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154화 (155/400)

Ep. 154

‘흠.’

나는 워커에 내장된 컴퓨터에 담긴 최근 기록들을 빠짐없이 열람했다.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지 않은 거대 생물에 대한 짧은 보고, 함선 내에 깔린 둥지 잔해 채취 후 정보 등록 등등.

내가 붙잡은 사이보그는 짧은 시간에 제법 많은 통신을 보냈다.

‘외부로 신호가 가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도 26호의 몸에서 통신 장애를 일으키는 사이킥 파워가 주기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중이다. 워커가 보낸 정보가 스타유니언의 수도성 작스-01까지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설령 도착한다고 해도 크게 손상되어 누구도 알아볼 수 없는 상태가 될 터.

다만 문제는 그 부분이 아니다.

‘인력공급선.’

저 배가 나를 조우하기 전에 나에 대한 정보를 스타링크에 등록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실제로 인력공급선은 나보다 먼저 나의 존재를 인지하고 다가왔다. 아마 오기 전 미리 나를 만났다는 사실을 스타유니언에 보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면 골치 아파지는데.’

상황이 귀찮아졌다.

내가 이 자리를 벗어난다고 해도 스타유니언의 추적대가 나의 뒤를 쫓을 테니.

초광속 항해로 도망치는 것은 보류다.

스타유니언 뿐만 아니라 컬트나 메가콥 같은 강대한 세력의 정예함대에는 초광속 항해를 추적하는 시스템을 지니고 있다. 저쪽에서 나를 얼마나 위험시하느냐에 따라 갈리겠지만, 정예함대가 나를 쫓는다면 도주는 불가능하다.

‘배의 외형을 바꿔도 숨는 것은 불가능해.’

악몽의 지평선으로 지배하는 배는 생물과 금속의 중간에 있는 존재. 인력공급선이 나의 특징을 ‘생체함선’이라 보고했다면 모양을 바꿔도 저쪽에서 금방 알아차릴 거다.

“크크크, 감히 스타유니언의 배를 건드리다니. 절대 편히 죽지 않…으극?!”

“조용.”

침식 촉수로 그의 몸을 확 조여서 침묵시킨 나는 가진 카드들을 점검해봤다.

‘성지에서 떠난 지 한 달이 지났어. 내가 쓸 수 있는 수단 대부분은 사용 가능해.’

우주선을 장악하는 악몽의 지평선, 거대화 또는 내 몸을 작게 만들어 주는 ‘유기적 진화’, 약탈자의 부정형다면체로 얻은 원거리 공격 능력 ‘신의 회초리’, 나의 육체를 전투에 적합한 형태로 바꾸는 ‘사냥의 표상’까지. 현재 내 상태는 강적과 싸우는데 부족함 없이 완벽하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전면전은 위험해.’

제국모함과 싸울 때랑은 상황이 다르다. 내가 있던 행성이 정치적으로 복잡한 위치에 있는 ‘성지’였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했으니까.

성지가 아니었다면 지금처럼 순조롭게 탈출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리라. 어떻게 탈출한다 쳐도 컬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을 거고.

하지만 스타유니언에게는 그런 제약이 없다.

최고 권력기관인 기계위원회가 독재하는 스타유니언에서는 ‘정치’라든가 ‘경쟁’, ‘갈등’ 같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형식상으로는 위원회와 각 부서들 간의 의견 조율을 거치지만, 실제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위원회가 시키면 모든 사이보그는 복종해야 한다.

기계위원회의 구성원들은 최고 존엄인 대수령을 제외하고, 전원이 고지능 안드로이드들이다. 그들이 나를 적으로 인지한다면 갖은 수를 다 써서 죽이려고 할 거다.

‘안드로이드는 방심 자체를 하지 않아서 성가셔.’

분명 나를 단번에 죽일 수 있도록 높은 무력을 지닌 정예함대를 파견하겠지.

‘우주전은 아직 어려워.’

육체 관련 특성 중 상당수가 봉인된 상황이 핸디캡을 안고 싸우는 거나 다름없다. 인력공급선을 먹으면서 ‘새로 해금한 타입 관련 특성’도 있지만, 이 특성들은 배와 동기화된 지금 상태에서는 유용하지 않다.

적 함선을 그대로 분쇄할 수 있는 공격 능력은 여러 개 지니고 있지만, 그것도 시간제한이라든가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다. 그렇다고 방어와 회피 기동에서 유리하냐고 한다면 그것도 아니다.

소수의 함선과 싸울 때는 내가 압도하겠지만, 함선 수백 척으로 구성된 함대와 싸우는 것은 쉽지 않다.

그나마 나은 것은 내가 지배하는 이 배가 개조된 점이라는 걸까? 컬트 배를 분해해서 얻은 무기들을 이 배에 붙여놨기에 지난번처럼 다수의 적과 싸운다고 무력하게 당하지는 않을 거다.

‘안 좋은 점은 내게 시간이 무한하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지.’

여기는 컬트 영역이다. 여기서 싸우다가 컬트들에게 걸리면? 그때부터는 양쪽의 적들한테 두드려 맞을 것이 뻔하다. 컬트들이 보기에 나는 생체함선, 즉 아웃스페이서의 비행괴수와 다를 바가 없으니까.

‘잠깐? 컬트?’

컬트를 떠올린 순간, 나는 멈칫했다.

이곳 JP-99 성계는 컬트의 권역.

변방인데다가 마땅히 좋은 자원도 없어서 계륵 같은 곳이지만, 남이 자국의 영토를 넘나드는 것을 용인할 리 없다. 그들이 성계에 침입한 스타유니언의 정예함대를 발견한다면, 필시 양측이 충돌할 거다.

‘그 사이에 빠져나가면 돼.’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떻게 컬트를 부르냐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내게는 그들을 부를 수단이 있다.

‘이거 재밌어지겠는걸.’

생각을 정리한 나는 이 난관을 어떻게 빠져나갈지 계획을 세웠다. 아슬아슬한 요소도 몇 개 있지만, 강행하기로 했다.

이제부터 컬트와 사이보그를 대상으로 속이는 이 작전은 내가 가장 잘하는 일이기도 했기에.

‘계획은 이쯤으로 정리하고.’

배에 탑승한 애들에게 설명해주기 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 나는 붙잡은 사이보그를 바라봤다.

“뭐, 뭐야?”

내 시선을 마주한 사이보그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는지 벌벌 떤다.

녀석은 내가 만든 무대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될 예정이다. 단순히 에너지를 채우기 위한 먹이가 아니라.

‘오랜만에 너희들 차례야.’

나의 의지에 따라 내 몸에 잠들어 있던 작은 그것들이 깨어난다.

나와 일체화된 함선의 천장에서 작은 구멍이 생기고, 그 안에서 무언가가 촉수 위로 툭 떨어졌다. 얇고 길쭉한 고무줄 같은 그것이 사이보그를 옥죄고 있는촉수 위를 부지런히 기어갔다.

“자, 잠깐! 이건 또 뭔…그, 그만둬!”

그제야 자기가 뭘 당할지 깨달은 사이보그가 발광한다.

열심히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올라가는 기생충을 돕기 위해 사이보그를 단단히 붙잡았다.

“읍읍읍!”

맹렬히 저항하는 사이보그.

아무리 몸을 기계로 개조했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 함선을 통째로 우그러트릴 정도로 힘이 강한 침식 촉수의 속박을 풀기는 무리다.

어차피 그 또한 모든 일이 끝나면 받아들이리라.

괴물의 하수인이 되었다는 현실을.

-

ESS-22 성계에 주둔해 있는 네메아 함대는 긴급 지령을 받았다.

스타유니언의 기계위원회 소속 대위원이자 네메아 함대의 수장 네메아 파이브로부터 내려온 전갈이었다.

“내용을 확인한 즉시 JP-99에 나타난 신규 생물을 말살하기 위해 출동할 것. 매우 위험한 존재이니 접근하지 말고 원거리에서 요격해 소각해야함. 이 명령은 대수…대수령 주바카께서 직접 내리신 거라고?!”

함대 통제권을 네메아 파이브로부터 위임받아 운용하고 있던 함대사령관 대리, 사나다에프는 깜짝 놀랐다.

기계위원회에는 매우 중요한 사항만 공지로 전달하지, 지금처럼 일개 사이보그에 직접 지령을 내리는 경우는 드물다. 스타유니언 전체를 운영하는 기계위원회는 그리 한가한 조직이 아니니까.

게다가 기계위원회의 수장이자 최고 존엄인 대수령까지 관심을 갖는 것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일. 기계로 개조된 이래 사나다에프는 처음으로 정신줄을 놓을 뻔했다.

“에프, 이거 거짓말 아니지?”

「기계위원회와 대수령의 인증 마크 확인됨. 위조일 가능성 0%.」

함선 컴퓨터 에프(F)의 말에 그는 턱을 긁적였다.

“JP-99는 컬트 영토인데. 기계위원회에서는 전쟁을 원하는 건가?”

ESS-22는 스타유니언의 관할 영역 중에서는 JP-99와 거리가 유독 가까운 곳. 스타유니언의 정예함대인 네메아 함대가 여기 있는 것도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설마 아니겠지?’

사나다에프는 기계위원회의 지령을 다시 확인했다. 몇 번을 봐도 컬트를 침공하라는 말은 없었다.

기계위원회는 대수령을 제외하고 전원 로봇으로 구성된 조직이다 보니 돌려 말하거나 비유하는 법이 없다. 아마 그가 우려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은 듯했다.

“현재 그곳에 주둔 병력은 어떻게 되지?”

「멤노스급 전투 순양함 3척, 시안급 초계함 20척.」

“확실히 변방이라 그런지 많지는 않네. 우주요새랑 제국모함도 없고.”

에프가 띄운 자료 화면을 본 그는 결심했다. 컬트들이 몰려오기 전, 빠르게 임무를 완수하고 뜨자고 말이다.

“근데 뭔 생물이기에 기계위원회까지 난리지?”

한 달 전쯤 모든 함선에 내려온 공지가 있다.

신규 생물을 발견하면 즉각 스타링크에 데이터를 등록할 것. 그리고 함선마다 기계위원회에서 제작한 신호칩을 심을 것, 이렇게 두 가지다.

당시에는 왜 이런 명령을 내린 건지 이유를 몰랐다.

“놈이 그렇게 위험한 놈이라고?”

「메시지에 위원회가 첨부한 자료 확인됨.」

“내 머리로 전송해 줘.”

곧이어 생물 데이터가 함선 케이블과 연결된 사나다에프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약간의 두통을 느낀 그는 관자놀이를 짓누르며 정보를 확인했다.

“흠. 함선으로 위장하는 능력을 지닌 거대 괴수라.”

「모델은 자스빌02산 자마급 호위함으로 추정됨.」

“자마급? 그 신형 호위함 말하는 거지? 흐으음.”

처음 든 생각은 컬트의 비밀 병기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그는 곧 자기 생각을 부정했다. 인공 생명체를 만들어서 지배한다는 발상은 메가콥에서나 할 짓이다.

‘아니면 아웃스페이서일지도 모르지.’

그가 알기로 아웃스페이서 군체가 운용하는 거대 생물은 저렇게 생기지 않았다.

그것들은 생화학 물질을 쏘는 생체 포대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흉측한 괴수다. 그걸 보고 컬트 호위함과 닮았다고 하는 자는 필시 눈의 기능이 많이 저하되거나 미적 감각이 이상한 자일 터.

다만 생체금속으로 구성된 우주선이라고 하면 아웃스페이서가 먼저 떠오르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놈들이 새로 진화시킨 우주 강습용 괴물일지도 모른다.

사나다에프는 기계위원회가 제공한 정보를 꼼꼼히 살펴봤다. 생각보다 정보의 양은 많지 않았다. 오히려 기계위원회가 추가한 주석이나 가설 등이 훨씬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감염 우려가 있으니 절대 접근하지 말 것, 승선도 불허, 사이킥 파워 공격을 쓸 수 있으니 대(對) 초능력 방어 수단을 마련해둘 것 등등.

그것만 봐도 기계위원회가 놈을 얼마나 경계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만만치 않은 녀석 같군.’

자료를 모두 확인한 사나다에프는 네메아 함대에 소속된 모든 함선들에게 연락했다. 기계위원회에서 지시한 사항들을 준비하라고 말이다.

그리고 2시간 후, 101척의 네메아 함대 전체가 초광속 항해 준비에 들어갔다.

성계에 있는 행성의 지표에서도 보일 정도로 거대한 푸른빛이 그들을 감싸고, 곧 그들은 ESS-22를 떠났다.

빛의 속도를 가볍게 초월하는 초광속 항해 덕분에 사나다에프가 이끄는 네메아 함대는 순식간에 JP-99에 도달했다.

「초광속 항해 완료. 낙오된 함선 0척 확인.」

“좋아. 컬트들이 알아차리기 전에 끝내자고. 탐사 드론하고 함재기 풀어.”

「확인.」

직사각형 형태의 선체에 가시처럼 생긴 길쭉한 함포로 뒤덮여 있는 스타유니언의 군함들에서 드론과 함재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드론들이 워낙 많아서 터진 모래주머니에서 모래가 흘러내리는 것처럼 보였다.

“주변부터 차근차근 뒤져. 이상한 점 발견하면 바로 보고하고.”

「확인.」

함선 컴퓨터의 통제를 받는 드론, 안드로이드가 조종하는 함재기들이 샅샅이 우주에 떠다니는 쓰레기, 암석 더미 등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몇 대의 함재기들이 인공적으로 합성된 금속 파편을 발견하고, 기함(旗艦)에 탑승한 사나다에프에게 전달했다.

그는 그 파편이 어느 배에서 나왔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그리고 기계위원회에서 보내준 자료의 출처가 어디인지도.

“에프. 초광속 항해 흔적 확인은 끝났어?”

「이 성계에서 도약한 흔적 없음.」

“좋아. 놈이 이 근처에 있으니 모두 주의….”

「긴급 보고! 전방에서 에너지 응집 발생!」

“뭐?”

그가 말을 채 끝내기 전, 함선 카메라가 전방을 비추었다. 아무것도 없는 텅 빈 우주에서 푸른색 에너지들이 모여 들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구조물로 전환되었다.

“…이런.”

이윽고 푸른색 빛이 번뜩일 때마다 크고 작은 컬트의 전함들이 속속히 네메아 함대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 모습을 본 사나다에프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 씹. 망했네.”

일반 컬트 전함들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초능력 방어 수단을 갖춘 네메아 함대라면 충분히 싸울만 하니까.

문제는 전함들 뒤를 든든히 지켜 주는 저 거대한 구조물이다.

「‘고르모스03의 단죄자’의 함장이 메시지를 보냄. 시급히 확인 바람.」

아이보리색에 황금색 장식으로 치장된 다이아몬드 형태의 구조물, 아니 함선.

네메아 함대 앞에 나타난 저 초대형 함선은 컬트가 자랑하는 제국모함이었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