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62
“하, 함장님? 끄아아악!”
“씹, 모두 후퇴해!”
“히, 히이이익!”
함장의 말을 듣고 상황실에 모인 사이보그들은 나를 마주하자마자 비명을 지르며 기겁했다. 몇몇 사이보그와 달리 그들은 눈까지 개조하지 않아서 내 존재를 금방 알아봤다.
‘때로는 모르는 것이 더 나을 때도 있는데 말이야.’
나를 본 사이보그들이 취한 행동은 제법 다양했다.
“사,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살려주…끄엑!”
바로 전의를 상실한 부류. 그들은 무릎을 꿇고 손이 닳도록 빌다가 내게 목이 뽑혔다.
“씨발! 이 스타유니언의 반역자 같으니! 내가 직접 처단…으아아아악!”
배신한 함장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부류. 그들은 함장에게 달려가다가 내 등에 있는 뼈 칼날 팔에 베여 상하체가 분리되었다.
그리고 마지막.
“모두 엄폐물 뒤로 숨어!”
“놈을 제압해야 해!”
전의를 잃지 않고 내게 덤벼드는 사이보그도 소수지만 존재했다. 그들은 상황실에 있는 컴퓨터나 기계 장치 뒤에 숨어서 나를 공격했다.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하는 펄스건의 총탄이 내 몸 위로 쏟아진다.
그럴 때마다 털 안쪽에 있는 외피, 아니 ‘비늘’이 물결처럼 흔들리며 탄환의 충격을 흡수했다.
「합성 비늘: 외피를 합성 비늘로 교체합니다. 합성 비늘을 활용해 특정 부위를 경질화할 수 있습니다.」
현재 내 몸을 감싸던 외피 전부가 아주 작은 비늘로 대체된 상태다. 스크리머를 잡아먹고 얻은 새 특성, ‘합성 비늘’ 덕분이다.
이 특성의 진가는 신체의 약점을 경질화할 수 있다는 것. 물리적인 충격이 닥쳤을 때 해당 부위의 비늘의 배열을 바꿔서 일시적으로 방어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다.
‘이 특성이 있으면 괴물의 촉수나 보조기관을 보호할 수 있지.’
사냥의 표상 상태인 지금은 보조기관이 갑각으로 덮여서 단단해졌지만, 일반 상태에서는 그렇지 않으니까.
나는 탄환의 비를 몸으로 때우면서 사이보그들에게 다가 갔다.
“씨, 씨발! 공격이 전혀 안 먹히…크악!”
“모두 후퇴! 후퇴에에에!”
내가 가까워지는데도 용맹하게 총알을 퍼붓던 사이보그는 내 턱 아래에 있는 4개의 뼈 칼날에 의해 도륙되었다.
총알이 소용없다는 것을 안 사이보그들이 동료가 당하는 사이를 틈타 도망치려 했다. 도망치기 위해 등을 보인 적들을 향해 꼬리가 날아들었다.
“아악!”
상대적으로 가까운 위치에 있던 사이보그가 내 꼬리에 맞고 날아가 벽에 처박힌다. 그나마 그는 고통 없이 죽었으니 다행이라 해도 좋을 거다.
“이, 이거 놔아아아아아악!”
꼬리 끝에 있는 집게발에 잡힌 사이보그가 버둥거렸지만 곧 집게발이 조여 들자 비명을 질렀다.
단단한 스크리머의 금속 골격도 으스러트린 집게발이다. 사이보그가 버틸 수 있을 리 없다.
입으로 내장 조각 섞인 체액을 토해낸 사이보그는 금세 시체가 되어 늘어졌다. 그 시체를 아무렇게나 던진 나는 도망치던 사이보그들을 뒤쫓아 갔다.
“자, 잠깐잠깐잠깐잠깐, 아아아악!”
“히, 히이익, 그, 그만…쿨럭! 켁켁!”
사냥의 표상이 끝나기 전, 선체 내부에 있는 사이보그들 대부분은 정리되었다. 몇 명을 제외하고.
‘기생충을 심어야 하니까.’
타입 효과로 강화된 ‘기생 군체’의 최대 제한은 10명. 하늘의 어머니에게 한 마리가 들어가 있으니, 생존자는 총 9명만 남겼다.
“끄, 끄으, 새, 새 주인님을 따르겠습니다.”
피바다가 된 상황실 위에서 기생충에 지배당한 사이보그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들을 살려 둔 이유는 두 가지다.
현재 이 배에는 안드로이드와 드론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들을 전부 무효화시키기 위해서다. 나와 애들이 돌아다니면서 파괴해도 되지만, 유전자 정수를 얻을 수도 없는 것들에 굳이 힘을 쏟을 이유는 없다.
‘그리고 스타유니언이 추격해 올 때 보험으로 써도 되지.’
추격대를 속이려면 함장을 비롯한 함선 수뇌부들이 남아 있어야 한다. 저쪽에서 이쪽 함장이나 고급 선원들의 생체신호를 검사하려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걸로 배 장악을 위한 준비는 끝났어.’
이전에 비해 많이 강해져서 그런지 군함을 장악하는 일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스크리머라는 예상외의 강적을 만난 것을 제외하고 큰 변수 없이 무난하게 끝났다.
‘따지고 보면 스크리머도 당장 이득을 준 부분이 더 커.’
스타유니언 플레이어에 대한 단서를 얻은 것은 둘째치고, 새 유전자 정수를 확보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게임에서 스크리머는 시스템상 생물이 아닌 기계로 분류되므로 유전자 정수도 얻지 못한다.
그러나 이 배에 있는 개량형 스크리머는 그렇지 않았다. 헐크 뮤턴트를 재료로 삼은 스크리머다 보니 몇 종류의 유전자 정수를 얻을 수 있었다.
‘여기서 콜드블러드의 특성을 얻은 것은 행운이야.’
콜드블러드는 파충류 인간 베이스에 풍뎅이류 곤충의 특징이 적당히 섞인 종족이다. 생긴 것을 봐서는 NPC 종족 같지만 플레이가 가능한 종족 중 하나다.
무서운 외모와 달리 지능도 높고, 비극적인 배경 설정을 가진 종족이어서 나름 컬트적인 인기를 끌던 종족이다.
설정상 콜드블러드는 과거에 컬트와 함께 우주의 패권을 두고 경쟁했지만, 현재 시점에는 완전히 몰락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볼텍스원과 계약한 대가로 힘을 얻었지만, 대신 종족의 운명 전체가 저당 잡히고 말았다.
‘지금은 볼텍스원을 숭배하는 사교도나 다른 종족에게 팔리는 노예로 전락했고.’
콜드블러드를 택한 플레이어는 고통에 신음하는 동족들을 해방시키고 구원하는 것이 목표가 된다.
‘전에 커뮤니티에서 누가 그랬는데. 공룡 버전 출애굽기라고.’
아무튼 이런 설정 탓에 콜드블러드는 우주 각지에 조금씩 퍼져 있다. 운이 없으면 우주에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후반에나 볼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녀석들의 특성을 얻는 것은 한참 나중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인력공급선에도 콜드블러드가 많더니 왜 그런지 모르겠네.’
내가 얻은 내부기관 관련 특성들은 전부 콜드블러드로부터 얻은 것들이다.
스크리머 개발에 콜드블러드의 유전자가 중요하게 작용하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먹은 인력공급선이 유독 콜드블러드가 많이 타 있었던 것인지 지금은 알 수 없다.
‘원인이 뭐가 됐든 결과적으로는 내게 이득이 됐어.’
약점을 지킬 수 있는 합성 비늘, 결정적인 순간에 비장의 수로 써먹기 좋은 ‘레버넌트 기관’은 예상하지 못한 선물이었다.
‘물론 살짝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스크리머를 먹으며 몇 개의 특성을 추가로 포식하긴 했지만, 나머지는 전부 내가 지니고 있던 특성들이었다.
보통 헐크 뮤턴트들은 제각각 다른 유전자로 합성한 경우가 많은데, 이 스크리머들은 그렇지 않았다. 복제품마냥 전부 동일한 유전자로 구성된 상태였다.
‘스크리머 재료로 쓸 것이라 일부러 규격화한 것일지도.’
유전자가 동일해서 그런지 외형과 맛도 똑같았다.
‘…떠올리니까 왠지 역한 느낌이 드네.’
스크리머 재료로 쓰인 헐크 뮤턴트의 맛은 실로 끔찍했다. 나도 모르게 턱을 벌린 뒤 손톱으로 입 속을 긁고 싶은 충동이 들 정도로.
지금까지 내 경험을 토대로 보면 유전자가 다수 조합된 생물일수록 맛이 괜찮았다. 시현 유진이 그랬고, 에저튼 가문의 기사단이 그랬다.
그런데 이번에 그 공식이 깨졌다.
‘역한 맛이었지.’
예전에 입에 치약을 한 움큼 짠 다음 오렌지 주스를 마신 적이 있는데 그때 느낀 맛과 비슷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 위에 추가로 소금을 친 것 같은 그런 맛.
아드하이가 왜 촉수를 앞발로 벅벅 긁었는지 이해가 갔다. 절대 자주 먹고 싶은 맛이 아니었다.
‘그래도 열량 자체는 높았으니 다행인가.’
맛은 별로였지만 함유된 에너지는 헐크 뮤턴트답게 무식하게 높았다. 지금도 배가 꽉 찬 느낌이 들 정도였으니까.
‘이 정도 포만감이면 사냥의 표상이 끝나도…아, 이제 끝날 때구나.’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내 몸에서 연기가 나면서 신체 구조가 변하기 시작했다. 사냥의 표상 효과가 끝난 것이다.
꼬리를 포함해 길이 8m 정도로 자라났던 내 몸이 다시 5m로 돌아왔다. 길어졌던 털들은 몸 크기에 맞춰 줄어들었고, 등에 돋은 뼈 칼날 팔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이윽고 뼈 칼날 팔은 피부에서 떨어져 나온 각질처럼 되더니 부스러졌다. 턱 아래 보조기관을 감싸던 뼈 갑각에서도 동일한 변화가 일어났다.
모든 변화가 끝난 나는 서둘러 상황실에 있는 사이보그 시체들을 입 속에 집어넣었다. 표상이 종료된 후 늘 찾아오는 굶주림을 해소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배가 별로 안 고프네?’
평소보다 허기가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맞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 허기면 사이보그 시체 몇 구만 먹어도 금방 달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도 영리한 약자 효과 덕분인가?’
예상대로 사이보그 시체 3구를 먹어 치우자 표상의 부작용이 바로 해소되었다. 어쩌면 생존에 특화된 특수상태답게 에너지 소모율도 극단적으로 낮춰주는 것일지 모르겠다.
‘전투력이 감소해서 안 좋다고 생각했는데….’
뒤를 보지 않고 사냥의 표상을 쓸 수 있다는 것은 메리트였다. 그뿐 아니라 체내에 저장된 에너지를 대량으로 소모하는 특성과도 궁합이 잘 맞을 것 같았다.
‘가령 신의 회초리라든가.’
컬트의 궤도병기 ‘뇌신’을 포식해서 얻은 ‘신의 회초리’는 내가 지닌 원거리 공격 수단 중 가장 강력하다.
원본과는 달리 14일에 한 번이라는 제한은 없지만, 대신 위력이 3분의 2 이하로 감소, 그리고 엄청난 에너지 소모라는 단점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영리한 약자 상태가 된다면? 신의 회초리를 다른 때보다 자유롭게 쓸 수 있을 터.
난사하는 것까지는 불가능해도, 원거리 공격 수단이 부족한 나에게는 가뭄의 단비라고 해도 좋으리라.
일반 상태에서는 아직 그런 식으로 운영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아쉬워할 거 없어. 나중에 얻으면 되니까.’
사냥의 표상 부작용을 해소한 나는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하늘의 어머니가 애들을 데리고 상황실에 들어왔다.
「거하게 날뛰셨군. 부작용은 어때?」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생각하지 못한 호재야)]
그녀는 내가 혹여 폭주할 것을 대비해 애들과 함께 배 한 구석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영리한 약자의 효과에 대해 짧게 설명했다. 그녀는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좋은 특성인데. 응용할 만한 범위가 보통 넓은 게 아니야.」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잠입할 때의 약점이 많이 보완됐어)]
「플레이어들한테 뒤통수치기 좋겠네. 그쪽에서는 이걸 모를 테니까.」
그녀 말대로다. 게임에서 에이모프의 크기를 인위적으로 바꾸는 특성은 내가 아는 바로 없다. 내가 모르면 다른 사람들도 모를 가능성이 높다.
적들은 함대를 운용하고 궤도병기를 부릴 정도로 강대한 세력을 구축한 상태. 아직 내 힘으로 그들을 제압하기는 부족하니 잠입과 기만전술로 대응해야 한다.
그렇게 그녀와 내 특성에 대해 얘기하는 중인데, 26호와 아드하이가 다가왔다.
「큰애기야. 밥 더 안 먹어도 돼?」
[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난 배부르니까 둘이서 먹어)]
내 파장을 이해한 26호가 시체에 촉수를 뻗었다. 아드하이도 26호를 따라 식사를 하려다가 문득 나를 보더니 가까이 다가왔다.
[즈 즈즈(왜 그래?)]
「큰어른」「이전」「다름」
[즈즈즈 즈즈즈즈즈(이전과 달라졌다고?)]
「이전」「못생김」「지금」「매력」「이해 불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사념파를 쏘는 아드하이. 녀석의 시선은 내 털 안쪽에 있는 비늘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좋음」
‘비늘 때문에 그런가 보네.’
평소에 아드하이가 나를 보고 멋지다고 말해주긴 하지만, 내 외모 자체는 갤러곤과는 거리가 있는 편이다. 활공피막은 날개라고 하기 어렵고, 몸에 있는 갑각이나 외피도 갤러곤의 비늘과는 거리가 있으니까.
거기서 외피가 비늘로 바뀐 것이 아드하이의 취향에 맞아떨어진 것 같다.
녀석은 나를 잠깐 보다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까닥이고 곧 26호 옆으로 갔다.
그 모습을 본 하늘의 어머니가 한마디했다.
「아주 깨가 쏟아지는군.」
초승달 모양으로 휜 그녀의 눈을 마주하니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졌다.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쓸데없는 소리 그만두고. 너는 안 먹어도 돼?)]
「알다시피 사이보그들을 먹어봐야 내게는 도움이 안 돼. 그러니 애들이 먹는 게 낫지.」
그녀 또한 나와 비슷하게 강력한 적의 육신을 섭취해야 성장이 가능한 상태다. 아마 용의 둥지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녀의 성장도 정체될 거다.
‘어차피 성가신 것들도 전부 정리했고.’
영리한 약자 특성에 대한 검토도 얼추 끝냈으니 슬슬 다음 단계로 나아갈 시간이다.
나는 식사 중인 애들에게 고개를 한 번씩 끄덕여주고 상황실을 나왔다.
마침내 이 98번 함선을 집어삼킬 시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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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저의가 뭡니까?”
“무슨 말이지?”
“저 컬트 말입니다! 대의를 이루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인데 저딴 자의 말을 듣고 보물찾기나 하고 있다니요!”
시현 유진의 집사 민석 유진은 태연한 얼굴로 앉아 있는 주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키라 유진 암살이 실패한 이후, 시현 유진의 행보를 보면 그가 이해할 수 없는 것 투성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지구에 남아 있는 유진 가문의 장로를 포섭하고 반(反) 아키라 세력을 구축해야 하는데, 지금처럼 태평하게 우주 공간을 떠돌고나 있으니 말이다.
본래 아키라 유진은 외부 활동을 그리 많이 하는 편이 아니었다. CEO가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을 제외하고는 거의 지구에서만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를 파괴하는 계획에 사활을 건 이유도 그가 드물게 외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침 내전이 터진 덕에 암살 계획을 세우기 수월해졌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안 된다고 하십니까!”
“지금 우리의 힘으로는 아키라를 제거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텐데.”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시현 유진. 그녀는 민석이 항의할 때마다 늘 똑같이 말했다.
아키라를 죽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녀는 아키라를 암살하기 위해 직접 유진 가문의 기함에 잠입했었다. 거기까지는 민석도 믿을 수 있었다. 그 증거로 코드 블루의 단검을 그녀가 챙겨 왔으니까.
하지만 그 뒤의 얘기가 문제였다.
“아직도 아키라가 그림자를 제압했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건 불가능합니다!”
민석은 시현의 최측근이기에 그림자가 어느 정도 힘을 지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만전 상태에 있는 시현이 얼마나 강력한지도.
그렇기에 그녀가 아키라에게 제압당하고 간신히 도망쳐왔다는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모르는 이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민석이 여전히 불신하자 시현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는 네 주인이다. 그 사실을 잊은 것은 아니겠지?”
“…….”
민석은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시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모습에 민석이 움찔했지만, 시선을 피하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묻겠다. 신중히 대답해라.”
“…….”
그의 손이 아주 짧은 순간, 바지 주머니로 향하려다가 멈췄다. 시현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민석 유진. 너는 누구를 섬기지?”
“…유진 가문의 정당한 후계자, 시현 유진입니다.”
정당한 후계자, 시현 유진에 충성한다.
얼핏 보면 그녀에게 복종한다는 표시 같았지만 시현은 그가 일부러 중의적인 표현을 골랐음을 눈치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는 시현 유진이면서 동시에 시현 유진이 아니었기에.
즉, 민석은 자기가 충성하는 대상은 ‘원본’ 시현 유진이지, 앞에 있는 ‘복제물’ 따위가 아님을 말한 것이었다.
시현은 그 점을 읽어냈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지적할 수 없었다.
“돌아가라.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예.”
민석도 오늘은 날이 아니라고 여겼는지 더 이상 항의하지 않았다. 그는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집무실을 나가려고 했다.
문고리를 잡고 나가려던 그는 작게 혼잣말했다.
“…게다가 경쟁자를 곁에 두다니. 무슨 생각인지. 쯧.”
민석이 집무실을 떠나고 홀로 남은 시현은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녀는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추한 꼴을 보였군.”
그러자 집무실의 구석에 서 있던 금속 슈트가 움직였다. 강화복과 워커의 특징이 뒤섞인 기괴한 디자인의 슈트는 크기만 2.5m에 달했고, 색깔은 우주선 밖의 우주처럼 검은색이었다.
게다가 그 금속 슈트는 에저튼의 은사자기사단이 입는 강화복처럼 전신을 꽁꽁 싸매는 형태였다. 마치 사람이 아니라 스타유니언의 안드로이드와 닮은 그것이 기계음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요. 생각보다 유익한 광경이었어요. 제가 모르는 정보를 많이 얻었으니까요.」
“악취미군. 라일라 쳄벌린.”
검은색 금속 슈트를 입은 자의 정체는 과거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의 총괄관리자였던 라일라 쳄벌린이었다.
“정보를 습득할 여유도 있는 걸 보니 슈트 내부가 제법 편한가 보군.”
「그럼요. 잠도, 식사도, 아무것도 안 해도 되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태연스러운 어조에 대비되는 무기질적인 음성. 현재 그녀는 성대가 완전히 망가져서 기계의 도움 없이는 말 자체가 불가능했다.
유전자 조작으로도 회복시킬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바이러스에 감염된 그녀는 저 생명 관리 슈트가 없다면 몇 초도 생존할 수 없다.
그리고 그녀에게 슈트를 제공한 시현은 사실상 라일라의 생명줄을 쥐고 있었다.
“내가 실언을 했군.”
그런데도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시현. 그 모습을 본 라일라가 흥미롭다는 듯 말을 이었다.
「당신, 생각보다 흥미롭군요.」
“무슨 뜻이지?”
「제가 알기로 그림자 시술을 받은 자들은 하나 같이 정신이상자가 되거든요. 피에 굶주린 학살자, 전쟁광, 극도의 강박증 환자 등등. 물론 당신도 예외는 아니예요.」
“칭찬 고맙군.”
「제가 본 당신은 뭐랄까. 아키라 유진보다도 노블캐피탈스럽지 않아요. 좀 전의 집사한테 보인 태도도 그렇고, 저한테 취하는 태도도 그렇고.」
“필요하기에 그랬을 뿐이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수단을 가리지 않고 취한다. 그게 노블캐피탈의 행동 원리 아닌가?”
「흐음, 과연 어떨지.」
라일라는 믿지 않는 것 같지만, 시현은 진심이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남들에게 말할 수 없는 어떤 목표가 빠르게 자라나고 있었다.
시현 유진의 것도, 민석의 것도 아닌 ‘그녀’ 고유의 목표가.
하지만 이 자리에서 그 얘기를 할 필요는 없다. 시현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나를 찾아온 이유가 있을 텐데.”
「아. 깜빡했네요.」
라일라는 슈트에 부착된 백팩을 열어 하얀색 기계 장치를 하나 꺼냈다. 그것은 반쯤 파손되어 제 기능을 상실한 드론이었다.
「밖에서 정찰하던 중에 발견했어요. 암석 구름에 섞여서 망가지기 직전이던 것을 꺼내 왔죠.」
“이건 스타유니언산 드론인데. 왜 이곳에 있지?”
드론 표면에 작게 새겨져 있는 98번이라는 숫자를 본 시현은 왠지 모르게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저 드론 안에 매우 중요한 정보가 담겨 있을 것 같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이것 말고 다른 드론은?”
「암석 구름을 만나 전부 파괴된 것 같아요.」
“데이터 정보가 손상됐는지 확인해 봐야겠어.”
「그래도 괜찮나요?」
“중요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으니.”
그녀는 집무실 책상에서 케이블을 뽑아 드론에 연결했다.
곧이어 책상 위로 깨진 홀로그램들이 마구 떠올랐다.
“!”
「이, 이건?」
그리고 그 내용을 확인한 둘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