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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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목?”
휴머니티 카르텔의 두목 뮤리엘은 보고된 영상들을 전부 확인했다.
처음에 홀로그램을 띄웠을 때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보던 그녀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더니 지금은 얼음장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차가워졌다.
“…이거 언제 찍은 거야?”
해적을 부를 때는 항상 오빠라고 부르는 그녀다.
그런 그녀가 호칭을 생략했다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분노했다는 것.
부하는 침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그, 그게 오늘로 일주일 됐습니다.”
“일주일? 통신은 누가 담당하지?”
“아, 그건 제가…컥?!”
말하던 도중 부하는 숨이 턱 막혀서 목을 붙잡았다. 그의 앞에 서 있는 뮤리엘의 눈에 보라색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이런 중요한 일을 이제 말해?”
“끄, 끄으윽….”
사원에 들어갔을 때 귀찮게 굴지 말라고 했던 것은 뮤리엘 본인이었지만 지금 그녀는 그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결국 애꿎은 통신 담당만 목이 비틀려 죽었다.
“치워.”
“넵.”
다른 부하보고 시체를 치우라고 한 그녀는 다시 홀로그램 영상을 띄웠다.
‘왜 여기에 에이모프가…설마?’
세인토피아02 대륙만이 아니라 PH-101 행성에는 에이모프 자체가 살지 않는다.
놈은 우주 공간을 지나 이 행성에 들어왔다면, 이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다.
‘플레이어다.’
뮤리엘은 이 디스토피아적 세계 속에 그녀처럼 다른 세계에서 건너온 자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 대다수의 플레이어들이 서로가 매우 적대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도.
그녀가 이 행성에 온 이유 중 하나도 플레이어를 잡기 위해서였으니까.
‘근데 에이모프는 멸종되었을 텐데 어떻게 된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부분이 아니다.
에이모프 플레이어가 이곳에 왔다면 그에 대한 대응 수단을 마련해야 한다.
“저 가죽 벗긴 시체….”
뮤리엘은 스페이스 서바이벌에서 랭킹 20위에 오른 플레이어였기에 저 시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게임에서 저런 식으로 상대를 도발하거나 겁을 주는 에이모프는 거의 없다.
오로지 단 한 명만이 저런 짓을 한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에서 가장 악명 높은 플레이어 중 하나이자 에이모프 중 유일한 랭커.
“분명 랭킹 5위였지.”
그녀가 랭커가 된 지 얼마 안 지나서 저 에이모프 랭커는 게임을 접었다. 덕분에 둘이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저쪽의 악명이 워낙 높다 보니 그녀도 대충 알고 있었다.
‘어떻게 접은 사람이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뮤리엘 또한 랭커 출신이다. 게다가 그녀는 이 세계에서 생존한 기간이 무려 3년이나 된다.
반면 상대는 오래 게임을 한 랭커긴 하지만, 도중에 게임을 관둔 플레이어.
그녀는 본인의 실력이 저 에이모프 랭커에 비해 결코 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내가 놈에게 질 가능성은 희박….”
「큭큭큭큭큭큭큭큭.」
그때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홀로그램에서 시선을 떼고 웃음소리를 낸 존재를 쳐다 봤다.
「크크큭, 쿨럭! 병신년인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하늘의 어머니가 뮤리엘을 비웃고 있었다.
내장을 끄집어내는 끔찍한 고문을 받는 도중인데도 그녀는 너무나도 웃긴 얘기를 들었다는 듯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가 그리 웃기지?”
「크크, 쿨럭, 퉤, 질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그 영상에 있는 것이 누군지는 알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5위의 에이모프 랭커 아냐?”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이렇게 태평하게 있다니. 참으로 대단한 자신감이네.」
“뭐?”
「놈은 어딜 가든 뭐든지 준비하고 움직여. 놈이 이곳에 왔고, 해적들을 죽였다? 뮤리엘 네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놈의 손바닥에서 벗어날 수 없어.」
“하? 고문 때문에 미쳤구나. 말도 안 되는 소리.”
뮤리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지만, 하늘의 어머니는 마치 자연 법칙을 설명하듯 말을 이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계획을 세우든 상관없어. 네가 싸우려고 해도 놈은 널 죽일 거고, 네가 도망치려고 해도 놈은 널 죽일 거고, 네가 자비를 구해도 놈은 널 죽일 거다.」
“…….”
「놈이 오기 전에 차라리 나를 죽여. 놈과 마주칠 바에는 그냥 이 자리에서 뒈지는 것이 훨씬 나아.」
지금까지 하늘의 어머니는 그 어떤 고문을 받아도 죽여 달라는 말을 한 적은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뮤리엘에게 복수하고 싶어 했으니까.
그런 존재가 지금 저 에이모프를 만날 바에는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사실이 뮤리엘의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씨발 뭐야?’
뮤리엘은 하늘의 어머니의 눈을 주시했다.
맹금류를 닮은 눈 속에 있는 감정은 매우 생소한 감정이었다.
두려움.
고문받는 중에 소변을 지릴지언정 전의를 잃지 않던 하늘의 어머니가 에이모프에게 겁을 먹고 있었다.
더 이상 하늘의 어머니에게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한 뮤리엘은 부하를 불렀다.
“순양함에 연락해서 내가 도착하기 전까지 최고 방위 수준으로 올리라고 해. 나 말고 그 누구라도 접근하면 사살해 버려.”
“캠프 쪽에서 오는 사람들도요?”
“그래. 놈은 사람인 척 속일 수 있으니까 누구도 믿지 말라고 해. 아예 연락도 받지 마. 그리고 뭔가 일이 생기면 바로 보고하라 하고.”
“넵.”
하늘의 어머니가 말한 내용이 꽤 신경 쓰였지만 그녀는 애써 무시했다.
위험한 존재와 싸우는 데 미리 겁을 먹으면 오히려 불리해질 뿐이다.
‘침착해. 어차피 놈은 아성체야.’
그녀도 랭커다 보니 에이모프와 싸운 경험이 적지 않다. 에이모프가 빠르게 강해지는 시점은 준성체 혹은 성체 이후부터다.
홀로그램에서 보이던 녀석은 게임에서의 모습과는 외형이 많이 다르긴 하지만 아직 아성체 단계로 보였다.
아무리 저쪽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수많은 부하와 순양함, 그리고 유일급 장비를 다수 보유한 그녀가 질 가능성은 낮았다.
‘예외라고 한다면 무슨 특전을 받았냐는 건데.’
뮤리엘 본인도 이 세계에 떨어지면서 새로운 특전을 받았다.
특전 효과는 매우 강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슨 도X에X의 만능 도구 같은 것이 결코 아니다. 그녀와 저 에이모프 간의 격차를 생각해보면 그가 아무리 좋은 특전을 받았다고 그녀를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정보다 일찍 돌아가야겠어. 모두 짐 싸.”
“알겠습니다.”
「큭큭큭큭, 쓸데없는 짓을 하긴. 너흰 이미 좆됐어! 크큭, 쿨럭!」
캠프의 인원들이 바삐 움직이는 와중에도 하늘의 어머니가 흘리는 비웃음이 불길하게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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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목이 오기로 한 날까지 이제 남은 시간은 하루.’
나는 해적들로부터 뺏은 소형 단말기 패드를 통해 시간을 확인했다.
준성체로 진화했으니 해적 두목과 맞서는데 필요한 조건은 얼추 갖춰진 상태라 할 수 있다.
준성체가 그 정도로 강하냐고 한다면 그건 아니다. 준성체가 되면 많이 강력해지는 것은 맞지만 해적 두목이 어느 수준인지 모르기에 마냥 이것만 믿고 갈 수는 없다.
내가 진화를 필요조건으로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적과의 물리적인 싸움을 대비해 스펙을 향상시키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잘못된 정보 습득으로 인한 실수를 유도하기 위함이다.
‘저쪽은 내가 아성체라고 알고 있을 테니까.’
해적 두목의 실력이 얼마나 될지는 현재 시점에서는 알 수 없다. 만약 상위권 플레이어라면 에이모프와 어떻게 싸워야하는지 정도는 알 터.
에이모프는 진화 단계에 따라 힘의 차이가 심하므로 저쪽은 아성체를 상정하고 대응을 준비할 거다.
「그그그그그」
‘잘못된 정보를 믿고 준비하다간 큰코다치지.’
작게 웃은 나는 반투명 텍스트박스를 띄웠다.
「종족: 미확인 적대적 우주생물
상태: 준성체(초월 1단계)
목표: 생존하라(진화 3회 성공).
보유 특성(육체계열 17개/초능력계열 7개/감염계열 8개/특수방어계열 5개/둥지계열 8개)
① 육체 관련(타입 적용 중): 금속 흡수, 완전한 유기체(유일), 페로몬 강화, 가사 상태, 뼈 도끼, 활공 피막, 강화 흡반, 강인한 생명력, 물갈퀴, 지느러미, 강화 대형 꼬리, 정수수확자의 턱
-육체 관련 융합 특성: 재생력, 신경독샘, 의태 기관(사용불가), 흡혈 촉수, 가시털 발사 꼬리
② 초능력 관련(타입 적용 중): 인간성, 통찰
-초능력 관련 융합 특성: 포식자 감각, 괴물의 촉수, 유령 발톱, 공포의 주시자, 초능력 반사 장갑
③ 감염 관련(타입 적용 중): 우주 박테리아, 전염 강화, 환청벌레
-감염 관련 융합 특성: 기생 군체, 부패 곰팡이 기관, 이빨요정 둥지, 그렘린 이끼, 산성 진균샘
④ 특수방어 관련: 고통 경감, 저항력, 질병 내성, 완전면역체
-특수방어 관련 융합 특성: 보호색
⑤ 둥지 관련(타입 적용 중): 악몽의 지평선(유일), 급속경질유도제, 확장 강화, 끈끈이주걱, 인신공양, 스모그 탑, 물귀신 농포
-둥지 관련 융합 특성: 공생물 포자
보유타입(4개)
육체 강화 타입, 초능력 강화 타입, 감염 강화 타입, 둥지 강화 타입
특성화 가능 타입(1개)
-특수방어 강화 타입(5/16)
* 불완전 특성(3개)
에너지 흡수, 왜소화, 아가미
‘많기도 하네.’
준성체가 된 이후 내가 새로 얻은 특성들의 수는 어마어마했다.
‘특히 유틸 쪽에서 보강이 많이 됐지.’
물론 육체와 초능력 쪽 특성도 몇 가지 새로 얻은 생긴 변화가 있다.
전자 교란을 감염 융합 특성인 ‘그렘린 이끼’의 재료로 써먹은 탓에 등에 있던 골판이 사라졌다.
그리고 외피의 색깔도 원래는 검갈색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검은색에 가까운 어두운 보라색에 가까웠다.
스웜프킹을 잡아 얻은 특성과 초능력 내성을 합쳐서 만든 ‘초능력 반사 장갑’의 효과 덕분이다.
두 특성 모두 이제부터 내가 맞서야할 적에게 수도 없이 사용될 특성들이다.
‘그렘린 이끼는 기계를 공략할 때 효과적이고, 초능력 반사 장갑은 컬트한테 유용하니까.’
이것 외에 향후에도 계속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 특성들이 많이 있다.
‘특히 공생물 포자를 얻은 것은 행운이야.’
늪지대에서 얻은 특성들을 재료로 삼아 만든 ‘공생물 포자’.
이 특성이 적용된 둥지에서는 매우 특수한 기능을 가진 포자를 만들어 낸다. 내가 공생물을 이식한 대상을 치료하는 능력을 지닌 포자 말이다.
‘공생물 포자가 있으면 26호랑 아드하이에게 큰 도움이 될 거야.’
여태까지 둘이 다칠까 봐 많이 걱정했는데 이제 한시름 덜어도 될 것 같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순양함부터 먼저 정리할까.’
현재 나는 적들의 순양함으로부터 50m도 안 떨어진 곳에 있다. 놈들은 두목으로부터 엄중히 경계하도록 명령받았는지 배 주변에 온갖 것들을 다 깔아 놨다.
다양한 방식으로 작동하는 지뢰, 자동 사격 모드 상태인 스톰건 수십 개, 헤비 워커 수십 체, 스타유니언에서 만든 정찰용 드론, 심지어 순양함에 달린 플라즈마포대까지 전부 가동시킨 상태였다.
방어수준이 그야말로 철옹성이다.
내가 아성체였다면 26호와 아드하이가 있어도 여기를 돌파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거다. 육상과 공중으로는 도저히 뚫고 들어갈 수 없을 정도니까.
‘과연 저들은 마지노 선을 알까 몰라.’
적들은 육상, 공중으로 진입하는 적에 대해서는 완벽에 가까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하지만 그들이 놓치는 것이 있었다.
바로 땅속.
아까 전부터 나는 땅굴을 파서 순양함 아래에 진입하는 중이었다.
준성체로 진화하면서 머리 갑각을 제외한 내 몸의 갑각 전반에는 뭉툭한 발톱들이 새로 생겼다. 대부분은 꼬리 부분에 몰려 있긴 하지만 팔목이나 허리, 흉곽 부분에도 뭉툭한 발톱이 돋아나 있다.
이 발톱들은 공격용으로도 쓸 수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흙을 파내는 데 매우 효과적이다. 발톱 덕분에 나는 땅속에서도 매우 빠르게, 그리고 조용히 이동할 수 있다.
‘이쯤이면 되려나.’
순양함 밑에 도달한 나는 땅을 파는 것을 그만뒀다.
내 몸보다 살짝 넓은 정도의 이 공간이 나의 새로운 둥지가 될 곳이다.
‘모처럼 특성들을 새로 얻었는데 써먹어 봐야지.’
둥지 만들기를 활성화하자 내 몸에서 검은 점액이 쏟아져 나왔다. 주변의 흙들은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 점액을 흡수했다.
예전 같았으면 점액이 굳고 포자를 형성할 때까지 한참 걸렸겠지만 지금은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둥지가 완성되었다. 모두 타입과 특성으로 강화된 덕분이리라.
‘빠르네. 아주 좋아.’
완성된 둥지는 내가 명령하지 않아도 알아서 빠르게 주변으로 영역을 넓혀갔다.
내가 파낸 땅굴의 벽이 점액질로 인해 순식간에 단단해지고, 주변에 있는 지반이 내 몸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둥지 위에 내 특성이 반영된 포자들이 곳곳에 열매 맺히듯 피어나고, 독과 바이러스, 곰팡이, 진균 등 온갖 병원체가 흙 속으로 기어들어간다.
순양함 위에 있는 자들은 과연 알까.
그들의 발아래에 역병의 왕국이 건설되는 중이라는 것을.
‘자, 빨리 올라가라.’
둥지가 위쪽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뻗어간다.
목표는 해적들이 지키고 있는 순양함.
순양함 또한 해적 두목이 가진 힘이니까 미리 약체화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다.
‘둥지 특성으로 습격한다면 걸리지도 않을 거고.’
위에 있는 해적들이 마주하게 될 적은 에이모프라는 단일 개체의 괴물이 아니다.
내 의지에 지배받는 이 흙, 이 대지가 그들의 적이 될 터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