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7
지금까지 나는 ‘사냥의 표상’을 주로 특성 획득 수단으로 사용했다.
내가 죽인 시체를 먹을 때 포식 확률을 큰 폭으로 높여주기 때문이다.
설령 유전자 샘플이나 내가 죽이지 않은 시체를 먹을 때는 온전한 특성이 아니라 0.5 특성만 획득할 수 있지만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 초월 재료로 사용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내 추측이건대 본래 사냥의 표상의 주 목적은 포식 확률에 있지 않다.
어디까지나 사냥과 살육. 적을 몰아넣고, 때려 부수고, 죽이는데 특화시켜주는 것이 목적이리라.
완전한 유기체의 설명을 보면 이런 문장이 있다.
내 육신이 살육과 진화에 최적화되어 있다고.
사실 지금 내 몸은 게임 속 준성체의 모습과는 미묘하게 다르다. 6개의 전투용 팔, 다리가 없어 하반신과 꼬리를 이용해 기어 다녀야 하는 생활양식, 몸 여기저기에 달린 뭉툭한 발톱 등은 게임과 동일하다.
다만 덩치와 머리 갑각은 게임에 비해 더 큰 편이고, 전투용 팔도 제법 긴 편이다. 대체로 게임에 비하면 전투에 훨씬 유리하도록 변화했다고 보면 되겠지.
거기서 한층 더 사냥과 포식 능력을 강화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일시적이지만 더 나은 존재로 변이한 나의 모습은 이전과 많이 달랐다.
먼저 몸의 크기.
변이 전과 비교했을 때 길이가 거의 2배로 늘어난 것 같았다. 그 증거로 시선의 위치부터 달라졌다.
준성체가 된 이후 하반신과 꼬리를 바닥에 끌면서 움직였기에 내 눈높이 자체는 이전보다 크게 달라진 게 없다. 얼추 7m에서 10m 사이라고 보면 되겠지.
그러던 것이 지금은 15m 이상의 높이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다. 오죽하면 내 앞에 있던 하늘의 어머니가 내 그림자에 가려질 정도일까.
‘몸의 길이를 보면 페일 마스크와 비슷하겠어.’
크기의 변화가 가장 두드러지긴 했지만 세부적인 변화도 적지 않았다.
일단 머리부터 보면 기존에 양쪽으로 갈라지던 턱이 훨씬 두껍고 튼튼하게 변했다. 턱과 목 사이에 여유 공간이 생겨서 뱀처럼 크게 입을 벌릴 수 있었다. 이렇게 크다면 인간을 단숨에 삼켜 버릴 수 있을지 않을까.
턱이 강화된 만큼 이빨도 단단해져서 씨 데몬과 같이 가죽이 두꺼운 적도 쉽게 씹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한 가지 크게 달라진 부분이 있다. 턱 아래에 있던 보조기관들에 갑각이 덮여서 보호받게 된 것이었다.
내 몸에서 가장 연약한 부위라고 한다면 턱 아래 보조기관이다. 탐지를 담당하는 섬세한 기관이다 보니 외피나 갑각으로 보호받지 못했다.
‘게임에서도 이 부분은 주요 약점이었는데.’
내 등에서 생기는 팔 끝에 붙어 있는 뼈 낫과 동일한 재질로 보이는 갑각이 보조기관을 감싸고 있어서 그런지 모양도 뼈 낫과 유사했다.
즉 놀라울 정도로 절삭력이 높다는 듯.
턱 아래에 4개의 칼날을 달고 있는 내 모습은 고전SF전략게임에 등장하는 육상괴수 울X라X스X의 모습을 연상시켰다.
보조기관을 덮은 칼날 갑각들은 각각 내가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다. 머리를 돌릴 때 칼날을 휘둘러 적의 목을 수확할 수도 있고, 대형 적과 싸울 때 물면서 동시에 칼날로 적을 베어 공격하는 방법도 있다.
이처럼 보조기관은 새 공격수단이 되었지만, 탐지 기능은 조금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갑각의 칼날 곳곳에 작게 뚫려 있는 미세한 구멍 덕분이었다.
그저 단순한 구멍이 아닌지 원래도 뛰어난 인지능력이 한층 더 강화되었다. 공기 중의 습도를 읽어내서 언제쯤 비가 내릴지 까지 감지할 수 있었으니까.
눈은 이전 때와 마찬가지로 머리 갑각에 감싸져서 보이지 않았지만, 보조기관의 성능이 이를 대체할 만큼 향상되어서 문제없다.
‘머리 갑각도 많이 달라졌네.’
준성체가 되기 전에는 뒷머리가 왕관 형태로 넓게 펴지는 식으로 화려하게 변화했다. 지금도 뒷머리가 넓게 펴지는 형태는 동일하지만, 겹겹이 쌓인 갑각 위에 길쭉한 가시와 삐죽한 골판들이 듬성듬성 솟아나 있다는 점에서 달랐다.
머리를 덮은 갑각은 최소 3겹 이상으로 보여 방어력이 극도로 상승했다. 게다가 가시와 골판이 새로 생겨서 이전에 뿔로 적을 찌르는 식, 소위 돌진 전술의 파괴력의 위력을 극대화시킬 수 있었다.
‘전반적으로 인상이 험악해졌나.’
이전처럼 퀸X일X언처럼 위엄 있는 인상은 아니지만, 효율적인 측면에서 봤을 때 나쁘지 않았다.
머리에 생긴 변화가 말 그대로 대격변이라 하면 몸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일단 등에는 머리와 비슷하게 갑각이 이중으로 덮인 형태로 진화했고, 그 사이에 골판과 가시들이 돋아났다.
페일 마스크가 나를 덮칠 때처럼, 적들이 몸무게로 나를 누르는 전략을 썼다간 내 골판과 가시에 찔려서 빈사 상태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예상했지만 내 등 위로 뼈 낫이 달린 팔이 새로 생겼다. 소용돌이 형태의 피막으로 덮여 있던 8개의 구멍 중 2개의 구멍에서만 침식 촉수가 나오지 않았는데, 여기가 바로 뼈 낫 팔이 나오는 구멍이었다.
그렇게 밖으로 튀어나온 뼈 낫 팔의 전반적인 형태는 이전과 유사했다.
일단 상완골과 요골(橈骨) 사이에 관절이 하나 있는 일반 팔과 달리, 중간에 관절이 하나 더 있을 정도로 팔이 길며 움직임 또한 자유롭다.
이전과의 차이점은 크기가 커진 것을 제외하고 팔 끝에 달린 뼈 낫이 2개로 나눠졌다는 점이었다. 집게발처럼 위아래로 뼈 칼날이 솟아 있으며 내 의지에 따라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위아래로 나 있는 뼈 낫의 길이만 3m가 넘으니 위압감이 넘쳤다. 그 예리함과 단단함도 전과 비할 수 없을 정도로 향상되었다.
뼈 낫 팔의 변화도 제법 흥미롭지만 개인적으로 내 몸에서 일어난 변화 중 가장 큰 변화라 한다면 바로 하반신이다.
준성체가 되면서 나의 몸 여기저기에는 땅을 기거나 팔 때, 지하나 물속에서 이동할 때 주로 사용하는 발톱이 생겼다.
그 발톱이 매우 흉악스럽게 변했다.
지네를 한 50m 정도로 키우면 이런 모습일까. 기존에는 뭉툭하고 짜리몽땅한 형태의 발톱이었던 것들이 짧은 다리 형태로 변한 것이다. 수많은 다리들이 생긴 덕분에 내 하반신과 꼬리는 바닥에서 살짝 떨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움직임도 훨씬 빨라지겠는걸.’
게다가 본래 팔 사이에만 있던 활공피막이 작은 다리들 사이에도 있어서 이대로 수면에 뜰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상반신.
확연히 변이한 머리와 등, 하반신과 달리 상반신에서의 변화는 딱히 특별하지 않았다.
전투용 팔은 굵고 길어졌다는 점 말고는 그대로였다. 그에 맞춰 팔 사이에 숨겨져 있는 피막도 커졌다는 점정도?
준성체 이후 새롭게 변이한 몸을 점검하기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자, 앞에 있던 하늘의 어머니가 움찔거렸다.
「성체…는 아닌 것 같고. 도대체 무슨 능력이지?」
[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내 비장의 수단이니 말해 줄 수 없다)]
「비장의 수단이라. 혹시 특전인가. 특전이라면 말이 안 되는 건 아닌데 이렇게까지 강해지는 건….」
대답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납득하는 하늘의 어머니.
지금 그녀는 나의 위엄 넘치는 외모에 크게 위축된 상태였다.
가지런히 정렬된 털은 긴장 때문인지 빳빳하게 서 있었고, 눈은 미세하게 흔들렸다. 또한 보조기관을 통해 그녀의 심장이 강하게 뛰고 있는 것도 느껴졌다.
나와 처음 조우했을 때도, 뮤리엘과 싸울 때도 항상 기품을 잃지 않던 그녀가 나를 두려워하고 있다.
그때 26호와 아드하이도 곁으로 다가왔다.
「큰애기 또 커졌네?」
[즈즈 즈즈즈즈(잠깐 커진 거야)]
「큰애기도 몸을 바꿀 수 있으니까 나랑 똑같네.」
공통점이 생겼다고 좋아하는 26호.
반면 아드하이는 나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나」「어른」「질문」
[즈즈(뭔데?)]
「나」「어른」「꼬리」「암컷」「판단」
[즈(응?)]
녀석이 날개 끝으로 뒤쪽을 가리켰다. 날개가 향하는 쪽에는 내 거대한 꼬리가 있었다.
이어서 녀석은 날개로 내 뿔을 가리켰다.
「나」「판단」「오류」「어른」「뿔」「많음」「멋짐」「나」「의문」「어른」「수컷?」「암컷?」
‘흠.’
갤러곤은 성적 이형성을 띤 동물이기에 암수별로 생김새가 다르다. 수컷은 뿔이 굵고 긴 반면, 암컷은 뿔 대신 꼬리가 통통한 편이다.
준성체가 된 나는 무엇보다도 꼬리가 가장 크게 변했다. 갤러곤 기준으로 보면 우람하다는 표현으로도 부족할 정도로.
‘아, 그러고 보니?’
26호를 구하러 갈 때 녀석이 나한테 머뭇거리며 말을 건 적이 있었다. 그때는 죄책감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지금 보니까 그게 아닌 것 같네.’
아마도 녀석은 내가 수컷인지 암컷인지 물어보려고 했던 것 같다.
사냥의 표상을 쓴 이후 내 뿔은 상당히 커졌다. 길이가 2m쯤 되니까. 이 정도 크기면 블랙 갤러곤보다 우위에 있다. 아드하이가 본 동족 중에서는 상위급에 속한다고 봐도 좋을 터.
다시 말해 갤러곤 기준에서 내 외형은 매우 기묘한 것이리라. 뿔도 큰데 꼬리까지 굵으니까.
그래도 워낙 황당한 질문이라 뭐라 대답할지 고민하는데 하늘의 어머니가 먼저 대답했다.
「이놈은 명실상부 남자야. 이 변…크흠, 이 녀석이 여자일 리 없어.」
「남자?」
「수컷이라고.」
[즈 즈즈즈(난 수컷이야)]
나와 하늘의 어머니의 말에 아드하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내 뿔을 바라보던 녀석은 내 말을 이해했다는 사념파를 보냈다.
「나」「이해」「어른」「수컷」「확실」
[즈즈(그래)]
「어른」「제일」「멋짐」「무리」「우두머리」「가능」
[즈즈즈(고마워)]
「…하.」
아드하이의 찬사에 나는 감사를 표했다. 물론 하늘의 어머니의 헛웃음은 무시하고 말이다.
대충 녀석들에게 설명이 다 끝난 것 같으니 나는 하던 점검을 마저 끝마쳤다.
이제 원래 의도했던 바를 행할 때다.
바로 페일 마스크 포식.
‘쩝. 이렇게 좋은 걸 포식할 때만 쓰자니 아쉽네.’
사냥의 표상이 비장의 카드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변신할 때마다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피하기 힘들다. 지속시간 20분, 쿨타임 일주일이라는 한계만 아니었어도 전투에 적극적으로 써먹었을 텐데 아쉬울 따름이다.
‘초월 2단계에 접어들면 좀 나아지려나.’
초월 2단계의 조건은 전부 다른 타입과 관련된 융합 특성 5개를 재료로 삼는 것.
이미 나는 늪지대를 돌면서 확보한 특성들 덕분에 초월 2단계의 조건을 클리어한 상태다. 다만 둥지 관련 융합 특성인 ‘공생물 포자’를 재료로 삼아야 해서 새로운 둥지 관련 융합 특성을 얻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이 행성을 떠나기 전에 새 둥지 관련 융합 특성을 얻고 가자.’
좀 망가진 상태지만 우주선도 준비되었고, 26호와 아드하이도 전부 모였다. ‘악몽의 지평선’을 다시 쓸 수 있기 전까지 둥지 관련 융합 특성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해야겠다.
‘그건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포식을 즐길 때다. 나는 26호와 함께 시체에 다가갔다.
‘어디.’
나는 턱을 크게 벌려 페일 마스크의 머리를 깨물었다. 백상아리나 보아뱀처럼 거대하게 벌어진 내 입이 페일 마스크의 살점을 크게 한 움큼 뜯어냈다.
‘음.’
턱이 강화되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이빨이 단단해져서 그런 걸까. 놈과 싸울 때는 질기다는 느낌이 역력했는데 지금은 입안에서 살살 녹는 느낌이 팍팍 든다.
‘이건 또 재밌는 맛인걸.’
내가 여기서 먹었던 해양 생물 고기는 두 가지. 피쉬리안과 씨 데몬이다.
둘 다 개성 있는 맛을 자랑했지만 어쨌든 맛 자체는 해산물의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여기 이 수컷 페일 마스크 고기는 뭐랄까. 해산물과는 또 다른 풍미가 느껴졌다.
‘오히려 양고기랑 가까운 것 같은데.’
페일 마스크 고기는 경뇌유과 섞여서 그런지 내가 살면서 먹어 본 고기 중에는 가장 기름진 식감을 자랑했다. 이렇게만 보면 느끼할 수 있는데 녀석의 고기향이 강렬해서 그런지 딱히 느끼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맛이 단계적으로 들어와.’
처음 씹었을 때 지방과 육즙이 팍 터지면서 강렬한 고기향이 입안을 장악한다. 이어서 고기를 씹으면 씹을수록 처음과 달리 기름과 섞여서 부드러운 맛으로 변해간다. 마지막에는 입안에서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달착지근한 맛으로 변한 뒤 목구멍 뒤로 사라진다.
독특하면서도 자연적인 느낌이 강한 씨 데몬 고기와 다르게 페일 마스크의 고기는 직관적이다. 고급 해산물 뷔페와 미국식 스테이크 가게의 차이라고 해도 좋으리라.
‘힘들게 잡았는데 맛이 좋아서 다행이네.’
그렇게 나와 26호는 페일 마스크 고기를 마음껏 즐겼다.
놈의 머리를 전부 먹는데 소비한 시간은 대략 10분 정도.
마지막 남은 뇌수 한 방울을 핥아먹는 순간, 기대했던 텍스트 박스가 떠올랐다.
「포식 효과 발동! 인면수(人面獸) 유전자 정수 획득 성공.」
「‘페일 마스크’의 특성 중 ‘인면수’를 탈취.」
「‘인면수’를 적용시키겠습니까?」
내가 획득한 특성은 ‘인면수’.
페일 마스크의 마스코트 같은 존재인 저 창백한 얼굴을 닮은 기생물을 생성하는 특성이었다.
최면파와 충격파를 쓰는 페일 마스크와 다르게 에이모프에게 적용된 인면수는 효과가 다르다. 개인적으로 유용하게 잘 써먹었던 특성이어서 반가운 기분도 들었지만, 아쉬움도 컸다.
‘거대생물을 노렸는데.’
‘거대생물’ 특성은 덩치가 50m 이상이 되는 생물들이 공유하는 특성이다. 거대생물 특성을 얻으면 거대화 능력을 쓸 수 있다. 사냥의 표상에 거대화까지 쓴다면 나의 신체 능력은 그야말로 무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터.
유치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한 번쯤은 보고 싶었다. 사냥의 표상을 쓴 상태에서 거대화된 나의 모습을 말이다.
어차피 진화하기 위해 에이펙스에 속하는 생물들을 잡아야 한다. 에이펙스 생물들 대부분은 덩치가 크니까 앞으로도 거대생물을 얻을 기회는 많다.
나는 아쉬움을 털어내고 페일 마스크의 유산, 인면수 특성을 적용했다.
-
무한한 어둠이 펼쳐진 우주.
수십, 수백 광년 이상 떨어진 별들만이 유일한 빛을 내뿜는 그 공간에 거대한 구조물이 떠다니고 있었다.
그 구조물의 형태는 정제된 다이아몬드를 닮았다. 직경 3km, 아이보리색 선체에 황금과 특수한 금속으로 장식된 이 구조물의 정체는 놀랍게도 우주선이었다.
그것의 정체는 컬트 제국의 고대 기술이 집약된 양산형 무기, 제국모함이다.
불과 수천 년 전까지만 해도 제국모함은 수많은 전장을 누비던 현역이었다.
컬트들의 근간이라 할 수 있는 ‘섭리’를 지키기 위해, 무수히 많은 행성과 원주민들을 계몽하기 위해 제국모함은 쉴 틈이 없었다.
물론 이제 와서는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가 됐다. 컬트 제국은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내전에 시달리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파벌들이 제국의회에서 자기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무의미한 설전을 반복하는 중이었다.
다시 말해 외부와의 전쟁이 종식되고 내부에서의 암투가 개시된 것이다.
시대가 변했으니 더 이상 제국모함 같은 강력한 병기들이 설 자리는 없었다. 일부는 퇴역했고, 일부는 제국의 변방에서 방위업무를 수행했다.
여기 있는 제국모함, ‘다모스08의 심판자’ 또한 퇴역을 피하고 변방으로 쫓겨난 배 중 하나였다.
찾아오는 자 하나 없고, 심지어 메탈릭 그렘린이나 아웃스페이서 같은 괴물들도 오지 않는 변방 중의 변방. 그곳에서 제국모함의 함장은 오늘도 무의미한 항로 계산을 반복하고 있었다.
만약 컬트 보좌관이 그에게 헐레벌떡 뛰어오지 않았으면 평소와 동일한 하루를 보냈으리라.
“함장님, 의회로부터의 연락입니다!”
“파벌 가입 요청이면 거절하라고 말해 뒀을 텐데.”
“그게 아닙니다! 현재 의회에서 정화 명령이 통과되었고, 원로회에서 심의 중이라고 합니다. 늦어도 일주일, 빠르면 며칠 내로 명령이 내려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보좌관의 말에 야크뿔의 컬트가 고개를 홱 돌렸다.
“정화명령? 설마 아웃스페이서인가? 언제 쳐들어온 건가? 어디가 공격받고 있지? 설마 모함이 동원되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인가?”
“어, 그게,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첩보부에서 스타유니언을 감시 중 성지가 오염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답니다. 어느 종족이 벌인 짓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성지?”
“성지 사이길08입니다.”
“사이길이라….”
함장은 첩보 활동이나 정보 수집에도 관심이 있어 열등한 지성체들과의 교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인간과 사이보그들이 사이길08을 PH-101이라 부른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성지가 오염됐는데 기계 놈들이 우리보다 먼저 알아? 의회도 제대로 썩었군.”
함장뿐만 아니라 컬트 수뇌부들 중 머리가 좀 돌아가는 자들은 의회에서 설치고 다니는 자들의 타락이 극심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 중 해적질이나 밀수질로 돈을 만지는 자들도 있다는 사실도.
“…역겨운 냄새가 나는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보좌관의 질문에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쩌긴. 우리는 전사다. 섭리를 따르며 파벌이 아닌 컬트에 충성하는 신성한 전사. 의회의 명령이라면 따라야겠지.”
“함장님….”
“전 승무원들에게 알려라. 미리 준비해 두라고.”
“알겠습니다.”
보좌관이 떠나고 함장은 다시 항로 계산을 시작했다. 그의 앞에 사이킥 파워로 구현된 우주가 다시 떠올랐다.
다만 그 모양은 이전과는 약간 달랐다. 함장 앞에 떠 있는 우주는 PH-101 행성이 속한 항성계의 모습과 유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