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116화 (117/400)

Ep. 116

순양함의 상황실.

내 목소리를 들은 해적 두목은 입을 다물었다.

아주 얕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그녀는 어지간히도 놀란 것처럼 보였다.

「…5위의 에이모프.」

그녀가 작게 떨리는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두목, 아니 플레이어가 처음으로 꺼낸 말은 예상외로 나의 신상이었다.

그녀는 내가 누군지 정확히 알고 있다.

‘하긴 그 난리를 쳤으니.’

딱히 자의식 과잉이거나 그런 건 아니다. 가죽 벗긴 시체로 적에게 심리전을 거는 에이모프 플레이어는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저쪽이 게임을 오래 즐긴 플레이어라면 한 번쯤은 나에 대해 들었을 거다.

「간도 크네. 너 내가 누군지 알아?」

“휴·머·니·티·면·랭·킹·2·0·위·겠·지.”

「잘 알고 있네.」

상황실을 점거한 뒤, 통신이 오기 전까지 나는 다른 일을 하던 중이었다.

바로 컴퓨터에 저장된 해적 두목의 정보를 열람하는 일이었다.

해적 두목, 즉 통신기 너머에서 나와 대화하는 여자의 이름은 뮤리엘.

게임에서 랭킹 20위의 스페이스독이었던 플레이어와 똑같은 이름이었다.

‘직접 만나 본 적은 없지만.’

그녀가 랭커가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학사경고 때문에 게임을 접었다. 그래서 뮤리엘과 직접 만나서 싸운 적이 없다.

물론 나는 싸우지 않아도 다른 랭커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해놨었다. 그녀가 어떤 종족, 어떤 세력, 어떤 클랜에 소속되어 있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

‘원래 컬트가 아니었을 텐데.’

내가 알기로 20위 랭커 뮤리엘은 사이보그 종족 스페이스독이었다. 그렇기에 컴퓨터로 이름을 확인하기 전까지는 해적 두목이 랭커일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물론 컬트 출신 스페이스독이 없는 것은 아닌데….’

그는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11위의 미국인 랭커로 예전에 몇 번 싸워 봤기에 기억하고 있다.

아무튼 컴퓨터 모니터에 떠 있는 뮤리엘의 사진을 보면 아무리 봐도 여성 컬트, 그것도 컬트 왕족의 상징이라는 사슴뿔을 가진 컬트다.

‘사슴뿔 컬트가 왜 해적질을 하는 중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녀가 랭커라면 사슴뿔 컬트가 컬트 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걸 할 수 있는지 알 거다.

배도 이런 순양함이 아니라 제국모함(帝國母艦)을 끌고 왔을 거고.

‘그건 차근차근 알아봐야지.’

현재 나는 플레이어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플레이어가 그녀와 나뿐인지, 아니면 우리 말고 다른 플레이어가 더 있는지 등 모르는 것이 많다.

그렇기에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충분한 정보를 얻어내야 한다.

「네가 나보다 랭킹이 높았던 건 게임 속 얘기일 뿐이야. 아직 아성체 주제에 나를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더 이상 긴장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인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그녀.

순양함을 뺏겼는데도 믿는 구석이 있는지 꽤 자신감 있는 태도다.

그녀가 여왕벌이니 뭐니 하며 안 좋은 소리를 들었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녀 또한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랭커.

저쪽이 20위의 랭커를 사칭한 사람이 아니라면 분명 비장의 수를 숨겨두고 있을 거다.

‘좀 더 얘기해볼까.’

“순·양·함·까·지·빼·앗·긴·주·제·에·기·고·만·장·하·군.”

「흥. 그깟 배 따위 우리가 가진 힘에 일부에 불과해.」

“우·리?”

그녀가 말한 ‘우리’는 뭘 의미하는 걸까.

휴머니티 카르텔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다. 나는 에이모프 특유의 초감각 덕분에 상대 목소리에 담겨 있는 감정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부하가 아니라 동료를 가리키는 느낌인데.’

그 말은 즉 플레이어, 혹은 플레이어에 준하는 존재가 그녀와 뜻을 함께한다는 의미일 터.

내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고 있는 동안에도 그녀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아성체 주제에 이 행성까지 찾아온 것은 칭찬해줄 만하지만 거기까지야. 얌전히 있었다면 그대로 넘어가줬을 텐데.」

“착·각·하·지·마·라. 그·쪽·이·내·배·를·먼·저·격·추·시·켰·지. 그·런·네·가·할·말·은·아·닐·텐·데?”

「멍청하긴. 내가 정체도 모르는 침입자를 놔둘 리가 없잖아. 하물며 지금 너는 약자에 불과해. 약자 주제에 나한테 항의할 권리는 없어.」

그녀의 말은 유치하게 들렸지만, 이 세계의 핵심을 꿰뚫는 말이었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는 약육강식, 적자생존의 논리가 지배하는 디스토피아 세계였으니까.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해.’

약자 운운하는 그녀의 태도를 보니 협상 얘기를 꺼내기는 글렀다.

자세한 정보는 그녀를 직접 만나서 그녀 입으로 들어야할 것 같다. 내게는 상대가 진실만 말하도록 도와주는 유용한 도구들이 많으니까.

“이·세·계·에·푹·빠·진·것·같·군.”

「하. 이 세계에서 오래 지내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될걸. 너도 알 거 아냐? 이곳이 어떤 세계라는 걸.」

이만 대화를 끝내려고 했는데 그녀가 중요한 단서를 줬다.

‘오래 지냈다고?’

내가 이곳에 온 지 반년이 채 되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뭔가를 하던 중이었기에 길게 느껴진 것은 사실이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오래 지냈다고 표현할 정도는 아니다.

‘…뮤리엘과 나는 이곳에 온 시간이 다르다.’

적어도 그녀는 나보다 훨씬 오래 이 세상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이 부분은 좀 흥미로운걸.’

어떻게든 뮤리엘을 붙잡아야 할 이유가 늘었다.

「그리고 말이야. 넌 내가 생각 없이 이렇게 쓸데없는 대화나 늘어놓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무·슨·뜻·이·지?”

「내가 그렇게 바보인 줄 알아? 내가 순양함에 아무 준비도 안 해놨을 거로 생각해?」

가소롭다는 듯 말하는 그녀. 마치 순양함에 무슨 수작이라도 해놨다는 것처럼 들린다.

“혹·시·폭·탄·을·말·하·는·건·가?”

「어?」

“너·희·스·페·이·스·독·은·폭·탄·을·참·좋·아·하·는·군.”

내가 상황실을 점거하기 전, 미리 선내에 뿌려놨던 이빨벌레들이 내게 위험 요소를 보고했다. 원자로 주변에 원격 조종으로 터지는 폭탄이 깔려 있다고 말이다.

매우 은밀하게 설치되어 있는 데다가 함선 컴퓨터에도 기록이 없는 것을 보니 아마도 뮤리엘이 함선이 탈취될 것을 염두에 두고 깔아 놓은 것으로 보였다.

전 연구선에서 스페이스독과 싸웠던 경험이 없었다면 나도 폭탄에 대해서는 떠올리지 못했을 거다. 배의 심장인 원자로에 폭탄을 설치한다는 생각은 실로 상상하기 힘든 발상이니까.

「…하. 진짜네. 확실히 랭커 5위라 이거지?」

폭탄은 이미 전선이 끊어져 작동 불능이 된 상태.

그 사실을 확인한 것인지 뮤리엘이 탄성을 내뱉었다.

그런데 그 목소리에 스며들어 있는 감정은 내 예상과 다른 것이었다.

그건 놀라움이나 경악이 아닌, 안도감이었다.

「똑똑하긴 한데 말이야. 내가 정말 그것만 준비해놨을 것 같아?」

「행성 궤도에서 정체불명의 에너지 흐름 감지! 위험합니다! 모두 대피하십시오!」

뮤리엘의 말이 끝나자마자 상황실에서 경고음이 울려 퍼졌다.

‘궤도? 설마?’

「배가 좀 아깝긴 하지만. 그래도 랭커를 잡는데 미끼로 던지는 거면 남는 장사겠지? 안 그래?」

나는 지체하지 않고 상황실을 빠져나왔다.

궤도에서의 에너지 흐름이 가리키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다.

바로 궤도 폭격.

함대를 통해 가하는 궤도 폭격이면 순양함의 함선AI가 감지해낼 수 있다. 정체불명의 에너지 흐름이라고 했으니 지금 궤도 폭격을 가하는 것은 우주선이 아니다.

‘유일급 무기!’

컬트만이 얻을 수 있는 유일급 무기 중 궤도에서 특정 지역을 타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위성병기가 있다.

그 이름은 ‘뇌신’.

소유자의 사이킥 파워를 연료로 삼아 작동하는 위성병기로, 엄청난 크기의 번개를 목표 위로 내리꽂는다.

번개라고 하니 약하게 들리지만 파괴력은 핵폭탄 이상이다. 한 번 땅에 쏘면 그 지역에 있는 모든 것들은 파괴된다고 보면 된다.

한 번 쏘고 쿨타임이 14일이라는 단점이 있지만, 강대한 적과 싸울 때 미리 쓰고 들어가면 무조건 이득이기에 게임에서도 매우 인기가 많은 장비였다.

‘성체라면 버티겠지만 지금은 안 돼!’

준성체라고 해도 뇌신이 쏜 번개에 맞으면 바로 즉사다.

나는 순양함 밑에 뚫어놓은 구멍을 통해 급히 땅 밑으로 기어 내려갔다.

‘이걸로는 부족해.’

지면과의 거리는 백 미터를 훌쩍 넘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다. 내가 땅속에 들어온 뒤 둥지가 내가 판 구멍을 채웠지만 이걸로는 부족하다.

나는 아래쪽을 향해 서둘러 땅을 팠다.

지표로부터 족히 수백 미터쯤 떨어졌을 때, 이빨요정들과 연결된 링크가 끊겼다.

이어서 위에서 강렬한 진동이 느껴졌다.

뇌신이 던진 번개가 땅에 떨어진 것이다.

-

“휘유, 장관이네.”

순양함으로부터 한참 떨어진 곳인데도 보일 정도로 뇌신의 번개는 강력했다. 밤하늘은 행성 궤도로부터 날아온 번개로 인해 구름이 전부 걷혀 깔끔해졌다.

번개가 내리꽂힌 지역에서는 순양함의 원자로가 폭발하면서 발생한 거대한 핵구름이 위로 치솟았다.

수백 미터 이상의 크기를 자랑하는 레드우드로 채워진 밀림이라 해도 이 초유의 사태 앞에서 버틸 수는 없었다.

거대한 불의 악마가 밀림과 그 속에 거주하던 생물들을 집어삼켰다.

무수한 생명이 꺼져가는 것을 보며 뮤리엘은 즐거운 듯 박수를 쳤다.

“역시 뇌신. 성능 하나는 확실하지.”

「…….」

하늘의 어머니는 두 번째로 보는 뇌신의 가동을 보고 이를 악물었다.

이 행성에서 뇌신이 가동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뮤리엘이 대지의 아버지와 하늘의 어머니를 잡을 때 썼기 때문이다.

대지의 아버지는 놀라울 정도로 높은 방어력을 가진 볼프 네임드였지만 뇌신의 번개를 버텨 낼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대지의 아버지는 하늘의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그녀의 몸 위를 가려서 번개를 대신 맞았다.

덕분에 그는 한 방에 빈사 상태가 되었고, 이어서 뮤리엘과의 전투 중에 참수되어 죽었다.

“흐흥, 아무리 5위 랭커라고 해도 저 번개를 맞고 살아날 가능성은 없겠지? 심지어 그 뭐니, 대지의 아버지? 걔도 이거 한 방에 나가리 됐잖아.”

「…….」

“뭐 그래도 안전제일이니까. 시체를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뮤리엘은 부하들 몇몇을 불렀다.

“오빠들, 여기 하늘의 어머니랑 같이 가서 확인해 봐.”

「…웃기지 마라.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아?」

“응? 당연한 거 아냐?”

그렇게 대꾸한 뮤리엘은 등에 메고 있던 단창을 풀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소년 볼프 한 명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

「너 이 년이!」

“‘가족’들이 있는데 버릴 거야?”

「죽여 버리겠다! 어떻게든 너를 찢어 죽일 거야!」

“어머나 무서워라. 근데 나를 죽이기 전에 여기 이 귀여운 아이들이 먼저 죽을 것 같은데.”

「으득!」

“가족을 살리고 싶으면 내 말을 듣는 게 좋을 거야. 15위 랭커님.”

「빌어먹을….」

뮤리엘의 협박에 하늘의 어머니는 이번에도 고개를 떨어뜨릴 수밖에 없었다.

-

‘죽는 줄 알았네.’

뇌신의 범위까지는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완벽히 안전해진 것은 아니었다.

원자로의 폭발, 폭탄 이렇게 두 요소가 합쳐지며 발생한 엄청난 화마가 내가 뚫어놓은 땅굴 내부까지 침투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준성체로 진화해서 갑각이 단단해진 덕분에 저 파괴적인 에너지의 흐름 속에서 견뎌낼 수 있었다.

그리고 뇌신의 번개 덕분에 지각이 크게 흔들려서 내가 판 땅굴이 무너진 덕분에 내 전신을 집어삼킬 것 같던 열기는 나를 계속 뒤쫓을 수 없었다.

나는 폭발의 여파가 끝날 때까지 땅속에서 기다린 후 지표로 올라왔다.

원래 레드우드와 풀숲으로 빼곡하던 곳이 그야말로 황량한 벌판이 되었다.

순양함이 있던 곳은 빈말이 아니라 모래만 남았고, 저 멀리 있는 밀림은 여전히 불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중이었다.

‘이렇게 나왔다 이거지.’

지금까지 나는 무수히 많은 생명을 잡아먹었다. 그중에는 인간도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그래도 마음 어딘가에는 그런 생각이 있었다.

나와 같은 세상에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지 않을까 하고.

그렇기에 실제 사람인 그녀에게만큼은 애매한 태도로 접근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뮤리엘이 나뿐만 아니라 26호와 아드하이에게도 큰 위협을 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말이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은 그 생각이 싹 사라졌다.

‘다른 사람 대가리에 번개 꽂고 다니는 애는 죽여도 정당방위겠지?’

땅에서 기어 나온 나는 저 멀리 불타고 있는 숲을 향해 빠르게 기어갔다.

몸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핵폭발로 인한 여파 때문인지 내가 분노해서 그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어차피 그건 중요하지 않다.

‘뇌신의 쿨타임은 14일.’

이게 그녀의 비장의 카드인지, 아니면 더 숨겨 놓은 것이 있을지는 나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상관없다.

‘바로 죽이지는 않을 거야.’

그녀에게 얻어야 할 정보들이 있으니까.

대신 그녀에게 때로는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줘야겠다.

내가 가진 모든 전략과 수단을 동원해서.

열 받은 에이모프가 얼마나 무서운지 그녀는 곧 알게 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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