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73
「스스?」
갑작스레 난입한 적 때문에 놈은 혼란스러워 보였다. 왜 자기가 이걸 놓친 것인지 의아하겠지.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놈의 집중을 흩트려 놓았으니까.’
내가 만만치 않은 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 놈은 나에게 모든 감각을 쏟았다.
만약 내가 몸을 사리거나 놈에게 거리를 벌리며 싸웠으면 놈도 여유가 있었을 거다. 그랬다면 애들이 오는 것도 금방 알아차렸겠지.
아이스 호러는 뛰어난 신체 능력을 지녔지만, 그 본질은 매복을 중심에 두는 사냥꾼이다. 환경 요건을 자기가 통제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면 바로 후퇴할 터.
‘그렇게 둘 수는 없지.’
우리에게는 놈이 필요하다. 나에게는 놈의 머리가, 하늘의 어머니에게는 놈의 심장이.
그리고 다른 녀석들에게 줄 놈의 살점까지.
‘이 자리에서 잡는다.’
「그르르르르르」
내가 으르렁 거리자 놈은 나와 26호를 번갈아 가며 쳐다 봤다.
이 자리에 있는 적들 중 놈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은 바로 나다. 나 때문에 복부의 갑각까지 부서졌으니까.
하지만 놈의 본능은 다른 답을 내놓고 있다. 아이스 호러보다 상위에 있는 포식자 씨 데몬의 존재를 느끼는 것이리라.
26호는 자기 몸에서 사이킥 파워가 흘러나오지 않도록 하는 편이다. 사이킥 파워에 민감한 아드하이를 배려하기 위해서다.
만약 내가 다치지 않았다면 지금도 숨겼을 거다.
‘제대로 화가 났는걸?’
26호의 몸 위에서 물처럼 흐르는 수많은 눈들. ‘심해의 공포’ 특성으로 구현된 눈동자들이 아이스 호러를 노려보고 있었다.
보라색에 가까운 분홍색으로 물든 몸 밖으로는 강렬한 사이킥 파워가 뿜어져 나와 공동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공동 밖으로는 사이킥 파워가 흘러나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밖으로 흘러나가면 갤러곤이 눈치챌 것이라 생각해서 조절하는 거겠지.
즉 현재 26호의 심정을 요약하자면 차가운 분노 상태라 보면 된다.
‘그게 더 무섭지만.’
「스스스스스」
아이스 호러는 사이킥 파워 때문에 어디에 집중할지 혼란스러워 보였다. 더듬이는 주인의 의식을 대변하듯 정처 없이 방황하는 중이었다.
놈의 주목이 다른 곳으로 향하면 곤란하다. 나는 부러지지 않은 전투용 팔들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우렁찬 포효를 내질렀다.
「■■■■■■■!」
내 울음소리가 공동을 떠나 다른 곳까지 널리 울려 퍼졌다. 내 주위에 있던 얼음 파편들과 돌 조각들이 풍압에 날려 허공에 비산했다. 내 포효에 담긴 기백을 느낀 놈이 더듬이를 움찔 떨었다.
「스아아아아!」
「■■■■!」
나와 마찬가지로 크게 울부짖는 아이스 호러. 놈은 26호에게 신경을 끄고 내게 달려들었다. 나 또한 땅을 박차고 놈을 향해 돌진했다.
무너진 얼음 바닥 위에 족적을 남기며 서로를 향해 달려가는 나와 아이스 호러. 둘이 다시 격돌하자 공동이 또한번 크게 진동한다.
‘큭!’
전투용 팔과 등의 팔이 부러지고 머리 갑각도 부서진 나다. 부러진 뼈를 회복시키는데 에너지가 소모되고 있어서 아까만큼 힘이 넘치지 않는다.
반면 놈은 전혀 지치지 않고 괴력을 과시하고 있다. 과연 깡스펙만으로는 수준급인 에이펙스 괴수답다고 해야 할까.
‘차라리 잘 됐어.’
놈은 교활한 포식자다.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는 적을 앞에 두고 도주를 생각하지 않을 터. 적이 방심하는 사이 우리는 부지런히 놈을 얽어매면 된다.
내가 놈을 붙잡고 있는 사이, 애들이 움직였다.
그리폰 수인 형태로 변한 하늘의 어머니는 ‘제사장의 황금창’을 든 채 아드하이 등에 올라탔다. 그녀를 태운 아드하이는 짙은 어둠에도 불구하고 눈 깜짝할 새에 아이스 호러의 등 위로 날아갔다.
아드하이가 아이스 호러의 배갑(背甲)에 거의 닿을락 말락할 정도로 바짝 붙어서 비행하자 하늘의 어머니가 창을 길게 뻗어 놈의 등을 벴다. 고속 비행에서 발생한 추진력이 더해진 덕분인지 놈의 배갑에 얇은 상처가 남았다.
「스스스스」
나와 힘겨루기를 하는 중에 공격을 당한 놈이 짜증스럽게 쉭쉭 거린다. 놈의 꼬리가 귀찮은 방해꾼을 치우기 위해 움직이려고 한다.
한 줌의 빛도 존재하지 않는 지하 공간이지만, 놀라울 정도로 발달된 보조기관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아드하이를 치기 위해 위로 떠오른 놈의 꼬리는 거대한 장벽 같았다.
하늘을 나는 천마(天馬)를 타고 신화 속 괴수와 싸우는 영웅처럼 아드하이와 하늘의 어머니는 놈의 꼬리를 잘 피해냈다. 아드하이의 비행 실력이 한층 더 물에 오른 덕에, 상대적으로 좁은 이 지하 공간에서도 어려움 없이 날아다녔다.
오로지 창을 내지르는데 전념하는 하늘의 어머니, 날아드는 꼬리와 몸을 피해내는 아드하이.
둘이 호흡을 맞춰 합공을 하고 있는 동안, 26호 역시 공격을 준비했다.
26호가 몸에 돋아난 촉수들을 지휘자가 흔드는 지휘봉처럼 흔들었다. 그러자 공동 바닥에 깔린 잔해들이 동시에 떠올랐다.
씨 데몬 고유 기술인 ‘데몬 크래시’가 발동한 것이다. 사이킥 파워가 스며든 저 파편은 이제 초능력 대포의 탄환이 된다.
공중에 떠오른 잔해 중 일부가 포탄처럼 쏘여져서 아이스 호러의 몸통을 때렸다.
「스스스!」
아이스 호러는 어디에 집중해야 할지 고민스러운 것 같았다. 놈의 신경이 분산되면서 나를 압박해 오던 놈의 턱에서 힘이 살짝 빠졌다.
‘좋아!’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놈의 턱과 머리를 붙잡고 있던 침식 촉수에 힘을 줬다. 그러자 싸우기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놈이 뒤로 밀려났다.
「스스?!」
놈도 당황했는지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나는 기세를 몰아 놈을 세차게 밀어냈다. 지반이 무너져서 평평하지 못한 바닥 덕분에 놈의 몸이 크게 기울었다.
그 덕분에 내가 만들어 놨던 깨진 복부 갑각이 크게 노출되었다.
당황한 놈이 재빨리 몸을 추스르려는데, 놈의 몸이 그 자리에서 멈췄다. 놈은 모르겠지만 수백m에 달하는 사이킥 파워의 그물이 놈의 거구를 얽매고 있었다.
그 그물을 던진 자는 26호. 녀석이 또다시 ‘속박’을 건 것이다.
[즈즈(지금!)]
내 외침을 들은 아드하이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들었다. 녀석의 등 위에 있던 하늘의 어머니가 창을 힘껏 내질렀다.
날카로운 창끝이 깨진 갑각 안쪽에 있는 속살을 찔렀다. 창은 무리 없이 놈의 몸 안쪽 깊숙이 박혔다.
「스아아아아!」
제사장의 황금창이 박힌 놈이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친다. 100m는 가볍게 넘는 거대한 덩치가 난리를 치니 공동뿐만 아니라 지하 공간 전체가 뒤흔들리는 느낌이다.
「조심해!」
「이해」
아이스 호러의 몸통과 꼬리가 롤러코스터의 트랙처럼 허공에서 널뛰고, 아드하이는 곡예비행을 하며 그 사이를 넘나들었다.
‘아직 부족해.’
워낙 몸이 크다 보니 제사장의 황금창을 손잡이 부근까지 전부 박아 넣어도 치명상이 아니었다.
나는 무너진 바닥 위에서 난동을 부리는 놈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부서진 갑각 부위를 깨물기 위해 아래턱을 양 갈래로 벌렸다.
「스스스스!」
맨몸으로 소금을 맞은 지렁이처럼 고통스러워하던 놈은 내가 노리는 바를 귀신 같이 알아채고 재빨리 몸을 뒤집었다.
그 탓에 내 공격은 빗나갔다. 내가 씹은 것은 말랑말랑한 살점이 아니라 매우 단단한 놈의 옆구리 갑각이었다.
‘쯧.’
함선 외벽도 씹어 먹을 이빨은 아이스 호러의 갑각에 부딪치자 무력하게 손상되었다. 이 세계에 온 지 처음으로 생니가 부러지는 경험을 한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스스」
게다가 지금 공격으로 놈도 내가 뭘 노리는지 알아차렸다. 상처가 난 부위를 지속적으로 노린다는 것을 안 놈이 약점을 숨기기 위해 몸을 꼬았다.
우리 중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아드하이가 이리저리 날면서 퍼플 라이트닝을 뿌렸지만 소용없었다.
내 사이킥 브레스을 정면에서 맞고도 흠집만 난 놈이다. 그보다 위력이 떨어지는 퍼플 라이트닝으로는 피해를 줄 수 없다.
「단단함!」
「작은애기야! 비켜봐!」
그 모습을 본 26호가 다시 힘을 발휘했다. 녀석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사이킥 파워가 실체화되어 빛났다.
이어서 허공에 떠 있던 잔해들이 26호 앞에 모여 들더니 천천히 회전하기 시작했다.
녀석이 뭘 생각하는지 이해한 나는 모든 침식 촉수와 전투용 팔을 이용해 아이스 호러를 단단히 붙잡았다.
「스스스스스」
「그르르」
마침 놈도 나를 빨리 정리하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겠다고 생각한 것 같다. 두껍고 긴 놈의 몸이 나를 휘감았다. 놈의 갑각과 내 몸의 합성 비늘이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놈은 나보다 훨씬 힘이 강하다. 놈이 작정하고 나를 조인다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거다.
그 증거로 내 눈앞에 ‘고통 경감’이 발동되었다는 메시지가 연달아 떠오르고 있었다.
특성 효과로 통증을 간신히 견뎌 낸 나는 침식 촉수로 부러진 등의 팔 하나를 붙잡았다. 그리고 팔을 그대로 뜯어냈다.
‘으윽!’
부러졌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통증이 머리 안쪽을 찌른다.
내가 미쳐서 나의 팔을 뜯어낸 것이 아니다. 사마귀의 앞발처럼 생긴 등의 팔에는 내 몸에서 가장 날카로운 뼈 칼날이 달려 있다.
뼈가 전부 부러져서 움직일 수 없는 등의 팔, 이걸 무기로 쓸 생각이다.
‘이거라면!’
나는 전투용 팔로 침식 촉수가 뜯어낸 등의 팔을 받았다. 그리고 그 팔을 도끼처럼 휘둘러서 놈의 약점을 내리찍었다.
「스스스스스!」
이미 제사장의 황금창이 꽂혔는데 그 위에 내 뼈 칼날까지 박히자 놈이 비명을 질렀다.
강한 포식자들은 남을 짓밟는데 익숙해서 자기 고통은 못 참는 경향이 있다. 놈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를 조여 오던 놈의 몸에 힘이 빠진다. 약점을 가리기 위해 나로부터 떨어지려는 아이스 호러. 그런 놈에게 나는 숨겨놨던 무기를 하나 더 꺼냈다.
내 머리 갑각에 위치한 다섯 개의 얼굴들이 일제히 입을 벌렸다.
그리고 인면수들의 입에서 어떤 적이라도 마비시킬 수 있는 음파가 놈을 향해 쏟아졌다.
「-----!」「-----!」「-----!」「-----!」「-----!」
「슷?!」
마비파를 머리에 제대로 맞은 놈이 움직임을 멈췄다. 거의 동시에 26호의 무기가 발사 준비를 완료했다.
[즈즈즈즈(지금이야)]
「응!」
사이킥 파워와 커다란 얼음덩어리를 섞어서 만든 초능력 드릴이 공기를 찢어발기며 날아간다.
드릴의 끝이 향하는 곳은 아이스 호러의 부서진 갑각 부위. 지금까지 우리가 만들어 놓은 놈의 약점이다.
그리고 순수한 사이킥 파워의 정수와 얼음 파편들이 놈의 맨살을 갈기갈기 찢어놓기 시작했다.
「스아아아악!」
씨 데몬, 아니 26호가 만든 무기인 사이킥 드릴의 파괴력은 대단했다. 갑각 안쪽의 뼈와 살점과 함께 갈려서 곤죽이 되었고, 내장은 회전에 빨려 나가 밖으로 뽑혀 나올 지경이었다.
내장이 절단되는 고통을 참지 못한 놈의 엄청난 소리로 울부짖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놈의 몸을 반토막낼 기세로 회전하던 사이킥 드릴이었지만, 놈의 갑각까지 파괴하는 것은 무리였다. 상처 부위를 크게 확장시킨 뒤 드릴을 구성하던 사이킥 파워는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기운이 빠졌어….」
「작은어른」「위험」
사이킥 파워를 과하게 소모한 26호의 몸이 쪼그라들었다. 평소 내 머리에 올라탈 때처럼 50cm 크기로 줄어든 26호를 아드하이가 등 위에 태웠다.
「스스스….」
아이스 호러의 더듬이가 불안하게 떨린다. 놈과 같은 포식자가 이 정도로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적이 얼마나 있을까? 아마 새끼 때 이후로는 없겠지.
놈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었는지 바닥을 파서 숨으려고 했다.
‘가긴 어딜 가?’
올 때는 마음대로지만 갈 때는 그렇지 않은 법이다. 나는 도망치려는 놈을 뒤에서 붙잡고 끌어당겼다.
「그르르」
「스스?!」
그리고 내 머리를 놈의 상처에 쑤셔 박았다. 닫힌 내 입 속으로 놈의 따뜻한 피가 스며들어온다.
나는 전투용 팔과 침식 촉수로 놈의 상처를 벌린 뒤, 머리를 한층 더 깊게 들이밀었다. 머리에 달린 뿔과 턱 아래의 뼈 칼날로는 놈의 몸속을 헤집으면서 말이다.
놈은 나를 빼기 위해 턱으로 내 꼬리를 물고 당겼다. 그럴수록 나는 놈의 벌어진 상처를 더 강하게 붙잡았다.
내 꼬리 끝에 달린 집게 부위, 꼬리에 달린 갑각과 다리들이 놈의 턱에 잡혀서 뜯겨져 나가도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딱딱한 벽 같은 것을 밀어내자 차가운 공기가 내 머리 갑각을 감쌌다.
내가 놈의 몸을 아예 관통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놈의 단말마가 들렸다.
「스스스…스스…스….」
수백, 아니 수천 년 이상을 살았을지 모르는 아이스 호러.
놈은 억울하다는 듯 나지막한 울음소리를 내고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