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171화 (172/400)

Ep. 171

차가운 빙판 아래에 펼쳐진 세계는 미로였다.

내가 둥지로 택했던 지하 공간도 양방향으로 크게 뚫려 있었지만, 이곳은 그보다 더했다. 초대형 광업용 드릴이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통로를 뚫어 놓은 것 같다.

나와 하늘의 어머니는 지하에 지어진 얼음의 미로를 걸었다.

나는 보조기관 덕분에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을 수 있다. 나야 그렇다 쳐도 하늘의 어머니는 빛 한 점 없는 이곳에서도 무리 없이 잘 움직였다.

「어느 쪽으로 가는 게 빠를까?」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오른쪽이 더 나을 것 같네)]

「그래?」

내 옆에서 걷는 그녀의 호박색 눈동자는 호롱불처럼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볼프가 변신할 수 있는 환수(幻獸) 중에는 저런 식으로 몸에 빛을 저장해놨다가 상황에 맞춰 빛을 발산하는 종류가 있다. 저 능력 덕분에 그리폰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그 뛰어난 시각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

작은 횃불 하나에 의지해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모험가처럼, 우리는 둥지가 있는 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뭔가 이상한데?’

들어온 지 10분이 넘게 지났지만 그 어떤 생물과도 조우하지 못했다. 이런 지하 공간에도 서식하는 생물이 있을 텐데 말이다.

게다가 처음 진입할 때는 몰랐는데 안쪽 깊숙이 들어갈수록 이 빈 공간이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나와 비슷하게 생각한 것은 하늘의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우리가 잘못 들어온 것 같은데.」

그녀가 앞발로 벽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3m 길이의 길게 파인 흔적들이 드문드문 이어져 있었다. 만들어진 지 꽤 오래 지난 것인지 모든 흔적에는 얼음이나 흙들이 잔뜩 끼어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나는 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도.

이곳은 내가 지금껏 대면했던 생물 그 어느 것보다도 거대한 존재가 창조한 공간이다.

블랙 갤러곤에 비하면 한 수 처지지만 막강한 힘을 가진 괴수.

[즈즈즈즈 즈즈즈즈(아이스 호러의 영역이군)]

「…덩치를 봤을 때 최소 성체, 아니면 그 이상이야.」

아이스 호러는 나이를 먹을수록 탈피를 하는데, 허물을 벗을 때마다 몸이 크게 자라나고 갑각이 단단해진다. 게임에서는 밸런스상의 이유로 성체라는 한계를 둬서 크기가 자라나는 것을 막아 놨다.

하지만 이곳은 현실. 만약 성체가 된 후로도 계속 자라났다면 그 크기가 얼마나 될 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저 흔적, 다리 발톱이 낸 자국 같은데.’

저만한 크기의 발톱이라면 놈의 덩치는 최소 150m 이상이다. 실로 규격 외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주변에 느껴지는 거 없어?」

[즈즈즈(아직은)]

당연한 얘기지만, 여기 내려오기 전 보조기관으로 살펴봤다. 서늘한 공기만 느껴졌을 뿐 특별한 움직임은 감지되지 않았다.

벽에 보조기관을 대봤지만, 좀 전과 똑같았다.

그러나 이곳이 아이스 호러의 영역이라면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된다.

놈은 비대한 덩치로 인해 멀리까지 나가서 사냥하지 않는다. 일정 영역을 자기 사냥터로 삼고 그 안에 들어온 먹이를 노린다.

‘들어온 지 몇십 분이 지났어. 우리의 침입은 진작 알았겠지.’

놈은 수십km 밖에서도 냄새나 진동을 감지할 수 있다. 둥지가 없다면 반경 몇km 이내의 적까지만 감지할 수 있는 나보다 월등히 뛰어나다고 봐야 한다.

지금쯤이면 우리를 잡으러 부지런히 오고 있는 중일 거다.

게다가 아이스 호러는 몸이 매우 크지만 움직이는 소리를 줄일 수 있다. 다리와 몸에 달린 솜털이 움직일 때마다 발생하는 소리를 최대한 줄여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특징 탓에 놈의 소리를 듣게 된다면 이미 늦었을 가능성이 높다.

설령 놈이 쫓아오는 것을 미리 발견하고 도망친다고 해도 여긴 놈의 홈그라운드다. 도주는 시간을 버는 것에 그칠 뿐.

그보다는 놈과 어떻게 싸울지 준비해야 한다.

‘차례차례 따져 보자.’

우선 적이 지닌 이점부터 살펴보자면, 나는 놈에 대해 잘 모른다.

아이스 호러에 대해서야 잘 알고 있지만, 여기 있는 존재가 얼마나 더 강한지는 확신할 수 없다.

게임에서 놈의 크기는 아무리 커봐야 100m를 넘지 않는데, 여기 있는 놈은 못해도 150m가 넘는다. 지금 내 몸의 크기가 28m, 여기서 사냥의 표상을 쓰면 더 커지겠지만 적에 비하면 한없이 작은 크기다.

아이스 호러는 기상천외한 특수능력으로 적을 농락하는 씨 데몬이나 블랙 갤러곤과 달리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지 않다. 대신 우월한 신체 능력으로 밀어붙이는 유형의 생물이다.

필시 놈은 힘도, 방어력도 나보다 우위에 있으리라.

게다가 놈은 나보다 탐지 능력이 뛰어나다. 아이스 호러는 머리에 있는 더듬이로 진동, 소리, 냄새 등 여러 요소들을 감지할 수 있다.

내가 어디에 숨든 금방 알아차릴 테니 평소와 같이 기습으로 전투를 시작하는 전략은 쓸 수 없다.

나보다도 우월한 탐지 능력을 갖춘 적. 그리고 놈이 얼마나 강한지 미지수인 상황. 이 두 가지가 놈의 어드밴티지다.

‘반대로 내가 지닌 이점도 똑같아.’

아이스 호러 역시 나에 대한 정보가 없다. 아마 놈은 우리를 우연히 지하에 떨어진 윈터워커 정도로 생각하고 있을 터.

‘놈은 내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몰라.’

놈이 규격에서 벗어난 존재라고 한다면 나 또한 마찬가지.

내 전투력이 놈보다 떨어진다고 해도 나에게는 이를 보완할 수 있는 특성들이 있다.

또한 나는 놈에 대해 모르지만, ‘아이스 호러’는 잘 안다. 아이스 호러의 습성, 강점과 약점, 모든 정보가 내 머리 안에 있다.

다양한 특성, 그리고 수많은 아이스 호러를 사냥했던 경험. 이것들이 내가 지닌 무기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하늘의 어머니를 불러세웠다.

[즈즈즈 즈즈즈(여기서 싸우자)]

「우리 둘만으로 괜찮겠어?」

하늘의 어머니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연히 아니다.

놈과 직접 마주해 봐야 알겠지만 나 혼자서 싸우는 것은 벅차다.

‘내 생각대로 놈 크기가 150m 이상이라면 갑각을 부수기도 힘들 거야.’

가장 얇은 갑각도 두께가 수m 가량 될 테니까. ‘사냥의 표상’으로 강화된 몸, 혹은 ‘신의 회초리’ 같은 파괴적인 특성이 아니라면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할 거다.

그러니 여기서는 나 말고 다른 녀석들, 26호와 아드하이, 하늘의 어머니, 모두의 도움이 필요하다.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내가 시간을 벌지. 그동안 둥지에 가서 녀석들을 데려와)]

「네가 유인하려고?」

[즈(그래)]

「글쎄, 놈이 큰 먹이부터 노리는 것은 맞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잖아. 내가 먼저 공격받을 수도 있어.」

타당한 지적이다.

아이스 호러는 일반적으로 큰 먹이를 선호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워낙 교활한 족속이라서 때로는 변칙적으로 행동하기도 한다.

가령 약해 보이는 적을 먼저 제압한 후, 큰 먹이를 노리는 경우도 가끔 있다. 만약 여기서 놈이 그렇게 행동하면 하늘의 어머니는 큰 위험에 처할 거다.

[즈즈즈 즈즈즈즈(걱정할 필요 없어)]

놈이 교활하다고 하지만, 이쪽도 머리 굴리는 거로는 지지 않는다.

‘얘들아, 너희의 시간이다.’

두터운 배갑(背甲)과 허리와 맞닿아 있는 부분에 위치한 원형의 점막이 끈적거리는 소리와 함께 찢어졌다. 둥지 안에 있던 작은 악귀들이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감염 관련 융합 특성, 이빨요정 둥지가 활성화된 것이다.

28m까지 자라난 나의 덩치에 비하면 여전히 작기만 한 살인벼룩들이 내 앞에 정렬했다. 내가 뭘 하려는지 눈치 챈 하늘의 어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 것 같네.」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그래. 갈림길이 나오면 오른쪽으로 꺾어서 가)]

「설명 안 해 줘도 알거든?」

코웃음을 친 그리폰이 내 눈을 마주 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그녀는 곧장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를 보낸 나는 이빨요정들을 쳐다 봤다.

‘너희들이 해 줘야할 일들이 있어.’

내 의지가 담긴 사념파를 접한 녀석들이 각자 해야 할 일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녀석들이 흩어지는 것을 보고 나 역시 자리를 옮겼다.

놈과 싸우기 적합한 전장이 이 근처에 있다.

-

무수히 많은 다리로 얼음굴을 기어가던 ‘그것’은 제자리에 멈춰 섰다.

멀리서부터 흘러들어오던 진동에 변동이 생겼기 때문이다.

함께 움직이던 큰 진동과 작은 진동이 갑자기 나눠지더니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것’은 안다. 무리를 짓는 먹이들 중에는 약한 새끼를 지키기 위해 성체가 미끼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 경우도 비슷한 경우일 터.

그렇다면 답은 정해져 있다.

바로 작은 진동을 노리는 것. 새끼들은 느리고 약하니까 먼저 먹고, 강한 성체를 나중에 노리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그것’은 평소 하던 대로 작은 진동을 따라 움직이려고 했지만, 그의 더듬이가 새로운 진동을 감지했다.

큰 진동으로부터 미세한 진동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어서 ‘그것’은 살짝 당황했다. 이번에는 작은 진동이 미끼 역할을 한 것인가? 아니면 그가 잘못 감지한 것인가?

‘그것’은 두 가닥으로 길게 뻗어 나온 더듬이를 바닥에 댔다. 서늘한 흙과 얼음의 감촉 속에 섞인 작은 흔들림과 소리가 더듬이를 타고 올라왔다.

놈은 이를 작은 생물들이 내는 발자국 소리라고 판단했다. 그 말은 큰 진동 주변에 새끼들이 있다는 것.

좀 전에 느껴지던 큰 진동에 변화가 생긴 이유는 아마 새끼를 업고 다니는 생물이라서 그런 것이리라. 드물지만 그런 생물이 없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것’은 납득했다.

「스스스스스스」

더듬이를 회수한 ‘그것’은 다시 출발했다.

목적지는 수많은 진동들이 모여 있는 곳.

놈은 수백 개에 달하는 다리들을 부지런히 움직이며 얼음의 미로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어마어마한 크기에도 불구하고 놈은 매우 조용히 움직였다. 아마 다른 생물이 들었다면 이 지하 공간 어딘가에 구멍이 생겨서 바람이 분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렇게 짧은 시간 이동하던 ‘그것’의 감각에 먹이가 잡혔다. 그의 앞에 열 마리의 새끼들이 있다.

아마 도망치던 놈의 새끼 중 일부가 뒤처진 것이겠지.

새끼라고 해도 상당히 호전적인 생물인지, 낙오된 녀석들은 통로에 나타난 ‘그것’에게 달려들었다.

‘그것’은 입을 덮고 있는 4개의 턱을 활짝 피고 그대로 먹이들이 있는 곳에 머리를 내리꽂았다. 4개의 턱이 굴착기마냥 얼어붙은 바닥을 통째로 드러냈다. 새끼들은 흙과 돌, 얼음 속에 섞여서 그대로 놈의 내장으로 직행했다.

양자의 크기 차이는 굳이 비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격차가 있기에 가능한 방법이었다.

단숨에 10마리의 새끼를 해치운 놈은 계속 나아갔다.

더듬이가 그에게 말한다. 이 앞 통로만 지나면 공동이 나온다. 그곳에 큰 진동과 새끼들이 모여 있다.

곧 있을 만찬을 생각하니 턱에서 독액이 흘러내린다. 한시라도 빨리 내장에 신선한 고기를 집어넣고 싶어진 놈이 얼음굴을 질주했다.

놈은 순식간에 통로를 통과해 넓은 공동에 머리를 내밀었다. ‘큰 진동’과의 거리는 그의 더듬이로 윤곽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웠다.

“걸렸네.”

공기를 타고 날아온 작은 소리.

놈은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다.

하지만 그 소리를 낸 존재로부터 감지되는 막대한 에너지들. 그 에너지 덩어리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는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재빨리 통로 뒤로 물러나려고 했지만 체격 때문에 쉽지 않았다. 몸이 통로에 끼어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사이, 놈이 우려하던 일이 현실화되었다.

공동 안쪽에서 날아온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놈의 갑각을 불태웠다. 갑각뿐만 아니라 속살까지 통째로 달궈지자 ‘그것’이 비명을 질렀다.

「스스스스!」

그 고통은 ‘그것’이 아주 어렸을 때, 하늘을 나는 뱀들에게 공격당했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그 당시에 맞았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력이 높다는 것.

에너지는 놈을 불태우는 것으로 모자라 머리 위의 천장과 벽까지 무너트렸다. 에너지의 불길이 끝나자마자 바위와 얼음들이 놈을 깔아뭉갰다.

-

‘계획대로야.’

내가 있는 공동에는 여러 개의 얼음 통로가 있지만, 나는 일부러 저 통로에 이빨요정 10마리를 남겨 놨다.

새끼나 약자부터 노리는 아이스 호러라면 필시 이빨요정들을 짓밟고 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빨요정의 죽음이 느껴지면 바로 사이킥 브레스를 쏠 수 있도록 미리 준비했다.

신의 회초리 대신 사이킥 브레스를 쓴 이유는 간단했다. 신의 회초리를 쓰면 머리 위의 얼음 평야 전체가 무너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나 말고 다른 애들은 바로 압사당할 것이다. 밖에 날아다니는 갤러곤들은 이 아래에 뭔가가 있다는 것을 금방 눈치챌 거고.

이런 이유로 신의 회초리 다음으로 파괴력이 강한 원거리 공격 수단인 사이킥 브레스를 쓴 것이다.

‘게다가 적의 덩치가 커서 오히려 잘 먹혔어.’

놈의 몸 길이를 150m라 예상했는데 머리만 봤을 때 그보다 더 커 보였다. 몸이 워낙 크다 보니 놈은 나의 공격을 일찍 감지했음에도 통로에 끼어서 피하지 못했다.

‘일단 선공을 내가 잡았고.’

놈이 지나온 통로는 완전히 무너졌지만, 아이스 호러는 저 정도 공격에 죽을 정도로 약하지 않다. 아마 갑각 중 사이킥 브레스에 직격당한 부분이나 손상되었을까.

금방 튀어나와 나를 덮칠 거다.

‘그 전에.’

괴물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나부터 괴물이 될 필요가 있는 법.

나는 사냥의 표상을 활성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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