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18
수백 미터가 넘는 길이의 레드우드로 뒤덮인 밀림에 또다시 밤이 찾아왔다.
짙은 녹색 잎사귀와 붉은색의 나무 색깔이 어우러져서 숲의 어둠은 남색 빛을 띠었다.
그 칙칙하고 서늘한 공간에서 헤비 워커 6체가 라이트를 킨 상태로 전진하고 있었다.
‘어디 보자.’
나는 나무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 봤다.
솔직히 준성체가 되었으니 그냥 내려가서 다 때려잡아도 되지만 그러지 않는 것은 이유가 있다.
‘내 모습이 걸리면 안 되니까.’
내가 준성체라는 사실을 들키면 뮤리엘은 그에 맞춰 대비하거나, 아니면 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우주로 도망치려 하리라.
순양함 말고 또 다른 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혹여 우주로 탈출한 수단을 지니고 있다면 나는 막을 수 없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적들이 나를 카메라로 찍지 못하도록 한순간에 6체를 동시에 파괴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 틈이 생길 때를 기다리는 중이다.
“잠도 못 자고 이게 무슨 고생이냐.”
“야, 이 주변에 있는 거 맞아?”
「그래. 놈은 가까이 있다.」
“에이씨, 다쳤다는 새끼가 오지게도 싸돌아다니네.”
“가까이 있다니까 그나마 다행이네. 빨리 잡고 돌아가자고.”
온종일 흔적 뒤만 쫓는 것이 지루한지 워커의 조종사들이 투덜거린다.
‘좋아.’
모두가 잠시 긴장이 풀린 상태니 지금 쳐야겠다.
언제든지 기습할 수 있도록 적당한 자리에 숨어 있던 나는 꼬리 끝으로 나무를 단단히 휘감고 상체를 그들 머리 위로 쭉 뻗었다.
마침 워커 수가 내 촉수 개수에 맞춰서 딱 여섯 체다. 나는 재빠르게 침식 촉수를 활성화했다.
날카로운 6개의 부속지를 가진 침식 촉수가 화살비처럼 쏟아지며 헤비 워커 여섯 체의 조종석을 정확히 노렸다.
조종석 위쪽을 뚫고 들어간 촉수가 안에 있는 조종사의 머리만을 뽑거나 으깨버렸다.
「…!」
아까부터 나를 눈치 채고 있던 그리폰 볼프는 앞으로 뛰쳐나갔다. 내 손에서 튀어 나간 흡혈 촉수는 아쉽게도 목표를 잡지 못하고 애꿎은 땅만 후려쳤다.
뛰쳐나간 그리폰 볼프는 그대로 뛰어올랐다.
놈의 몸이 자연법칙을 무시하고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공중에 보이지 않는 계단이라도 있는 것처럼 놈이 공기를 박차며 빠르게 움직인다.
놈의 목에는 워커와 연결된 쇠사슬이 매여 있었지만 애초에 놈도 도망칠 생각은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물고기를 발견한 독수리처럼 그리폰이 빠르게 습격해 온다. 녀석이 노리는 대상은 나의 상체가 아니라 꼬리, 즉 나무를 붙들고 있는 부분이다.
나는 재빨리 꼬리를 풀고 활공피막을 펼쳐 다른 나무로 날아갔다. 찰나의 순간 놈의 앞발이 레드우드를 후려쳤다.
우지직
그 단단한 레드우드가 놈의 앞발에 의해 푹 파였다.
「?!」
놈은 내가 날아서 피할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다른 나무로 옮겨 간 나는 꼬리 끝을 크게 털었다.
식칼보다 큰 사이즈의 거대한 가시털이 공중에 떠 있는 놈에게 날아들었다.
독수리의 눈을 가진 놈은 짧은 순간에 날아오는 가시털의 궤도를 전부 읽어내고 피해냈다.
놈이 땅에 착지한 순간, 조종사를 전부 잃은 워커들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뭐야? 왜 다 신호가 끊겼어? 하늘의 어머니?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워커들은 놈에게 당했어.」
워커 안에 있는 통신기로부터 당황한 뮤리엘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리폰은 맹금류를 연상케 하는 미성으로 짧게 답했다.
「뭐? 다쳤다며?」
「그사이에 회복했다.」
「이런 씹?! 그게 무슨 개소리야! 야! 워커에 달린 카메라 꺼내서 보여 줘! 내가 직접 봐야겠어!」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나는 산성 진균샘을 활성화했다. 식도 부근에서 산성 진균이 끓어오르듯 위로 올라온 진균을 워커들의 조종석 위로 토해냈다.
워커에 떨어진 산성 진균이 이리저리 튀면서 6체 모두에 옮아 붙었다.
「내가 놈과 상대하고 있지.」
「개소리 집어 치우고 빨리 꺼내…치지지지직」
「…….」
조종석이 통째로 녹아내리면서 카메라들과 통신기들 또한 같이 사라졌다. 그리폰은 자기 목에 매인 사슬을 진균에 대서 끊어 버렸다.
그 모습을 본 나는 확신했다.
놈 또한 플레이어라고.
“너·도·플·레·이·어?”
「그래.」
그리폰은 나에게 시선을 떼지 않으며 담담히 답했다. 그러더니 곧 인상을 찌푸렸다.
「…젠장, 기껏 행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연달아 사이코년, 모프박이를 만나다니.」
좀 전 워커들이 죽기 전에 나눴던 대화나 지금 그녀의 태도를 봤을 때 그리폰 볼프는 뮤리엘과 딱히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벌써 만난 플레이어가 둘.’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이 세계에 찾아온 플레이어가 많은 것 같다.
‘그건 이후에 알아보고.’
일단 뮤리엘이 이곳에 오기 전에 그리폰 볼프부터 처리해야겠다.
아까부터 저쪽이 애매한 태도를 취해서 확실하지 않지만 방심한 것은 뮤리엘에게 한 방 먹은 것으로 족하다.
내 적의를 느낀 것인지 놈이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사자가 먹이를 노리는 것처럼 몸을 낮추고 천천히 배회하는 그리폰. 나 또한 긴 꼬리를 이끌며 놈의 허점을 노렸다.
‘배에 상처가 있어.’
그리폰의 회복력은 매우 뛰어난 것으로 아는데 꽤 깊은 상처였나 보다. 지금도 털 사이로 핏방울이 떨어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놈을 살피듯 놈의 시선도 내 몸을 찬찬히 훑는다. 그리폰의 눈은 내가 가진 ‘통찰’ 특성과 비슷하게 적의 약점을 파악하는 효과가 있다.
‘그래 봐야 소용없겠지만.’
놈과 나의 격차를 보면 내 쪽이 크게 우위에 있다. 게다가 놈은 부상이 아직 덜 회복된 상태.
내가 다른 에이모프였다면 모를까 놈은 내 정체를 알고 있을 테니까 갑갑하기 이를 데가 없겠지.
그 증거로 놈의 심장이 거세게 뛰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은 긴장과 공포로 인한 것이다.
「캬오!」
그렇게 서로 짧게 탐색 시간을 가진 뒤, 선공을 취한 것은 그리폰 측이었다.
놈이 짧게 포효하며 나에게 날아든다.
놈의 앞발이 향하는 곳은 내 팔이 있는 곳이었다.
‘머리가 단단하다는 걸 알고 있네.’
좀 전 레드우드를 부술 때의 힘을 봤을 때 팔을 자르는 것은 무리더라도 부러트리는 정도는 가능할 것 같다. 다시 말해 맞는 것보다는 피하는 게 좋다는 뜻이다.
나는 춤추는 코브라처럼 몸을 비틀어 놈의 앞발을 피해냈다.
놈의 앞발이 바닥을 내리찍자 수류탄이 터진 것처럼 폭음이 울려 퍼졌다.
공격에 실패했으니 놈의 자세가 무너졌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손에서 뼈 도끼를 뽑아서 녀석의 등을 향해 휘둘렀다.
하지만 놈이 공격을 실패했듯이 내 의도 또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와중에 놈이 몸을 유연하게 뒤틀어 내 공격을 간발의 차로 피해냈기 때문이다.
놈은 몸을 튼 반동을 역이용해서 뒷발로 나의 목 부근, 정확히 말하면 괴물의 촉수가 있는 부분을 걷어찼다.
‘이런!’
시급히 뒤로 몸을 빼서 촉수가 살짝 스치는 것으로 그쳤지만 상당한 통증이 밀려왔다.
‘제법인데.’
괴물의 촉수는 초능력 기관을 기반으로 하는 특성이기에 게임에서도 볼 일이 없는 특성이다. 에이모프 중 초능력 기관을 습득하는 플레이어는 없으니까.
그런데도 놈은 짧은 순간에 내 몸에서 약한 부위를 캐치해냈다.
내가 뒤로 물러나며 감탄하고 있었지만, 놈은 후속 공격을 날리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면 할 수 없었다. 내 등에서 튀어나온 침식 촉수들을 피하느라 바빴기에.
촉수가 놈이 서 있던 땅과 공중을 꿰뚫고, 놈은 허공을 박차며 곡예를 하듯 아슬아슬하게 피해낸다.
하지만 나의 공격 수단은 이걸로 끝이 아니다. 내 머리에 있는 눈 모양의 문양들이 일제히 빛난다.
공포의 주시자가 그리폰의 정신을 억압한다.
한순간 눈빛이 흐릿해진 놈. 그리폰은 정신 공격에 대한 내성을 지니고 있기에 금세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늦었다.
「큭!」
내 손에서 쏘아진 흡혈 촉수가 그리폰의 옆구리를 긁고 지나갔다. 놈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뒤로 피하려고 했지만, 나의 전투용 팔이 놓치지 않았다.
나는 놈의 앞발을 잡은 상태로 유령 발톱을 사용했다. 내 손이 발 안쪽에 있는 뼈와 근육 부분에 닿았을 때 나는 특성 효과를 해제했다.
당연히 내 손이 놈의 앞발보다 컸기에 놈의 앞발은 안쪽에서 생긴 내 손에 의해 그대로 파열되었다.
「크아아아앙!」
놈도 앞발이 안쪽부터 터지는 고통은 참을 수 없었는지 크게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나의 다른 팔이 놈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는 놈을 그대로 땅바닥에 내리꽂았다.
놈은 저항도 하지 못하고 내 손에 붙들린 채 땅에 처박혔다.
나는 마무리를 위해 거대한 꼬리로 쓰러져 있는 놈의 몸을 내리찍었다.
「컥!」
놈이 피를 토한다. 방금의 일격으로 놈의 허리와 다리뼈는 전부 부러졌다.
놈이 뛰어난 생명력을 지닌 그리폰이 아니었다면 즉사했겠지.
‘센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상대가 나빴어.’
타이밍도 안 좋았고 말이다.
놈에 대한 제압은 완료했다. 나는 숨만 간신히 쉬고 있는 녀석을 붙잡아서 들었다.
“당·장·은·죽·이·지·않·지.”
「…….」
“네·가·아·는·사·실·을·전·부·털·어·놓·아·라.”
놈이 뮤리엘과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같이 활동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뮤리엘에 대한 정보도 많이 알고 있을 터.
놈을 잡아먹을지 말지는 정보를 다 얻은 뒤에 결정할 생각이다.
그런데 놈이 예상 외의 반응을 보였다.
「크, 크큭, 쿨럭…역시 하나도 변한 게 없네.」
그리폰은 피를 토하며 웃었다. 지금까지 내가 죽였던 자들 중 내 앞에서 웃던 부류는 딱 한 종류밖에 없었다.
“미·친·건·가?”
「쿠억! 쿨럭, 쿨럭…. 틀린 말은 아니네. 이제부터 미친 짓을 할 거니까.」
그렇게 말한 놈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호박색으로 빛나는 놈의 눈에서는 어떤 감정이 들끓고 있었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도, 이제 곧 나에게 잡아먹힐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절망도 아니었다.
턱 아래의 보조기관이 추측하기로 그 감정은 맹렬한 분노였다.
「내가 아는 것을 전부 말할게. 네가 협조를 요구한다면 들을 것이고, 나를 노예로 부리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나를 잡아먹어도 상관없어.」
“뭐·라·고?”
「대신 이것만은 약속해 줘.」
피범벅된 그리폰이 이를 악물며 말한다.
「뮤리엘에게 너, 모프박이라고 불리는 네가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큰 절망을 줘. 그렇게 약속해준다면 네가 바라는 모든 것을 줄게.」
아무래도 그리폰 볼프와 뮤리엘과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은 것 같았다. 그리폰이 품은 원한은 내가 봐도 진실인 것처럼 보였으니까.
“네·가·내·게·거·래·를·청·할·입·장·은·아·닐·텐·데.”
「알아. 쿨럭, 내 입장이 이렇다는 걸. 근데 너도 알잖아. 기생충의 단점.」
놈의 시선이 내 팔을 향한다. 기생 군체가 들어 있는 팔을 말이다.
“이·걸·아·나?”
「큭큭, 내가 그거에 얼마나 시달렸는데…쿨럭, 현실이라 얼마나, 쿠억! 쿨럭…달라졌을지 모르겠지만, 아마 완전하지 않을 걸.」
그리폰 볼프의 눈썰미는 보통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내가 마주해서 싸운 적들 중 이 정도로 나에 대해 빠르게 파악한 적은 한 명도 없었다.
감염 강화 타입을 획득한 덕분에 내가 부릴 수 있는 기생충의 수는 10마리로 늘어났다.
또한 내가 움직이지 않고 집중한다면 기생충에 지배당한 존재 한 명의 육체를 10분 동안 지배할 수 있다. 게임에서도 의태기관과 기생 군체로 클랜을 터뜨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닐 정도였다.
‘다만 약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야.’
적의 내분을 유도하는 데는 매우 효과적이지만 심문 기능 자체는 크게 강화되지 않았다.
그렇기에 윌리엄의 사례에서 봤듯이 극심한 통증에도 사실을 말하지 않거나 딴생각을 품을 수 있다.
‘게다가 나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세히 알고 있고.’
말하는 것을 보니 놈은 게임에서도 나와 몇 번 싸웠던 것이 분명해 보였다. 다만 볼프랑은 워낙 많이 싸워 봐서 기억이 날 듯 말 듯했다.
‘흠.’
내가 침묵하자 놈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눈을 감았다.
이 다 죽어 가는 그리폰 볼프, 꽤 흥미로운 존재다.
‘어떻게 할까.’
좀 더 고민하면 좋겠지만 나에게는 시간이 없다.
결정을 내린 나는 놈의 머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