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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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함전단(母艦戰團) 소속 앙그라급 고속호위함에 배치된 컬트들은 그나마 운이 좋은 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5일 전, 그들은 세 머리의 악마가 쏜 사이킥 파워 열선을 맞고 어느 섬 위로 추락했다.
이곳 사이길08 행성에 위험한 생물이 득실거리는 마경과도 같은 곳. 신체 능력이 인간 이하 수준에 불과한 그들이 생존하기 쉬운 환경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이 대륙 위에 떨어졌다면 하루도 채 버티지 못했으리라.
“정말 구조대가 올까요?”
“저 자기장 폭풍이 잦아들면 위성과 연락할 수 있을 거다.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제각각 다양한 뿔을 지닌 컬트들이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구운 생선을 뜯어먹고 있었다. 어떤 컬트는 추락의 충격으로 뿔 한쪽이 부러졌고, 어떤 컬트는 몸에 붕대를 둘둘 감쌌다.
패잔병이나 다름없는 몰골이었지만, 25명의 눈에는 어떻게든 버티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다.
“하늘을 보면 어제보다 자기장 폭풍이 약화됐어.”
“통신 장비는 얼추 복구됐어. 다만 부품이 좀 모자란데.”
“내일 아침 다시 시도해 보자고. 기술관들은 망가진 함재기들로부터 부품을 구할 방법이 있는지 확인해 봐.”
염소 뿔이 달린 전사단원의 지시를 받은 컬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힘들겠지만 어떻게든 견뎌야 해. 많은 이들이 섭리의 인도를 받아 떠났지만 우리는 아직 때가 아니야.”
컬트들은 사이킥 파워라는 축복 받은 힘을 지닌 종족이지만, 이 상황에서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사이킥 파워 기술 대부분은 사용자의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다. 물고기를 잡거나 열매를 따기 위해 사이킥 파워 기술을 썼다간 순식간에 에너지가 바닥나 그대로 쓰러지고 말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전사단원은 컬트들이 무리가 생기지 않는 선에서 움직일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였다.
선원들도 전사단원의 의중을 알고 있었기에 그의 지시에 따랐다. 이 상황이 불만스러운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식사를 마친 이들은 각자 맡은 일을 처리하기 위해 움직였다. 리더인 전사단원은 쉬지 않고 돌아다니며 동료들의 일을 도왔다.
시간이 흐르고 섬에 여섯 번째 밤이 찾아왔다.
이 섬에 위험 생물이 없다는 것은 전사단원이 돌아다니며 확인했다. 그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밤중에 터질 수 있어 불침번을 두기로 했다.
불침번 3명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모두 깊은 잠에 빠졌다.
“불이 약해지는걸.”
“나 볼일 좀 보고 오려는데 그때 주워 오지.”
컬트 한 명이 소총을 들고 숲 안으로 들어갔다.
“어휴, 쌀 뻔했네.”
모닥불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그는 볼일을 해결했다. 바지춤을 추스른 그는 주변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주웠다.
이 정도면 되겠다 싶어 돌아가려는데 그의 귀에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뭇잎과 가지가 밟히는 소리. 그는 재빨리 가지들을 버리고 소총을 들었다.
“누, 누구야?”
그가 외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다른 불침번 1명이 그의 외침을 듣고 급히 뛰어왔다.
“갑자기 왜 소리를 질러?”
“방금 숲에서 발소리를 들어서.”
“뭐?”
불침번 둘은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소총을 겨눴지만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그런가?”
다시 모닥불 쪽으로 돌아가려는 둘.
그때 또다시 정체불명의 소리가 그들의 귀를 자극했다. 이번에는 단순한 발소리가 아니었다.
“방금 들었어?”
“…….”
둘은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숲 너머에서 들리는 아련한 파도 소리, 바람에 불어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그리고.
“누구 없나요?”
작지만 확연히 들리는 그 소리는 분명 여성 컬트의 목소리였다. 컬트의 생존자 중 하나가 이 섬까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어, 어떻게 하지? 도와줘야 하나?”
“잠깐 기다려. 뭔가 이상해.”
이 섬에 온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이 섬이 대륙이라 부를 정도로 넓은 것도 아니다. 반나절이면 섬 한 바퀴를 삥 돌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인데 그들이 못 본 컬트가 있을 리 없다.
“우리가 여기 며칠 있었는데. 이곳에 다른 함선은 없어.”
“다른 곳에서 찾아온 거 아닐까? 우, 우리보다 사정이 나아서 함재기를 타고 올 수도 있잖아.”
“그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밤중인데도 함재기가 날아오는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으니까.
“이럴 때일수록 힘을 합쳐야 해! 이봐! 이쪽이야!”
“기다려!”
동료가 그 사실을 지적하기도 전에 컬트는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뛰어가 버렸다. 시끄럽게 고함을 지르면서 말이다.
“둘 다 뭐 하는 거야?”
“좀 전에 저쪽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어.”
“뭐?”
불침번 둘은 잠시 고민했지만, 달려간 동료의 뒤를 따라가는 대신 전사단원을 깨우기로 정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목소리가 수상했기 때문이었다.
둘이 모닥불 쪽으로 움직이려는데, 수풀 뒤에서 좀 전에 뛰어간 동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봐! 우리 좀 도와줘!”
“어?”
“자스빌02산 호위함에서 온 친구들이야!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맞습니다! 함재기를 끌고 오면서 문제가 생겼어요.”
“와서 좀 도와주세요.”
수풀 너머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한 명의 것이 아니었다. 다수가 이곳에 온 것인지 동시다발적으로 외침이 들려왔다.
뛰어간 동료의 목소리에서 뭔가 위협을 느끼는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오랜만에 동족을 만났다는 반가움뿐.
“이상하다. 함재기 소리는 못 들었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놓쳤나 본데. 한번 가서 확인해 보자고.”
그래서 남은 불침번 두 명도 긴장을 풀었다. 그들은 수풀을 헤치며 목소리를 따라갔다.
섬에 자란 나무들은 그리 거대하지 않지만 현재는 야심한 밤이다. 소총에 부착된 라이트가 있다고 해도 전투원이 아닌 그들이 어둠에 잠긴 숲을 뚫고 지나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런 상황을 이해라도 하듯 컬트들의 목소리가 시기적절하게 튀어나왔다.
“이쪽이야!”
“여기야! 여기!”
“조금만 더 오면 돼요!”
마치 그들이 조금도 헤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애를 쓰듯이 말이다.
목소리를 따라 간 끝에 도달한 곳은 숲이 아닌 해변이었다. 파도 때문인지 모래가 넓고 깊게 파인 곳에 강화복을 입은 여성 컬트가 홀로 서 있었다.
“뭐지? 다른 이들은 어디 있습니까?”
불침번의 질문에도 여성 컬트는 답이 없었다. 그녀는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로 그들을 쳐다만 볼 뿐이었다.
방금 전만해도 동시다발적으로 들리던 목소리의 주인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타고 왔다고 하는 함재기도.
상황이 묘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그때.
넘실거리는 파도 쪽을 바라보던 불침번 한 명이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어라?’
파도가 해변으로 치고 올라와야 하는데 보이지 않는 무언가에 막히는 것처럼 허공에 부딪치고 있었다.
부자연스럽다는 사실을 인식한 순간, 컬트는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공기 중에 은은히 깔린 기묘한 냄새가 있다. 소금기 있는 바다 냄새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역한 냄새.
혼자만 이상함을 느낀 것이 아닌지 옆자리의 동료가 뒷걸음쳤다. 그의 시선은 기이한 얼굴로 모래 위에 홀로 서 있는 여성의 그림자에 꽂혀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 그림자를 본 컬트는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에는 물에 젖은 모래가 검게 보이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들 앞에 있는 검은 모래들 전부가 그림자였다.
“갈려고?”
여성 컬트의 모습이 아지랑이처럼 일렁거린다. 동시에 그림자가 꿈틀거리며 움직인다.
그리고 들리는 목소리.
“우리만 두고 어딜 가게?”
“우리를 두고 가지 마.”
“우리와 함께 하자.”
동족들의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가 그들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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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그라급 고속호위함의 전사단원은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눈을 떴다.
일반적으로 염소 뿔 컬트는 육체 강화와 관련한 사이킥 파워 기술에 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도 자기 적성을 살려 전사단에 들어간 것이지만, 그에게는 남들보다 특별한 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뛰어난 위기 감지 능력.
동료들보다 빠르게 위기를 느낀 덕분에 위험한 전장에서도 죽음을 면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이번 임무가 끝나면 아예 전사단을 은퇴, 예언자 시험을 준비할 계획이었다. 그의 능력은 진짜 예언자들에 비하면 한참 부족하지만, 재능이 있으니 수련만 하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아무튼 예지에 가까운 위기 감지 능력이 갑자기 발동된 것.
전사단원은 재빨리 옆에 놓아둔 무기를 집어 들었다. 그는 사이킥 파워로 본인의 오감을 강화했다.
강화된 그의 귀가 간이텐트 밖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들을 일일이 잡아냈다.
“그러니까 이걸 분리하면 된다고?”
“옙. 이 부품하고 조합하면 부착 후 바로 가동이 가능합니다.”
“그렇군. 또 필요한 것은?”
“가져가실 거면 이것도 챙겨 가시면 됩니다.”
들리는 것은 남성 컬트와 여성 컬트의 대화 소리였다.
‘불침번인가?’
동족들이 태연히 대화하는 것을 보면 위기 상황하고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그의 뇌에서는 위기 감지 능력이 여전히 경종을 울렸다.
당장 이 자리를 벗어나라고.
게다가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이 생존자 그룹 중에 여성 컬트는 없다.
‘…….’
고민하던 전사단원은 결국 상황을 직접 살펴보기로 마음먹었다. 심장이 크게 뛰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가 텐트의 가려진 입구를 살짝 걷어냈다.
그리고 그는 자기 행동을 후회했다.
“좋아. 이 정도면 괜찮겠군.”
텐트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반파된 함선. 그곳에 한눈에 모습을 다 담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무언가가 있었다.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무시무시한 외형의 괴물은 길쭉한 팔로 함선들을 분해하는 중이었다.
“그, 그럼 전 살려주시는 겁니까?”
“저, 저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저도 살려주세요!”
“젠장! 저도!”
더 끔찍한 것은 놈의 등에 있는 ‘무언가’였다. 새하얗게 질린 컬트 얼굴 5개가 등에 종기처럼 박혀서 계속 살려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 얼굴 중에는 전사단원이 아는 얼굴도 있었다.
“제가 아는 것은 다 말했습니다! 제발…!”
“조용.”
괴물의 입에서 매끄러운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아우성치던 얼굴들이 얌전해졌다. 괴물의 새하얀 눈알이 움직이더니 전사단원의 텐트로 향했다.
“봤구나?”
놈과 눈이 마주친 전사단원은 모든 것이 꿈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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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것은 다 구했네.’
악몽의 지평선 쿨타임이 끝나기 전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하늘의 어머니가 체크한 함선 추락 지점들을 돌아다니며 신형 호위함의 무장을 강화시킬 수 있는 부품들을 모았다.
‘무장 수준이 높다고 나쁠 것은 없지.’
함선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침식을 통해 활용할 수 있는 무기도 늘어나니까.
‘오늘이 6일차. 내일이면 바로 출발할 수 있어.’
나는 새로 얻은 부품과 함선 무기들을 등에 지고 세인토피아02 대륙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이곳이 마지막 대상이다. 다른 함선들은 아예 다른 대륙에 추락해서 거리가 너무 멀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의태기관과 인면수 콤보를 써 보네.’
둘 다 게임에서 주력으로 사용하던 두 특성이다. 실제로도 두 특성은 공식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시너지가 있다.
‘인면수 특성이 있으면 의태기관으로 적용할 희생자를 선택할 수 있지.’
본래 의태기관은 새로운 유전자를 섭취하면 기존에 저장해 둔 유전자를 버리고 새것으로 교체한다. 그래서 먹을 때마다 페로몬으로 구현하는 대상이 바뀐다.
‘그 점이 의태기관의 약점이지.’
페로몬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대상을 내 자율의지로 바꿀 수 없다는 것.
덩치가 커짐에 따라 발생하는 괴리감, 그리고 특정 대상인 척해서 적을 속이는 것이 제한적이라는 약점 때문에 의태기관은 후반까지 계속 사용하기가 힘들었다.
‘원래라면 그렇지만….’
인면수 특성이 끼어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진다.
인면수 특성은 적의 유전자를 복사해서 체내에 저장하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내가 그들에게 질문하고 정보를 캐낼 수 있는 것도 흡수할 때 그들의 기억 정보도 일부 가져오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저장된 유전자 정보를 의태기관이 꺼내서 쓸 수 있다는 점.
몸 안에 저장된 유전자 정보들 중 하나를 골라서 그 대상의 모습으로 위장시키는 페로몬을 만들 수 있는 거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
내가 알기로 두 특성을 동시에 활용해서 쓴 사람은 나밖에 없다. 애초에 의태기관 자체가 얻는 사람이 거의 없는 특성이다 보니 둘을 같이 쓰려고 시도한 자도 극히 적을 터.
‘이걸로 참 많은 사람을 골탕 먹였는데.’
내가 의태기관으로 하도 많은 사람을 엿 먹이다 보니 그들 중에서도 공략법을 내놓는 자들이 나타났다. 자기들끼리만 알고 있는 암호를 물어본다거나, 다른 먹이를 새로 잡아먹으면 기존에 위장했던 대상으로는 위장할 수 없다는 것을 노리고 미끼를 던진다거나 등등.
하지만 그들도 내가 여러 대상의 모습으로 위장할 수단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
‘물론 이것도 단점은 있지만.’
인면수 특성으로 저장할 수 있는 유전자는 최대 5인까지다. 그러니 내가 한 번에 의태기관으로 위장할 수 있는 사람의 모습도 총 5명까지 가능하다.
‘이 부분도 어떻게 늘릴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게임에서는 늘릴 수 있는 방법이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이 세계라면 또 다를지도.’
게임에서 존재하지 않던 요소가 속속 등장하는 곳이니 이 우주 어딘가에 인면수의 제한을 늘리는 수단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헤엄을 치는 중인데 익숙한 파장이 느껴졌다.
「큰애기야!」
어느새 26호가 지느러미를 흐느적거리며 내가 다가왔다. 저 멀리 달빛이 깔린 모래사장 위에 하늘의 어머니와 아드하이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즈 즈즈즈즈 즈즈(왜 여기까지 왔어?)]
「심심해서 수영 중이었어.」
녀석이 해맑은 파장을 쏘며 답했다. 역시 해양생물답게 수영하는 것을 즐기는 것일까.
‘내일이면 이 행성을 떠날 테니.’
다음 행선지에 가면 한동안 수영할 일이 드물 거다. 지금이라도 녀석이 좋아하는 수영을 마음껏 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좋겠지.
[즈즈 즈즈 즈즈(그럼 같이 가자)]
「응!」
나는 26호와 함께 이 행성 밤바다에서의 마지막 수영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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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흑과도 같은 검은 우주 한복판.
작은 함선이 무한한 공간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우주선에 대해 관심이 있는 자라면 저 아이보리색의 타원형 디자인의 배가 컬트들의 탈출선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좀 더 조예가 깊은 자라면 저 우주선의 후미 부분, 즉 초광속 엔진 부근이 심하게 손상되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으리라.
이 광활한 우주에서 초광속 항해가 불가능하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다. 하물며 최소한의 식료품과 의료품이 탑재된 탈출선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고.
아름다운 디자인의 탈출선 내부에 있는 두 명은 하루하루 죽을 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함장님, 이게 마지막으로 남은 식량입니다.”
“나는 배가 안 고프니 자네가 먹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벌써 3일째 아무것도 안 드시지 않았습니까.”
그들의 정체는 제국모함 ‘다모스08의 심판자’로부터 탈출한 함장과 선원이었다.
마지막으로 탈출할 때, 모함 폭발의 여파로 초광속 엔진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현재 그들은 우주 한복판에서 조난당한 상태였다.
이 탈출선의 비행 속도는 매우 빠르지만, 초광속 엔진 없이 컬트들의 영향권 내에 들어가려면 족히 반년은 걸린다. 일주일치 식량만이 저장된 탈출선으로 가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다시 말해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두 가지다. 아사(餓死) 또는 자살.
“함장님. 저는 다른 녀석들과 약속했습니다. 함장님께서 헛되이 죽지 않도록 하겠다고 말입니다.”
“…….”
“제발 제가 약속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반만 먹도록 하지.”
그렇게 선원이 전투식량의 절반을 함장에게 건네려는데, 갑자기 배가 덜컥 멈췄다.
“무슨 일이지? 혹시 스페이스독인가?”
“확인하겠습니다!”
둘은 재빨리 계기판을 조작해서 배가 왜 멈췄는지 살펴봤다.
“함장님!”
“…누가 우리 배를 강제로 끌어당기고 있군.”
운 좋게 컬트 함선이 그들을 발견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탈출선이 지나고 있는 이 성계는 어느 세력도 점거하지 않은 텅 빈 공간. 모든 세력에 적대적인 스페이스독이 숨기에 적절한 곳이다.
“하하, 섭리께서 우리를 거두시려 하는 것 같군.”
“…끝까지 싸우겠습니다.”
그들은 탈출선에 보관된 무기를 손에 쥐었다. 이윽고 탈출선의 문 쪽에서 플라즈마 커터가 작동하는 소리가 났다.
“꿀꺽.”
“…지금!”
문이 잘려서 떨어지는 순간, 그들이 뛰쳐나갔다.
며칠간 굶었지만 과거에 무수히 많은 전장을 돌아다녔던 함장이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사이킥 파워를 전부 끌어올려 적을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적은 그의 예상보다 능수능란했다. 하얀색 슈트를 입고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적은 가볍게 함장이 쏜 공격을 흘려내고 팔을 칼날로 변형시켜 그의 목에 겨눴다.
“큭?!”
“멈추세요.”
“함장님!”
그사이 다른 선원은 워커와 강화복이 합쳐진 것처럼 생긴 기괴한 슈트를 입은 적에게 제압당한 후였다.
“우리는 스페이스독에게 항복하지 않는다.”
“스페이스독? 제가 스페이스독으로 보이시나요?”
함장을 제압한 상대가 서늘한 미성으로 되물었다. 그제야 함장은 상대의 모습을 제대로 살필 수 있었다.
뛰어난 전투 실력을 갖춘 상대는 놀랍게도 여성이었다. 머리 왼편에 길쭉한 뿔이 달린 여성.
“너는 컬트…가 아니군. 정체를 밝혀라.”
함장의 말에 그녀가 답했다.
“제 이름은 시현 유진. ‘다모스08의 심판자’의 함장 네른,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유진? 설마 메가콥의 유진 가문?”
메가콥의 노블캐피탈이자 유진 가문의 전(前) 그림자, 시현 유진이 정화 임무에 실패한 이들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