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3
‘여기까지인가.’
뮤리엘의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했다.
그러나 그녀의 몸을 감싸고 있는 슈트는 그렇지 않았다. 군데군데 구멍이 뚫려서 그녀의 새하얀 속살을 노출시키고 있었으니까.
나노 스파르탄 모듈은 방어용 모듈 중에는 일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만능이 아니다. 저 정도로 손상된 상태라면 나노 머신을 보충해야만 원상 복구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 여분도 이미 썼겠지.’
파르르 떨리는 저 눈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에게는 남은 카드가 얼마 없다는 것을.
‘하늘의 어머니가 알려 준 장비와 기술은 이미 다 확인했어.’
또한 나는 뮤리엘과 싸우기 전, 랭커들과 싸웠던 기억들을 하나둘씩 복기했다.
그들이 어떤 종족이고, 무슨 기술을 지녔고, 얼마만큼 강한 장비를 착용했고, 어떤 전략을 주로 사용했는지 말이다.
그렇기에 뮤리엘이 장착한 모듈이라든가, 어떤 상황에서 무슨 사이킥 파워 기술을 쓸지 등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나름 잘 싸우긴 했지만.’
뮤리엘의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어떻게 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컬트와 사이보그의 혼종이라는 사기 조합까지 들고 왔으니 강적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만약 그녀가 내 상태, 나의 능력 등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잘 알았다면 이렇게 쉽사리 당하지 않았을 거다.
‘최소한 뇌신 같은 비장의 카드를 쓸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렸겠지.’
애초에 뮤리엘이 작정하고 도망친다면 내가 그녀를 뒤쫓기는 결코 쉽지 않다.
우리가 서 있는 대규모 야영지에는 수송선이라는 장거리 이동 수단이 있다. 행성 밖으로는 못 나가도 다른 대륙으로 떠나버리면, 절대로 뒤쫓지 못했으리라.
‘하지만….’
그녀는 살 기회가 여러 번 있었음에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다.
“…읏!”
짧은 침음을 흘리는 뮤리엘. 처음 싸웠을 때의 자신만만한 미소는 온데간데없다.
조율자의 기회가 한 번밖에 남지 않자 그녀는 전의(戰意)를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싸움 대신 그녀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다.
“젠장! 두고 보자!”
뮤리엘은 빽 소리를 지르고 기계팔로 목옆의 버튼들을 눌렀다.
이어서 그녀의 몸이 연기마냥 급격히 흐려지더니 곧 안개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원래부터 그 자리에 없었던 듯 완벽한 은신이었다.
‘내 시야에도 보이지 않아.’
심지어 보조기관으로도 제대로 감지되지 않을 정도였다.
뮤리엘이 내뱉은 숨결, 움직일 때 바닥에 닿는 발걸음 등이 만들어 내는 진동만 아니었으면 그녀가 어느 방향으로 뛰어갔는지 전혀 몰랐을 거다.
시각만큼은 나보다 훨씬 뛰어난 하늘의 어머니가 뮤리엘을 찾기 위해 연신 고개를 돌렸다.
「저 년, 아직도 남겨둔 것이 있었네.」
“저·정·도·은·신·모·듈·은·게·임·에·서·본·적·이·없·는·데.”
「…일단 내 눈에는 안 보여.」
저 정도 수준 높은 은신 모듈을 지금까지 안 쓴 것을 보면 전투에 쓰기에는 한계가 있거나 회수 제한이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할 거야?」
뮤리엘을 발견하지 못한 하늘의 어머니가 내게 고개를 돌린다.
‘어떻게 하냐고?’
당연한 것을 묻는다.
“잡·아·서·죽·인·다.”
「…좋아.」
그녀가 아무리 뛰어난 은신 장비를 지니고 있다고 해도 그녀는 결국, 내 손바닥 위에 있다.
‘이곳은 나의 둥지니까.’
당장 나의 보조기관만으로는 그녀를 직접 발견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녀가 남긴 흔적들. 그것들은 둥지와 링크만 한다면 쉽게 잡아낼 수 있다.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나와 싸우기 전에 도망치는 것이 뮤리엘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
‘씨발씨발씨발씨발….’
짙은 안개가 깔린 숲속.
뮤리엘은 수백m가 넘는 레드우드의 나뭇가지 위에서 몸을 숨기고 있었다.
이 모듈은 그녀와 뜻을 같이하는 메가콥 랭커가 개발한 실험용 모듈이었다.
‘자이언트 카멜레온’을 재료로 써서 만든 모듈로, 장착한 자에게 고도의 은신 능력을 부여한다. 맨눈으로는 당연히 확인이 불가능하고, 탐지 장비나 기술에도 걸리지 않는다.
다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다 보니 불안정한 면이 많았다.
조심스럽게 움직일 때는 괜찮지만 전투를 위해 격렬히 움직이거나, 또는 적의 공격에 당하면 바로 은신 효과가 취소되었다.
이 모듈을 개발한 랭커도 아직 미완성 작품이니 급할 때 탈출용으로만 쓰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했을 정도였으니까.
일단 적으로부터 도망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문제는 남아 있다.
그 지독한 에이모프나 강한 원한을 품은 하늘의 어머니가 그녀에 대한 추적을 포기할 가능성은 0에 수렴했다.
‘…조율자 초기화를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없어.’
시간은 양쪽에게 공평하게 작용한다. 그녀는 24시간 동안 숨어 있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지만 저쪽은 아니다.
‘그 모프박이 새끼라면 이 숲 전체를 태워 버릴지도 몰라.’
나무에다가 시체를 걸어두는 놈이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부하들의 참혹한 모습을 떠올리자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움찔했다. 가죽이 벗겨진 시체가 본인의 미래일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안 되겠어.’
그녀는 아직 남아 있는 사이오니움의 강화 효과를 이용해 주변을 관측했다. 발달된 감각으로 느끼기에 주변 가까운 곳에 다른 적은 없었다.
‘이걸 쓰고 싶지는 않았지만….’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니 어쩔 수 없다.
근처에 적이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목옆의 버튼을 꾹 눌렀다. 그러자 목 아래까지 덮고 있던 나노 슈트에서 길쭉한 줄이 튀어나와 그녀의 귀에 꽂혔다.
지금 그녀가 활성화한 장치는 항성 간의 통신이 가능하게 해주는 장치였다.
에이모프와 싸우기 전, 그녀는 금고에 보관하고 있던 군용 통신기를 나노 스파르탄 모듈과 융합시켜뒀었다.
원래는 전투 후 다른 행성에 있는 그녀의 부하들에게 우주선을 가져오라고 명령하는데 쓸 생각이었다.
전투 중에 쓰지 않은 이유는 항성 간의 통신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이 통신이 종료되면 나노 스파르탄 모듈은 잔량 에너지를 전부 소모해서 자동 해제될 가능성이 높다.
‘제발 받아라!’
즉, 이 한 번의 통신이 그녀의 목숨줄이다.
짧은 연결음이 울리던 중, 그녀의 귀에 뜬금없이 큰 바람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새가 날갯짓을 했을 때 나는 소리가 짧게 들렸다가 곧 사라졌다.
‘뭐야?’
고개를 들어 나무 위를 살펴봤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자리를 옮겨야 하나 생각하는데, 때마침 통신기에서 삑 소리가 났다.
그리고 들려오는 남성의 아름다운 목소리.
「My Honey? 통신하면 도청될 수도 있다고 안 하던 애가 웬일이야?」
“오빠!”
평소에 늘 재수 없다고 생각했던 목소리가 지금처럼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뮤리엘은 눈물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오빠 나 지금 큰일 났어! 당장 도와줘!”
「뭐?」
“놈들한테 내 부하들하고 우주선 다 잃고 지금 쫓기는 중이야! 빨리 와줘!”
「씹, 또 그 새끼들이냐? 휴전이라더니 이 개 같…잠깐, 어라? 너 그러면 내 의뢰는 어떻게 하고? 내가 볼프 암컷들 구해 달라고 했잖아.」
급한 상황에도 노예 타령이나 하는 상대의 반응에 뮤리엘은 버럭 짜증을 냈다.
“아니 씹! 오빠! 동생이 뒈질 것 같다는데 그게 중요해? 그리고 걔네가 아니고 다른 놈이야! 두 명밖에 안 되는데 실력이 장난 아니니까 제대로 준비하고 와야 해!”
「둘? 둘밖에 안 되는데 My Honey한테 덤볐다고?」
“한 명은 오빠한테 갖다 주려고 한 볼프 플레이어고, 다른 하나는 에이모프 플레이어야!”
「…뭐? 에이모프?」
“어! 5위 랭커라고 그랬어!”
뮤리엘이 자기를 뒤쫓고 있는 적에 대해 말하자 상대편이 입을 다물었다.
“아무튼 시간이 없어! 최대한 빨리 준비…어? 오빠?”
「…….」
“오빠?”
「Oh, Shit…뚝]
“오빠? 오빠아아? 이런 씨발! 끊어졌잖아?!”
갑작스러운 통신 종료에 뮤리엘은 급히 다시 통신을 걸었다. 그러나 연결음만 계속 울릴 뿐 상대는 받지 않았다.
“젠장! 아, 아니야! 어, 언니한테 걸면….”
그녀는 어떻게든 도움을 요청하려고 했지만, 그녀의 손목에서 붉은빛이 들어왔다.
나노 스파르탄 모듈이 해제된다는 표시였다. 붉은빛이 꺼지자마자 그녀의 몸을 감싸던 나노 슈트가 사라지고 작은 원반 형태의 기계로 변했다.
슈트가 사라진 탓에 그녀는 거의 알몸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튼튼한 사이보그이긴 하지만 그녀를 추적하는 괴물들 앞에서는 무의미했다.
아직 실험용 모듈에 의한 은신 효과는 적용되고 있지만 그것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그 효과가 끝나면 그녀의 목숨도 끝이다.
“어, 어어! 안 돼! 안 돼에에에!”
거의 정신이 나간 뮤리엘은 모듈을 어떻게든 다시 작동시키려고 원반을 흔들었다. 그런다고 해서 에너지가 전부 소진된 나노 머신들이 도로 나올 리가 없었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이를 판단할 정도로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럴 수는 없…히익?!”
원반으로 나무를 찍고 있던 그녀의 귀로 나뭇잎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가 숨어 있는 나무 아래로 어떤 동물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 독성 안개 속에서 저렇게 태연히 걸어 다닐 수 있는 동물은 딱 둘밖에 없다.
잠시 후 유연하지만 탄탄한 근육이 돋보이는 암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머리를 가진 동물이 나타났다.
그녀는 맹금류 특유의 뛰어난 시각을 적극 활용해 주위와 나무 위를 꼼꼼히 훑었다.
뮤리엘은 숨을 죽인 채 가만히 있었다. 그리폰은 그녀가 숨은 나무를 그대로 지나쳐서 저 안개 너머로 사라졌다.
“휴.”
그녀가 떠난 것을 확인하고서야 뮤리엘은 숨을 쉴 수 있었다.
‘…이동해야겠어.’
저 그리폰이 언제 돌아올지 알 수 없다. 보호 장비가 없는 상태에서 그리폰 볼프와 육탄전을 벌이는 것은 그야말로 자살 행위.
‘빌어처먹을 모프박이도 안 보이니까.’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야 했다.
그렇게 다짐한 뮤리엘은 나무를 내리찍었던 원반을 회수했다.
“응?”
원반에는 검은색 점액질이 묻어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나무에 난 상처로 향했다.
그곳에서부터 끈적거리는 점액이 수액(樹液)대신 흘러내리는 중이었다.
‘…….’
저 검은색 액체가 무엇인지 그녀는 알고 있다.
저것은 에이모프의 둥지에서 자동으로 분비되는 물질.
다시 말해 그녀가 지금까지 숨어 있던 이 나무는 에이모프의 둥지에 의해 오염된 상태라는 뜻.
‘그러고 보니 아까….’
문득 그녀는 통신기로 도움을 요청하기 전 들었던 날갯짓 소리를 떠올렸다.
이 숲에 셋을 제외하고 살아 있는 생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 소리는 누가 낸 소리란 말인가.
뮤리엘은 전신의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을 느꼈다.
기분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의 몸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떨리고 있었으니.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는 울창하게 뻗어 있는 나뭇가지와 잎사귀들밖에 없었다.
온몸을 떨던 그녀는 원반을 위로 던졌다.
아무것도 없으니 그대로 위로 날아가야 할 원반이 허공에서 무언가에 부딪쳐 떨어졌다.
덜덜덜덜
귀신들린 여자처럼 몸을 떨고 있는 뮤리엘의 머리 위로 놈의 모습이 천천히 드러났다.
뱀처럼 긴 몸을 가진 놈이 레드우드를 휘감은 채, 은신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히, 히이익!”
그녀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놈이 더 빨랐다. 놈의 등에서 촉수 하나가 튀어나와 그녀의 다리를 붙잡았다.
“이, 이거 놔아…꺄아아아악!”
촉수에 달린 여섯 개의 날카로운 부속지가 그녀의 다리를 움켜쥔 뒤 그대로 박살 냈다. 이어서 다른 촉수들이 그녀의 팔과 다리를 붙잡았다.
“사, 살려 줘! 살려 줘어어어!”
“네·가·말·했·지. 배·를·갈·라·서·내·장·을·보·여·주·겠·다·고.”
“그, 그건! 끄아아아아악!”
멀쩡한 팔다리가 느리게 으스러지자 보라색으로 빛나던 뮤리엘의 눈에 빛이 사라졌다. 끔찍한 통증으로 인해 사이킥 파워 기술이 시전 중에 취소된 것이었다.
“끄으으으….”
“지·금·까·지·가·죽·을·벗·긴·적·은·있·는·데·그·생·각·은·안·해·봤·어.”
놈이 당장에라도 자기가 한 말을 그대로 이행할 것처럼 보였기에 뮤리엘은 다급히 입을 열었다.
“기, 기다려! 대, 대화하자고! 잠깐만 시간을 줘!”
“대·화?”
그녀의 말에 에이모프가 멈칫했다.
자기가 말한 키워드가 최후의 희망이라는 것을 깨달은 뮤리엘이 말을 이었다.
-
“나, 나는 좋은 카드가 많아! 너, 너한테 부, 분명 유리할 테니까! 그, 그러니까 협상을 하자고!”
목숨이 경각에 달렸기에 순종적인 태도로 내게 말하는 뮤리엘. 나는 그녀에게 뻗었던 손을 거뒀다.
‘협상이라.’
이제 와서 협상이라는 단어를 운운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그녀는 내 목숨을 몇 번씩이나 위협했고, 그녀의 부하들은 26호와 아드하이를 죽이려고 했으니까.
거기에 더해 지금 그녀는 나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다른 플레이어들한테 넘어가면 큰일이야.’
좀 전에 그녀가 슈트에 내장된 통신 장치로 통화하던 것을 들어 보니 그녀와 알고 지내는 다른 플레이어도 있는 것 같았다.
정보 유출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뮤리엘은 무조건 내 손에 죽어야만 한다.
‘그렇긴 하지만.’
그 다른 플레이어들에 대한 정보는 꽤 흥미가 생긴다.
“워, 원한다면 내, 내가 너한테 봉사해 줄게! 너, 너도 알잖아! 에, 에이모프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거!”
내가 얌전히 있으니 자기 제안에 혹했다고 생각한 걸까?
나는 대답 대신 뮤리엘를 들고 나무 위에서 내려왔다.
‘아직 나를 잘 모르네.’
나를 모르니까 저런 건방진 말을 아무렇게나 막 할 수 있는 거겠지.
“어, 언제든지 해도 상관없으니까 살려만 준다면…헉?!”
나는 그녀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침식 촉수를 위로 높이 쳐들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그대로 땅에 매다 꽂았다.
“크억!”
“착·각·하·지·마·라.”
검은색 피를 토하는 뮤리엘.
나는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다시 그녀를 붙잡은 촉수를 번쩍 들었다. 뮤리엘의 눈에 고통과 공포심이 깃들었지만 나는 주저하지 않았다.
“끄엑!”
“네·몸·이·내·게·할·수·있·는·일·은.”
“그, 그, 꺅! 그마아, 끅!”
“오·직·고·기·를·제·공·하·는·일·뿐·이·다.”
“에, 에오압이아아안, 껙!”
열 번 이상 내려치자 그녀의 몸에서 뼈와 각종 기계부품, 모듈들이 피부를 뚫고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이보그니까 이 정도로는 안 죽어.’
아직 죽일 생각은 없으니 정확히 허리뼈가 부러질 정도만 내려쳤다.
“끅, 끄륵, 끄윽, 끄극….”
바닥에 널브러져 신음하는 뮤리엘의 모습은 마치 해부되어 신경만 간신히 살아 있는 개구리 꼴이었다.
백옥 같던 피부와 아름답던 외모, 멋진 뿔은 온데간데없고, 망가지면서 못생겨진 기계인형만이 남았다.
“내·게·협·상·을·청·했·지? 좋·아. 들·어·주·지.”
내 무미건조한 목소리를 들은 그녀가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사, 살, 려, 주는 거?”
“대·신·조·건·이·있·다.”
“무, 뭐든지 들을게! 시, 시키는 대, 로 다, 다 할 수 있어!”
그렇게까지 말 안 해도 어차피 내 말은 무조건 들을 수밖에 없을 거다.
나는 그녀가 보는 앞에서 기생군체를 활성화했다. 타입으로 강화된 기생충이 오랜만에 바깥 공기를 쐐서 좋은지 몸을 쭉 핀다.
“그, 그건! 자, 잠까아아아안!”
나는 뮤리엘이 저항할 수 없도록 머리를 붙잡고, 기생충을 흘려보냈다. 검은색 기생충이 꿈틀거리며 그녀의 콧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케엑! 켁켁! 크어억!”
“원·래·라·면·이·상·태·로·심·문·하·겠·지·만.”
나는 정신없이 기침하는 그녀에게 앞으로 무슨 일이 이어질지 얘기해줬다.
“넌·나·에·게·많·은·피·해·를·줬·고·나·를·모·욕·했·다. 그·빚·을·갚·을·수·있·도·록·해·주·지.”
“그, 그게 무슨?”
“지·금·부·터·내·가·질·문·할·때·마·다·이·손·으·로·너·의·척·추·를·한·차·례·씩·긁·어·내·겠·다.”
“뭐?”
내 말을 들은 그녀가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어차피 좀 있으면 이해하기 싫어도 저절로 이해하게 될 거다.
“횟·수·는·내·의·문·이·전·부·풀·릴·때·까·지·다.”
“어, 어어어어! 잠깐잠깐잠깐잠깐!”
“참·고·로·거·짓·말·은·소·용·없·다.”
내 손에 유령 발톱 특성이 활성화된 것을 본 뮤리엘의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다.
그녀도 컬트니까 잘 알 거다. 이 손톱으로 내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는지 말이다.
“묻·겠·다. 좀·전·에·통·화·한·자·는·누·구·지?”
심문이 시작되는 것과 함께 나의 예리한 손톱이 보라색으로 번뜩였다.
-
뮤리엘과 나 사이에 죽음의 게임이 시작된 지 여섯 시간이 지날 때쯤, 나는 유용한 정보들을 뮤리엘로부터 전부 빼낼 수 있었다.
‘대단한 집착인걸.’
척추가 유령 발톱에 의해 수백 번 이상 긁혔음에도 뮤리엘은 미치지 않았다. 그녀가 가진 삶에 대한 열망이 얼마나 대단한지 엿볼 수 있는 부분이었다.
‘중간에 몇 번씩이나 딴마음을 품는 바람에 기생충의 제재에 의해 죽을 뻔했지만.’
내 공생물 포자 특성 덕분에 그녀는 죽지 않았다. 사실 그게 뮤리엘에게 좋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더·이·상·물·어·볼·만·한·것·은·없·군.”
“…그, 그렇, 다면, 사, 살려주는 거…?”
“아·니.”
“그, 그런!”
약속과 다르지 않느냐는 눈빛을 보내는 뮤리엘.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내·심·문·은·끝·났·지·만·다·음·사·람·이·기·다·리·고·있·군.”
“다, 다음?”
내가 물러나자 뒤에서 그리폰이 나타났다.
「뮤리엘….」
“아, 아아, 아아아아.”
하늘의 어머니의 입에는 어린 볼프가 입었던 옷가지가 물려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뮤리엘이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기 시작했다.
「기어코 나의 가족들을 죽였구나.」
“아, 아니야! 그, 그건 오해가 있어서…!”
「네가 나의 연인의 목을 베었을 때도, 네가 나를 고문할 때도 나는 망설였어. 너를 죽이는 게 과연 옳은지 말이야.」
“기, 기다려 봐! 서아 언니! 우, 우리 사이 좋았잖아! 응?”
「그래. 2년 전, 난 너를 살렸어.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했기에 너를 구했지만….」
조심스럽게 물고 있던 옷가지를 내려놓은 하늘의 어머니.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내가 틀렸구나. 너희 같은 플레이어들은 멸종해야 해.」
하늘의 어머니가 말하는 사이, 나는 뮤리엘의 몸에 붙은 공생물을 체크했다.
“나·와·동·일·하·게·여·섯·시·간·을·주·마. 내·가·먹·어·야·하·니·죽·이·지·만·말·아·라.”
「알았어.」
“이, 이건 약속과 다르잖아! 살려 준다며! 살려 준다며어어어!”
자리를 뜨는 나를 향해 뮤리엘이 울부짖는다.
왜 약속을 지키지 않느냐고 말이다.
‘애초에 약속한 적도 없는데 지키고 자시고.’
나는 빚을 갚을 수 있도록 해주겠다고 말했지 살려주겠다고 한 적은 없다.
다만 굳이 그 사실을 지적해 줄 필요는 없겠지.
그로부터 여섯 시간 후.
나는 그녀들이 있던 자리로 돌아왔다.
“히, 히익, 히익, 히익….”
뮤리엘은 머리와 상반신만 남은 채 숨만 붙어 있었다. 하늘의 어머니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둘이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하늘의 어머니는 뮤리엘이 죽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굳이 부를 필요는 없겠지.’
나는 쓰러져 있는 뮤리엘을 잡아들었다.
“엄마….”
나지막하게 유언을 읊조리는 그녀.
이윽고 내 턱이 활짝 벌어지고 그녀의 몸 전체를 집어삼켰다.
그걸로 랭킹 20위였던 스페이스독 랭커 뮤리엘은 죽었다.
「포식 효과 발동! ‘뮤리엘(한수빈)’의 특전 탈취 성공!」
「기존에 보유하고 있던 ‘금속 흡수’을 융합 가능.」
「‘뮤리엘(한수빈)’의 특전과 ‘금속 흡수’ 특성이 융합.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 특성으로 진화!」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 장비 하나를 포식해 장비 고유의 능력을 특성화시킵니다. 한 장비당 한 번만 가능하며, 다른 장비를 새로 포식할 시, 이전 장비의 특성 효과는 소실됩니다.
*추신: 당신은 죽음이요, 우주의 파괴자입니다. 그러나 주의하시길. 온 우주가 당신을 주목할 겁니다.」
달콤한 고급 케이크의 맛과 함께 내 머리를 강타한 것은 새로운 특성과 관련된 텍스트박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