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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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오늘은 안 바빠?”
“오늘은 우리 귀염둥이랑 특별한 곳에 가려고 이 아빠가 준비를 했어요.”
“특별한 곳?”
“응. 바로 엄마 촬영장에 갈 거야.”
“우와! 진짜? 아, 근데 엄마가 오지 말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엄마를 위한 깜짝 파티 해주자. 어때?”
“히히, 재밌겠다! 나 갈래!”
“누가 좀 도와줘요! 우리 애가 차 아래에 깔렸어!”
“엔진에 불이 붙어서 위험합니다! 물러나세요!”
“■■야! 안 돼!”
“당신이 그날 데려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어!”
“지금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비싼 치료비를 누가 대는지 알아?”
“허, 치료비? 당신은 애한테 관심도 없잖아.”
“으아아앙! 선생님! 나 자리 바꿔줘요! 얘 몸에서 냄새나요!”
“야, 어디서 이상한 냄새나지 않냐?”
“왝. 저기 박피괴물 지나간다.”
“■■야, 몸이 안 좋다고 그렇게 학교를 안 나오면 되겠니? 친구들의 이해심만 바랄게 아니라 너 스스로부터 바꾸는 게 필요하지 않을까?”
“씹, 나 방금 괴물 봤다?”
“나도. 와, 오늘이 무슨 할로윈인 줄 알았네.”
“불쌍해. 내가 저렇게 되면 차라리 혀 깨물고 죽을 듯.”
불쌍해.
역겨워.
왜 살지?
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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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르?」
눈을 뜨자 살짝 서늘하면서도 습한 공기가 나를 반겼다. 잠들어 있던 감각이 활성화되니 바닥에 흐르는 미지근한 액체가 느껴졌다.
‘꿈.’
이 세상에 떨어진 이후, 꿈을 꾼 적은 드물었다. 기껏해야 진화할 때나 초월 시스템을 활용할 봤던 환상 정도나 있을까.
‘얼마 전에 봤던 기억 때문인가?’
초월 2단계로 넘어갈 때 봤던 어렸을 때의 기억.
화상 때문에 중환자실에 있었던 날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의 일이었다.
‘휴.’
최근에는 잊고 있었는데 현실 세계의 일을 떠올리니까 기분이 심란해진다.
성체 다음 단계인 승천.
확실하지는 않지만, 승천에 도달한다면 이 세계를 떠날 수단이 주어질 가능성이 높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이 아니다. 하늘의 어머니가 말하길, 나보다 먼저 왔던 플레이어들도 비슷한 목표를 노렸으니까.
‘전부 실패했지만.’
실패의 여파로 1위는 사망했고, 나머지 플레이어들은 각자 새로운 목표를 찾아 쪼개졌다. 그렇게 시작된 갈등의 씨앗이 지금에 이르렀고.
‘엔딩이라.’
1위도 클리어하지 못한 난이도면 도대체 얼마나 어려울지 짐작되지 않는다.
원래 게임에서도 승천은 살인적인 난이도로 악명이 높았다. 다른 진화 단계와 달리 승천은 조건을 모두 채운다고 끝이 아니었다.
최종 전투. 세계의 비밀을 간직한 존재가 내리는 마지막 시험이 있고, 그 시험을 통과해야 승천할 수 있다. 에이모프 중에서도 승천 조건을 채운 플레이어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중 성공한 자는 내가 유일하다.
‘게임과 동일한 난이도라면 다른 플레이어들이 먼저 클리어했을 거야.’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내가 모르는 변동 사항이 있다는 것.
그렇다고 중도에 포기할 생각은 없다. 모두가 불가능할 것이라 말한 에이모프 랭커가 된 나다. 나보다 높은 랭커들이 실패했다면, 그들보다 더 준비해서 가면 될 뿐이다.
‘다만….’
나는 몸을 살짝 일으켰다.
그러자 내 근처에 있는 애들이 몸을 뒤척였다. 26호, 아드하이, 하늘의 어머니, 셋은 얕은 늪지대로 변한 지하 공간에서 함께 잠을 자고 있었다.
‘내가 떠난다면 이곳은 어떻게 되지?’
이 세상에 떨어진 원인이나 과정은 차치하고.
내가 사라진다고 이 세계가 사라지거나 붕괴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가상의 게임 세계에 떨어졌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멀리 왔다. 이곳은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우주와 비슷한 형태를 가진 새로운 무언가라고 보는 것이 합당하겠지.
내가 겪은 경험들은 모두 실체를 지니고 있다. 그 사실이 나를 심란하게 만든다.
‘녀석들과 헤어지면 정말 아쉽겠지.’
이 세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감정도 깊어져 간다. 나보다 10여 년 가량 일찍 도착한 하늘의 어머니는 결혼까지 했다.
내가 녀석들에게 품는 마음이 사랑 같은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깊은 애정임은 분명했다. 어린 시절 이후에 가져 본 적 없는 특별한 감정.
‘…게다가 걱정되는 부분도 있고.’
과연 26호와 아드하이가 나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을까?
솔직히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과 그렇지 않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혼재한다.
전자의 경우야 그들이 주어진 수명을 끝까지 누리고 살아가기를 바라는, 일종의 순수한 바람이다.
반면 후자는….
‘뒤틀린 욕망이지.’
내가 없는 것을 알고 슬퍼하고, 기억하고 외로워하면 좋겠다는 그런 지저분한 마음.
‘쩝.’
아직 승천까지 갈 길이 먼데 벌써부터 쓸데없는 생각이라니.
빌어먹을 꿈 때문에 잠도 다 깼고, 기분도 심란하니 일이라도 해야겠다.
‘둥지 온도가 아직 좀 추운 것 같지?’
흙과 얼음 밖에 없던 지하 공간은 나의 손길에 의해 전혀 다른 환경으로 탈바꿈했다. 둥지 관련 특성 중 두 가지, ‘늪 조성’과 ‘환경의 지배자’ 특성 덕분이었다.
모두 초월 2단계로 올라가기 전, 늪지대를 순회하면서 얻었던 특성들이다.
‘둘 다 게임에서는 쓸모없는 특성이었는데 이런 식으로 쓰네.’
늪 조성은 이름 그대로 둥지에 늪을 만드는 특성이다. 단독으로 써먹기는 어렵고, 독이나 병균을 살포하는 특성과 조합해야만 그나마 써볼 만한 특성이다.
이전 티앤씨 특수무역중심지의 하수도에서 우주 박테리아를 퍼뜨렸을 때처럼 사용할 수 있다. 물론 게임에서는 강력한 치유 기술이나 장비들이 많으니 그 정도까지의 파급력을 보여주기 힘들지만 말이다.
‘그나마 늪 조성은 디버프를 끼얹는 용도로라도 썼지만.’
환경의 지배자는 거창한 이름과 달리 게임에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특성이었다.
‘둥지랑 효과가 겹쳐.’
이 특성의 효과는 둥지 위의 환경을 내가 원하는 대로 바꾸는 것. 둥지를 통해 주위 환경을 조작할 수 있는 에이모프에게는 하등 쓸모가 없다.
에이모프의 둥지는 에이모프의 생존에 유용한 환경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다. 치유력을 올려주거나 떨어진 에너지를 보급해주는 등의 이로운 효과가 있다.
반면 환경의 지배자는 온도라든가 주변 풍경을 바꾸는 것 말고는 딱히 이득을 주지 않는다.
‘그런 특성이 이런 것에 쓰일 줄이야.’
혹시나 초능력 기관처럼 초월 재료로 쓰일 수도 있어서 챙겨놨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유용하게 쓰이게 됐다.
환경의 지배자 특성 덕분에 지하 공간의 온도는 서늘하다고 느낄 정도로 낮아졌다. 그렇게 되면 천장과 벽이 녹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지만, 이 부분은 둥지의 재료인 점액 덕분에 해결되었다.
반경 100m 안에 깔린 둥지가 열을 차단해서 얼음이 녹는 것을 방지하고, 내부는 서늘한 수준의 온도를 유지했다.
그리고 그 위에 깔린 늪. 만약 빛이 이곳까지 들어온다면 늪 위에 피어오르는 김을 볼 수 있을 거다.
‘열 방출과 늪 조성이라. 이걸 같이 쓴 사람도 내가 처음이겠지.’
둥지 위에 생긴 늪지대 위에 누워서 열을 천천히 발산하니 말 그대로 진흙물 온천이 됐다. 덕분에 추위를 타는 아드하이와 하늘의 어머니도 편히 잠을 청할 수 있었다.
‘생각해 보면 초능력 기관도 그렇고 내가 안 쓰던 특성들이 하나하나 재발굴되네.’
에이모프 플레이어 중에서 나만큼 다채롭게 플레이한 유저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반성해야겠다.
나는 아직 배울 것이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발산하던 온도를 조절했다. 몸에서 발생하는 열이 강해지자 늪의 온도가 따라서 올라갔다.
「큰애기야? 뭐 해?」
[즈즈 즈즈 즈즈즈즈(미안. 내가 깨웠구나)]
물결의 흐름을 통해 내 움직임을 느낀 것인지 26호가 파장을 보냈다. 나는 열 방출을 중단하고 손을 뻗어 녀석을 쓰다듬었다.
[즈즈즈즈 즈즈 즈(신경 쓰지 말고 자)]
「큰애기 안 졸려? 그럼 내가 재워줄게!」
내가 사양하기도 전에 녀석이 커다란 덩치로 내 머리를 꼭 껴안았다.
10m 사이즈의 풍선이 된 녀석은 내 몸에 비해 절반 이하지만, 베개 역할을 하는 것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이건 또 신기한 감각이네.’
지금까지 녀석이 내 머리에 올라탄 적은 있어도 내가 녀석 위에 올라간 적은 없었는데.
그래도 적당히 차가운 온도를 유지하는 녀석의 몸 덕분일까.
「큰애기야 잘 자.」
왠지 모를 안락함을 느끼며 나는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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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콥의 노블캐피탈들은 우주 곳곳에 식민 행성을 지니고 있다.
어떤 행성은 다른 세력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요충지이기도 하고, 어떤 행성은 잘 알려지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유진 가문 또한 수많은 행성들을 거느리고 있다. 유전자 개조나 헐크 뮤턴트 제작에 필요한 재료들을 구하기 위해서다.
그러한 행성들 중 이름 없는 행성이 하나 있다.
과거 아키라 유진이 직접 탐사하다가 발견한 행성으로 다수의 세력이 공유하는 함선 지도에도 기록되지 않은 곳이다.
이름조자 정해지지 않은 그 행성에는 우주의 용, 갤러곤의 둥지가 있다.
그 차갑게 얼어붙은 행성이 유일한 갤러곤 유전자 공급처였다.
다만 갤러곤들은 어느 하나 포악하지 않은 존재가 없기에, 해당 행성에 들어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100명이 들어가면 1명이 겨우 나올 수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가혹한 곳이었기에.
위험성과 귀중함.
그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이 행성의 위치는 유진 가문 내에서도 극소수만이 알고 있다.
그리고 시현 유진은 행성의 위치를 아는 극소수 중 하나였다.
애초에 그녀의 몸에 들어간 갤러곤 유전자의 출처가 이곳이니 그녀가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이 얼마나 위험한지 잘 아는 이유는 단순히 유전자 때문만이 아니다.
그녀는 아키라 유진을 제외하고 이곳에 직접 와 본 경험이 있는 유일한 노블캐피탈이다.
왜냐하면 이 행성에서 갤러곤 알을 훔치고 돌연변이 블루 갤러곤을 포획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그녀의 세력은 뒤쫓아 오는 갤러곤들에 의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비록 지금의 그녀가 클론이긴 하지만, 원본의 기억 대부분은 가지고 있었다. 분노한 갤러곤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알고 있기에 이곳에 다시 올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 갤러곤들이 서식하는 이 행성에 다시 발을 디뎠다.
“…놈이 간 것 같군.”
전용 강화복인 화이트메이든을 입고 있던 시현이 눈 속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주변에 숨어 있던 사람들은 그녀의 말을 듣고 하나둘씩 몸을 일으켰다.
일반 강화복을 입었다간 동력원이 순식간에 얼어붙을 수 있기에 그녀의 부하들은 특별 제작한 강화복을 입었다.
색은 눈처럼 하얗고, 두께가 두꺼워서 우주복을 닮은 해당 강화복은 화산 행성이나 지금처럼 얼음 행성을 탐사할 때 쓰는 장비다. 그것 말고 통신 장비, 들고 있는 무기 등도 모두 얼어붙지 않도록 특수 처리를 거친 물건들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외장에 위장 도료를 발라 하얗게 만든 라일라 쳄벌린이 시현에게 다가 갔다.
「갤러곤들은 제법 부지런한 것 같군요. 원래 저렇게 자주 돌아다니나요?」
“아니. 그렇지 않다. 사냥할 때 말고는 거의 둥지에서 지낸다.”
좀 전에 갑자기 나타난 화이트 갤러곤 때문에 행성에 착륙한 대원들 모두가 급히 몸을 숨겨야 했다.
「기함이 착륙하지 않아서 다행이네요. 그랬다간 3일 전에 탐사가 바로 종료됐을 테니까요.」
시현의 기함이 이름 없는 행성에 도착한 날은 3일 전.
라일라의 말대로 시현은 기함을 탄 상태로 행성에 착륙하는 대신, 수송선을 통해 들어왔다.
거대한 크기의 기함은 갤러곤에게 발각되기 쉽거니와 혹여 외부 지원이 필요한 상황이 될 수도 있어서 일부러 그런 선택을 했다.
그런데 상황을 보니 그 판단이 득이 되었다.
‘이상해. 원래 저렇게 자주 돌아다니지 않는데.’
이 행성 최고 포식자는 갤러곤이지만, 놈들 만큼 강한 힘을 가진 생물들도 다수 서식했다. 화이트 갤러곤은 강적들로부터 둥지를 지킬 임무가 있다.
사냥도 아닌데 둥지 밖으로 자꾸 나가는 것은 명백히 이상 행위였다.
“네른 함장. 유물을 저 산맥에 묻었다고 했지?”
“그렇소만. 잠깐 지도 좀.”
시현은 야크 뿔을 가진 중년의 컬트, 네른에게 소형 컴퓨터 패드를 건넸다.
제국모함 ‘다모스08의 심판자’의 전(前) 함장이었지만, ‘세 머리의 악마’라는 존재에 의해 함선과 부하들을 잃은 그는 복수를 위해 이 행성에 왔다.
컬트답지 않게 인간의 도구를 능숙하게 조종한 그는 지도로 구현된 산맥의 어느 지점에 붉은점을 표시했다.
“이곳에 묻었소.”
“거리가 좀 되는군.”
“그래도 이쪽으로 가는 것이 시간이 더 단축될 거요.”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은 추천하지 않네요. 화이트 갤러곤이 또 날아올 수도 있으니까요.」
네른과 라일라의 말 모두 일리가 있다.
「그러지 말고 저 평원 쪽을 가로질러서 것은 어떨까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은데.」
“그건 어렵다. ‘빙판 평야’ 쪽에는 위험한 괴물이 있어.”
라일라가 기계 손으로 가리킨 장소의 지하 공간에는 매우 강력한 야수가 산다. 이전에 들어왔을 때도 놈 때문에 휘하의 병사들 중 100여명이 전사했다.
갤러곤과 싸우다가 죽은 것도 아니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존재 때문에 다수의 부하를 잃었기에 잊으려야 잊을 수 없었다.
‘놈이 아직도 살아 있다면 그쪽으로 가는 것은 위험해.’
“어쩔 수 없군. 좀 돌아서 가더라도 안전한 길로 가겠다.”
시현에게 시간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실패하면 기함에 있는 민석이 더 이상 그녀를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아직은 그의 신뢰가 필요해.’
지도에서 눈을 땐 그녀가 전방을 노려봤다.
지평선 너머에 걸쳐 있는 검은색 장벽. 저 산맥의 봉우리들 중 하나에 그녀가 찾는 유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