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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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와 어둠 때문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던 숲에도 아침이 찾아왔다.
어둑한 숲속 대지 위에 빛이 내리깔렸다. 새벽에 있었던 안개와 이슬로 인해 땅은 살짝 젖어 있었다.
그 축축한 흙 위에는 발자국으로 가득 찍혀 있었다. 해적들과 워커들이 이동하면서 남긴 족적들이었다.
아침이 되었기에 지난 새벽과 달리 이동과 수색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분위기는 몇 시간 전 이곳에 왔을 때랑 많이 달라졌다.
헬멧에 가려진 그들의 얼굴에는 생소한 감정이 배어 있었다.
공포.
그것은 피식자들이 본능적으로 느끼는 두려움이다.
“부두목. 보좌관이 살아 있을까요?”
“닥쳐.”
“…넵.”
딜런이 으르렁거리자 부하는 바로 꼬리를 말았다.
현재 그들은 탐지기를 이용해 실종된 부보좌관의 뒤를 쫓고 있었다.
부보좌관은 그들이 습격 받던 도중 갑자기 사라졌다. 십중팔구 괴물이 그를 끌고 간 것이 틀림없었다.
‘빌어먹을! 두목이 이 사실을 안다면….’
부보좌관은 두목이 딜런을 보좌하라고 직접 붙여 준 인물이다.
그런 자가 괴물에게 붙잡혔다는 사실을 두목이 안다면 그를 절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불행한 미래를 피하기 위해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괴물을 잡아야 한다. 산 채로 포획하든 시체를 진상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적 발견!”
워커 조종사가 외치자마자 전원이 나무 위에 숨어 있던 생물들을 향해 일제히 사격했다.
몇 초도 안 지나 하반신 일부만 남은 놈이 땅바닥으로 떨어졌다.
“…씹, 우드데블이다. 아직 두 마리가 더 있을 테니까 찾아.”
“넵.”
아까부터 계속 애꿎은 우드데블만 죽어 나갔지만 놈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아예 이곳을 떠나 멀리 도망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딜런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놈은 사냥꾼이다.’
그것도 이 대륙에서 가장 치명적인 포식자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
놈은 이 숲에 들어온 해적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죽기 전까지는 살육을 멈추지 않으리라.
“부두목! 저길 보십쇼!”
그때 부하 중 하나가 나무 위를 가리켰다.
우드데블인 줄 알고 고개를 들었지만 거기에 있는 것은 더 안 좋은 것이었다.
“…이 씨발 새끼가.”
나무들마다 가죽이 벗겨진 시체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것은 메시지였다.
너희들도 이렇게 만들어 주겠다는 경고, 혹은 너희는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도발.
매달린 시체에 담긴 의미를 읽어낸 딜런은 이를 악물었다.
“수, 수습해야 하지 않을까요?”
“…….”
딜런이나 이 자리에 있는 해적들이나 동료 의식은 거의 없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시체를 수습해야 한다는 말을 꺼낸 이유는 다름 아니라 이 숲에 있는 다른 포식자들 때문이었다.
이 주변에는 해적들을 위협할 정도로 강대한 포식자는 없다.
그러나 새벽에 있었던 폭발과 플랜트리자드 무리의 이동으로 인해 멀리 떨어진 포식자들이 이곳에 찾아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혼드 기간트’.
두 발로 걷는 육식성 파충류인데 몸은 함선의 외벽만큼 단단한 비늘로 덮여 있고, 턱의 힘은 헤비 워커도 쉽게 으스러트릴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다.
게다가 놈들은 항상 암수가 함께 다니므로 한번 싸울 때 두 마리를 동시에 상대해야 한다. 이 자리에 있는 인원들로는 혼드 기간트 부부와 맞서 싸우기 어렵다.
‘…놈들은 후각이 예민하지.’
필시 이 시체를 걸어놓은 괴물도 그 사실을 알고 일부러 저렇게 해 놓은 게 분명했다.
사라진 부보좌관의 뒤를 쫓는 그들은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그렇다면 시체 냄새를 맡고 찾아온 또 다른 포식자와 마주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당장 저 시체들을 끌어내…아니, 잠깐.”
부하들에게 시체를 수습하라고 명령하려던 딜런은 입을 다물었다.
‘아니야. 놈이 그렇게 예상 가능한 행동을 했을까?’
수송선이 착륙하는 지점을 예측해서 지뢰까지 깔아 놓은 놈이다.
그런 교활한 놈이 과연 시체에다 아무 짓도 안 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시체를 낮은 위치에 걸어 놨어.’
부하가 보낸 영상에서는 한참 높은 곳에 시체를 걸어 놨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강화복을 입은 해적이라도 제자리에서 뛰어 시체를 잡고 끌어내릴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위치였다.
마치 시체를 수습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처럼.
‘수상해.’
딜런은 퍼플스프레이건을 들고 나무에 걸린 시체들을 향해 갈겼다.
길쭉한 총구 끝에서 뿜어져 나온 보라색 화염이 시체와 나무를 태웠다.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시체가 땅 위로 추락했고, 땅에 닿자마자 굉음과 함께 폭발했다.
“이 씹새끼!”
놈은 시체 안에 폭탄을 숨겨 놨다. 충격을 받으면 폭발하도록 손을 써놓은 것이었다.
즉, 이중함정.
놈은 시체를 치워도 문제고, 안 치워도 문제가 되는 함정을 준비했다.
“…으득,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난다.”
“알겠습니다!”
폭탄이 매달린 길을 지난다는 것은 결코 달갑지 않은 선택지였지만 어쩔 수 없다. 폭발로 인해 다른 포식자들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보다는 낫다.
딜런과 해적들은 시체들을 두고 빠르게 이동했다.
“50미터 앞, 부보좌관의 움직임이 멈췄습니다!”
놈과 점점 가까워지고 있지만 딜런은 오히려 불안했다. 이번에는 또 무슨 짓을 꾸미고 있을지 짐작도 가지 않았다.
“모두 정지.”
아무래도 불굴의 가면을 쓴 그가 직접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너, 너, 그리고 너는 나랑 같이 움직인다. 나머지는 대기.”
“넵.”
딜런은 몇몇 부하들과 함께 앞으로 나섰다.
우거진 풀숲을 뚫고 나가니 그들 앞에 넓은 공터가 나타났다. 공터의 나무 밑동에 부보좌관이 등을 기대고 있었다.
괴물이 그를 물어뜯은 것인지 부보좌관이 입고 있는 강화복은 매우 심각하게 손상되어 있었다.
복부 부위만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전부 뜯어져 있었으니까.
딜런은 먼저 불굴의 가면으로 공터 주변을 둘러봤다. 놈이 은폐하고 있다면 보라색 빛으로 보일 테지만 주변에는 그 어떤 생물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부보좌관도 확인해보니 몸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는 아직 살아 있었다.
“씹새야, 살아 있냐?”
“으, 읍읍! 으읍!”
그는 심각한 부상을 당했는지 움직이지 못하고 신음만 흘렸다. 딜런은 부하에게 손짓했다.
해적 한 명이 조심스럽게 부보좌관을 향해 다가갔다.
“보좌관님?”
“읍읍! 으읍!”
해적이 다가가자 부보좌관의 신음이 한층 더 거세졌다.
“응?”
가까이 가서야 해적은 부보좌관의 몸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부보좌관의 배가 기이할 정도로 부풀어 오른 상태였기 때문이다.
해적이 그의 복부에 손을 데려는 순간.
강화복이 터지면서 안쪽에 붙어 있던 검은 벌레들이 튀어나와 해적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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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숨겨놨던 이빨요정들이 행동을 개시했다. 이제 나의 차례다.
금속 포식으로 은신 상태에 있던 나는 거목 꼭대기까지 기어 올라가 적들의 탐지를 피하고 있었다.
‘저쪽 우두머리도 나름 머리를 굴린 것 같지만.’
폭탄 함정을 알아차린 것은 제법 기특했지만, 그것도 내 예상 범위 내에 있었다.
놈들은 시체에만 집중하느라 그 위까지 확인할 수 없었고, 덕분에 내가 거목 꼭대기에 숨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 손바닥 안이라니까.’
나는 거목 위에서 뛰어내렸다.
목표는 후방에서 전투를 준비하는 워커.
악몽의 지평선 효과로 굉장히 무거워진 내 몸이 빠른 속도로 추락한다. 앞에서 비명이 들렸기에 플라즈마 런처를 충전하고 있던 워커는 내가 떨어지는 것을 모른다.
“억?!”
“악!”
나와 충돌한 워커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졌다. 그러면서 충전하던 런처가 발사되며 앞에 있던 해적 둘을 가루로 만들었다.
“노, 놈이다!”
조종석 안쪽에서 조종사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한 번에 압사시킬 계획이었는데 아쉽게도 실패였다.
조종석을 둘러싼 두꺼운 강철 장갑이 나와의 충돌로 인해 엿가락처럼 휘어졌지만 조종사를 죽일 정도는 아니었나보다.
다른 해적들과 워커가 조종사의 말에 반응해 뒤를 돌아본다.
나는 유령 발톱을 활성화해서 조종석 안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손을 몇 번 휘저어서 조종사를 단번에 침묵시킨 나는 재빨리 앞으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로 내 등 위로 플라즈마 열선이 스쳐 지나갔다.
「고통 경감 발동!」
‘이런!’
무사히 피한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열선이 등에 있는 골판을 파괴했다.
회복되기 전까지는 전파 교란 특성은 사용 불가다.
열선에 이어서 사방에서 퍼플스프레이건으로부터 쏘여진 보라색 화염이 내게 작렬했다.
‘…엄청 뜨겁네.’
초능력의 불길이 내 외피를 뜨겁게 달군다.
퍼플스프레이건은 파괴력도 강력하지만, 불길이 백린탄처럼 쉽게 꺼지지 않는다는 특징을 가진다. 정제되지 않은 사이킥 파워로 이루어진 불길이라 일정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는 계속 타오른다.
현재 나는 초능력 강화 타입, 초능력 내성 특성, 고통 경감 특성을 보유한 상태.
덕분에 뜨겁다고 느끼는 선에서 그쳤지, 이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나는 온몸이 타들어 가는 통증 때문에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했을 거다.
‘기껏 금속 흡수를 썼는데 아쉽게 됐어.’
몸에 붙은 보라색 불길 때문에 투명화가 소용없어졌다.
‘…하지만 이 상태로도 쓸 수 있는 전략이 있지.’
나는 불길을 몸에 두른 채로 남은 워커 1체를 향해 돌진했다. 런처를 충전하고 있던 놈은 내가 달려오자 서둘러 어깨 부근에 달린 부무장인 유탄발사기를 작동시켰다.
‘멍청하긴.’
응축된 플라즈마 에너지를 담은 유탄이 내 머리에 맞고 튕겨 나갔다.
튕겨진 유탄은 나에게 열심히 초능력 화염을 쏟아 붓던 중인 해적들 앞에 떨어졌다.
“뭐 이런…!”
등 뒤에서 들려오는 폭음을 무시하고 나는 워커에게 달려들었다. 새벽에 무력하게 당한 워커와 달리 그는 몸을 기울여 나의 돌진을 흘려 냈다.
뿔이 조종석의 외장갑에 스치며 길쭉한 흔적을 냈지만 꿰뚫지 못했다. 내 뿔을 피해낸 워커는 발로 나를 차서 밀어냈다.
돌진에 집중하고 있던 나였기에 워커의 발차기 한 번에 몸이 크게 밀려났다.
‘그래도 상관없어.’
워커는 자세가 무너진 나를 향해 런처를 겨눴지만 그의 의도는 이루어질 수 없었다.
“으, 으아아아악!”
왜냐하면 내 몸을 휘감고 있던 초능력 불길이 워커에게 옮아 붙었으니까.
조종석이 보라색 불길에 휩싸이자 안에서 조종사가 급히 탈출했다.
‘어딜 가시려고.’
나는 도망치려는 그에게 꼬리를 휘둘렀다.
단단한 비늘로 감싸져 있는 꼬리에 맞은 그는 저 멀리 날아가 나무에 부딪쳤다. 나무와 충돌한 순간, 그는 손바닥에 맞은 모기 꼴이 됐다.
“쏴! 쏴서 놈을 죽여!”
정찰 때문에 앞서 갔던 해적 리더가 어느새 돌아와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그의 어깨에 달린 오토 플라즈마 건이 정확히 나를 노리고 사격을 가했다.
나는 머리를 틀어서 내 팔을 노리고 날아온 플라즈마탄을 막았다. 머리가 찡 하고 울렸지만 아직 견딜 만했다.
‘자리를 바꿀까.’
나는 초능력 화염과 플라즈마탄을 피해 해적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퍼플스프레이건은 적, 아군을 가리지 않는다. 중화기를 든 해적들이 당황해하며 사격을 멈췄다.
“이 병신들아! 당장 놈을 쏴!”
똑똑한 해적 리더가 악을 썼지만 이미 늦었다. 나는 전투용 팔에서 가진 무기들을 전부 뽑아 들었다.
먼저 뼈 도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해적의 머리를 내리쳤다.
“켁!”
그의 뇌수가 비산하는 사이, 피처럼 붉은 흡혈 촉수가 다른 해적의 다리를 붙잡았다.
“억?!”
흡혈 촉수에 매달린 해적은 1.9m짜리 몽둥이가 되어 다른 해적들을 두드려 패는데 쓰였다.
“끄엑!”
“악!”
단단한 강화복을 입은 해적이라 해도 똑같은 옷을 입은 해적으로 만든 몽둥이는 버틸 수 없었다. 볼링공에 맞은 핀처럼 해적들이 나가떨어졌다.
그 모습에 다른 해적들도 동료들을 버리기로 작정한 것인지 다시 퍼플스프레이건을 작동시키려 한다.
나는 그들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목구멍 안쪽에 있는 기관으로부터 악성 곰팡이가 든 주머니가 입 밖으로 내뿜어진다.
검은색 덩어리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 중화기를 든 해적들 뒤로 떨어졌다. 물풍선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극악한 곰팡이들이 해방되어 해적들에게 달라붙는다.
“끄, 끄갸갸갸각!”
“아가각각!”
해적들이 기묘한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진다. 전염 강화 특성 덕분에 현재 우주 박테리아와 부패 곰팡이 기관의 효과는 한층 더 강해진 상태다.
이전에 비해 훨씬 악랄해진 부패 곰팡이가 해적들의 몸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이, 이런 씨발…후퇴! 후퇴!”
워커는 전멸했고, 남아 있는 해적들도 반 가까이 줄어들었다.
해적 리더의 퇴각 명령에 다른 해적들이 등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을 쫓지 않았다. 대신 주변에 아직 죽지 않은 해적들을 챙겼다.
“그, 그만…끄엑!”
‘쫓기 전에 회복부터 해야 해.’
나는 버둥거리던 해적의 머리를 잘근잘근 씹었다.
전파 교란 특성을 발동시키는 골판도 손상되었고, 몸 전체에도 초능력 화염 때문에 화상을 입은 상태다.
굳이 서둘러 적을 추적하기보다는 상처를 회복하고 몸에 에너지를 채운 다음 움직이는 것이 바람직하다.
‘어차피 워커랑 중화기병은 전부 제거했어.’
그나마 리더로 보이는 자는 퍼플스프레이건과 오토 플라즈마 건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그뿐이다.
이 위험한 숲에서 그들은 상처 입은 사슴이나 다름없다.
‘이제는 내가 술래네.’
준비해 놓은 함정들을 쓸 일이 없어져서 아쉽지만 괜찮다.
나는 추격전도 아주 좋아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