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68
이른 아침,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둥지 위로 올라왔다.
둥지 입구 위에 올려 둔 얼음덩어리에는 하룻밤 사이에 상당한 무게의 눈이 쌓였다. 얼음덩어리를 치운 뒤, 나는 빙판 속 통로에서 잠깐 대기했다.
하늘의 어머니가 나보다 먼저 밖으로 나갔다. 시각이 나보다 뛰어난 그녀가 하늘 위에 위험한 것이 없는지 살펴보기 위해서다.
몇 분 정도 살펴보던 그녀가 사자의 꼬리를 흔들며 안전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눈과 얼음덩어리를 치우고 올라가 보니 어제 들어오기 전과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풍경이 보였다.
차이점이라면 맨살을 뜯어낼 정도로 날카로운 눈바람은 그쳤다는 것. 덕분에 하늘의 어머니도 어제보다는 덜 추워하고 있었다.
‘그래도 오래 있을 수는 없겠어.’
위를 올려다 보니 여전히 구름이 가득 끼어 있었다. 언제 다시 눈과 우박이 쏟아질지 모르니 서둘러야 했다.
“얻어야 할 것이 뭐라고 했지?”
「윈터워커, 아이스 호러의 심장이야.」
윈터워커와 아이스 호러. 둘 다 얼음 행성이나 지구형 행성의 극지에만 서식하는 생물이다.
아드하이도 두 동물과 비슷하게 생긴 생물에 대해 알고 있었다. 윈터워커는 녀석이 직접 봤고, 아이스 호러는 다른 갤러곤에게 들었다고 했다.
‘둘 다 이 행성에 있어서 다행이긴 한데….’
추운 환경이라는 까다로운 공략 조건도 있지만, 두 생물의 스펙도 결코 떨어지지 않다. 그 중에서 아이스 호러는 특히나 강력한 적이다.
“쉽지 않겠네.”
「응. 윈터워커는 그나마 할 만하겠지만 아이스 호러가 문제야.」
그녀 말대로다. 아이스 호러는 혹한지에서 가장 위험한 포식자 중 하나다.
준레이드 보스로 취급받는 씨 데몬이나 블랙 갤러곤보다는 약하지만, 고유의 습성과 우월한 깡스펙 탓에 난적으로 평가받는다. 나 역시 게임에서도 놈을 잡다가 몇 번씩 실패한 경험이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래도 우리는 넷이니까.’
갤러곤, 씨 데몬, 에이모프 준성체, 신격화 볼프 조합이다. 힘을 합치면 놈을 충분히 꺾을 수 있으리라.
‘어차피 나도 아이스 호러를 잡아야 하니까.’
나의 경우, 준성체에서 성체가 되려면 에이펙스(APEX)로 분류되는 강력한 생물들을 30마리 사냥해야 한다. 아이스 호러는 에이펙스로 분류되니 이 기회에 하나 카운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문제는 놈을 어디서 찾느냐 인데.”
「그렇지. 놈은 지상 위로 안 다니니까.」
아이스 호러는 먹이를 찾아 배회하기보다는 자기 영역 내에 함정을 파고 그 안에 들어오는 생물을 사냥하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 간단히 말하면 혹한지에 사는 거미라고 해도 좋다.
‘생긴 것은 많이 다르지만 말이야.’
아무튼 아이스 호러를 찾으려면 시간이 꽤 걸린다.
놈은 먹이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서식하지만, 은신의 달인이다. 나도 제법 잘 숨는 편이지만 놈에게는 비할 데가 못 된다. 자기 영역과 함정을 아주 그럴싸하게 꾸며놓기에 가까이 가지 않는 이상 확인이 불가능하다.
‘가까이 있다면 유인하는 방법도 써볼만한데.’
만약 놈이 근방에 없으면 아주 멀리까지 돌아다녀야할지도 모른다.
「아이스 호러는 시간이 오래 걸리니 먼저 윈터워커부터 찾자.」
“좋은 생각이야.”
하늘의 어머니도 나와 똑같은 판단을 내렸다.
윈터워커는 아이스 호러와 달리 적극적으로 사냥에 나서는 생물. 아드하이도 봤을 정도로 흔하게 돌아다닌다고 하니까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다.
목표를 정한 우리는 눈과 얼음으로 가득한 평야를 달렸다.
빙판과 눈 더미를 파헤치며 기어가는 나의 옆에 황금색의 그리폰이 질주한다.
그녀의 갈기와 목에 걸린 사파이어 펜던트가 겨울바람을 타고 마구 흔들렸다. 갈기 아래 암사자의 몸에서는 털 아래에 감춰져 있던 근육들이 도드라졌다. 고밀도의 근육은 장식이 아니라는 듯 그녀의 움직임은 매우 날렵했다.
바람처럼 빠르게 움직이는 그녀였지만, 나 또한 만만치 않았다.
여섯 개의 전투용 팔은 다리가 되어 빙판의 얼음을 박살내면서 내 몸을 끌어당겼다. 뒤에서는 꼬리와 몸 여기저기 나 있는 뭉툭한 발톱이 육중한 거구를 앞으로 밀어냈다.
공기 위를 거니는 그녀에 비하면 요란한 움직임이지만 속도만은 빨랐다.
고속 열차처럼 빠르게 이동하던 덕분에 우리는 급격히 산맥에 가까워졌다.
백색의 지평선 위에 자리 잡은 검은 산들은 마치 미지의 존재가 세운 구조물처럼 느껴졌다. 저 산을 만들어 낸 자연 또한 초월적인 존재이니 내 느낌은 사실일지도.
경이로운 풍경과 함께 검은 산들에서는 생명의 냄새가 짙게 났다. 단단하게 굳은 흙 위에는 길게 뻗은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나 있었다.
혹한지라는 특수한 환경에서 자란 식물이라 그런지 나무의 외형은 죄다 비슷했다. 몸통은 길고 얇았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가지가 복잡하게 펼쳐지는 형태였다. 그 가지들은 서로 다른 나무들과 뒤얽혀서 서로를 단단히 고정했다.
강풍이 수시로 부는 이곳 환경에 적응한 형태이리라.
‘조심해야겠어.’
숲이 있다면 먹이도 풍부하다는 뜻. 윈터워커나 갤러곤들이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기 좋은 환경이다.
나는 속도를 줄이고 보조기관에 집중하면서 움직였다. 옆에 있던 하늘의 어머니도 주변을 주시하며 걸었다.
턱 아래의 보조기관 4개가 꿈틀거리며 땅을 핥듯 스쳤다. 그럴 때마다 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기관을 타고 내 뇌로 흘러들어왔다.
‘땅에서 느껴지는 진동만 봤을 때 적은 둘, 아니면 셋.’
진동의 세기를 봤을 때는 거리가 좀 되는 것 같은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진동들이 서로 얽혔다가 떨어졌다가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싸움.’
나는 고개를 땅에서 뗐다.
숲에서 목표로 추측되는 생물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이상, 지금부터는 조용히 움직여야 한다. 나는 의태기관으로 목소리를 내는 대신, 괴물의 촉수를 활용해 하늘의 어머니를 불렀다.
「앞에서 싸움이 있다고?」
[즈즈즈 즈즈(거리는 좀 돼)]
「확인해야겠지?」
느껴지는 진동을 봐서는 둘 다 육상 동물이다. 갤러곤이라면 비행이 가능하니 진동이 지금보다 드문드문 느껴졌을 거다.
나와 하늘의 어머니는 진동을 따라 조심스럽게 이동했다.
진원지와 가까워지자 멀리서 나무가 부러지는 소리와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호랑이가 으르렁거릴 때 내는 소리와 비슷한 저 낮은 소리는 윈터워커의 소리다. 놈이 사냥감과 싸우고 있다.
소리를 들은 우리는 이동을 멈췄다. 여기서 더 접근하면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저쪽에서 알아차릴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위에서 확인해 볼게.」
하늘의 어머니가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무 위에 올라갔다.
이곳 나무는 내가 올라타도 될 정도로 튼튼하지 않다. 나는 다시 보조기관을 땅에 대고 적들의 소리와 진동을 엿들었다.
‘윈터워커가 상대하는 적은 작고 날렵해.’
크기는 얼추 하늘의 어머니랑 비슷한 것 같고, 다리는….
‘여덟 개에서 아홉 개 사이야.’
내가 알기로 얼음 행성에 서식하는 생물 중 다리가 여덟 개 있는 생물은 없다. 수백 개의 다리를 지녔거나 다리가 아예 없는 생물이면 몰라도.
‘내가 모르는 종인가?’
그때 정찰을 마친 하늘의 어머니가 나무 위에서 뛰어내렸다.
[즈즈(봤어?)]
「한쪽은 윈터워커가 맞아. 다른 하나는….」
그녀는 잠깐 망설이다가 마저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스크리머 같아.」
[즈(뭐?)]
스타유니언의 기계 괴물 스크리머가 왜 여기 있다는 말인가? 그녀 말이 사실이라면 이곳은 스타유니언의 영토라는 말이 된다.
‘스타유니언의 배를 몇 개나 집어삼켰는데. 여기까지 이어진 항로는 못 봤어.’
[즈즈즈(확실해?)]
「솔직히 말하자면 잘 모르겠어. 스크리머를 닮은 생물하고 윈터워커가 싸우는 중이야.」
아무래도 직접 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나와 그녀는 다시 움직였다.
나무들을 헤치며 달려간 그곳에는 윈터워커와 수수께끼의 괴물이 있었다.
아니, 정정하겠다. ‘목이 잘린’ 윈터워커의 시체와 스크리머를 닮은 괴물이라고.
“적대적 생물 제거 완료.”
피바다가 된 공터 위에 서 있는 놈은 게임을 오래 한 나도 처음 보는 괴물이었다.
‘저게 스크리머라고?’
인간의 머리와 몸통에 튜브와 금속 기계 장치, 꼬리가 붙어 있고, 금속 골격으로 이루어진 6개의 다리로 땅을 기어 다닌다는 점은 스크리머와 동일했지만, 차이점이 더 많았다.
간단히 말하자면 놈은 원본보다 덜 기계처럼 생겼다.
일반 스크리머는 입에 튜브를 꼽아놨기에 본인이 말하는 대신 기계 장치가 대신 목소리를 낸다.
반면 놈의 입에는 튜브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입이 노출되어 있었다. 자기 의지대로 소리를 낼 수 있었으며, 튜브 때문에 생기는 거친 숨소리도 내지 않았다.
얼굴은 인면수처럼 창백하다는 점 말고는 멀쩡했지만, 뒤통수부터는 생체 조직과 튜브, 기계 장치가 뒤엉킨 바이오메카니컬한 외형이 이어졌다. 기계와 맨몸이 명확히 구분되는 스크리머와 다르게 놈의 몸에는 그런 구분이 없었다.
몸에서 뻗어 나온 8개의 다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금속 골격 위에 붉은색 근육과 튜브가 얽힌 형태의 다리들. 길쭉하고 얇은 다리 아래에는 발 대신 뾰족한 3개의 합금 발톱이 돋아나 있었다.
원본 스크리머가 전갈을 연상시켰다면, 내 앞에 있는 놈은 무당거미였다. 생물과 기계가 뒤섞여서 만들어진 혼종 거미 말이다.
‘생긴 것만 위협적인 것이 아니야.’
목이 잘려 죽은 윈터워커는 놈에게 당했다. 윈터워커를 단신으로 죽였다면 상당한 실력을 지녔다는 뜻이니까.
다만 놈도 완전히 압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다리 중 2개는 금속 골격이 크게 찌그러져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기계와 살점이 뒤엉켜 있는 몸통 부근에서는 검붉은색의 피를 흘렸다.
“부족한 에너지 보충 필요. 자체 보급 개시.”
그렇게 중얼거린 놈은 입을 벌려 윈터워커를 허겁지겁 뜯어먹기 시작했다.
‘더 기다릴 필요는 없겠지.’
놈의 정체는 직접 확인해 보면 된다. 에이모프답게 에이모프의 방식으로 말이다.
‘어차피 먹으면 다 나와.’
하늘의 어머니는 내 기색을 읽고 바로 나무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와 동시에 나는 식사 중인 놈에게 돌진했다.
“위험 감지.”
고기에 정신을 쏟던 놈은 나를 보지도 않고 내 기습을 읽어냈다. 놈은 먹이를 먹던 자세 그대로 공중 위로 도약했다. 폭주하는 트럭처럼 달려 나간 나는 그대로 윈터워커의 시체를 들이받았다.
“적대적 생물 확인. 제압….”
「어딜!」
위에서 뭐라 외치려던 거미 괴물은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나무 사이를 박차며 뛰쳐나온 하늘의 어머니가 놈의 머리에 앞발을 휘두른 탓이다. 놈의 목이 기괴할 정도로 꺾이면서 아슬아슬하게 공격을 피했다.
「칫!」
공격이 실패한 것을 아쉬워하며 하늘의 어머니가 착지했다. 우리의 기습도 전부 피한 거미 괴물은 땅에 내려앉은 뒤 바로 거리를 벌렸다.
‘스크리머가 아닌가?’
스크리머라면 자세를 가다듬자마자 즉시 덤벼들었을 텐데 놈은 그렇지 않았다. 놈은 탐색이라도 하려는 듯 고개를 까딱이며 우리 둘을 노려봤다.
“적대적 생물 2 확인. 왼쪽 생물. 특수 목표 C타입과 89% 일치. 오른쪽은….”
나를 본 놈이 붉은색 눈을 부릅떴다. 놈은 핏빛을 닮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며 고개를 위협적으로 까딱거렸다.
“설정된 목표와 75% 일치. 메인 컨트롤러 ‘피라 일레븐’ 명령 지연 상태. 자체적 판단 필요. 목표 제압 개시.”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던 놈은 몸을 바짝 낮추며 전투 태세를 취했다.
나 또한 놈의 움직임에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공격을 준비했다.
놈이 정말 스크리머인지, 아니면 새로운 종류의 병기인지는 나도 모른다. 다만 놈이 스크리머라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스크리머가 홀로 이곳에 다닐 가능성은 0에 가까워.’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 놈의 지원군이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행성에는 갤러곤의 둥지가 있으니까 필시 소수 정예로 들어왔겠지만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상황.
‘일단 빨리 정리하고 판단해야겠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놈이 번개처럼 도약해 내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