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4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 장비 하나를 포식해 장비 고유의 능력을 특성화시킵니다. 한 장비당 한 번만 가능하며, 다른 장비를 새로 포식할 시, 이전 장비의 특성 효과는 소실됩니다.」
‘이건?’
뮤리엘의 정수를 흡수한 뒤 얻은 새로운 특성.
한 번도 본 적이 없고, 또한 존재하지 않았던 유형이었다.
‘장비 능력을 흡수한다니.’
유체 시절에 얻었던 초능력 기관도 게임에서 얻은 적 없던 특성이긴 하지만, 이건 차원이 완전히 달랐다.
‘에이모프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는 특성이야.’
에이모프, 아웃스페이서, 메탈릭 그렘린은 뛰어난 신체 능력이나 강력한 유틸 능력을 지닌 대신, 장비를 착용할 수 없다는 핸디캡을 지니고 있다.
설령 모종의 준비를 거쳐 장비 능력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그건 일반 장비나 소비품에 한하지 유일급 장비의 활용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이 특성이 있으면 비록 하나지만 유일급 장비도 특성화해서 쓸 수 있게 된다.
‘이런 건 전례가 없는데.’
게임에서는 플레이어를 죽였다고 해서 특별히 새로운 특성을 얻거나 하는 경우가 없었다.
유전자 개조를 한 인간이면 그 몸에 들어 있는 생물 유전자 정수를 얻고, 컬트의 경우는 사이킥 파워와 관련된 특성을 얻는 것이 전부였다.
그동안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먹어 치웠지만 이 정도로 궤를 달리하는 특성을 얻은 적은 처음이다.
나는 반투명 텍스트박스를 다시 확인했다.
「-둥지 관련 융합 특성: 공생물 포자
강적의 증표*: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X)」
보유한 특성 목록 아래에 ‘강적의 증표’라는 카테고리와 별표가 새로 생겼다.
‘강적의 증표?’
별표로 눈을 돌리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강적의 증표’는 강대한 사냥감을 포식한 뒤 얻는 증표입니다. 사냥감이 지닌 고유 특전과 호응하는 특성이 존재한다면 강적의 증표 특성으로 재구성됩니다. 강적의 증표로 분류되는 특성은 융합, 초월 시스템 재료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설명만 봤을 때, 강적의 증표 특성인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는 육체, 초능력 관련 특성들과 같은 일반 특성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새로운 분류로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강대한 사냥감은 플레이어를 말하는 거겠지.’
뮤리엘이 지닌 특전은 다른 종족으로부터 상징물이라는 것을 얻어 모듈화하는 능력이다. 상징화한 모듈을 장착하면 종족이 바뀐다.
‘덕분에 사이보그면서 컬트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었던 거야.’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는 장비를 먹고 그 고유 능력을 특성화시키는 특성.
다른 종족의 특징을 모듈화해서 장착하는 뮤리엘의 특전과 통하는 면이 있었다.
아마도 여러 종류의 ‘강대한 사냥감’을 사냥한다면 전혀 다른 형태의 증표 특성을 얻을 수 있을 터.
‘플레이어들과의 투쟁이라.’
뮤리엘을 심문할 때 그녀에게 우리 말고 다른 플레이어들이 존재하는지 물어 봤다.
그녀 말에 따르면 그녀와 뜻을 함께하는 플레이어 수는 2명.
그녀가 알고 있는 플레이어는 하늘의 어머니와 나를 포함해 7명이었다.
‘예전에 더 있었다고 했지만….’
지금은 얼마나 더 남아 있는지 불명이라고 한다. 오래전 플레이어들 간의 전쟁이 터져 다수가 죽었기 때문이다.
‘다른 플레이어를 죽이면 특별한 보상을 얻는다는 사실은 그때 퍼졌을 거고.’
뮤리엘이 이 세계에 왔을 때는 전쟁은 이미 끝났고, 남은 플레이어들끼리 파벌을 형성한 상태였다.
이 세상에 적응하고 살아가려는 자가 있는 반면, 특전을 얻기 위해 다른 플레이어를 노리는 자, 이곳을 게임이라 여기고 폭군처럼 군림하는 자 등등.
‘이 세계에 건너온 시점이 달라서 그래.’
뮤리엘은 3년 전에 이 세계에 왔고, 하늘의 어머니는 최소 10년이 넘었다. 뮤리엘이 아는 플레이어 중에는 백 년을 넘게 산 플레이어도 있었다.
‘각자 다른 방식으로 생존해왔을 테니까 파벌이 갈리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은 아니야.’
다만 의문인 것은 그렇게 오래 있었음에도 엔딩을 본 자가 없다는 점이다.
‘과거에 벌어졌다는 전쟁은 아마 엔딩을 보려는 플레이어들끼리 싸운 것 같은데.’
에이모프의 엔딩이 승천이라고 한다면, 다른 종족에게도 비슷한 분류의 고유 엔딩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자기와 비슷한 수준의, 경쟁 종족 플레이어들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정확히 말하면 종족 지도계층을 사살하는 거지만.’
예를 들어 메가콥과 스타유니언은 각각 엔딩 트리거 중에 서로의 수뇌부를 잡아야 한다는 조건이 포함되어 있다. 메가콥CEO에 오른 플레이어가 엔딩을 보기 위해서는 스타유니언의 대수령과 싸워서 제거해야 한다.
게임에서 CEO든 대수령이든 각 종족 지도자의 자리는 플레이어들이 장악한 경우가 대부분이기에 결국 이 목표는 플레이어 간의 투쟁을 유도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따라서 과거의 전쟁 중 누군가는 틀림없이 이 조건을 달성했을 터.
그런데 뮤리엘의 말을 들어봐도 그렇고, 엔딩을 본 자는 아직까지 나오지 않은 것 같았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또 있는 건가?’
이곳은 현실이니까 플레이어들이 엔딩 트리거가 해금될 정도로 높은 자리까지 못 올라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곳은 게임과 달리 한 번 죽으면 끝. 강심장을 지닌 플레이어라고 해도 몸을 사리면서 움직일 수밖에 없겠지.
‘이건 하늘의 어머니에게 물어봐야겠다.’
뮤리엘보다 그녀가 훨씬 오래 생존했으니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찌 됐든 향후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적대 관계가 될 가능성이 높아.’
뮤리엘은 내게 붙잡히기 전에 동료들에게 구조신호를 보냈다. 그러니 최소한 그녀의 동료들이 나를 적대하는 것은 확정이었다.
그리고 뮤리엘의 동료들과 적대 관계에 있는 플레이어들도 어떠한 경로로든 나의 행위에 대해 알게 될 거고.
그들이 어떤 파벌이냐에 따라 나를 적대하거나, 혹은 이용하려 들 거다.
「*추신: 당신은 죽음이요, 우주의 파괴자입니다. 그러나 주의하시길. 온 우주가 당신을 주목할 겁니다.」
추신의 말 그대로다.
온 우주가 나를 주시할 거라는 말.
플레이어들이 내게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 당장은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내가 강해져야 해.’
그래야만 생존에도 유리하고, 누군가에게 이용당하지 않을 수 있다.
초월 시스템에 이르러 플레이어 사냥까지.
나를 이곳에 보낸 자가 무슨 의도로 이러는 것인지는 불명이나 그 원인과 이유를 밝히는 것도 결국 살아남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마지막으로 혹시 새로운 메시지가 온 것이 없나 확인했지만 별표의 해설 외 추가적인 설명은 없었다.
정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계속 머리를 굴려 봐야 시간 낭비일 뿐이다.
지금은 새로 얻은 능력을 어떻게 활용할지 고민하는 게 훨씬 생산적이리라.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는 아무 장비의 능력이나 특성으로 만들 수 있어.’
그리고 한 장비마다 한 번 이상 특성화시킬 수 없다.
보급형 장비면 여러 차례 해당 장비의 능력을 뽑아 쓸 수 있겠지만, 유일급 장비는 그렇지 않다.
‘뮤리엘이 가진 장비라면….’
나는 바닥에 떨어진 제사장의 황금창과 조율자를 집어 들었다.
이것 말고도 뇌신과 블러드 리버가 야영지에 있다.
장비의 고유 능력이 특성화된다고 했을 때 어떤 형태로 작용하는지는 모른다. 일단 장비들의 능력만 봤을 때는 전부 내게 도움이 된다.
황금창은 나의 힘을 한없이 강하게 만들어 줄 거고, 조율자는 5회에 달하는 절대회피능력을 확보할 수 있다.
뇌신이면 나의 부족한 원거리 공격 및 대공(對空) 능력을 보완해 줄 수 있고, 블러드 리버라면 나의 전장 지배 능력을 훨씬 강화시켜 주겠지.
‘다른 장비로 먼저 실험해볼까?’
야영지에 있는 아무 장비나 먹어서 어떤 식으로 적용되는지부터 확인해야겠다. 나는 단창과 조율자를 들고 그 자리를 떠나려고 했다.
문득 든 생각에 나는 움직임을 멈췄다.
‘…….’
나는 근처에 있는 돌을 주워 다가 내가 좀 전까지 서 있던 장소에 쌓았다.
공터에 작은 돌산을 만든 나는 그 자리를 떴다.
-
컬트의 신성한 별 ‘인도자’.
이곳은 은하 전역에 퍼져 있는 컬트들의 정신적 고향이다.
사실 인도자는 아주 오래 전 행성 전체가 사막화되었기에 빈말로라도 살기 좋은 곳은 아니다.
만약 컬트의 뛰어난 사이킥 파워 기술이 없었다면 진작 버려졌으리라.
행성 전역에 깔린 붉은 모래들 위에 오래된 도시들이 있었다.
그 도시들 중 ‘선지자의 돌’이라는 도시가 있다.
선지자의 돌은 길가에 있는 도로 장식물조차도 세워진 지 수만, 수십만 년 이상 지났을 정도로 가장 오래된 도시였다.
아이보리색 외벽 위에 보라색 장식품들로 치장된 건물들을 지나 도시 중앙에는 거대한 탑 하나가 세워져 있었다.
컬트 중 가장 고귀한 자들이 머무는 탑의 최상층.
사슴뿔을 지닌 남성 컬트가 길게 뻗은 복도를 지나 기도실의 문을 열었다. 기도실 안에는 수많은 전선들이 연결된 다이아몬드 형태의 비석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
남성 컬트가 말없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놓여 있던 다이아몬드 비석 중 두 개에서 불이 들어오더니 공중에 떠올랐다.
「다들 오랜만이야!」
비석 중 하나로부터 소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애니메이션 캐릭터의 목소리를 닮아 밝고 활기차서 기도실의 음침한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쪽은 바쁘니 빨리 이야기하라. 제이슨이여.」
반면, 이쪽에서 나온 목소리는 근엄한 중년남성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제이슨은 대답하지 않고 다른 비석이 활성화 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몇 초가 더 지났지만 움직이는 비석은 없었다.
활성화된 비석이 두 개밖에 없자 제이슨이라 불린 남성 컬트는 한숨을 쉬었다.
“…급하다고 했는데 들어오는 사람이 둘밖에 없냐?”
「오빠가 병신같이 얘기해서 그렇지. 제대로 얘기했으면 다른 사람들이 더 들어왔을 걸.」
“이 씹…아니, 잠깐? 너도 왔는데 중2병 쪽바리는 뭐 하느라 안 들어왔데? 그 인간이 제일 중요한데.”
「영감님은 요즘 내전 때문에 완전 바빠. 나도 연락 안 한지 오래됐어.」
“Fuck. 나도 마지막에 메가콥이나 할 걸 그랬나. 유부녀 따먹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여기는 너무 지루하다니까.”
제이슨이 소녀 목소리가 나오는 비석하고만 대화하자 중간에 중년남성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는 시간이 없다. 그러니 잡담 그만하고 자세히 설명하라. 새로운 플레이어가 온 게 아닌가?」
「맞아. 자세히 좀 얘기해 봐. 뮤리엘, 걔는 갑자기 왜 뒈진 거야? 우리 말고 플레이어 잡으러 다니는 애들은 없잖아.」
“우리가 모르는 플레이어가 그녀를 죽였어. ‘에이모프’ 플레이어가.”
제이슨의 입에서 ‘에이모프’란 단어가 나오자 수다스럽게 떠들던 비석들이 조용해졌다.
「…제이슨 오빠, 그런 농담 재미없어.」
「쯧, 연설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쓸데없이 시간을 버렸군.」
“Shit, 나도 거짓이면 좋겠다.”
「진짜야? 진짜 에이모프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에이모프는 멸종되었다.」
“뮤리엘과 연락이 끊기기 전에 그랬어. 볼프 플레이어랑 에이모프 플레이어가 자기를 노린다고.”
제이슨은 기록된 통신 기록을 비석 너머의 인물들에게 전송했다.
잠시 후, 통신 기록을 확인한 그들의 분노가 비석에서 터져 나왔다.
「애미씹 돌겠네 진짜! 10년 전에 멸종한 새끼들이 왜 지금 나왔데?」
「Пиздец(빌어먹을)…. 마지막으로 정리를 담당한 자가 누구였지?」
“아마 범호였을 걸.”
「범호, 그 씹새끼 절대 포기 안 할 거니까 내가 미리 죽이자고 했잖아!」
“네가 죽일 수는 있고? 너 게임에서도 범호 한 번도 못 이겼잖아?”
「оба заткнись(둘 다 입 닥쳐라)! 이미 늦은 일이니 탓해 봐야 소용없다. 뮤리엘을 사살한 자가 에이모프라면 답은 정해져 있겠군.」
“그래. 40위까지 에이모프는 단 한 명밖에 없으니까. 애초에 뮤리엘을 잡을 실력의 에이모프라면 그놈뿐이겠지만.”
제이슨의 말에 소녀의 목소리가 나오는 비석에서 불이 들어왔다.
「자, 잠깐만! 그, 그 뭐야, 5위 걔는 친구 없잖아. 그런 애가 서아 언니랑 같이 있을 리가….」
「동의한다. 모프퍽커에게 동료가 있을 가능성은 0에 수렴한다.」
“뮤리엘은 내게 의뢰받아서 최서아를 잡아 오기로 했어. 둘이 싸우던 중에 모프박이가 난입한 게 아닐까?”
「과연. 모프퍽커다운 행동이군. 납득 가능한 설명이다.」
「하아아아…실화냐. 요즘 장비 개발이 잘 돼서 운수가 좋다고 생각했더니.」
비석 너머에 있는 자들은 그제야 제이슨이 왜 자기들을 불렀는지 알 수 있었다.
「놈을 토벌할 생각인가?」
“당연하지. 그 새끼 내버려 뒀다간 우리 다 죽어.”
「영감님이라면 몰라도 난 아닌데? 난 가주라서 에이모프 진화 조건에 카운트 안 돼.」
“뮤리엘이 죽기 전에 과연 너에 대해 얘기를 안 했을까? 내가 에이모프였으면 너는 무조건 잡으려 할 걸?”
「끄응, 뮤리엘 이 도움도 안 되는 씹년이 진짜….」
「조용! 그래서 어쩌자는 거지?」
“다 같이 직접 가서 잡을까 하는데 어때? 솔직히 부하들을 보내는 것은 미덥지가 않고 게다가….”
제이슨은 생각했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야말로 우주를 실시간으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자들.
천외천(天外天)의 존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자들이 모여서 에이모프 한 마리를 잡는 일이 과연 어려울까?
그러나 비석 너머의 사람들의 생각은 제이슨과 많이 달랐다.
「오빠 미쳤어? 다 함께 줄초상 치르려고? 영감님 빼고 우리만 갔다간 다 뒈질 걸?」
「나 또한 반대한다. 내가 죽으면 스타유니언은 그대로 붕괴할 거다.」
“야야야! 둘 다 말을 이상하게 한다? 나만 살겠다고 그런 것도 아니고 우리들의 힘이면 충분히….”
「쌉소리 집어치우고. 오빠가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그 모프박이, 예전에 준성체인 채로 랭커들 대가리 깨고 다닌 거 알지?」
「놈 때문에 컬트들 중 엔딩을 못 본 자도 수두룩하다고 들었다. 제이슨, 너라면 모르지 않을 터.」
「그니까. 난 통곡의 벽한테 정수를 상납할 생각은 절대로 없거든? 뒈지고 싶으면 오빠 혼자 가서 뒈져.」
「동의한다. 정 토벌을 원한다면 혼자 가라. 혹시 유언을 남기고 싶다면 지금 기록하도록. 거기 갔다간 유언도 못 남길 테니까.」
“…….”
제이슨의 말을 중간에 끊고 들어오는 비석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사람들처럼 보이는 그들의 반응에 제이슨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