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40
강렬한 냄새가 나를 깨웠다.
눈을 뜨자마자 느낀 것은 독한 화학약품 냄새였다. 어찌나 독한지 턱 아래 보조기관이 아려왔다.
‘여긴?’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무수히 많은 관들이었다. 어두운 공동 안에 관처럼 보이는 녹색 유리관들이 수백, 아니 수천 개가 놓여 있었다.
그 모습은 연구 시설이라기 보다는 고대의 카타콤을 연상시켰다.
‘왜 내가 이곳에 있지?’
유체에서 아성체가 될 때, 그리고 아성체에서 준성체가 될 때 나는 환상을 봤다. 전자는 에이모프와의 조우, 후자는 어린 시절의 기억과 조우하는 환상을.
둘 다 다른 종류의 환상이지만 내가 본 적이 있거나 내 기억 속에 있는 요소들을 기반으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이곳은 현실이든 게임에서든 와본 적 없는 완전히 낯선 공간이다.
‘게다가 초월 도중에 이런 적은 없는데.’
초월 2단계는 1단계와 뭔가 다른 걸까? 진화할 때처럼 환각을 보여주는 것은 그만큼 성장시켜준다는 의미일까?
‘…내 기억에 없는 곳이지만 중요한 단서일지도 몰라.’
어차피 초월이 완료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을 터. 나는 가까운 곳에 있는 유리관에 다가갔다.
유리관 안에는 걸쭉한 녹색 화학 약품이 가득 차 있었다. 액체가 워낙 탁해서 안에 뭐가 들었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보조기관의 판단은 달랐다.
저 액체 속에 뭔가가 들어 있다.
나는 실험관에 얼굴을 가까이했다.
가느다란 보조기관이 관 표면에 닿으려는 순간.
내가 서 있던 공동이 한순간에 백색의 공간으로 바뀌었다. 앞에 있던 유리관이 조각나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색 하나 없이 하얀 공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병원 내부로 전환되었다. 독한 화학 약품 대신 익숙한 소독제 냄새가 느껴졌고, 환자의 생명을 저울질하는 생명 유지 장치 소리가 들렸다.
이곳이 어디인지 안다. 하지만 그보다 좀 전에 본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방금 그건?’
실험관이 사라지기 전, 안에 있던 물체가 아주 잠깐 노출되었다.
그 물체는 어떤 생물의 새끼였다. 어딘가 모르게 낯이 익은 생물의 새끼.
“당신이 그날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내 생각을 지우려는 듯 갑자기 들리는 고함 소리.
병실 앞 복도에서 얼굴이 보이지 않는 성인 두 명이서 말다툼을 한다.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비싼 치료비를 누가 대는지 알아?”
“허. 치료비? 당신은 애한테 관심도 없잖아.”
“뭐?”
“카메라 앞에서나 우리 집 귀염둥이 이 지랄이지, 집에서 애 한번 안아준 적 있냐고.”
그들의 대화는 어렸을 때부터 지겹도록 들은 내용들이다. 그들은 항상 동일한 레파토리로 싸워댔으니.
지금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좀 전에 봤던 그 실험체, 분명 에이모프의 해츨링과 비슷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만.’
팔의 개수라든가, 보조기관의 유무라든가 내가 아는 에이모프의 모습과 많이 달랐다. 그 생물의 팔은 에이모프 해츨링보다도 덜 발달되어 있었고, 턱 아래의 보조기관이 없었으니까.
그 생물에 대해 생각하던 중인데 내 앞의 병실 문이 반쯤 열렸다. 열린 문 너머에는 한 아이가 있었다.
얼굴을 붕대로 꽁꽁 싸매고 있는 아이. 그 모습을 보니 불현듯 생각났다.
‘아. 이게 그때였나.’
내가 보고 있는 이 환각은 나의 삶에 전환점이 된 순간 중 하나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더 이상 실험관의 생물에 대한 생각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 날은 내가 한 가정의 소중한 선물에서 짐 덩어리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날이다.
복도에서 간호사가 걸어오는 것을 봤는지 아이가 문을 닫았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문고리에 손을 뻗었다. 문고리에 손가락이 닿는 순간, 나의 정신은 또다시 암흑 속에 빠졌다.
-
세인토피아02 대륙의 어느 숲.
고층 건물, 탑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거대한 레드우드들이 가득한 이곳은 대낮임에도 제법 어두웠다. 우거진 나뭇가지와 잎들 때문에 빛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그 어두운 숲 한가운데에 일련의 무리가 있었다.
인원은 총 10명. 전원이 전신을 감싸는 슈트 형태의 강화복을 입고, 그 위에 특별한 문양이 그려진 판초를 걸쳤다.
아이보리색 역삼각형 안에 보라색 마름모가 들어간 형태의 문양은 컬트 종족의 군대, 즉 ‘전사단’의 상징이었다.
전사단이란 이름에 걸맞게 그들은 여러 종류의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도끼, 칼, 도리깨, 창과 같은 냉병기부터 활, 소총, 그물총 등의 원거리 화기, 합금 방패, 실드 활성화 장치, 메디컬 키트 같은 방어 및 서포트형 장비까지.
컬트 전사단은 어떠한 적과 마주해도 능히 대처할 수 있도록 언제나 철저히 준비한다. 그렇기에 어떠한 난적을 만나도 쉽게 대응하기 위해 과할 정도로 무장한 것이다.
“여긴 전사장 레이스. 그쪽은 어떻게 됐지?”
「여긴 에드린. 마을은 완전히 전소되었습니다. 생존자는 없습니다.」
“또? 도대체 무슨 일이지. 다른 마을은 어떤가.”
「여긴 올라이. 메모리 사이트로 확인했는데도 아무것도 안 나왔습니다.」
제국모함 ‘다모스08의 심판자’에 소속된 이 전사단은 함장의 밀명을 받고 미리 사이길08의 내려왔다.
정화작업이 개시되기 전 볼프 원주민을 포획해 데려오라는 명령이었다. 그러나 볼프들이 서식하는 이 대륙에 도착한 지 벌써 몇 시간이 지났음에도 볼프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우리가 온 걸 안 것일까요?」
“그럴 리가. 원시 종족이 제국모함의 초광속 항해를 감지하는 것은 불가능해.”
「사이길08 밖에 떠돌던 원숭이들의 구조물. 그게 원인이 아닐까요?」
“메가콥이 이 행성 볼프들과 연계 활동한다는 첩보는 확인되지 않았다. 현재까지는 원인 불명이니 속단하지 말도록.”
「옙!」
“일단 시간이 남았으니 에드린, 올라이. 둘 다 수색을 계속 하도록.”
「알겠습니다. 전사장.」
「옙.」
“여섯 시간 후 함대 포격이 개시될 거다. 두 시간이 남기 전까지 살펴보고 발견 못하면 귀환하도록.”
전사장 레이스는 헬멧에 달린 버튼을 눌러 텔레파시 링크를 종료했다. 그가 쓴 헬멧은 원시 종족들이 쓰는 강화복 투구와는 많이 달랐다.
얼굴 전면부를 보호하는 형태인 것은 똑같지만 컬트는 머리에 뿔이 있다 보니 관자놀이 부분에 틈이 있었다.
그리고 헬멧에 자체 실드 기능과 텔레파시 기능이 있었다. 내부에 있는 장치 덕에 특별한 통신 장치의 도움 없이도 먼 거리에 있는 아군과도 소통할 수 있었다.
다만 정신력 소모가 심해 텔레파시 기능을 항상 켜둘 수 없다는 것은 단점이다.
통신을 종료한 그의 곁으로 부수석 전사 이사벨이 다가왔다.
“전사장님. 아직도 발견하지 못했답니까?”
“이해할 수 없군. 마치 누가 볼프만 싹 쓸어간 것 같아.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처음에는 해적 짓일까 생각했지만 레이스는 그럴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다.
볼프 노예는 해적들이 노릴 만큼 비싸지 않다. 컬트의 여러 행성 중 좀 산다는 곳에 가면 아주 쉽고 싸게 구할 수 있다.
이 행성의 볼프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면 다른 생물을 포획하는 것이 훨씬 큰돈이 된다.
가령 늪지대에 서식하는 겔 아르마나 화산 지대에 있는 뿔난 왕 마누크 아르마 같은 희귀 포식자 말이다.
참고로 마누크 아르마, 인간들이 혼드 기간트라 부르는 그 생물들은 멀쩡히 잘 살고 있었다. 레이스와 전사단이 이 숲에 오기 전 놈들의 서식지 근처에 있는 볼프 부락에 먼저 들리면서 확인했다.
“평소에 노예제를 혐오하시던 함장님도 볼프를 데려오라고 하시지를 않나, 원주민들은 씨가 마르지를 않나. 여기 볼프가 좀 먹을 만한가 봅니다.”
그녀의 음담패설에 옆에 있던 다른 전사들의 헬멧으로부터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모습에 레이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사벨 부수석 전사. 그 발언은 함장님에 대한 모독이자 컬트의 ‘섭리’를 부정하는 거나 다름없다. 자중하도록.”
“아, 죄, 죄송합니다!”
서늘한 레이스의 말에 이사벨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다른 전사들도 이사벨을 따라 바로 웃음을 멈췄다.
그 모습을 본 레이스는 혀를 찼다.
“쓸데없는 소리나 하는 걸 보니 다들 충분히 쉰 것 같군. 다시 움직이겠다.”
“넵!”
상관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안 전사단원들은 잽싸게 장비들을 들고 일어났다. 질서 있게 움직이는 그들의 모습은 고도의 훈련을 받은 전사 그 자체였다.
그러나 레이스는 잘 훈련된 부하들을 봐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제국모함의 함장이 왜 자기 신념을 꺾어서까지 그들을 이 행성에 보냈는지 알고 있었다. 함장이 컬트 권력자들에게 부하들의 장래를 부탁하기 위해 선물을 준비하려는 것이었다.
함장의 그런 고귀한 뜻을 모르고 이 새파랗게 젊은 전사들은 농담 따먹기나 하고 있다니. 레이스는 기가 찰 따름이었다.
‘올라가면 처음부터 다시 굴려야겠군.’
레이스가 부하들을 어떻게 굴릴 지 생각하는 사이, 전사단은 점점 숲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중간에 우드데블이나 나이트스토커들이 덤벼드는 경우가 있었지만, 전사단원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전투의 프로이자 어엿한 정규군. 마누크 아르마 정도의 포식자가 아닌 이상 그들에게 위해를 줄 생물은 이 대륙에 없다.
게다가 서로 소울링크라는 사이킥 파워 기술로 시야가 연결되어 있어서 기습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게 레이스 휘하의 전사단은 숲 안 어딘가에 있을 볼프들을 찾아다녔다.
다시 이동하기 시작한 지 30분쯤 정도 지났을까. 선두에 선 레이스는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바위틈과 나뭇가지들 사이까지 꼼꼼히 살펴봤다.
그러던 중 그의 눈에 이질적인 것이 걸렸다.
두꺼운 나무들 사이에 웬 분홍색 풍선이 보였다. 자세히 보기 위해 사이킥 파워 기술인 투시를 사용했지만, 그가 기술을 준비하는 동안 풍선은 사라진 뒤였다.
“전사장님?”
이곳에 있는 10명 모두 소울링크로 시야를 공유한 상태다. 레이스는 부하들에게 자기가 본 것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다.
그 순간.
“크윽?!”
“으으윽!”
레이스와 전사단원들이 갑작스러운 소음에 헬멧을 부여잡았다. 소리가 이어진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듣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시끄럽고 음산했다. 어떤 전사는 현기증에 무릎을 꿇을 정도였으니까.
그 모습을 본 레이스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전원 키트 사용을 허가한다! 방금 소음이 정신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모르니 치료제와 사이킥 방어제를 주사하도록!”
명령을 들은 전사단원들이 서둘러 가슴에 찬 메디컬 키트를 열어 주사기들을 꺼냈다. 레이스도 부하들처럼 주사기를 꺼내 허벅지에 주입했다.
“방금 그건 뭡니까?”
“…모르겠다. 부수석 전사 이사벨. 전사들의 이상 징후를 확인하라.”
“옙. 전사장.”
그들은 5분 정도 그 자리에서 대기했다. 전사들 중 일부는 눈과 귀에서 피를 흘렸지만 그것 말고 특별한 부상은 없었다.
“적이 언제 나타날지 모른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게 꼼꼼히 확인하도록.”
“알겠습니다!”
전사단은 각자의 무기를 부여 잡고 최고 경계 태세에 들어갔다. 아까보다 훨씬 긴장한 그들은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숲속을 걸었다.
출발한 지 5분 정도 지났을까. 레이스는 문득 이상함을 느꼈다.
‘…너무 조용해.’
소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간간이 우드데블이 습격한다거나,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던 것이 지금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마치 숲 전체가 죽은 것처럼.
오직 이곳에 있는 전사단원들이 내는 발소리와 숨소리만이 전부였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레이스만이 아니었다. 다른 전사들의 숨소리에도 불편함이 섞여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전사단을 잠식해가고 있는데, 갑자기 전사 하나가 들고 있던 퍼플 스프레이건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소울링크로 시야가 공유된 상태였기에 레이스는 부하가 뭘 향해 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그들로부터 몇십m 떨어져 있는 한 나무 위였다.
그리고 나무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만! 사격 중지!”
레이스는 고함을 질러 사격 중지 명령을 내렸다. 보이지 않는 표적을 향해 정신없이 초능력 화염을 갈기고 있던 부하는 명령을 듣고서야 정신을 차렸다.
“도대체 뭘 보고 쏘는 건가! 저기에는 아무것도 없어!”
“으, 으으, 그, 그게….”
다그치는 레이스에게 전사단원은 더듬거리기만 할 뿐 말을 잇지 못했다. 부하의 상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레이스는 그의 헬멧을 벗겼다.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어린아이처럼 겁에 질린 컬트의 얼굴이었다.
“괴, 괴물이 있었습니다! 무, 무수히 많은 눈이 저를 주시하고 있었어요!”
“눈? 무슨 눈?”
“분홍색의 그것이 지, 지금도 저를…히익?!”
레이스가 재차 질문했지만 전사단원은 ‘눈’과 ‘분홍색’이라는 단어만 연발할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레이스는 그의 키트에서 진정제를 꺼내 그에게 강제로 주사했다.
컬트들이 개발한 이 진정제는 전쟁 중 공황 상태에 빠진 병사들을 진정시키는데 매우 효과적이다. 진정제를 맞은 전사의 시야가 흐릿해지고 몸의 떨림도 멎었다.
다만 강력한 진정제 효과에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진정됐나?”
“…예.”
“좀 전에 뭘 본 건가?”
그의 질문에 전사가 다시 몸을 떨었지만 좀 전처럼 완전히 공황 상태에 빠지지는 않았다. 부하는 두려움에 떨면서도 어떻게든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그, 믿기 어려우시겠지만 풍선 같이 생긴 괴물이 있었습니다.”
“풍선?”
“처음에는 잘못 봤나 싶었는데 갑자기 놈의 몸에서 수많은 눈이 자라나더니 저를 노려보더군요.”
풍선을 닮은 괴물.
레이스는 귀를 찢을 것 같던 소음이 터지기 전에 봤던 그것을 떠올렸다.
‘설마?’
“시야를 체크하겠다! 나머지 인원은 경계를 늦추…응?”
소울링크를 통해 전사단원들의 시야를 한 번 더 체크하던 레이스는 하나가 빠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자리에 있는 자들은 그를 포함해 10명. 그런데 지금 확인되는 시야는 총 8명밖에 되지 않았다.
“코셰이? 코셰이 어디 갔어?”
“어, 제 뒤에 있을…어라? 바, 방금까지 뒤에 있었는데?”
후방을 지키던 전사단원은 자기 뒤에 있어야 할 동료가 사라진 사실을 깨닫고 허둥댔다.
정신이 이상해진 부하에게 모두의 시선이 쏠린 사이, 다른 한 명이 사라진 것이었다.
“…이사벨. 모함에 연락해라.”
“예?”
“현재 레이스 전사단이 공격받고 있다고.”
“아, 알겠습니다!”
레이스의 말대로였다.
숲속 어딘가에 숨어 있을 정체불명의 야수들.
그들의 공세는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