켜야 할 관리들도 죄다 도망치는 마당에 괴물의 시체 따위를 신경 쓸 사람이 있을까?
오히려 덴버는 문득 다른 가능성을 떠올렸다.
‘모뉴먼트의 습격…혹시?’
놈이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
그 가능성을 떠올리자 덴버는 전신에서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놈을 사살한 게 아니라 생포했구나!’
어쩐지 수상하다 싶었다.
에저튼의 정예 육상 병력인 기사단원들을 도륙한 것으로 모자라 베테랑 중 베테랑인 비커스 전(前) 부단장까지 살해한 놈이다.
방위함대의 육군의 무장 수준이 높지 않다는 사실은 그도 잘 알고 있다. 가우스 소총이 제식무기인 이곳 병력으로는 놈을 죽일 수 없다.
‘플라즈마 볼터도 견디는 놈이니까.’
아마 방위군은 런처 사격으로 놈을 제압한 뒤, 모뉴먼트의 과학연구소로 데려갔을 것이다.
그곳에서 과학자들이 놈을 연구해서 이사회 도중 발표할 수 있을 정도의 성과를 뽑아낸 것이리라.
‘그러다가 뭔가 일이 잘못되어 이 사달이 난 것이겠지.‘
“놈이 없다는 것을 보니 이 사단의 원흉이 누군지 알겠군.”
「예. 이 사태의 원흉은 아마도….」
사태의 전말을 파악한 덴버는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놈의 흔적은 발견했는가?”
「유전자 추적기로 살펴본 결과, 놈이 건물 밖으로 빠져나간 것은 확인했습니다. 그 뒤로는 흔적을 지운 것인지 확인 불가입니다.」
제이콥은 어디 있는지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덴버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일단 놈이 살아서 모뉴먼트 밖으로 도주했다는 것은 확실했으니까.
“놈의 위장일 수 있다. 건물 내부를 가능한 선에서 계속 추적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리고 놈의 유전자 데이터는 바로 전송하라.”
「옙.」
통신을 종료한 덴버는 부관을 불렀다.
“부단장이 곧 유전자 데이터를 보낼 거다. 바이오 스캐너에 넣어 도시를 살펴보도록.”
“전하, 그랬다간 티앤씨에서 분명 항의할 것입니다.”
“상관없다. 당장 실행하도록.”
바이오 스캐너는 특정 생물의 유전자 데이터를 입력하면 일정 범위 내에 해당 생물이 어디 있는지 찾아주는 장비다.
데이터만 입력한다면 사람도 찾을 수 있어서 다른 가문의 영역에서 쓰려면 반드시 허가를 받도록 메가콥 법률로 규정되어 있다.
그렇기에 부관도 만류했지만, 덴버는 개의치 않았다.
티앤씨와의 관계는 이미 악화된 상태다. 여기서 조금 더 나빠진다고 얼마나 더 문제가 되겠는가.
‘괴물이 내 손에 들어오면 아쉬운 것은 티앤씨 쪽이다.’
에저튼이 괴물을 손에 넣는다면 한 달 안에 신형 헐크 뮤턴트 개발을 완료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전과 달리 티앤씨가 제발 팔아달라고 애원하는 상황이 될 것이다.
잠시 후 제이콥이 보낸 유전자 데이터를 전송받은 바이오 스캐너가 작동되었다.
사령실 전면에 배치된 대형 홀로그램 모니터에 도시 전체를 대상으로 스캔한 결과가 출력되었다.
“목표물 항만 지구를 향해 접근 중.”
“역시.”
덴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놈은 악마적인 지능을 가진 무서운 괴물. 자기가 가진 힘과 한계를 잘 알고 있는 놈이다.
‘탈출하는 우주선을 타고 도망칠 생각이겠지.’
“탑승한 기사단원들에게 알려라. 전투를 준비하라고.”
옥좌에서 몸을 일으킨 덴버는 부관에게 명령했다.
“전원에게 어썰트팩 착용을 허용한다.”
“어썰트팩 말입니까?”
현재 기함에 남아 있는 기사단원의 수는 총 50명. 그들 전원에게 고가의 장비인 어썰트팩 사용을 허가하니 부관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놈은 만만치 않은 사냥감이다. 이번에는 생포가 아닌 사살할 것이니 런처도 준비하도록.”
“알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직접 지휘할 터이니 나의 강화복도 준비하라.”
덴버는 사령실의 모니터에서 움직이는 놈의 신호를 바라봤다.
‘놈은 나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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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쏟아지는 플라즈마탄을 피해 하수도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보조기관으로 확인해 보니 나를 노리는 적의 수가 순식간에 늘어났다.
‘매복하고 있었어.’
감지되는 적만 50명.
몸의 표면에서 강렬한 전기의 흐름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전원 상급 강화복에 어썰트팩까지 착용하고 있었다.
내가 감지하지 못하도록 먼 거리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어썰트팩에 있는 제트팩 기능으로 단숨에 날아온 것이리라.
‘어떻게 알았지?’
방위함대 소속 군인이면 모를까 에저튼 기사단이 매복하고 있던 것은 예상외였다.
저들에게는 내가 이미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을 터.
다만 지금 상황을 고려해 보면 어떻게 알아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지난 며칠 동안 해부팀장은 나의 유전자를 갖고 이사회에서 발표를 했다. 그 자리에 있던 에저튼이 얼마나 탐을 냈을지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게임 속 설정과 달리 현실의 에저튼 가문은 유전자 조작에 관심이 많아 보였으니까.
‘모뉴먼트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내 시체를 훔치려고 했을 거야.’
노블캐피탈은 하나같이 욕심이 많은 족속이니 필시 지금이 기회라 판단하고 움직였을 가능성이 높다.
하나 나는 한참 전에 모뉴먼트 과학연구소를 빠져나갔다.
따라서 현재 모뉴먼트 과학연구소는 텅텅 빈 상태.
내 시체가 말끔히 사라졌으니 저들도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리라.
‘그 다음에는 아마 바이오 스캐너를 썼겠지.’
메가콥 군함에는 생물의 생체신호를 파악하는 바이오 스캐너가 탑재되어 있다.
기기에 생물의 유전자 데이터 같은 것을 넣으면 일정 범위 내에 해당 생물의 위치를 찾아낸다.
‘원래라면 타 가문의 영토에서 바이오 스캐너를 쓰는 것은 금기지만.’
바이오 스캐너는 유전자 데이터만 있다면 사람의 신호도 실시간으로 읽어낼 수 있어서 첩보 활동에 쓰기도 용이하다.
그런 도구를 상대 영토에서 쓴다면 대놓고 너희 영토를 감시하겠다는 말밖에 되지 않기에, 메가콥의 각 가문들은 서로의 영토에서는 바이오 스캐너를 쓰지 않자고 약조한 상태다.
그 중요한 규칙을 에저튼이 어긴 것이다.
‘저쪽도 급하긴 급한가 보네.’
이사회 발표 이후로 몸이 제대로 달았는지 저쪽도 막 나가려는 것 같다.
“내가 네놈을 놓칠 것이라 생각했느냐?”
밖에서 지휘관으로 추정되는 자의 외침이 들렸다.
전신을 감싸는 강화복 때문에 기계음으로 변조된 목소리였지만 그 안에 담긴 집착과 광기는 숨길 수 없었다.
‘만만치 않겠는데.’
50명의 기사에 어썰트팩까지 부착한 적과 백병전을 벌인다니.
어썰트팩은 탁 트인 전장에서 싸울 때 그 진가가 발휘된다. 지난번에는 하수도라는 좁은 공간에서 싸우느라 적들도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사냥의 표상 없이 내가 이길 가능성은 낮아.’
그렇다고 하수도로 유인하는 것도 마땅치 않다.
“기사단이여! 런처를 준비하라!”
지휘관의 명령을 들은 기사 5명이 플라즈마 런처를 들고 이쪽으로 온다.
기사단의 지휘관은 나를 생포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하긴 저들이 하수도에서 당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이게 현명한 방법이겠지만.
5명이 런처를 순차적으로 쏴대면 이 하수도 통로에서 막는 것도, 피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애초에 내가 피하면 애들이 대신 맞겠지.’
나 혼자면 모를까 26호와 아드하이도 있다.
26호는 그나마 낫지만 아드하이는 아직 부상이 다 낫지 않은 상태다.
둘 다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내가 녀석들을 지켜야 한다.
‘어떻게 할까.’
지금 내가 있는 지형은 적과 싸우기에는 유리하지 않다. 기습을 하려고 해도 저쪽에서 들어오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게다가 밖으로 나간다고 해도 문제다.
‘나가는 길이 제한되어 있으니까.’
적들은 박살이 난 맨홀 주변에 모든 화력을 집중할 수 있도록 전열을 짠 상태다. 나가는 순간, 그대로 벌집이 되겠지.
설령 내가 다른 길로 우회하려고 해도 군함에 있는 바이오 스캐너에 걸린다.
‘…남은 길은 하나뿐이야.’
아무래도 모험을 해야 할 것 같다.
[즈즈 즈즈즈(모두 물러나)]
「큰애기야?」
「?」
나는 26호와 아드하이에게 뒤로 한참 물러나라고 한 뒤, 바닥에 엎드렸다. 머리의 갑각을 방패처럼 세워서 최대한 몸에 피격 면적을 줄였다.
통로에 흐르는 물속에서 보조기관에 모든 감각을 집중한 채 기다렸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짓은 예전에 게임에서도 몇 번 해 본 적 있었다.
문제는 나라고 해도 100% 성공할 수 없는 방법이라는 것.
게임에서는 실패해서 죽어도 다시 리젠되는 걸로 끝이지만 여기는 현실.
조금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다.
‘쓸데없는 생각은 그만하고 집중하자.’
런처를 든 기사단원이 한 명이 하수도 안으로 뛰어든다.
그들이 밟으며 만든 파장이 수면으로 퍼져나가고 내 보조기관에 전달된다. 이어서 한 명, 두 명, 연달아 이곳으로 진입한다.
들어오자마자 그들은 공격을 준비했다.
“런처 준비 완료. 엄호 사격 개시!”
「Charging 10…30%」
런처를 작동시키는 자 외 다른 이들이 나에게 볼터로 사격한다.
정제된 플라즈마 에너지가 내 머리의 갑각에 마구 쏟아졌다. 두꺼운 머리 갑각의 일부가 플라즈마탄에 맞아 떨어져 나가고, 몸 전체가 충격 때문에 뒤로 밀려났다.
「고통 경감 발동!」
‘집중.’
나는 하수도 바닥에 전투용 팔을 박아서 몸을 고정했다.
「Charging 60…80%」
‘기다리자.’
볼터의 세례를 맞는 나를 걱정하는 26호의 파장이 느껴진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집중을 유지했다.
「Charging 90%…」
플라즈라 런처의 에너지가 한계까지 차오른 그 순간.
내 등의 골판들이 움직였다.
두 갈래로 나 있는 골판이 서로 맞닿으며 만들어 낸 파장이 하수도의 통로에 뻗어 나간다.
그 목표는 선두에 선 기사.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기사의 몸이 아니라 그의 몸을 감싸고 있는 갑주.
첨단기기를 지배하는 파장이 기사가 입고 있던 강화복을 휘감는다.
본래 착용자를 보호해야 할 강화복이 주인의 통제에서 벗어나 나의 의지에 따른다.
강화복의 장치는 복잡하므로 내가 완벽하게 지배하기는 어렵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복잡하고 섬세한 움직임이 아니다.
내가 요구하는 것은 그저 총을 든 상체를 뒤쪽으로 돌리면 된다는, 아주 간단한 움직임뿐이다.
“헉!”
런처로 나를 겨냥하고 있던 그의 몸이 뒤로 홱 돌아간다.
런처의 총구가 가리키는 방향은 내가 아닌 기사의 동료들.
“뭣?!”
뒤에 있던 기사가 급히 발사되기 직전인 런처를 멈추려고 손을 뻗었지만 나의 보이지 않는 습격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공포의 주시자.’
내 머리의 갑각에 있던 눈을 닮은 문양이 음울한 빛을 내뿜는다.
갑각에 새겨진 눈동자 모양의 문양이 빛을 내며 선두에 선 기사를 주시한다.
한순간 공포에 사로잡힌 기사가 뻗던 손을 내리고, 선두에 선 기사처럼 몸을 돌린다. 그가 들고 있던 런처의 방향 또한 주인의 움직임에 맞춰 뒤로 향한다.
5명 중 2명이 런처의 총구를 내가 아닌 반대 방향, 즉 동료에게 향했다.
“모두 물러…!”
「Charging 100%」
후방에 있던 기사가 그 모습을 보고 외쳤지만 이미 런처의 차징은 완료되었다.
동료를 배신한 기사 2명이 들고 있는 런처 끝에서 함선도 격추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해방된다.
선두에 선 둘이 쏜 플라즈마 빔이 향한 곳은 동료 기사들이 들고 있던 런처들.
아직 충전 중이던 런처에 녹색 에너지가 맞닿은 순간, 엄청난 섬광이 내 눈을 가렸다.
이전에는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거대한 진동이 나의 몸을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중에 큰 통증은 없었다.
적들이 보유한 플라즈마 런처를 역이용해 연쇄폭발을 야기시키려 한 나의 계획은 성공했다.
보조기관이 나에게 말한다. 나를 노리던 5명의 기사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빠르게 회복된 내 시야에 보이는 것은 어두컴컴한 하수도가 아니라 항만 지구의 전경이었다. 더 이상 내 앞에는 하수도 통로라 불릴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대신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나간 대규모 파괴 현장만 존재할 뿐.
[즈즈즈즈 즈즈즈(지금이야. 모두 나가)]
「응!」
「반격」「개시」
나는 애들과 함께 땅 위로 올라왔다.
무너진 콘크리트 지반 위에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기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상당수가 플라즈마 연쇄폭발에 휘말려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거나, 지반이 무너질 때 함께 매몰되었다.
“미, 미친! 이건 불가능해!”
은색 기사들 중 유일하게 검은색 갑옷을 입고 있던 남자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목소리를 들어 보니 저자가 지휘관임이 틀림없었다.
‘계급이 높아 보이는데.’
다른 이들과 다르게 유독 튀는 검은색 강화복을 입은 것을 보면 에저튼 가의 장로쯤은 되지 않을까.
‘저자를 이용해야 해.’
[즈즈즈즈 즈즈 즈즈(다른 사람을 맡아줘)]
「큰애기를 괴롭힌 사람은 혼내줄 거야!」
「동의」
26호와 아드하이에게 남아 있는 기사의 처리를 맡기고, 나는 검은 갑옷의 기사를 향해 달려갔다.
“전하를 지켜…컥!”
기사들 중 한 명이 나를 보고 소리치려고 했지만, 투명한 무언가에 목이 막혀 버렸다.
멀리서 26호가 촉수를 뻗어 ‘속박’을 시전하고 있었다. 그 위에 아드하이가 공중으로 날아오르며 기사들에게 보라색 번개를 쏴댔다.
그린 갤러곤이 되면서 새로 습득한 기술인 퍼플 라이트닝이다.
관통력과 파괴력은 말 그대로 처참한 수준이지만, 대신 범위 공격이고 무엇보다 감전 효과가 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합금으로 전신을 감싸고 있는 만큼 그 피해는 클 수밖에.
아드하이가 쏜 보라색 번개에 기사들 중 일부가 쓰러지고, 범위 밖에 있던 기사들이 제트팩을 이용해 하늘로 날아올랐다.
“저, 저놈부터 처리…헉!”
“히, 히익! 괴물이다!”
하늘에서 아드하이를 치려던 기사들이 일제히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도 오싹한 느낌이 드는 것을 보니 누가 한 짓인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속박으로 기사들의 목을 비틀던 26호.
어느새 녀석의 몸에는 대여섯 개의 눈동자가 나타나 기사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바다는커녕 호수조차 없는 이 우주도시에서 심해의 공포가 그들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히, 히히! 히히히! 죽어! 죽어!”
“정신 차려!”
“아악!”
26호와 아드하이의 협동 공격에 적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 나는 검은 기사에게 빠르게 접근했다.
“전하! 기함에 지원을 요청하시길!”
“여기는 저희가 막겠습니다!”
다른 기사 2명이 검은 기사를 지키기 위해 나섰다.
‘방해되니까 비켜.’
나는 촉수를 뻗어 한 명을 후려치고, 다른 한 명에게 하이재킹을 걸었다.
“큭?! 이, 이게!”
볼터를 든 팔을 강제로 움직여서 촉수에 맞고 쓰러진 동료의 머리를 쐈다.
플라즈마탄에 맞은 그의 머리는 전자렌지에 돌린 계란처럼 터져 버렸다.
“씨바아아알!”
나는 절규 섞인 욕설을 내뱉는 기사의 몸을 다시 조종해서 검은 기사를 조준하도록 시켰다.
기사는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했지만 강화복의 힘을 이겨 낼 수는 없었다. 강화복으로 둘러싸인 손가락이 나의 의지에 따라 볼터의 방아쇠를 당겼다.
볼터에서 발사된 플라즈마탄이 검은 기사의 등을 후려쳤다.
“커억!”
확실히 높은 지위에 있는 자라 그런지 볼터에 맞았음에도 그의 갑옷은 크게 손상되지 않았다.
하지만 충격량까지 완전히 흡수하지는 못했는지 검은 기사는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를 쓰러트린 나는 하이재킹한 기사의 머리를 전투용 팔로 붙잡았다. 어떻게든 저항하려고 하는 그의 움직임이 느껴졌지만 소용없었다.
언제나 그를 보호해주던 강화복이 역으로 본인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으니까.
“저, 전하, 어서 대피…끄아아악!”
유령 발톱을 써서 투구 안에 있던 기사의 머리를 헤집자 기사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어서 강화복 틈 사이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손을 빼자 기사의 시체가 맥없이 쓰러졌다.
“크, 으으윽!”
검은 기사는 볼터에 맞은 충격이 가시지 않았는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다가 갔다.
다른 기사들은 26호와 아드하이와 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 가까이 오지 마라!”
이곳에 그를 보호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나는 그가 쓰고 있던 투구를 잡아 뜯어냈다.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은 검은색 피부의 흑인이었다.
그는 입가에 피를 흘리며 두려움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내 뾰족한 이빨이 가까워지자 그가 덜덜 떨기 시작했다.
「네·가·지·휘·관·이·지·」
“마, 말을 하다니?!”
그의 두 눈동자가 경악에 물들었다.
그는 내가 사람 말을 한 것에 꽤나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허, 헐크 뮤턴트가 맞았나? 이, 이런 기술이 존재했을 줄이야!”
헐크 뮤턴트라니.
나는 그런 저열한 존재가 아니지만 굳이 적에게 그 사실을 설명해줄 필요는 없다.
내가 이를 드러내자 그가 다급히 외쳤다.
“기, 기다려! 나는 덴버 에저튼이다! 나를 살려 준다면….”
확실히 지위가 높은 사람이다 보니 반응도 다르다.
지금까지 나와 조우한 뒤로 협상을 제시한 사람은 별로 없었으니까.
말이 통하는 상대이니까 협상도 가능할 것으로 생각한 것 같지만 완전히 잘못 짚었다.
‘지금까지 여러 번 싸웠는데도 아직 나에 대해 모르는 것 같네.’
나는 전투용 팔로 그의 견갑을 뜯어낸 뒤, 날카로운 이빨로 그의 어깨를 물어뜯었다.
“악!”
내 이빨로부터 흘러나온 신경독이 그의 혈관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덴버의 피가 내 목구멍으로 흘러들어왔다.
「필·요·없·어·」
“!”
의태기관의 효과로 인해 내 입에서 그의 목소리와 거의 비슷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나는 몸이 인형처럼 뻣뻣하게 굳은 그에게 다시 투구를 씌워줬다.
그가 잘 모르는 것 같으니 가르쳐 줘야겠다.
에이모프는 협상 따위 하지 않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