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0
“괴, 괴물이다!”
“놈을 죽여!”
요새화된 야영지 한가운데서 몸을 드러낸 나를 보고 해적들이 괴성을 지른다.
이어서 무자비하게 쏟아지는 빛줄기들.
백 명을 훌쩍 넘는 수의 해적, 거기다가 워커 수십 체와 곳곳마다 설치된 방어탑들이 일제사격하며 만들어 낸 화망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준성체로 진화하기 전이었다면 방금 이 공격에 의해 회복 불가능할 수준의 상처를 입었을 거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지.’
내 외피에서 보닛 위에 소나기가 쏟아질 때 나는 소리가 들린다. 생체갑옷이나 다름없는 나의 갑각의 방어력 앞에서 저들의 공격력은 무용지물이다.
총알을 헛되이 낭비하는 그들에게 절약 정신을 다시금 새겨줘야겠다.
나는 화망을 뚫고 놈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여섯 개의 전투용 팔이 동시에 뻗어 나가 무장한 해적들을 노린다.
준성체가 되면서 20m 이상의 크기로 자라난 몸에 맞춰 팔과 손톱 또한 마찬가지로 커진 상태.
손톱이 해적의 몸을 스칠 때마다 그들의 신체가 쪼개지고, 전투용 팔에 채이면 저 멀리 날아가 진지의 방벽에 처박혔다.
“으아악! 미친!”
“아아악! 죽어어어!”
전투용 팔 끝에서 나온 뼈 도끼가 누군가를 참수하면, 침식 촉수가 잊지 않고 머리가 땅에 떨어지기 전에 받아먹었다.
몇몇 해적은 최후의 발악인지 허리춤에서 소닉 블레이드를 뽑아 들고 내게 돌진했다.
두꺼운 나무와 단단한 금속들도 가볍게 잘라낼 수 있는 절삭력을 가진 초진동 검날이 날아든다.
“어라?”
예전에 내게 몇 번씩이나 위기감을 줬던 그 검들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부러졌다.
눈앞에서 일어난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보 같은 표정을 하는 해적들. 전투 중 정신을 놓는 것은 무엇보다 치명적이다.
그들은 쓸모없는 머리가 몸에서 분리되는 것으로 대가를 치렀다.
“젠장! 그냥 갈겨!”
“씨발!”
동료들에게 바짝 붙어서 학살하는 나를 향해 헤비 워커들이 양팔에 달린 스톰건과 플라즈마 런처를 쏴댔다.
무식한 크기의 열화우라늄탄의 세례와 파괴적인 플라즈마 광선이 내가 있는 자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내 손에 의해 사지가 뜯겨 죽어가던 해적들은 눈먼 탄환에 맞아 금방 육편으로 화했다.
‘아까운 짓을.’
그 모습을 보고 유전자 정수를 아깝게 날렸다고 생각하는데, 가우스 소총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힘을 가진 플라즈마 에너지가 내 머리를 강타했다.
「그르르르」
아성체였으면 한참이나 뒤로 밀려났을 그 공격이.
지금은 고개를 살짝 틀어지게 하는데 그쳤다.
“미, 미친!”
“플라즈마 런처도 안 통하잖아!”
헤비 워커를 탄 조종사들의 경악스러운 외침이 들린다.
솔직히 말하면 아예 피해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열선에 의해 맞은 내 외피 부분에는 그 강한 열기 때문에 붉게 달아올랐고, 나 또한 고통을 느끼고 있으니까.
하지만 충분히 참고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다.
‘받은 만큼 돌려 줘야겠지.’
내 턱이 양 갈래로 갈라지고 몸 안쪽에 있는 두 개의 기관이 빠르게 활성화되었다.
원래 지니고 있던 산성피 특성을 재료로 삼아 만든 융합 특성인 산성 진균샘.
부패 곰팡이가 가득 들어 있는 포자를 만드는 기관인 부패 곰팡이 기관.
악마적인 두 기관이 적들에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기 위해 부지런히 준비한다.
이어서 연녹색 액체와 검은색 포자가 함께 목을 통과해 입 밖으로 발산되었다.
기계와 인간 양자에게 치명적인 오염물이 헤비 워커와 그 주변에 있는 해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합금 따위는 쉽게 녹여 버리는 산성 진균이 워커의 장갑을 녹이면, 그 틈으로 인간의 육신에 악영향을 끼치는 부패 곰팡이가 스며들었다.
조종사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곰팡이를 뒤집어 쓴 채 울부짖었다.
“끄아아악! 사, 살려 줘!”
“끄에에엑!”
“어, 어어어! 조심…끄악!”
평소에 위협적인 환경요소들로부터 조종사를 보호해주던 워커의 두터운 장갑이 지금은 조종사들을 가두는 감옥이 되었다.
조종사들과 정신이 링크된 워커들은 사격을 멈추고 제자리에서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워커를 엄폐물로 삼고 있던 해적들은 수 미터 이상의 강철 덩어리의 발에 밟혀 곤죽이 되었다.
“우, 우리가 이길 수 없어!”
“두목! 두목이 필요해!”
내가 일반 해적이고 워커고 가리지 않고 박살을 내자 남은 해적들은 전의가 꺾여 도망쳤다.
굳이 그들을 뒤쫓을 필요는 없다.
어차피 이 요새를 감싸고 있는 안개, 그리고 바닥 아래에서 기어 올라오는 둥지가 그들을 처리할 것이므로.
“켁, 케엑?!”
“안개에 독이…쿠억!”
몇 발자국 못 가 그들은 본인들의 호흡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해적들은 달아나던 것도 잊고 그 자리에 엎드려서 살점 조각이 섞인 피를 토했다.
요새에 있는 해적들은 전원 강화복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들의 헬멧에 방독 효과가 있지만, 10개의 둥지가 하나로 합쳐지면서 강화된 스모그탑이 내뿜는 독성 안개를 방호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설령 막아 낸다고 해도 얼마 못 갈걸.’
10배로 강화된 독성 안개는 세인토피아02 대륙의 늪지대에 있는 안개보다 살짝 못한 수준의 독성을 지닌다.
강화복에 내장된 방호 효과만으로는 기껏해야 몇 분 정도 버티는 게 전부이리라.
그나마 독 안개의 영향을 덜 받은 해적들도 있지만 그들도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으헉! 귀, 귀신! 귀신이야!”
“헤, 헤헤헤…꽃, 꽃이 너무 아름다워….”
둥지의 포자를 깨고 나온 환청벌레, 마치 해적의 피를 머금고 자라난 것 같은 끈끈이주걱들이 그들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 또한 10배로 강화되었기에 해적들이 피하기는 쉽지 않다.
해적들은 이 요새화된 야영지가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했겠지만 틀렸다.
그들은 뮤리엘의 명령을 거부하고서라도 이 행성을 떠났어야 했다.
‘너희는 잘못된 선택지를 골랐어.’
내 침식 촉수들이 전투 중에도 쉬지 않고 바닥에 쓰러져 죽어 가는 해적들의 머리들을 수확했다. 나무에서 떨어진 열매를 줍는 것처럼.
“모든 워커들은 중앙 광장으로 후퇴!”
“후퇴해!”
살아남은 워커들이 공격을 중단하고 급히 뒤로 빠졌다. 그들이 뭘 기대하는지, 난 알고 있다.
중앙 광장에는 이 야영지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지닌 존재가 있다.
휴머니티 카르텔의 두목이자 20위의 랭커 뮤리엘.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는 상반신까지 바닥에 붙인 뒤 기어서 워커들을 따라갔다.
헤비 워커들은 전열을 유지한 채 적에게 화력을 퍼붓는 것에 특화되어 있지 기동전에는 크게 유리한 점이 없다. 그래도 인간보다야 훨씬 빠르게 움직이지만, 기차만큼 움직이는 나의 앞에서는 거기서 거기다.
나는 워커와 가까워질 때마다 그들을 뒤에서 덮쳤다. 밖에는 독성 안개가 짙게 깔려 있기에 그들은 조종석 밖으로 나갈 생각도 못하고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남은 워커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줄어들었을 때, 나와 도망치는 워커들은 중앙 광장에 도달했다.
“…….”
그곳에는 찬란하게 빛나는 황금색 단창을 쥔 사슴뿔의 컬트가 서 있었다.
머리에는 은은한 보라색 빛이 감도는 십자가 형태의 후광머리띠를 썼고, 몸에는 전신 바디슈트 형태의 강화복를 입었다.
전투 준비를 완전히 끝낸 뮤리엘은 입에 전자담배를 문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도망치던 워커를 덮쳐서 조종사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양팔과 두 다리를 붙잡고 잡아당겼다.
“두, 두목! 살려주…끼아아아아아악!”
내 전투용 팔의 힘은 함선 외벽도 맨손으로 찢어버릴 수 있다. 강화복을 입었다고 해도 일반인이 버틸 수 있는 힘은 아니었다. 내게 붙잡힌 해적은 두목을 애타게 부르다가 상하체가 분리되어 죽었다.
그 모습을 본 뮤리엘이 눈썹을 찌푸렸다.
“쯧, 야만적이긴.”
“의·외·로·군.”
“의외? 퉤,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설마 준성체가 됐을 줄이야.”
침을 뱉으며 짜증스럽게 말하는 뮤리엘.
그녀는 내가 준성체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도 딱히 충격을 받았거나 두려워하는 모습이 아니었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뮤리엘의 태도는 자기가 명백한 우위에 서 있다고 믿는 사람의 태도였다.
“도·망·치·지·않·을·줄·은·몰·랐·군.”
내 말을 들은 그녀가 재밌는 농담을 들었다는 듯 피식 웃었다.
“도망? 내가?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한 뮤리엘은 왼손에 든 라이터를 들었다. 그녀는 라이터, 아니 라이터 형태의 단말기에 달린 스위치를 꾹 눌렀다.
그러자 내가 있던 흙 주변에서 거미를 닮은 작은 기계 8개가 일제히 튀어나와 나에게 달라붙었다. 턱 아래 보조기관으로 감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른 속도였기에 나는 전혀 피할 수 없었다.
기계에 붉은빛이 들어오자 내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기계에게 생명력을 흡수당하는 것 같았다.
‘블러드 리버!’
내 몸에 달라붙어 있는 기계의 이름은 블러드 리버(Blood Reaver).
스타유니언에서 사용하는 유일급 전쟁 병기 중 하나다.
피해자에게 매우 빠른 속도로 달라붙어서 생명력을 빠르게 흡수하는 병기인데, 내구도가 매우 높아서 몸에 붙으면 홀로 기계를 부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지금 내가 보조기관으로 감지하지 못한 것처럼 탐지 또한 불가능하고 기습 속도도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이런 특징 덕분에 블러드 리버는 게임에서 생물형 플레이어나 적에게는 필살의 무기 중 하나였다.
나는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머리를 땅에 처박고 말았다.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고 싶어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내가 너 같은 괴물과 싸우는 데 아무런 준비도 안 했을 것 같아?”
뮤리엘이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내게 걸어왔다.
그녀가 단창을 높게 쳐든 순간.
나는 전투용 팔로 그녀의 옆구리를 후려쳤다.
“큿?!”
간발의 차로 나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낸 그녀. 내 날카로운 손톱이 그녀의 옆구리야 얇은 자상을 남겼다.
뒤로 빠르게 물러나는 그녀에게 내 침식 촉수가 작렬했다.
여섯 방향에서 날아오는 공격을 그녀가 단창으로 빠르게 쳐 냈다. 그녀가 촉수들을 튕겨내는 사이, 나는 엎드린 채 뼈 도끼를 뽑아서 그녀의 발목을 노렸다.
“어딜!”
그녀의 몸이 보라색으로 빛나며 공중으로 솟구쳤다. 나의 뼈 도끼가 바닥을 쓸고 지나가는 동안, 그녀는 한참 먼 거리에서 가볍게 착지했다.
그녀의 슈트가 꾸물거리더니 옆구리에 난 자상을 회복시켰다. 몇 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몸은 싸우기 전의 상태로 돌아갔다.
그에 반해 그녀의 얼굴은 좀 전에 비하면 여유를 많이 잃은 것처럼 보였다.
“블러드 리버가 붙었는데 어떻게 움직일 수 있지?”
“이·거·말·인·가?”
나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키면서 몸 여기저기 붙어 있는 블러드 리버를 떼어냈다.
새까만 거미 같이 생긴 기계 위에는 은색의 이끼가 허여멀겋게 끼어 있었다.
‘미리 알지 않았으면 위험할 뻔했어.’
블러드 리버는 하나만 붙여도 내가 생물형 적에게 신경독을 주입한 것 이상의 효과가 생긴다. 그래서 이 기계에 당한 적은 생명력을 강탈당하는 동시에 몸이 마비되어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괜히 유일급 무기가 아니지.’
하늘의 어머니는 뮤리엘이 2개의 블러드 리버를 보유했다고 말했다. 자기와 싸울 때 뮤리엘이 블러드 리버 2개를 썼기 때문이다.
전투의 상당 부분을 육체의 성능에 의존하는 볼프인 만큼 그녀는 매우 약화된 상태로 뮤리엘과 싸워야 했겠지.
‘그런 걸 나한테는 8개씩이나 써?’
하늘의 어머니 말과 달리 뮤리엘은 8개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 8개를 전부 나에게 썼고.
게임에서도 나에게 8개를 동시에 쓴 플레이어는 한 명도 없었다. 애초에 유일급 무기다 보니 그렇게 쉽게 구할 수 있는 장비도 아니고 말이다.
‘아성체였다면 지금 걸로 죽었겠지.’
준성체임에도 8개가 붙자마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정도였으니 아성체였으면 순식간에 생명력이 고갈되어 사망했을 거다.
‘나름 머리를 굴리긴 했지만….’
나는 그녀와 싸우기 전에 미리 그렘린 이끼를 활성화한 상태였다. 예상 못할 기습에 대응하기 위해서 말이다.
은색 이끼들은 내 외피, 갑각 위에 있는 모공을 통해 언제든지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덕분에 적이 날린 비장의 공격을 훌륭하게 차단할 수 있었다.
‘그렘린 이끼에 감염된 이상, 20분 동안 블러드 리버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참고로 블러드 리버에 의해 강탈된 생명력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신공양 효과 덕분에 둥지, 즉 이 야영지의 흙 위에서 죽은 시체들은 모두 내 에너지나 다름없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바닥에 맞닿아 있는 꼬리가 둥지에서 보내는 에너지를 쭉쭉 빨아먹고 있으니까 말이다.
나는 마지막으로 머리에 붙은 거미 기계를 떼어 내서 그녀 발 앞에 던졌다.
“내·가·너·같·은·괴·물·과·싸·우·는·데·아·무·런·준·비·도·안·했·을·것·같·나?”
“…….”
방금 그녀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자 뮤리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재수 없는 오빠네. 배를 갈라서 내장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흥·미·로·운·생·각·이·군. 참·고·하·도·록·하·지”
단창을 들고 전투자세를 취하는 뮤리엘.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떤 계획을 세웠는지 나는 모른다. 나의 보조기관으로 심장 박동이나 신체 반응으로 상대의 심리를 추측할 수 있긴 하지만 완전히 정확한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상관없다.
그녀는 나에 대해 모르지만, 나는 그녀에 대한 유용한 정보들을 입수했다.
‘싸움의 승패는 정보의 차이에서 나지.’
야영지를 치기 전, 나는 둥지를 만들며 내게 유리한 지형을 먼저 조성했다.
그리고 내가 사냥할 적에 대한 정보를 최대한 끌어모아 어떻게 상대할지에 관한 전략을 미리 구축했다.
지형, 정보 양쪽에서 모두 우위를 점한 내게 남은 것은 하나뿐.
바로 이기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