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58
배에 몰래 잠입, 안전한 장소까지 마련하는데 성공했다.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가?
‘초광속 엔진을 망가트려야 해.’
이 배는 스타유니언의 함대에 소속된 군함. 전투가 종료되면 원래 있던 우주기지로 회항해서 수리를 받으러 할 거다. 그렇게 되면 이 자리에 있는 우리는 전부 끝장이고.
‘그러나 초광속 엔진에 문제가 생기면 이동이 불가능해지지.’
초과학적 기술의 결정체인 초광속 엔진은 그 뛰어난 성능에 걸맞게 매우 예민한 기관이다. 망가진 초광속 엔진은 과부하된 원자로만큼이나 위험하다. 초광속 항해에 들어간 함선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운이 없으면 항성 내부에 떨어지기도 하니까.’
게임에서 초광속 항해에 실패해서 항성 속에 떨어지면 무조건 즉사다. 유일급 장비와 특성, 최고 등급의 함선 다 소용없다. 나도 전에 볼텍스원과 싸우다가 항성 내부로 강제 워프되어 죽은 적이 있다.
‘현실이라도 비슷할 거야.’
이동 중 오작동으로 항성으로 떨어지는 것은 극단적인 사례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패전한 것이 아니고서야 무모하게 움직일 리 없을 터.
나는 쓰레기 처리장 내부의 벽에 보조기관을 가져다 댔다. 간헐적인 진동과 함께 함선 측면에서 강렬한 에너지의 흐름이 느껴진다.
전방에 위치한 로켓과 함선의 전면부가 크게 손상되었기 때문에 이 배는 전투에 참여하기 어려운 상태. 아마 함대 후방으로 빠진 뒤 컬트들의 공격이나 피하며 움직일 거다.
‘전투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아마 길지 않을 거다.
‘아까 본 사이보그 기함.’
다른 함선에 비해 세 배 이상 커 보이는 그 배는 나도 아는 모델이다.
‘Z2급 대형 전투순양함. 일부 개조된 것처럼 보이지만 맞을 거야.’
스타유니언의 전투순양함에는 공통적으로 대(對)함선용 어뢰가 탑재된다.
‘그렘린 어뢰.’
스타유니언의 발명품 중에서도 매우 뛰어난 성능을 지닌 이 무기는 이름처럼 금속만 갉아먹어 없애버리는 일종의 나노 머신 어뢰다. 이 중 기함에 실리는 그렘린 어뢰는 특수한 개조가 이루어져 포식시킬 금속 종류를 지정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실버를 공격 대상으로 지정한 그렘린 어뢰는 착탄된 지점 근처에 있는 문실버를 전부 없애버리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이 자리에 문실버를 사용해서 배를 만든 세력은 하나밖에 없다.
‘난전 중에 쏴도 전혀 문제가 없어.’
단점이라면 단가가 매우 비싸다는 것과 EMP에 취약하다는 점뿐이다.
‘근데 컬트는 EMP를 못 쓰지.’
26호 수준의 능숙한 사이킥 파워 사용자, 컬트 예언자라도 있으면 모를까, 일반 실드만으로는 그렘린 어뢰를 방어하기 어렵다.
‘기회를 노려서 제국모함에 쏘겠지.’
그렘린 어뢰를 쏘면 전투가 끝난다. 그 전까지 엔진 문제를 처리해야 한다.
목표가 정해졌다. 이제 움직일 시간이다.
[즈 즈즈 즈즈즈 즈즈(나 나갔다 올게)]
「어디가? 나도 같이 갈래.」
「나」「함께」
「둘 다 기다려. 모프박…크흠, 크, 큰애기는 볼일이 있대.」
「볼일?」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잠깐 둘러보고 오려고. 그동안 놀고 있어)]
「응. 다녀와!」
「나」「인사」
「…….」
스스로 특정 단어를 말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워하는 하늘의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꽤 유쾌한 일이었지만, 시간이 없다. 나는 애들에게 쉬고 있으라고 한 뒤 쓰레기 처리장 밖으로 기어 나왔다.
다른 때 같으면 녀석들과 함께 움직이겠지만 이번만큼은 아니다.
‘몰래 움직여야 하니까 말이야.’
모두가 함께 거하게 날뛰는 것은 안전이 확실시된 이후부터다.
처리장에서 나온 나는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 기면서 움직였다. 복도에 수많은 카메라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나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거꾸로 매달린 바람에 아래로 쏠린 털들, ‘미지생물의 털가죽’ 특성 덕분이다.
‘사이보그였으면 날 보고 깜짝 놀랐겠지?’
탐지 장비나 특성, 기술을 피하는 은신 효과라고 했으니 일반 사이보그는 나를 멀쩡히 볼 수 있을 거다. 안드로이드나 드론은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건 나중에 실험해 보자고.’
당장은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지. 총 8개의 팔과 다리로 천장에 바짝 붙어서 이동하던 나는 안드로이드나 드론의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는 곳을 골라 움직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드론과 안드로이드가 함선 수리에 투입되었는지, 복도에 다니는 로봇이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엔진실과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데 멀리서 큼지막한 무언가의 움직임이 느껴졌다.
‘워커인가?’
그러나 나는 바로 생각을 수정했다. 그것이 가까워질수록 워커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놈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갈림길에서 빠져서 복도 벽으로 몸을 가렸다.
이윽고 거미와 닮은 기계가 복도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머리와 몸통은 인간의 것이지만 팔과 다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여섯 개의 로봇 다리가 달린 로봇이었다.
‘스크리머잖아?’
「쿠우우」「쿠우우」
흉측한 외형의 스크리머가 입에 달린 튜브로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놈의 입과 등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튜브가 꿀렁거리며 화학용액을 주입할 때마다 놈의 몸에서 쉴 새 없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놈은 핏발 선 눈으로 복도를 한 차례 둘러보더니, 곧 금속 뼈대만 남은 여섯 개의 다리를 까닥거리며 어디론가 가버렸다.
‘어째 땀 냄새가 나더니만.’
개조가 덜 된 사이보그 병사들이 긴장해서 땀을 흘린 줄 알았는데, 스크리머일 줄이야.
스크리머는 스페이스 서바이벌 개발진의 취향이 잘 드러나는 존재다. 저 괴상망측한 기계생물의 설정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과거 공산권 국가들이 운용하던 형벌부대 같은 존재다.
스타유니언은 사이보그들 중 질 나쁜 범죄자 혹은 반체제 인사들을 감옥에 보내지 않고 스크리머로 만든다. 누가 기계 아니랄까 봐 사회에 쓸모가 없는 자라도 아깝게 낭비하지 않고 전투병기로 만들어 써먹는 거다.
스크리머가 되면 육체에 대한 모든 통제권을 상실하고 그저 정신만 남은 채 꼭두각시가 된다. 오죽하면 별명이 생체드론일까.
형기(刑期)가 끝나면 일반 사이보그로 복구시켜 준다고 하지만, 대부분 그 전에 전쟁터에서 구르다 죽는다고 한다.
‘정예함대에 스크리머가 있다니. 신기하네.’
기계위원회 시점에서 저들은 전원이 범죄자들이다 보니 이런 좋은 함대에는 잘 편성하지 않는다. 내가 알기로 스타유니언의 정예군 중 스크리머들로만 이루어진 부대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이 배는 그 부대 소속이 아니다.
‘스크리머는 성가신 적이니까 주의해 두자.’
놈은 안드로이드와 비슷하게 두려움을 모르는 존재인데다가 전투용 안드로이드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전투력이 높다.
적을 보면 미친개처럼 물어뜯어서 발목을 잡는다. 지금처럼 잠입해서 적들을 하나하나 사냥해야 할 시점에서는 귀찮은 적일 수밖에.
그 이후, 놈 말고도 두 마리가 더 있는 것을 확인했다. 스크리머들이 주기적으로 돌아다녔기에 나는 엔진실로 향하는 길을 한참이나 돌아서 가야만 했다.
놈들 때문에 생각보다 오래 걸렸지만,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무의미하게 쓴 것은 아니었다.
‘미리 함선 구조를 익혔다고 생각하자.’
통신 시설의 보안 수준이라든가, 추진기의 출력을 확인할 수 있는 보조 단말기의 위치 등 이 함선을 공략할 때 필요한 정보들을 확인해 뒀다.
우회하면서 정보를 함께 모으고 난 뒤에야 마침내 엔진실 위층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왜 엔진실이 아니라 그 위층이냐면 이유는 간단하다.
‘엔진실로 직행하는 것은 위험해.’
군함이다 보니 엔진실의 경호 수준이 예전 해츨링 시절에 돌아다녔던 연구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이 배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인 그곳은 중무장한 안드로이드 10대와 전투 드론 20대가 지키는 중이다. 그들은 허가 받지 않은 침입자를 벌집으로 만들기 위해 24시간 내내 쉬지 않고 엄중 감시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엔진실로 이어지는 복도에도 온갖 종류의 센서가 죄다 깔려 있다.
미지생물의 털가죽이 카메라에 걸리지 않는 것은 맞지만, 필시 만능은 아닐 거다. 진동을 감지하는 동작 센서 같은 것에는 걸리겠지.
그러니 나는 엔진실을 직접 공략하지 않을 생각이다.
‘엔진 가동에 필요한 다른 것들을 망가트리면 돼.’
가령 엔진실의 냉각 시스템이라든가, 원자로부터 에너지를 공급받는 회로라든가 등등.
나는 복도 위에 설치된 카메라들의 방향을 조정한 뒤, 바닥으로 뛰어내렸다. 사뿐히 착지한 다음 바짝 엎드려 턱 아래의 보조기관을 바닥의 금속판에 갖다 댔다.
어두운 회색빛의 내벽에서 강렬한 열기, 얕지만 다른 곳보다는 강한 진동이 감지된다.
‘이쯤인가.’
카메라는 방금 돌려놨으니 이 부근은 찍히지 않는다. 나는 예리한 손톱으로 바닥의 금속판을 파냈다. 혹여 소음 때문에 누가 올지도 몰라 조심스럽게 긁었다.
얼마 안 지나 판에 구멍이 나고 그 안에 전선과 튜브가 얽혀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구멍 위에서 입을 크게 벌렸다.
‘녹은 것은 복구하기 힘들겠지?’
내 목구멍 안쪽과 식도 사이에 위치한 산성진균샘이 활성화되었다. 곧이어 내 입에서 강산성의 진균 덩어리들이 밖으로 쏟아졌다.
-
「제국모함 손상 78%. 행동 불능.」
“휴우.”
함선과 연결된 케이블을 통해 들어오는 영상 정보를 보며 케인즈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보고 있는 영상의 중앙에는 제국모함‘이었던’ 것이 있었다.
컬트들이 자랑하는 절대병기 제국모함 ‘고르모스03의 단죄자’가 그렘린 어뢰에 맞고 침몰 중이다.
“치열했네. 정말로.”
난전이 길어지면서 어느 순간부터 제국모함은 몸을 사리기 시작했다. 이쪽에서 그렘린 어뢰로 끝장낼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리라. 다른 컬트 군함들도 어뢰의 타격범위에 제국모함에 도달하지 않도록 애썼다.
‘생각보다 귀찮았지.’
컬트 군함들이 스스로 희생하면서까지 막아서는 바람에 기함 또한 그렘린 어뢰를 쏘는데 애를 먹었다.
「컬트 군함 후퇴 중.」
“쯧, 진작 도망치지. 병신 새끼들.”
컬트들이 생각보다 귀찮게 굴자 네메아 함대 함대사령관 대리 사나다에프는 지극히 스타유니언스러운 전략을 택했다.
아군 배에 어뢰를 착탄시켜서 나노 머신을 바른 뒤, 제국모함을 향해 돌격을 시킨 것이었다.
그로 인해 10척 가량의 배가 희생되었지만, 덕분에 제국모함은 그렘린 어뢰의 나노 머신에 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가 지금 케인즈큐가 보고 있는 영상이고.
「추적 불필요. 함대 전원은 ESS-22 성계로 귀환할 것.」
그렇게 짧은 전투가 끝났다. 이 전투의 결과가 이후 얼마나 큰 파장을 일으킬지 케인즈큐는 모른다.
‘어차피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고.’
모든 결정은 기계위원회의 높으신 분들이 한다. 함대사령관 대리인 사나다에프나 이 전투 때문에 좀 귀찮아질까.
“수리 드론에게 귀환 명령 내리고, 초광속 엔진 준비해.”
「확인.」
98번 함선의 컴퓨터가 케인즈큐의 명령을 전달했다. 그 사이 그는 함선 내에 실린 ‘특별한 기계’들의 정보를 확인했다.
‘쳇, 신형 스크리머 실험을 왜 내 배에서 하냐고.’
본래 스타유니언의 스크리머는 전부 기계위원회 소속의 안드로이드 피라 일레븐이 관리한다.
원래라면 그쪽에서 스크리머 실험을 도맡아서 해야겠지만, 이번 경우에는 상황이 달랐다. 스크리머가 함선에서 일반 병사들과 잘 어울릴 수 있는지 실험해보자는 말이 위에서 나온 것이었다.
현재 소수만 완성된 프로토타입을 일반 함선에 배치해도 문제가 없는지 실험 중인데, 케인즈큐의 함선이 스크리머를 태운 배 중 하나였다.
‘범죄자 새끼들을 뭐하러 배에다가 태우는지 원.’
아무리 완전히 통제된다고 해도 범죄자들이 배 안을 돌아다니는 것을 좋아할 함장은 없다. 게다가 그 범죄자들이 얼마나 잘 적응하는지 수시로 관찰해서 보고서를 올려야 한다면 더더욱 싫을 수밖에.
그렇지만 케인즈큐는 불만을 말할 수 없었다.
피라 일레븐의 직급은 최고위원. 그가 소속된 네메아 함대의 총사령관이자 기계위원회의 최고위원 네메아 파이브와 같은 직급이다. 함대사령관 대리 사나다에프보다도 까마득하게 높은 위치의 안드로이드에게 그가 뭐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에휴, 까라면 까야지. 98번, 아직 멀었어? 왜 출발 안 해?”
「초광속 엔진에 문제가 발생.」
“뭐? 무슨 문제인데?”
「냉각 기능 미가동 중. 원자로로부터 에너지 공급률 40%로 저하. 이 상태로 초광속 도약시 오류 발생 가능성 63%.」
“뭐라고? 아니 씹, 그게 무슨 개소리야?”
멀쩡하던 초광속 엔진이 왜 갑자기 난리란 말인가. 케인즈큐는 어이가 없었다.
그때 기함으로부터 통신이 날아왔다.
「98번 함선, 무슨 일이지? 왜 귀환하지 않는가?」
“어, 초광속 엔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이대로 도약했다간 오류 발생 가능성이 63%라서 위험합니다.”
「JP-99 성계는 언제 적들이 돌아올지 모른다. 근처의 성계로 이동해서 시급히 수리해서 오류 발생 가능성이 10%로 떨어지면 귀환하도록.」
“알겠습니다!”
통신을 종료한 케인즈큐는 다시 98번을 불렀다.
“이곳으로부터 제일 가까운 성계가 어디지?”
「AD-100 성계입니다. 현재 추진기 상태로는 3일 안에 도착합니다.」
“좋아. 일단 그곳에 가서 수리부터….”
케인즈큐가 명령을 내리려는데 갑자기 그 앞에 떠 있던 영상이 그대로 끊겼다. 그뿐 아니라 그가 앉아 있는 상황실의 불이 일제히 꺼졌다.
“뭐야? 98번? 이게 어떻게 된 거야?”
그의 외침에도 침묵하는 함선.
잠시 후 함선 상황실에 전원이 돌아왔다. 98번이 다시금 그와 연결된 케이블을 통해 메시지를 보냈다.
「칙, 원인 불명의, 치직, EMP 발생. 현재 복구 중.」
“뭐? 갑자기 EMP라니? 원인이 뭐지?”
「알 수 없음. 탐색 중」
“스타링크랑 연결해서 원인 조사해 봐.”
「불가능. 현재 통신 기능 비활성화.」
“이런 젠장! 이게 어떻게 된 거야!”
통신 기능이 비활성화.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였다.
조난.
그들이 있는 곳은 조금 전까지 전투를 치르던 적의 영토. 그런 위험한 곳에서 초광속 엔진까지 망가진 상태로 낙오된 것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EMP 발생지 확인. 함선 내부로 추정.」
“…내부라고?”
98번의 보고를 들은 케인즈큐는 목덜미가 얼어붙는 기분을 느꼈다.
낙오된 것만 해도 문제인데,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들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