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5
「와! 이겼다!」
「나」「승리」「멋짐」
해양 괴수의 사체를 앞에 두고 26호가 촉수 두 가닥만 뽑아서 만세 자세를 취했다. 아드하이는 괴수 위에 올라타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승리의 기쁨을 만끽했다.
「나도 이 세계에 제법 오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경험은 처음이군.」
그리폰으로 변신한 하늘의 어머니는 승리의 세레모니를 펼치는 녀석들을 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즈즈즈 즈즈즈즈(똑똑한 녀석들이지)]
「…전투 중에 어쩔 수 없이 빌렸어. 돌려주지.」
내가 다가가자 그녀가 입으로 물고 있던 단창을 내게 돌려 줬다.
‘아드하이랑 호흡이 잘 맞는 것을 보니 이후에도 맡겨야겠어.’
아드하이는 아직 덜 자란 그린 갤러곤인데다가 돌연변이라서 몸도 작다. 화이트 갤러곤이 된다면 지금보다 훨씬 강해지겠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할 터.
녀석의 부족한 부분을 하늘의 어머니를 이용해 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리라.
나중에라도 그녀에게 제사장의 황금창을 빌려줄까 생각하는데 26호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큰애기야! 우리가 나쁜 놈 혼내줬어!」
[즈 즈즈(그래. 잘했어)]
「응! 근데 옆의 친구는 누구야?」
싸울 때는 경황이 없어서 하늘의 어머니를 소개하지 못했다. 나는 26호에게 그녀가 누군지 짧게 설명해줬다.
「그럼 친구도 가족의 대장이야?」
「…아니. 내게 가족은 없어.」
「왜? 엄마 아니야? 엄마는 애기들을 지켜야 해.」
「나의 자식들은 모두 죽었다. 나의 남편 또한. 지금의 나는 혼자다.」
「그렇구나.」
하늘의 어머니의 슬픔을 느낀 것인지 26호가 어두운 분홍빛을 내뿜었다. 생각해 보면 26호도 그녀의 비슷한 경험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동족들이 전부 실험당하다가 죽었으니까.’
26호는 연구선에 있던 버블아메바 중 최후의 생존자. 우리 중에 녀석만큼은 그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겠지.
녀석은 생각하는 게 있는지 잠시 가만히 있다가 다시 파장을 쐈다.
「엄마는 애기들을 지킬 수 있을 정도로 강해야 해.」
「…그래.」
「그러니까 중간애기라 부를게.」
「뭐?」
잘못 들었다는 듯 반문하는 하늘의 어머니. 26호는 그녀의 반응에 신경 쓰지 않고 이어서 파장을 발산했다.
「친구는 엄마지만 애기들을 못 지켰으니까 아직 애기야. 그래서 중간애기.」
「어….」
독수리의 얼굴을 한 그녀의 눈에 당혹스러워하는 감정이 흐른다. 그녀의 시선이 좌우로 흔들리다가 나를 향한다.
내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 그녀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26호는 짤막하게 빛을 내뿜으며 한마디를 덧붙였다.
「중간애기도 가족을 지킬 수 있도록 함께 힘내자!」
「…….」
마지막으로 26호가 남긴 말. 가족을 지킬 힘을 기르자는 말이 그녀의 심금을 울린 것 같다. 눈에서 거부감이 잦아들었으니까.
「고마워.」
26호나 아드하이는 특유의 파장이나 사념파로만 대화하는 생물이다. 그래서 하늘의 어머니는 목에 걸린 특수한 목걸이를 이용해 사념파를 보내며 의사소통을 나누고 있다.
지금 그녀가 보낸 사념파에는 이전에 비해 다소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하늘의 어머니와 대화를 마친 26호가 이번에는 나를 불렀다.
「큰애기야, 같이 갈 곳이 있어.」
[즈즈(갈 곳?)]
「응. 빨리 가지 않으면 늦을지도 몰라.」
급한 일이라.
나는 26호의 파장이 무엇을 의미하나 생각해봤다.
‘페일 마스크까지 잡았으니 새로운 위협은 없을…아.’
그러고 보니 전에 26호가 말했다. 녀석의 표현을 빌리자면 나쁜 애, 즉 페일 마스크 때문에 친구의 가족이 위험에 처했다고 말이다.
‘친구의 가족이라.’
정황상 친구가 씨 데몬을 지칭하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 가족이라고 하면 다른 씨 데몬을 말하는 걸까?
‘그건 아니겠지. 씨 데몬, 그것도 한 마리도 아니고 무리가 페일 마스크에게 질 리 없으니까.’
가족이란 씨 데몬과 함께 서식하는 버블아메바들을 지칭하는 거겠지.
솔직히 말하면 나는 버블아메바에게 관심이 없다. 설령 내가 모르는 유전자 정수가 포함되어 있다고 해도 26호가 보는 앞에서 잡아먹을 수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해서 안 갈 수는 없겠지.’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으니까 녀석이 나와 함께 가려는 것일 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페일 마스크를 포식하려면 좀 더 기다려야 해.’
사냥의 표상을 쓸 수 있을 때까지 30분 정도 남았다. 그사이에 다른 볼일을 본다고 해서 문제될 것은 없다.
나는 가기 전에 아드하이에게 먹고 있으라고 말했다.
「나」「머리」「식사」「불가?」
[즈즈즈 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머리에 독이 있으니까 먹으면 안 돼)]
「이해」「못생긴 친구」「같이」「식사」
「잠깐. 못생긴 친구라면 날 말하는 거야?」
「너」「꼬리」「없음」「뿔」「없음」「못생김」
「…하.」
기묘한 만담을 나누는 하늘의 어머니와 아드하이를 뒤로하고 나와 26호는 다시 물속에 들어갔다.
「이쪽이야.」
길쭉한 지느러미를 활짝 펼친 26호가 점점 바다 깊은 곳으로 나를 인도했다. 녀석은 심해의 연구기지를 지나 그 옆에 있는 해저협곡 아래의 해구(海溝)로 헤엄쳐 들어갔다.
녀석을 따라 들어가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짙은 암흑이 나를 반겼다.
‘마치 우주처럼.’
우리는 흔히 우주를 묘사할 때 주로 물과 관련된 개념과 단어들을 많이 사용한다. 우주를 이동하는 기계를 우주선이라 부른다거나 우주비행이라는 단어 대신 항해라고 표현하는 등 말이다.
빛 한 점 비추지 않는 이 공간은 저 위에 있는 우주와 또 다른 형태의 우주였다.
그때 앞에서 우주에서 스스로 빛나는 항성처럼 26호가 빛을 발산했다. 그 빛은 태양의 빛과 같은 강렬함이나, 태양광에 반사되어 비치는 달빛의 창백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저 신비로우면서도 동시에 포근한 느낌을 주는 은은한 빛이 장막을 걷어냈다.
그렇게 얼마나 내려갔을까. 나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멀리서 알갱이 같은 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별?’
흑암 속에 26호와 비슷하게 분홍빛으로 선명히 빛나는 별.
그것은 26호의 동족들, 버블아메바였다. 그들이 26호와 공명하듯 빛을 내고 있었다.
「친구네 가족들이 살아 있어!」
그 모습을 보고 안도하는 26호.
그녀는 버블아메바 무리들에게 빛을 띄엄띄엄 쏴서 보냈다. 그녀의 몸에서는 평소 나에게 뜻을 전달할 때와 다르게 다양한 색깔들로 뒤섞인 빛이 흘러나왔다.
‘이게 버블아메바들 간의 대화겠지.’
따지고 보면 나는 괴물의 촉수를 통해 만든 파장으로 대화하는 것이니 다를 수밖에.
이쪽에서 보낸 메시지를 확인했는지 저쪽에서 다양한 색의 빛들이 반짝거렸다. 근처에 있던 또 다른 무리가 26호의 빛을 보고 대화에 참여했다.
버블아메바 무리가 의사소통을 위해 일제히 몸을 빛내는 모습은 유성우 같기도, 맑은 밤하늘에 비치는 은하수 같기도 했다.
생명이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어둡고 무거운 바다 밑바닥에서 가장 나약한 생물들이 이처럼 강하게 빛을 낼 줄이야.
아무리 감성이 메마른 자라도 이 광경을 보면 경이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으리라.
‘…멋지네.’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무대 위에서 펼쳐진 오색 빛의 무도회는 놀라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런 광경은 게임에서 본 적이 없다. 이런 이벤트가 존재했다고 해도 VR머신으로 과연 이 매혹적인 풍경을 1%라도 담을 수 있을까? 단언하건대 이는 불가능하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빛과 색채의 대화는 의외로 짧게 끝났다. 대화를 위해 다양한 색상의 빛을 내뿜던 26호의 몸이 다시 분홍색으로 돌아왔다.
「다들 괜찮대.」
그들을 보호할 씨 데몬이 죽었지만, 강력한 경쟁자인 페일 마스크도 죽어 버렸다. 저들은 이제 안전할 것이다.
또 다른 인간이 침입할 수도 있지만, 컬트 고위직과 커넥션이 있는 뮤리엘이 죽은 이상 이 행성에 대한 감시망이 해제될 가능성은 낮다.
이제부터 저들은 다시 자연의 순리에 맞춰 살아가겠지. 때로는 포식자를 만나 도망치거나 잡아먹히고, 때로는 새로운 동족을 만나 무리를 지어 번성해가는 그러한 순환 말이다.
다만 이어지는 녀석의 말을 들은 나는 녀석이 나눈 대화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친구네 가족들이 나한테 부탁했어.」
[즈즈(부탁?)]
「나보고 자기들의 엄마가 되어 달래.」
녀석의 파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안다.
‘26호가 여기 남는다고?’
그 의미를 이해한 순간, 나는 크게 놀랐다. 26호가 헤어진다고 생각하자마자 느낀 상실감이 상상 외로 컸기 때문이었다.
내가 침묵하는 동안에도 26호의 파장은 이어졌다.
「친구네 가족들은 약해. 가족을 이끌 애가 없으면 다른 나쁜 애가 왔을 때 힘들 거야.」
나는 그 말에 반박하고 싶었다. 그게 자연의 순리라고, 버블아메바의 생태가 본래 그러한 것이라고.
「나도 가족을 잃는 아픔이 뭔지 알아. 가족들이 아프면 나도 아파.」
26호의 종족은 씨 데몬.
에이모프가 다른 생물의 유전자 정수를 강탈하는 것이 고유 습성인 것처럼 녀석은 심해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생물. 물속에서 가족들, 다른 버블아메바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녀석에게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앞으로 어떤 난관이 닥칠지 모르는데 뛰어난 실력을 가진 26호를 여기서 보낼 수는 없다.
한편으로는 녀석의 뜻도 존중하고 싶다.
‘…어떻게 해야 하지?’
뭐라고 해야 할지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데 녀석이 나 대신 결정을 내려 줬다.
「근데 안 된다고 했어.」
[즈(뭐?)]
「내게도 지켜야 할 가족들이 있어.」
26호가 촉수 한 가닥을 뽑아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과 맞닿은 부위로부터 26호가 품은 감정이 여실히 느껴진다. 내 마음속에서 녀석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만큼, 녀석도 우릴 소중히 여기고 있다.
「큰애기는 쑥쑥 빨리 크고, 나보다 힘도 세지만 아직 애기야. 내가 지켜줘야 해.」
녀석의 솔직한 말을 듣고서야 나는 마음을 담은 파장을 쏴 보낼 수 있었다.
[즈즈 즈즈즈(같은 마음이야)]
「응!」
파장은 짧았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결코 모자람이 없다고 자부할 수 있다. 나의 간절한 마음을 이해한 녀석이 기쁨을 담아 몸을 밝게 빛냈다.
이걸로 심해에서의 볼일은 다 끝났다. 나는 슬슬 올라갈 준비를 했다.
버블아메바들이 내뿜는 빛들은 참 보기 좋지만, 여기 계속 있다간 26호가 남겠다고 할 것 같아서 불안감이 든다.
반면에 26호는 아직 볼일이 남은 듯 보였다.
「큰애기야, 친구네 가족들이 그러는데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래.」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여기보다 아래면 위험해)]
더 내려가면 해구의 바닥인데, 그곳에는 드레드 히드라가 서식한다. 페일 마스크의 주 먹이에 불과한 녀석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약한 녀석은 아니다.
하지만 26호는 부정의 뜻을 담아 발광(發光)했다.
「친구가 남겨둔 보물이 있으니 가져가라고 했어.」
‘보물이라고?’
이 깊은 바다의 끝에 있는 보물이라면 대체 뭘까. 게다가 씨 데몬의 보물이라니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 가 볼까.’
어쩌면 준보스급 생물인 씨 데몬이 떨구는 귀한 장비 같은 것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26호와 함께 더 내려가 보기로 했다.
우리는 엄청난 수압을 뚫고, 깊고도 깊은 바다의 저편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한참을 나아가던 중 26호가 그 자리에서 멈췄다. 부드럽게 유영하는 녀석의 앞에 어떤 거대한 물체가 있었다.
‘이건?’
26호와 흡사한 외모지만 그 덩치는 비교가 불가할 정도로 거대한 그것.
심해에서 숨 쉬는 공포이자 바다의 악마.
죽은 씨 데몬이 세상의 밑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