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2
게임에서 사이오니움 효과는 5분 동안 지속된다.
적절한 타이밍에 쓰면 불리한 전황도 뒤집을 수 있어서 매우 유용한 약물이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쓸 때마다 지속 시간이 줄어든다는 거지.’
줄어드는 시간은 몇 초부터 최대 1분 사이에서 무작위로 정해진다. 재수가 없는 사람이면 5회 밖에 못 쓴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플레이어들은 게임 초반에 다 써버리거나, 아니면 간직하고 있다가 이후 중요한 순간에 신중히 사용했다.
이러한 사이오니움의 특징은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작용한다. 나 또한 에이모프가 된 이후, 사이오니움을 쓴 적이 있으니까.
‘시현 유진과 싸울 때 썼었지.’
그때 5분간 효과를 누렸으니까 이후에 내가 다른 사이오니움을 섭취한다면 최소 4분 이상 효과를 누릴 수 있을 거다.
‘그런데 뮤리엘은 그렇지 않다고 했어.’
하늘의 어머니 말로는 뮤리엘이 자기와 싸울 때 사이오니움을 썼는데, 8분 동안 지속되었다고 했다.
‘사이오니움의 개량형일까, 아니면 약물 효과를 강화시켜 주는 모듈?’
게임과 달라진 부분이 많은 만큼 무엇이 원인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상관없어. 그 부분은 중요한 게 아니니까.’
분명한 것은 뮤리엘이 사이오니움의 효과를 무한정 누릴 수 없다는 것.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와 싸울 때 바로 썼을 테니까.
‘처음에 나랑 싸울 때 그녀가 쓴 약은 울트라 컨트롤러였지.’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던 중에 피던 담배.
그 안에 담겨 있는 용액은 합성마약이 아니라 초능력의 출력과 정밀성을 향상시켜 주는 울트라 컨트롤러였다.
그녀는 제법 자연스럽게 연기했지만, 연기에서 담배 특유의 몽롱한 약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기에 금방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똑똑한 여자가 나를 쉽게 압도할 수 있는 길이 있음에도 피해간다?’
추측컨대 그녀가 쓴 사이오니움은 지속 시간이 늘어났다고 해도 원 약품이 지닌 단점, 쓸 때마다 지속 시간이 줄어든다는 점은 없애지 못했을 거다.
‘아무 때나 막 쓴다면 이후에 정작 중요할 때는 사용하기 어려워질 테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스스로가 위급하다고 판단했을 때 사이오니움을 쓴 것이리라.
‘지속 시간은 최대 8분 미만. 일반 사이오니움과 지속 시간 감소폭이 동일하다고 가정한다면 7분 미만일 거야.’
사실 우리들의 싸움이 7분에서 8분까지 갈 가능성은 희박하다.
양측 모두 인간을 아득히 초월한 속도로 움직이기에 어느 쪽이 이기든 간에 전투 시간은 그리 길지 않을 거다.
‘애초에 내 계획도 사이오니움 효과가 다 떨어질 때까지 버티는 게 아니었으니까.’
하늘의 어머니에게 얘기를 들던 시점에 나는 생각했다.
사이오니움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을 그녀가 못하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둘이라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어!”
이을 악문 뮤리엘이 곧바로 공세를 취했다.
그녀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자마자 황금색 단창이 나의 코앞까지 접근했다.
그야말로 번개와 같은 속도.
나는 뼈 도끼를 빠르게 위로 올려 쳤다. 나의 뼈와 그녀의 단창이 부딪치자 폭탄이 터진 것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창이 위로 밀려나고 그녀의 자세가 무너진다. 그녀를 통째로 집어삼키기 위해 나의 침식 촉수들이 6개의 부속지를 활짝 벌린 채 달려든다.
“핫!”
뮤리엘이 기계화된 왼손을 활짝 폈다. 왜곡장으로 인해 느려진 촉수들의 사이로 그녀의 몸이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갔다.
그리고 왼팔에 주먹을 쥐는 그녀. 그 짧은 순간, 나의 보조기관이 그녀의 몸에서 막대한 에너지의 흐름이 왼팔로 이동하는 것을 감지했다.
사이보그가 장착할 수 있는 전투용 모듈 중 상급에 속하는 선더 암 모듈이다. 파괴력, 관통력 양자에서 매우 우수한 효과를 보여주기에 준성체가 된 내 갑각도 뚫을 수 있다.
「어딜!」
“큭?!”
하늘의 어머니가 뛰어올라 뮤리엘의 옆구리를 몸으로 들이받았다.
아무리 뮤리엘의 신체 능력이 상승했다고 해도 4m 이상의 덩치에 전신이 근육으로 꽉 차 있는 그리폰의 돌진을 무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뮤리엘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기계팔이 향한 방향도 살짝 틀어졌다. 덕분에 뮤리엘이 쏜 노란빛 번개도 내 등 위를 스치는 것으로 그쳤다.
물론 아무런 피해 없이 끝난 것은 아니어서 침식 촉수 2개를 잃었지만 아직 견딜 만 했다.
“방해하지 마…!”
「윽!」
뮤리엘이 에너지 방출 이후 뜨겁게 달궈진 왼팔로 하늘의 어머니를 후려쳤다. 얼굴에 화상과 함께 부리가 깨지는 상처를 입은 하늘의 어머니가 뒤로 한참 물러났다.
‘좋아.’
그녀가 다른 적에 신경을 쓰고 있는 지금이 기회다.
나는 머리 쪽에 모든 힘을 실어서 뮤리엘을 들이받았다.
“컥!”
내 뿔이 그녀의 갈비뼈를 부수고 안에 있는 장기를 찔렀다. 그나마 그녀가 뒤늦게 뒤로 물러난 덕분에 관통은 면했지만, 이 정도 상처도 충분히 치명상이다.
‘아니야! 아직 안 끝났어!’
내 예상대로 그녀의 몸이 보라색으로 빛났다.
그녀 머리 뒤에 떠 있는 보라색 헤일로. 저건 그녀가 착용한 십자가 형태의 후광머리띠, ‘조율자’에 의한 효과다.
조율자는 컬트의 중후반 퀘스트 클리어 보상 중 하나로, 착용한 자에게 하루에 총 5회, 영체화해서 이동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한다.
컬트의 퀘스트는 총 12단계로 구분되고, 조율자는 9단계 퀘스트 보상으로 해금된다.
내가 쏜 산성 진균 세례를 맞았을 때 그녀는 조율자를 쓰지 않았다.
‘안 쓴 것이 아니라 사용 조건을 충족 못 해서 쓰지 못한 것이겠지만.’
사이오니움 섭취 이후 써먹는 것을 보면 그녀는 8단계 퀘스트까지 클리어한 것이 틀림없었다.
‘뭐가 됐든 이제 세 번 남았어.’
지금까지 뮤리엘은 조율자를 두 번 사용했다. 하늘의 어머니가 땅속에서 튀어나와 기습했을 때 한 번 사용했고, 방금 전 내가 뿔로 그녀를 찔렀을 때 또다시 사용했다.
다시 말해 그녀가 가진 여분의 목숨은 3개 밖에 안 남았다는 뜻.
나는 그녀가 이동할 지점을 예측하고 빠르게 이동했다. 100m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보라색 입자들이 허공에 모이고 있었다.
“!”
영체화가 끝난 뮤리엘이 내가 돌진해 오는 것을 보고 눈을 번쩍 뜬다.
그녀가 왜곡장을 쓰기 위해 왼팔을 들었지만, 하늘의 어머니가 그걸 보고만 있을 리 없었다.
「내버려 둘 줄 알고!」
얼굴 절반이 검게 그을린 하늘의 어머니가 어느새 뮤리엘의 뒤를 잡았다. 반쯤 부러진 부리가 그녀의 왼쪽 어깨를 강하게 깨물었다.
“끅!”
어깨뼈가 으스러지는 바람에 왜곡장이 발현되던 도중에 취소되었다.
뮤리엘은 바로 앞까지 다가온 나를 보고 제사장의 단창으로 급히 방어 자세를 취했다.
콰득
“으윽!”
단창과 뿔이 충돌하면서 내 뿔 중 하나가 부러졌다. 누군가가 단단한 물건으로 내 머리를 세게 후려친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다만 피해는 나만 입은 것이 아니었다.
내가 돌진하면서 실린 힘이 뿔에 담겨 있었기에 이를 막아 낸 뮤리엘 또한 무사할 수 없었다.
단창을 든 그녀의 오른팔이 축 늘어졌다. 몸을 감싸고 있는 나노 스파르탄 모듈 덕분에 팔이 떨어지지 않고 붙어 있는 것이지, 안쪽은 완전히 곤죽이 되었으리라.
“이이익! 죽어어어어!”
그녀가 비명인지 기합인지 모를 고함을 내지르며 재차 선더 암 모듈을 가동했다. 그녀의 왼팔에 에너지가 모이자 하늘의 어머니가 황급히 물고 있던 부리를 뗐다.
나 또한 그녀의 팔이 향하는 방향을 피해 몸을 크게 틀었다. 노란색 열선이 종이 한 장 차이로 내 옆구리를 스쳤다.
그 사이 영체화해서 사라진 그녀는 야영지 주변에 배치된 감시탑 위에 다시 나타났다.
“이, 이건 말도 안 돼…!”
영체화 효과 덕분에 그녀의 몸에는 상처 하나 없었지만 표정은 달랐다.
입술을 깨무는 바람에 입가에는 피가 맺혔고, 눈동자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지금 그녀는 싸우기 전에 비해 명백히 위축되어 있었다.
‘외통수야. 뮤리엘.’
소극적으로 싸우거나 시간을 끌면 사이오니움 효과가 다 떨어지니 조율자 사용이 불가능해진다.
반대로 평소 하던 대로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하면 조율자를 쓸 가능성이 높아진다.
어느 쪽이 됐든 조율자를 쓰지 못하게 되면 그녀는 오로지 나노 스파르탄 모듈의 회복력에만 기대서 우리를 상대해야 한다.
‘애초에 도망치는데 썼어야지.’
우리, 아니 나와 전투를 시작한 것 자체가 잘못된 선택지였다.
우리를 향해 두려움을 느끼는 그녀에게 나는 담담히 사실을 고했다.
“두·번·남·았·다.”
“!”
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그녀가 가장 잘 알겠지.
그 두 번이 끝난다면 자기가 어떻게 될지도.
-
지금으로부터 3년 전.
뮤리엘은 홀로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에 떨어졌다.
그것도 스페이스독 카르텔의 조직원에게 빙의된 채로 말이다.
아무리 그녀가 랭킹 20위에, 대규모 클랜의 리더라고 해도 그것은 모두 게임 속에서의 이야기였다.
현실 세계에서 일개 대학생에 불과했던 그녀가 이 가혹한 디스토피아 세계에서 생존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튼튼한 육체를 가진 사이보그가 아니었다면, 혹은 두목에게 사랑을 받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가 아니었다면 이틀도 버티지 못했으리라.
뮤리엘은 자기를 아끼는 컬트 출신 두목 덕분에 목숨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두목의 연인이 된 지 한 달이 지났다.
생존이 보장되고 나서야 그녀는 자기가 이 세계로 오면서 무엇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축복이자 이 세계로 건너온 자들을 위한 ‘특전’이었다.
그녀가 받은 특전은 바로 사이보그의 베이스가 된 종족을 다른 종족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이었다.
본래 게임에서는 사이보그는 베이스 종족이 무조건 인간으로 고정되어 있지만, 그녀는 베이스 종족을 사이보그, 볼프, 컬트 등 다른 종족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다양한 종족이 포함된 해적 집단, 스페이스독의 특징이 반영된 특전이라 해도 좋으리라.
대신 아무런 제약 없이 베이스 종족을 바꿀 수는 없었다.
그녀의 본 종족은 사이보그.
다른 종족의 상징물을 약탈 후 ‘모듈’로 개조해서 착용해야만 특전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한 조건은 종족 전환을 해도 바뀌지 않았다.
또한 플레이어가 고를 수 있는 지성체 종족만 전환할 수 있었고, 플레이 불가의 야생 동물로는 전환이 불가능했다.
어쨌든 특전이 가진 잠재력을 깨달은 그녀는 컬트로 베이스 종족을 바꾸기 위해 두목을 독살했다.
그를 사랑했던 것도 아니고, 어차피 게임 속 NPC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살인의 거부감은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두목의 뿔을 모듈로 만들어서 컬트로 종족 전환한 그녀는 카르텔 조직원들을 다음 타깃으로 삼았다.
그녀가 소속된 카르텔이 나름 강대한 카르텔이다 보니 쉽지 않은 싸움이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승리할 수 있었다.
그 후 그녀는 컬트 본성으로 가던 중 다른 플레이어를 만났고, 그들의 도움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렇게 이 세계에 온 지 2년이 흐르고, 뮤리엘은 강해졌다. 이 우주에 있는 존재들 중 누구도 그녀에게 함부로 대할 수 없을 정도로.
게다가 그녀를 후원하는 랭커도 둘이나 됐으니, 뮤리엘에게 위기란 존재하지 않는 단어나 다름없었다.
바로 지금, 이 세인토피아02에서 에이모프를 만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큭!”
뮤리엘은 단창을 들어 저 빌어먹을 에이모프 준성체가 내려친 팔을 막아 냈다. 놈의 공격이 보통 무거웠던 게 아니었기에 뮤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놈의 힘은 싸우기 시작한 이후, 전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싸움이 계속될수록 더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적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약해지는 것이었지만.
‘아니야! 내가 질 리가…!’
“씨바아아알!”
불안감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왔지만 그녀는 욕설 섞인 기합으로 떨쳐 냈다.
그녀의 왼팔에 장착된 선더 암 모듈이 가동되고 노란색 번개가 놈의 팔을 뚫고 지나갔다.
팔이 잘린 놈을 보며 기뻐하기도 잠시, 하늘의 어머니가 그녀의 얼굴을 향해 앞발을 휘둘렀다.
“윽!”
피하려고 고개를 뒤로 뺐으나 오른쪽 얼굴이 저 짐승박이 년의 공격에 반쯤 뜯겨 나갔다.
‘…이 정도는 회복할 수 있어!’
조율자의 회수가 2회 밖에 남지 않았기에 아껴 써야만 한다. 그녀는 나노 스파르탄 모듈의 회복력을 믿고 단창을 휘둘렀다.
제사장의 황금창이 하늘의 어머니의 옆구리를 베는 사이, 어느새 에이모프의 꼬리가 그녀에게 날아들었다.
공격하던 도중이었기에 완전히 피할 수 없었다. 단단한 선더 암 모듈의 방어력을 믿고 막아 내기로 했지만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이, 이익!”
무식한 꼬리에 의해 그녀의 기계팔이 기형적으로 휘었다. 그걸로 모자라 그녀는 허공에 떠서 바닥에 처참하게 나뒹굴었다.
“커헉?!”
입에서 검은 피를 토한 뮤리엘.
싸우는 도중에 몇 차례나 바닥에 나가떨어졌지만 피를 토한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빌어먹을 애미모프 새끼가 잔재주를…!’
그제야 그녀는 야영지를 완전히 감싼 안개의 존재를 인지했다.
이 안개는 에이모프의 둥지가 만들어 낸 것이 분명했다. 게임에서도 에이모프와 여러 번 싸운 적 있기에 금방 알 수 있었다.
다만 이번처럼 오랫동안 에이모프랑 싸운 적이 없었기에 독성 안개의 무서움을 등한시했다.
사실 그녀가 딱히 어리석은 판단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노 스파르탄 모듈의 회복력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뛰어나다. 아무리 안개의 독성이 강력하다고 해도 모듈이 작동하는 한 금방 회복시킬 정도였으니.
‘모듈의 회복력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어!’
그녀가 짧은 시간이라도 안정 상태를 유지한다면 모듈의 회복 기능은 정상화될 것이다.
그러나 적들은 ‘그 짧은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하늘의 어머니가 피를 토하는 뮤리엘을 향해 질주했다. 뮤리엘은 허공에 뛰어올라 자기를 덮치려는 하늘의 어머니를 두 발로 걷어찼다.
적이 멀리 날아갔지만, 또 다른 적이 그녀를 공격해 왔다.
전방에서 쏟아지는 가시털을 뮤리엘은 간신히 단창으로 쳐 냈다.
‘아, 아니야! 아직 버틸 수 있….’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적의 촉수가 날아들었다. 어떻게든 튕겨 냈지만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방금의 공격 때문에 그녀의 허벅지 중 절반이 뜯겨졌다.
‘다른 모듈을 쓰면 해결할 수 있어!’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어느새 하늘의 어머니가 휘두른 앞발이 코앞까지 와 있었다. 뮤리엘의 오른편 시야가 좁아진 틈을 이용한 공격이었다.
‘왜곡장을 쓰면…!’
급히 회복 중인 왼팔을 들어 왜곡장을 펼친 그녀. 하늘의 어머니가 공중에서 멈췄지만, 그 반대 방향에서 에이모프의 뿔이 그녀를 노렸다.
“컥!”
‘이 다음엔…!’
또다시 피를 토하며 허공을 나는 뮤리엘.
그녀의 머리에서는 계속 다음 수를 떠올렸다.
그녀가 가진 모듈 중 이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것이 있다. 귀한 모듈인데다가 후유증이 만만치 않아 잘 쓰지 않았는데 상황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다.
‘아직 이길 수 있어!’
막혔다. 그녀의 양다리가 전부 부러졌다.
그녀는 사이킥 파워 기술을 활용해 공중에 몸을 띄운 뒤, 재빨리 다음 수를 떠올렸다.
그녀가 가진 사이킥 파워 기술 중 적을 일소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 아껴두고 있었지만 지금이야말로 활약할 시간이다.
‘이거라면…!’
하지만 막혔다. 그녀의 어깨와 복부에 관통상이 추가되었다.
연달아 치명상이 발생하자 나노 슈트가 급속도로 느려진다. 출혈에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녀는 계속 생각했다.
‘이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지?
놈은 마치 그녀가 어떤 모듈을 지니고 있고, 어떤 사이킥 파워 기술을 쓸 수 있는지 전부 아는 것처럼 보였다.
놈 앞에서 그녀는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앞에 있는 괴물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피를 먹고, 그녀의 살점을 먹고, 그녀의 감정을 먹고 커진 놈이 이제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하게 보였다.
그런 놈과 마주하니 오래전 가슴속에 묻어 뒀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막막함,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
“나, 나는 죽고 싶지 않아!”
정신이 극한까지 몰린 뮤리엘은 아껴 쓰기로 다짐했던 조율자를 또 한 번 쓰고 말았다.
그녀의 몸이 보라색 입자로 흩어진 뒤, 저 괴물과 최대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 다시 모여 들었다.
‘안 돼!’
몸이 재생되자마자 그녀는 후회했다. 이제 남은 기회는 한 번뿐.
그때 놈이 말했다.
“한·번.”
놈과의 거리가 수백m 이상 떨어져 있음에도 에이모프의 말은 그녀의 귀에 박히듯 선명하게 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