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170화 (171/400)

Ep. 170

시체로부터 흘러나온 피가 설원에 번진다.

나뭇잎 소리가 스산하게 깔리는 가운데, 거미를 닮은 괴물이 질주한다.

놈이 노리는 목표는 나.

구체적으로는 내 목 부근이다. 어떻게 알았는지 단번에 내 약점을 노렸다.

나의 등에서 6개의 침식 촉수가 일제히 튀어나왔다. 원래도 단단했지만 합성 비늘까지 덮인 덕분에 훨씬 튼튼해진 촉수가 놈을 붙잡기 위해 부속지를 활짝 펼쳤다.

놈의 크기는 대략 4m. 하늘의 어머니보다 약간 작은 정도다. 놈의 힘이 어느 정도일지 모르지만 크기에서 나오는 불리함을 역전시킬 정도는 아니다.

여섯 갈래의 촉수와 놈이 지닌 여덟 개의 다리가 충돌했다. 금속이 갈려 나가는 시끄러운 소리가 숲에 널리 퍼졌다.

침식 촉수에 비해 한참 작은 크기의 놈은 다리를 틀어 촉수의 공격을 흘려 냈다. 검은색 금속 골격을 새빨갛게 물들인 놈은 내 촉수 위에 올라타 빠르게 기어 왔다.

순식간에 내 등 위까지 접근한 거미 괴물. 놈의 앞다리가 내 목에 있는 괴물의 촉수를 노렸다.

‘어딜!’

나는 타이밍에 맞춰 몸을 크게 흔들었다. 금속 다리 끝에 있는 세 개의 기계 발톱이 허공을 갈랐다.

놈의 자세가 무너진 틈에 나는 반격을 개시했다.

꼬리를 위쪽으로 꺾어서 그 끝에 있는 집게발을 크게 휘둘렀다. 놈은 헛발질한 앞다리 둘을 급히 세워서 방어했다.

안타깝지만 내 집게발은 머리 갑각과 함께 내 몸에서 가장 단단한 부위. 초대형 해머로 맞은 것처럼 육중한 파열음이 들리고 놈의 몸이 공중에 붕 떴다.

그리고 하늘의 어머니가 내 전투용 팔을 타고 위로 뛰어올랐다. 그녀가 두 앞발에 모든 힘을 실어서 놈의 오른편 다리들을 후려쳤다.

「칫!」

거미 괴물은 집게발에 맞아 날아가는 와중에도 어떻게든 자세를 틀었다. 아쉽게도 그녀의 공격은 다리 하나만 찌그러트리는데 그쳤다.

그녀와 거미 괴물이 교차하고 서로 떨어진 곳 위에 착지했다. 우아하게 눈 위에 발을 디딘 하늘의 어머니와 다르게 거미 괴물은 손상된 다리 때문인지 땅에 반쯤 처박혔다.

「…생각보다 단단해.」

[즈즈 즈즈즈(그런 것 같군)]

그녀의 일격은 함선에도 구멍을 낼 수 있을 정도로 무겁다. 그런데도 놈의 다리는 부러지기는커녕 우그러지는 것으로 끝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원래는 고기를 먹어서 정체를 확인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예상 외로 잘 싸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은 상황. 이 이상 시간을 더 이상 끄는 것은 현명하지 않다.

나는 아껴놨던 ‘통찰’ 특성을 활성화했다.

「이름: S-422

종족: 양산형 뮤■■ ■■■■

상태: 확인할 수 없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착용 장비: 확인할 수 없는 정보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뭐?’

통찰로 본 놈의 정보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잘못 봤나 싶어 다시 한번 더 사용해봤지만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놈은 플레이어가 아닌데 왜?’

확인할 수 없는 정보라고 뜬 것은 뮤리엘 이후 처음이다.

“다리 손상 상태 ‘심각’. 복구 불가. 메인 컨트롤러 ‘피라 일레븐’ 응답 없음. 전투 속행.”

통찰을 사용하느라 내가 움직이지 않는 사이, 자세를 가다듬은 놈이 다시 공격을 개시했다.

일곱 개의 다리를 빠르게 놀리며 달려오는 S-422.

나는 몸을 뒤틀고 전방을 향해 꼬리를 휘둘렀다. 바닥에 쌓여 있던 눈이 눈보라가 되어 흩날렸다.

놈은 몸을 바짝 낮춰 내 공격을 피해낸 동시에, 앞다리 둘을 거꾸로 꺾어서 꼬리 아래쪽을 할퀴었다. 비늘과 뭉툭한 발톱들이 뜯어지면서 알싸한 통증이 밀려왔다.

침식 촉수가 공격당하는 주인을 방어하기 위해 달려들었지만, 놈은 이를 예상한 듯 위로 도약해서 공격을 피했다.

나의 촉수는 땅에 그대로 쳐 박혔고, 공중에 떠 있던 놈에게는 하늘의 어머니의 공격이 날아들었다.

그녀가 가진 가장 강력한 무기인 부리와 놈의 앞발이 충돌한다. 신체 부위와 금속이 부딪쳤다가 보다는 오히려 진검끼리 서로 힘겨루기를 할 때와 비슷한 소리가 났다.

“왼쪽 2번 다리 손상.”

「윽!」

놈의 금속 다리는 칼에 베인 듯 잘렸다. 하지만 하늘의 어머니 또한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놈의 발톱이 그녀의 옆구리를 베었기 때문이다.

나는 앞으로 기어가서 전투용 팔로 그녀를 받는 동시에 놈을 향해 입을 크게 벌렸다. 목 안쪽 식도 부근에 위치한 산성 진균샘이 활성화되고, 곧 내 입 밖으로 녹색의 산성 진균이 발사되었다.

“산성 물질 위험.”

아직 공중에 떠 있던 놈은 날아오는 액체들을 피하고자 몸을 억지로 틀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놈도 완전히 피하지 못했다. 놈의 몸에 닿은 탐욕스러운 진균들이 금속 골격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외부 골격 손상 88%.”

착지한 놈은 눈에다가 다리를 비볐지만 이미 늦었다. 이미 놈의 다리들은 회생 불가 상태가 됐기에.

놈은 더 이상 서 있지 못하고 그대로 눈밭에 쓰러졌다.

‘끝났나.’

지금까지 다리가 주 무기였던 놈이다. 보아하니 놈에게는 다른 무기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야. 아직 뭔가 더 남았을지도 몰라.’

착용 장비를 볼 수 없었기에 뭔가 숨겨진 무기가 있을 수도 있다. 나는 경계를 유지한 채 놈에게 다가갔다.

“메인 컨트롤러 ‘피라 일레븐’ 통신 장애 상태로 확인. 패배 기록, 데이터베이스에 등록 완료.”

바닥에 고개를 처박은 놈은 쉴 틈 없이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소각, 소각 프로토콜 발동함. 20, 19….”

‘소각 프로토콜?’

“18, 17, 16….”

전투용 팔로 끝장을 내려고 했는데 놈이 갑자기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15, 14, 13….”

‘설마?’

불길한 예감이 엄습한 나는 재빨리 하늘의 어머니를 붙잡았다. 미친 듯이 기어서 공터 밖을 빠져나왔다.

「가, 갑자기 왜 그래?」

내가 갑자기 자기를 껴안고 달리자 그녀는 당황스럽다는 감정을 담아 사념파를 쐈다. 그녀는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는 것 같았지만, 일일이 설명해주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

나는 설명 대신 나무들을 죄다 쓰러트리면서 앞으로 계속 기어갔다.

10여 초가 지나고 내 등 뒤에서 엄청난 양의 에너지와 열기가 발생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와 함께 내 보조기관을 찌르르 떨게 만들 정도로 압도적인 굉음이 들렸다.

내 뒤쪽을 쳐다본 하늘의 어머니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런 미친! 빨리 달려!」

‘나도 알아!’

이미 내 등과 꼬리에 범상치 않은 열기가 느껴진다. 그것만 봐도 놈의 몸에서 발생한 에너지의 양이 플라즈마 런처 수십 발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아마 안 죽겠지만….’

전투용 팔에 안겨 있는 하늘의 어머니는 아니다. 나야 워낙 튼튼하니 갑각과 팔, 다리가 없어지는 것에 그치겠지만, 그녀는 재도 안 남기고 타버릴 거다.

3개의 전투용 팔과 뭉툭한 발톱, 거기다가 침식 촉수까지 동원해서 정신없이 달려간 덕분에 간신히 폭발 범위 밖으로 벗어날 수 있었다.

불 속에서 활활 타오르는 숲을 보며 하늘의 어머니가 중얼거렸다.

「게임에도 저런 놈이 있었나?」

[즈 즈즈즈 즈즈(내 기억에는 없어)]

「그렇지?」

게임에도 자폭을 무기로 사용하는 존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메가콥의 경우는 쓸모없는 고용인의 몸에 폭탄을 심고 자폭 돌격 시키는 것이 정석 플레이로 자리 잡았고, 야생 생물 중 자폭해서 피해를 주는 생물도 있었으니까.

다만 이 정도로 강한 폭발을 일으키는 존재는 없었다.

‘혹시 전에 만난 스페이스독 잔당인가?’

문득 두 개의 심장 중 하나에 폭탄을 심어서 나를 곤란하게 했던 거구의 헐크 뮤턴트가 떠올랐다. 당시 내가 약했던 것도 있지만, 상대가 헐크 뮤턴트치고 상당히 지능적인 놈이어서 기억이 남았다.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놈일 가능성은 낮아. 갑자기 이런 곳에 나타나는 것도 너무 뜬금없고.’

그보다는 오히려 이곳에 도착하기 전 스타유니언의 군함에서 만난 신형 스크리머. 놈과 연관성이 깊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거다.

‘스크리머치고는 지나치게 오버스펙인데.’

게다가 아까 통찰로 확인했을 때 봤다.

놈의 종족명에 표시된 ‘양산형’이라는 단어. 이 단어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첫 번째, 놈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 그리고….

‘놈은 한 마리가 아니야.’

어쩌면 스크리머를 닮은 괴물 수십, 수백 이상이 이 행성 어딘가에 있을지 모른다.

‘…그건 나중에 고민하자.’

지금은 이곳에서 벗어나야 한다. 눈과 얼음만 가득한 이 행성에서 이 정도로 거대한 불길이 치솟는다면 갤러곤들이 필시 날아올 거다.

아니면 놈의 동료들이나.

‘오늘 사냥은 글렀어.’

앞으로 이 숲 부근에는 절대로 올 수 없게 됐다. 갤러곤들이 계속 돌아다닐 테니.

다른 쪽으로 돌아서 산맥에 접근하는 것도 안전하다는 확신이 든 뒤에 시도해야 할 거다.

그렇게 우리는 불에 타는 숲을 빠져나왔지만,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눈밭을 가로질러 가는 것은 위험해.」

하얀색으로 가득 찬 세계 위에 검은색 봉화가 피어오르는 중이다. 모두가 이곳을 주목할 텐데 엄폐물이 전혀 없는 빙판 평야를 지나가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

내 비늘이 하얀색이면 모를까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이다 보니 지금처럼 눈바람이 불지 않는 상황에서는 아주 먼 거리에서도 쉽게 보이겠지.

그렇다고 ‘유기적 진화’를 써서 ‘영리한 약자’로 변신, 덩치를 줄이자니 상황이 좋지 않다.

정체를 모르는 괴물들과 갤러곤과 싸우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유기적 진화로 변신 가능한 특수상태 중 하나, ‘괴수의 왕’이 비장의 수가 될 테니까 아껴놔야 한다.

‘지하로 가야겠어.’

빙판 아래에는 매우 넓은 지하 공간이 있다.

내가 둥지로 만든 곳도 벽으로 완전 둘러싸인 곳이 아니라 양 방향이 뻥 뚫린 공간이다. 이곳 아래의 지하 공간이 둥지 쪽까지 연결되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눈 위를 걷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안전하리라.

[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바닥을 뚫을 거야. 누가 오는지 좀 봐줘)]

「알았어.」

하늘의 어머니에게 감시를 맡긴 나는 어제 했던 일을 반복했다. 열 방출로 몸을 달구고, 전투용 팔과 꼬리로 얼음을 깼다.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즈즈즈(누가 와?)]

「갤러곤 수십 마리.」

위에서 내려온 좋지 않은 소식에 나는 속도를 더 높였다. 침식 촉수와 양 갈래로 갈라지는 턱까지 동원해서 급히 얼음을 파냈다.

죽을힘을 다한 덕분에 지하 공간까지 이어지는 굴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기어 나와 하늘의 어머니를 먼저 내려 보냈다.

이제는 내 눈에서도 보일 정도로 갤러곤들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놈들은 불에 탄 숲에 집중하고 있었다. 놈들은 타죽은 생물들의 시체를 들고 어딘가로 날아가 버렸다.

적이 다른 곳에 신경을 쓰는 동안, 나는 급히 새로 만든 굴의 입구를 숨겼다.

모든 작업을 마친 나는 얼음 굴 밑으로 기어 내려갔다. 다행히 누군가 눈치를 채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안 걸렸어?」

[즈즈즈(아마도)]

지하 공간에 도착한 나는 하늘의 어머니와 함께 서둘러 그 자리를 떴다.

‘젠장.’

누가 만들었는지 모를 양산형 괴물 때문에 이렇게까지 곤란한 상황에 처할 줄은 몰랐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이렇게까지 나를 불쾌하게 만든 놈은 정말 오랜만이다. 예전에 모프 사냥꾼 때문에 진화를 방해받은 것만큼이나 짜증이 난다.

‘찾기만 해 봐라.’

나는 지금까지 나의 진화를 방해한 자를 용서한 적이 없다. 게임에서 모프 사냥꾼들에게는 내가 쓸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보복했다.

못생긴 거미 괴물을 만든 자. 그도 모프 사냥꾼들과 같은 길을 걷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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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 수백m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 공동.

똬리를 튼 채 아늑한 어둠을 즐기던 ‘그것’은 어떤 진동을 느꼈다. 어떤 얼간이가 감히 그의 영토 위에서 행패를 부리는 게 분명했다.

최근에는 유독 이런 일이 잦았다.

이 주변에서는 본 적 없는 ‘작은 짐승’들 떼거리가 그에게 달려들지 않나, 하늘을 나는 알록달록한 뱀들은 갑자기 그의 영토를 싸돌아다니지를 않나.

셀 수 없이 긴 세월을 살아온 ‘그것’은 게으른 성격 탓에 몸을 크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기에게 덤벼드는 ‘작은 짐승’들만 대충 깔아뭉개버리나 삼키는 것을 대응했을 뿐, 하늘을 나는 뱀들은 내버려 두고 있었다.

다만 오늘의 진동은 다른 때 있었던 이변과는 궤를 달리 했다. 강한 진동이 ‘그것’의 둥지까지 흔들었기 때문이다.

시건방진 놈들이 자기 집까지 위협하자 ‘그것’은 생각했다.

자꾸 저런 식으로 멍청이들이 그의 영토를 짓밟는다면 하늘의 뱀들도 그를 우습게보지 않을까 하고. ‘그것’이 자기 집도 못 지킬 정도로 약해졌다고 말이다.

‘그것’은 게으르지만 멍청하지는 않다. 이 척박한 세계에서 약한 자에게 남은 미래는 죽음 뿐이다.

그러니 이 지하의 왕이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적들에게 보여 줘야 한다.

오늘만큼은 움직이고자 마음먹은 ‘그것’이 길쭉한 두 개의 더듬이로 적들의 냄새를 추적했다. 늙었지만 여전히 예리한 더듬이의 끄트머리에 향긋한 두 줄기의 냄새가 닿았다.

커다란 진동이 있은 후, ‘그것’의 영토로 들어온 침입자들. 두 마리의 짐승이 흘린 냄새가 그의 더듬이에 닿은 것이다.

먹이를 발견했으니 남은 일은 찾아가 응징하는 것뿐. 수백m의 공동을 가득 채우던 ‘그것’이 돌돌 말고 있던 몸통을 길게 풀었다.

오랜만에 찾아온 사냥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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