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93
나는 전투용 팔로 쓰러진 덴버를 붙잡았다.
‘성이 에저튼이라고 했지?’
특색 있는 갑옷을 입고 있는 것도 그렇고, 에저튼의 성씨를 가진 것도 보면 이 자의 지위는 그리 낮아 보이지 않았다.
‘실험해볼까.’
방금 나는 덴버를 마비시키기 위해 그의 목을 깨물었다. 그 과정에서 그의 피에 담긴 유전자 정보가 내게 흡수된 상태이기에 그의 목소리를 흉내낼 수 있다.
‘의태기관은 봉인됐지만 목소리만큼은 제한적으로 흉내낼 수 있으니까.’
나는 덴버의 강화복 전원을 차단한 뒤, 허리춤에 달린 통신기를 빼 들었다.
“도, 와, 줘.”
「전하!」
가슴의 작은 팔로 통신기를 들고 덴버의 목소리를 흉내 내자, 기사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전하가 붙잡혔다!」
「빌어먹을 괴물 놈!」
통신기 너머로 기사들이 분통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린다.
당장 나를 씹어 먹을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함부로 나에게 달려드는 사람은 없었다.
‘오?’
나는 덴버를 붙잡은 채 애들을 불렀다. 26호와 아드하이가 내게 접근하자 기사들이 움찔거렸다.
기사들의 반응을 보니 확실해졌다.
이 자, 덴버 에저튼은 지위가 제법 높은 사람이다.
‘그러고 보니 나에게 협상을 시도하려고 했지.’
어쩌면 가문 내에서도 중책을 맡은 인물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혹시 가주인가?’
너무 쉽게 잡혀서 설마 에저튼의 가주일까 생각했는데 저들의 과민반응을 보니 가주가 맞는 것 같다.
덴버가 가주가 맞다면 나의 선택지가 훨씬 넓어진다.
‘여기서 좀 더 질러볼까?’
우리가 기사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더라도 이미 발각된 이상 몰래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전투에서는 이기더라도 전쟁에서는 아직 불리한 상태야.’
저쪽에서 나의 시체를 포기하고 함포사격을 가하면 나와 애들은 그대로 죽는다.
또한 어떻게든 이 자리를 빠져나가서 우주선에 숨어든다고 해도 군함이 뒤쫓아 오면 그걸로 끝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덴버를 붙잡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덴버가 값어치가 높은 인질이라는 것이 확실해졌으니 한발 더 나아가 모험을 해도 괜찮을 것 같다.
「…저 괴물 놈, 지금 전하를 인질로 잡은 건가?」
「지성이 있다고 들었거늘 이 정도일 줄이야.」
「전하께서 인질로 잡혀 있으니 모두 경거망동하지 말게.」
통신기에서 기사들이 대화하는 내용들이 들려온다.
당연한 얘기겠지만 저들은 내가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러고 보니 덴버가 그랬었지.’
그는 나를 보자마자 헐크 뮤턴트라 판단했다.
저들이 에이모프를 모른다면 딱히 틀린 판단은 아니다.
나의 몸에 여러 생물의 유전자가 들어가 있다는 것은 싸우면서 이미 알았을 터. 그렇다면 비슷한 존재인 헐크 뮤턴트라 추정한 것이 자연스럽다.
물론 헐크 뮤턴트 말고 유전자 흡수를 통해 진화하는 아웃스페이서가 있지만 그들은 26호와 비슷하게 자기 종족들만 공유하는 특유의 파장으로 대화한다.
‘원래 헐크 뮤턴트도 나만큼 말을 잘 하지는 못하지만.’
그것도 게임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다.
이미 말뿐만 아니라 해적질까지 무리 없이 하는 헐크 뮤턴트도 만나 봤지 않은가.
‘저쪽에서 날 헐크 뮤턴트라 판단한다면….’
어떻게 속이면 좋을까.
‘설정상 헐크 뮤턴트는 유전자를 부작용 없이 융합할 수 있는 유전자 조작 기술이 필요해.’
당연히 이를 위해서는 대규모 자본, 유전자를 융합시킬 첨단 기기들이 설치된 실험실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즉, 아무나 못 만든다는 것.
‘그 부분을 이용해보자.’
짧은 시간 동안 고민을 마친 나는 작은 팔로 통신기의 채널을 조작했다.
‘군함과도 통신할 수 있었는데…아, 여깄네.’
공용 채널로 전환한 다음, 전투용 팔로 덴버의 오른쪽 팔을 꺾었다. 전신이 마비된 상태기에 고통은 없겠지만 저 기사들이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다.
「전하!」
「네놈!」
“그르, 모, 두, 에, 게, 그륵, 알, 린, 다.”
「전하? 왜 이쪽 채널에…?」
「전하께서 인질로 붙잡히셨다!」
이 자리에 있는 기사들과 군함에 대기 중인 부하들까지 당황한 자들의 말소리로 통신기가 시끄러웠다.
저들의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놈, 은, 그륵, 일, 반, 헐, 크, 뮤, 턴, 트, 그르르, 가, 아, 니, 다.”
「전하! 부상이 심합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않으셔도…!」
“이, 놈, 은, 티, 앤, 씨, 에, 서, 만, 든, 괴, 물, 티, 앤, 씨, 를, 쳐, 라.”
「설마!」
「마, 말도 안 됩니다!」
내 말에 기사들과 군함 양쪽의 반응이 격렬해졌다.
당장 티앤씨를 쳐야 한다는 반응과 덴버가 부상으로 정신이 혼미해진 것이라는 반응 등등.
그러나 그들 중 나를 의심하는 자는 없었다.
‘당연히 의심할 리 없지.’
덴버의 키는 강화복 덕분에 2m 50cm에 육박한다.
내가 두 발로 선 자세가 3m를 조금 넘으니까 저쪽에서 가까이 접근해 확인하지 않는 이상, 내가 통신기로 몰래 연락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기 어렵다.
하물며 알 수 없는 괴물이 멀쩡히 살아있는 가주의 목소리를 따라한다고 누가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목소리가 좀 다르지만 그것도 계산했어.’
현재 나는 초월 시스템의 제약 때문에 목소리를 온전히 따라 할 수 없다. 고장이 난 라디오에 나오는 것처럼 잡음이 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러 저들이 보는 앞에서 덴버에게 부상을 입혔다. 통증 때문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자의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게다가 티앤씨는 적들의 시선을 돌리기 적당한 타깃이야.’
헐크 뮤턴트는 프라임캐피탈도 개발에 어려움을 느낄 정도로 고급 기술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저들이 봤을 때, 나 정도 되는 헐크 뮤턴트를 개발할 수 있는 자는 딱 하나밖에 없다.
바로 요 며칠간 유전자 조작 기술에 관련해 획기적인 성과를 발표한 티앤씨 말이다.
‘여기서 쐐기를 박아야 해.’
“지, 구, 경, 계, 에, 그르르, 이, 놈, 을, 조, 종, 하, 는, 장, 치, 그륵, 가, 있 ,다.”
「그 말씀은?」
“경, 계, 의, 검, 문, 소, 파, 괴, 하, 라.”
「자, 잠깐! 그랬다간 티앤씨와 전쟁이 터질 겁니다!」
군함 측의 말이 맞다.
하수도에서 무력충돌까지 한 마당에 검문소에 함포사격까지 한다면 남은 것은 전쟁밖에 없다.
하나 가주가 내 손에 붙잡혀 있기에 저들은 내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아직 설득력이 부족한가.’
나는 아래쪽의 팔을 이용해 덴버의 다리를 붙잡고 으스러트렸다. 전신의 감각이 마비되었다고 해도 지금 것은 꽤 충격이었는지 투구 안쪽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다.
본인도 이렇게 당황하는데 저쪽은 어떻겠는가.
통신기에서 고함 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입을 벌려 덴버의 어깨를 물었다. 두꺼운 견갑이 부서지고 안쪽에 있는 거뭇한 어깨에 내 이빨이 박혔다.
분노한 기사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나는 그 사실을 신경 쓸 수 없었다.
덴버의 어깨에서 솟구치는 핏줄기가 내 목구멍을 따뜻하게 적셨기 때문이다.
‘맛이 좋네.’
목을 깨물 때 살짝 맛을 봤지만 이렇게 대량의 피를 마시니까 확실히 느껴진다.
오래 숙성시킨 고급 와인이 이런 맛일까. 달착지근하면서도 뒷맛이 깔끔한 맛이었다.
‘따로 유전자 개조는 하지 않은 것 같은데.’
잘 먹고 잘 지내서 그런 것일까. 여태 먹었던 먹이 중 가장 맛이 좋았던 시현 유진과는 또 다른 풍미였다.
‘아직은 안 돼.’
지금은 저쪽을 흔들어놓기 위해 한 행동이다. 만찬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고.
나는 아쉬움을 담아 어깨에 박은 이빨을 뽑았다.
‘이쯤 했으면 저쪽도 이해했겠지.’
가주를 버리지 않는 이상, 그들이 할 수 있는 행동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내 예상대로 저 멀리 선착장에 정박된 대형 군함 한 척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했다.
‘휴.’
그제야 나는 간신히 긴장을 풀 수 있었다.
‘솔직히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가주를 인질로 잡는다는 행동은 도박성이 짙은 선택지였다.
만약 내가 붙잡은 사람이 가주가 아니었다면?
아니면 군함에 탑승한 자들이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나에게 포격을 가했다면?
그걸로 나와 애들의 운명은 끝이다.
‘저쪽에서 메가콥스러운 사고방식으로 행동해 줘서 다행이야.’
메가콥은 캐피탈 간에 격차가 심하게 존재하는 경직된 사회이면서도 동시에 무한경쟁을 용인하는 희한한 구조를 가진 곳이다.
그렇다 보니 경쟁에서 패배할 시, 심하면 캐피탈이 몇 단계씩 떨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러한 현상은 낮은 캐피탈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상위권에 위치한 7대 가문도 마찬가지다.
‘덴버가 죽으면 그 부하들은 새로 가주가 된 자에 의해 모조리 숙청되겠지.’
기사들뿐만 아니라 군함에 탑승한 사람들도 자기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는 덴버를 어떻게든 살려놔야 한다.
그렇기에 주인이 내린 말도 안 되는 명령을 저렇게 따르는 거고.
군함이 목표를 향해 날아가는 사이, 나는 보조기관으로 우리가 타고 떠날 배를 찾았다.
선착장까지 거리가 꽤 돼서 자세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나쁘지 않은 느낌의 우주선을 몇 개 발견할 수 있었다.
‘군함이 검문소를 포격하면 그때가 움직일 시간이야.’
에저튼의 군함에 대응하기 위해 방위함대가 나서면 이곳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될 거다. 그때 선착장으로 달려서 우주선에 몰래 탑승하면 된다.
[즈즈즈 즈즈즈(신호가 오면 뛰어)]
「신호?」
되묻는 26호에게 대답해 준 것은 내가 아니었다.
지구 경계에서 거대한 폭발이 솟구치고 이어서 항만 지구 전체에 굉음이 쩌렁쩌렁 울렸다.
[즈(지금)]
나는 덴버를 붙잡은 채로 달렸다. 26호와 아드하이도 나의 뒤를 따랐다.
‘생각보다 26호도 빠르네.’
녀석은 다리 역할을 하는 지느러미를 빠르게 놀리는 동시에 촉수로 뒤를 밀어 앞으로 나아가는 식으로 움직였다.
심해에서 사는 생물이라 걱정했지만, 땅 위라고 속도가 크게 떨어지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우리가 빠른 속도로 멀어지자 기사들이 당황해하며 뒤쫓아왔다.
「못된 사람이 쫓아와.」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쟤네는 우리가 잡지 않아도 돼)]
「?」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하늘이 일그러지더니 곳곳에 검은색 줄이 그어졌다.
홀로그램과 인공 태양으로 유지하고 있던 하늘이 사라지고, 도시를 감싸고 있는 금속 재질의 돔이 드러났다.
이어서 돔 내벽에 설치된 차폐문이 열리고 그 안에서 강철의 배들이 쏟아지듯 튀어나왔다.
[즈즈즈 즈즈즈즈(저들이 처리할 거야)]
「와!」
항만 지구 근처의 차폐문에서 나온 전함들이 에저튼의 군함을 향해 플라즈마 열선을 발사했다.
거대한 인공구조물 내에서 수많은 강철배들이 일제히 녹색 빛줄기를 쏘는 광경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그에 맞서 에저튼의 군함 정면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왔다. 전함 이상급 배에만 설치한다는 플라즈마 실드가 가동된 것이다.
녹색 열선들은 군함을 보호하는 실드를 뚫지 못하고 그대로 사그라졌다.
‘원래 저 정도는 아닌데 가주가 타는 배라고 좋은 것을 썼나보네.’
에저튼 군함에 장착된 수많은 포대가 동시에 불을 뿜었다. 실드만 좋은 것을 쓴 게 아닌지 군함에서 발사된 열선의 굵기는 티앤씨 측에 비해 두 배 이상이었다.
전함들 또한 실드를 가동했지만 에저튼이 쏜 플라즈마 열선은 막을 수 없었다. 열선에 피격된 전함들이 불나방처럼 도시 위로 추락했다.
도시 한가운데서 전쟁이 터지자 선착장의 분위기도 급변했다. 밖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배들이 서둘러 출항 준비를 했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마, 맙소사!」
「어떻게 이런 일이….」
우리를 뒤쫓던 기사들은 에저튼의 군함과 방위함대가 싸우는 것을 보고 넋이 나간 것 같았다.
그들은 우리를 쫓던 것도 잊어버린 채 제자리에 서서 그 참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야 그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은 듯 보였다.
통신기를 통해 망연자실한 감정이 담긴 대화들이 오고 가는 것을 들으니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시현 유진의 수하들이 임의로 내전을 일으키려 한다고 짐작했다.
하나 내가 당시 음모의 핵심이었던 갤러곤 아드하이를 살려주면서 유진의 음모는 좌절되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 내 앞에서 메가콥 최대의 이벤트, 내전이 발발했다.
그것도 내 손에 의해서 말이다.
「와! 쾅쾅! 멋있다!」
나와 기사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26호는 공중에서 녹색과 푸른색 빛이 서로 얽히는 광경을 보며 해맑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