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75
나는 급히 스크리머의 머리를 전투용 손으로 집어던졌다.
그리고 26호를 끌어안고 몸을 웅크렸다.
「큰애기야?」
26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파장을 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폭발 반경으로부터 벗어나기는 이미 늦었다. 이 방법이 폭발로부터 26호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젠장!’
‘뼈 야수’ 특성이 적용된 덕분에 내 몸의 방어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했지만, 26호는 그렇지 않다. 씨 데몬이니까 스크리머의 자폭에 휘말려도 죽지는 않겠지만 치명적인 부상은 불가피했다.
‘제발 견뎌라.’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곧 닥쳐올 화염의 세례를 기다렸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다.
‘응?’
「큰애기야, 왜 그래? 혹시 화났어?」
아무리 기다려도 전신을 불태우는 고통은 오지 않았다. 그저 얼음 통로 내에서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뿐.
나는 눈을 뜨고 스크리머를 확인했다.
“PS-111. 외부 충격으로 인해 추가 손상이 발생했습니다. 현재 피해 상황 보고. 87% 손상됨.”
얼음벽에 처박힌 스크리머는 하얀색 피를 흘리며 기계적으로 중얼거릴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그제야 나는 이 스크리머가 뭔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스크리머는 기계의 지배를 받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물을 기반으로 해서 작동하는 존재다. 머리만 남아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안드로이드들뿐이다.
‘안드로이드는 아닌 것 같은데?’
나는 보조기관에 집중해서 녀석의 외형을 자세히 살폈다. 녀석은 안드로이드에 비해 훨씬 생동감이 있었다.
첩보 활동을 하는 안드로이드면 인간 흉내를 잘 내지만, 스크리머에게 그런 기능을 부여할 리 없으니 아마 아닐 터.
「나 답답해.」
가만히 놈을 살펴보고 있는데, 품 안에 있던 26호가 밖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벽에 박힌 스크리머를 봤는지 녀석이 몸을 번쩍 빛냈다.
「으앙! 친구가 다쳤어!」
“PS-111. 메인 컨트롤러에게 조언합니다. 적대적 생물이 감지되었으니 후퇴하시기 바랍니다.”
여태까지 경험한 바로 26호의 몸 색깔이 어둡게 빛날수록 녀석의 기분이 좋지 않다는 뜻이었다. 내가 크게 다쳤을 때마다 보라색에 가까운 분홍색으로 변했기에 확실히 알고 있었다.
몸의 색이 살짝 어둡게 변한 26호가 촉수를 뽑아내 벽에 박힌 스크리머를 꺼냈다.
「친구야, 괜찮아?」
“메인 컨트롤러에게 보고합니다. 현재 수복 0.5% 진행 중.”
26호가 스크리머를 바닥에 내려놓자 스크리머의 목 부위에서 거미 다리 비슷한 금속 다리 6개가 튀어나왔다. 나는 놈의 모습을 보자마자 남극의 연구기지를 배경으로 하는 고전 SF호러영화에 등장하는 외계 생물의 분신을 떠올렸다.
기괴한 형태의 스크리머 머리는 금속 다리를 부지런히 움직이더니 26호 앞에 섰다. 그 모습은 26호를 지키려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야!」
“적대적 생물이 메인 컨트롤러에게 위협이 될 가능성 95%. 배제합니다.”
26호는 나와 스크리머 사이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지 당황한 것 같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상식을 초월하는 상황이다 보니 나 또한 바로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큰애기야, 친구가 아픈 것 같아.」
[즈즈(조용)]
「응.」
내 심정이 파장에 녹아들었는지 나도 모르게 차갑게 말하고 말았다. 26호는 부모 몰래 강아지를 주워 온 아이처럼 움츠러들었다.
‘…차근차근 살펴보자.’
스크리머가 자폭하지 않은 것은 다행이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괜찮아진 것은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26호가 나와 만난 뒤 처음으로 독자적인 행동을 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단순히 놀 거나 먹이를 먹는 정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대형 사고를 쳤다.
‘나 몰래 위험 요소를 숨겼어.’
만약 스크리머가 26호에게 위해를 가했다면 녀석은 이 자리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아드하이까지도 심각한 부상을 피할 수 없었겠지.
당연히 녀석을 혼내야 했지만, 그 전에 따져 봐야 할 점이 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분홍색 빛을 내뿜는 26호를 바라봤다.
녀석은 내가 분노했다는 사실에 크게 움츠러든 상태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크리머를 즉시 버리려고는 하지 않았다.
즉, 녀석에게 자비심이 생겼을 수 있다는 것.
에이모프인 나는 필연적으로 다른 생물들의 생명을 빼앗아야만 한다. 그것이 진화하는 유일한 길이자 내가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이기에. 내 동료들 중 그 점을 모르는 존재는 없다.
예외로 하늘의 어머니가 있지만, 그녀에게는 목표가 있다. 원수를 죽여서 가족들의 혼을 위로하는 것 말이다.
아무튼 모두가 나의 특성을 이해하고 있기에 나는 녀석들과 함께 이곳, 용의 둥지에 올 수 있었다.
원래라면 에이펙스 사냥에 필요한 특성을 모으러 다니면서 긴 시간을 보냈을 거다. 녀석들로 인해 내가 지닌 단점이 보완되니 그럴 필요가 없을 뿐.
그런데 여기서 26호가 생명의 소중함 같은 것을 느낀다면 내 사냥 활동에 큰 지장이 생긴다. 특히 우리 중 가장 사이킥 파워를 잘 다루는 녀석이 빠진다면 갤러곤 사냥이 몹시 힘들어진다.
‘게다가….’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26호의 돌발 행동은 녀석이 성장하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 말은 즉, 앞으로도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 녀석이 똑똑해질수록 나와 더 자주 갈등을 빚게 될 거다.
26호뿐만 아니다. 아드하이도 자라면서 비슷하게 될 수 있다. 아드하이는 26호보다도 어리니까.
‘내가 이 자리에서 강압적으로 나온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나는 나의 약점을 보완해 줄 조력자가 필요한 것이지 노예가 필요한 게 아니다. 향후에도 녀석들과 긍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만큼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뭐든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해.’
아이의 자아가 커지면 커질수록 부모의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것과 같은 이치. 이때 부모와 갈등이 생기면 평생 간다는 사실은 나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26호를 야단치는 것은 정해진 사실이지만, 녀석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말을 잘 골라야 한다.
생각을 정리한 나는 26호에게 말했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저게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
「친구가 위험해?」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저게 콰광 하고 터지면 우리 모두 다쳐)]
「정말? 쾅쾅 보다 위험해?」
[즈(응)]
스크리머가 플라즈마 런처보다 위험하다는 말을 들은 26호의 몸이 하얗게 질렸다.
거짓말은 아니다. 내가 본 스크리머의 자폭은 플라즈라 런처보다 20배 이상 위험해 보였으니까. 물론 나는 안 죽겠지만 그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큰애기가 다치는 건 싫어!」
[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나도 그래. 그러니까 날 믿고 도와줘)]
「응….」
예전에 메가콥 연구원들에게 실험을 당할 때처럼 바들바들 떠는 녀석을 보니 급격히 미안한 마음이 올라왔다. 하지만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쟤를 어디서 데려온 거야?)]
「커다란 나쁜 애를 먹을 때 봤어. 많이 아프다고 해서….」
그러고 보면 낮에 하늘의 어머니와 스크리머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심장을 뽑아 먹기 위해 몸 안 이곳저곳을 헤집던 그녀는 내장에서 소화되다 만 스크리머 잔해를 발견했다. 당시 모은 잔해로 보면 아이스 호러가 잡아먹은 스크리머는 최소 10마리 이상이었다.
하늘의 어머니가 말하길, 부서진 흔적을 봤을 때 그들은 자폭을 하기도 전에 아이스 호러에게 먹히거나 압살당한 것 같다고 했다.
‘윈터워커를 잡던 스크리머와 동일한 구성이었지.’
그것 때문에 우리는 스타유니언이 이 행성에서 비밀리에 스크리머 개발 실험을 한다고 판단했었다. 전투력이 얼마나 되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이스 호러라든가 윈터워커 같은 강력한 포식자들에게 싸움을 붙인 거라고.
[즈즈즈 즈(한 가지 더)]
「응.」
[즈 즈즈 즈즈 즈즈(왜 쟤를 구한 거야?)]
「그건….」
내 물음에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망설였다.
여기서 26호가 불쌍해서 그랬다고 답하면 매우 곤란해진다. 그 부분은 내가 억누를 수 있는 요소가 아니니까.
‘초조해하지 말자.’
괜히 강압적으로 나오면 역효과다. 나는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잠시 가만히 있던 녀석은 내게 조심스러운 파장을 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동족 냄새가 났어.」
[즈즈(동족?)]
「응. 친구가 아프다고 해서 안 아프게 해주려고 데려왔어.」
그러고 보니 내가 숨어 있을 때 26호는 스크리머에게 뭔가를 먹으라고 건네줬었다.
[즈즈 즈즈즈(다시 해볼래?)]
내 파장을 들은 26호가 촉수들을 꺼냈다. 녀석이 ‘속박’ 기술을 쓸 때처럼 촉수 끝에서 보라색 실 같은 것들이 나오더니 스크리머의 뒤통수에 있는 금속 구멍들이 꽂혔다.
그러자 스크리머의 눈이 뒤집히더니 입에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PS-111. 파, 파, 파, 파워 충전률 5%에서 6, 6, 6%로 증가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아픈 친구들은 밥을 주면 괜찮아 져.」
그 모습은 본 나는 어떤 상황인지 얼추 이해했다.
‘버블아메바, 혹은 씨 데몬의 유전자가 들어갔어.’
그렇게 생각하면 머리만 남아도 살아 움직이는 스크리머의 특성도 이해가 된다.
슬라임처럼 생긴 두 생물은 뇌와 같은 중요 장기의 위치를 원하는 대로 이동시키거나 축소시킬 수 있다. 이런 특성 덕분에 씨 데몬은 몸의 수십 분의 1만 남아도 생존할 수 있다.
‘필요한 장기만을 축소해서 얼굴 안에 집어 넣은 거야.’
이 스크리머에게 버블아메바나 씨 데몬의 유전자가 들어갔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또한 대화체계가 완전히 다른 26호와 스크리머가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이유도 설명이 된다.
“파워 충전률 10%. 생체 기능 보완에 활용하겠습니다.”
녀석이 입을 열고 말을 할 때, 아주 미세한 파장의 흐름이 느껴졌다. 아마 26호에게는 아드하이가 말하는 것보다 훨씬 어눌한 느낌으로 들리겠지.
26호가 보기에 몸이 많이 아픈데다가 말도 제대로 못하는 동족이니까 훨씬 불쌍하게 느꼈을 거다.
‘동족애가 깊은 녀석이니까.’
우려했던 것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지만, 그래도 아직 문제가 남아 있다.
‘다른 스크리머와 만났을 때 똑같은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버블아메바나 씨 데몬의 유전자를 이식받은 신형 스크리머들과 조우할 때마다 26호가 머뭇거리면 좋지 않다.
[즈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앞으로 이런 친구들이 많이 나올 수 있어)]
「정말?」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그 친구들이 나를 공격하면 나는 엄청 아플 걸)]
「친구도 좋지만 애기들이 아파하는 건 더 싫어!」
말뜻을 이해한 26호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부풀렸다. 백지장처럼 하얀 녀석의 몸을 봤을 때 앞으로 또다시 돌발 행동을 할 가능성은 낮아 보였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나는 마무리로 경고의 의미를 담은 파장을 쐈다.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 즈즈즈 즈 즈즈즈 즈즈즈(나는 가족을 지킬 책임이 있어. 너도 내 마음을 알 거야.)]
「응. 알아.」
[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새 친구를 보면 나한테 말해줘. 알겠지?)]
「알았어….」
시무룩해 보이는 26호를 보니 마음이 편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다. 수십, 수백의 스크리머와 싸우는데 이런 식의 돌발상황이 생기는 것은 결코 좋지 않으니까.
그걸로 26호에게 경고를 끝낸 나는 나를 노려보는 스크리머를 돌아봤다.
‘다음은 이걸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건데.’
나는 머리만 남은 스크리머를 손가락으로 집어 들었다.
방금까지 얼굴에 금속 다리면 달려 있던 놈이었는데, 지금은 외형이 바뀌었다. 아까는 못 본 촉수와 돌기 같은 것도 볼과 턱 부근에 튀어나와 있었다. 게다가 부서지고 끊어진 튜브에는 살점이 돋아나서 반(半) 유기체적 형태로 변했다.
‘자체 수복 기능인가?’
방금 26호로부터 사이킥 파워를 받아먹은 놈이 에너지를 활용해 몸을 회복시킨 것이리라.
“적대적 생물에 의한 위협 감지. 반격 개시합니다.”
「친구야! 큰애기는 내 동족이야! 그러지 마!」
한층 더 기괴한 형태가 된 놈이 금속 다리로 내 손가락을 콕콕 찌르며 저항하자, 26호가 이를 제지했다.
“메인 컨트롤러의 명령 확인했습니다. 반격을 중단합니다.”
26호의 말에 바로 저항을 멈추는 스크리머. 같은 유전자가 포함되어서 그런지 26호를 상급자로 인식하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야. 큰애기 말 잘 들어야 해. 알겠지?」
“적대적 생물에 대한 등급 재분류합니다. 서브 컨트롤러 등급으로 분류 완료. 내장 데이터베이스 접근권 확인.”
조정을 완료한 스크리머는 금속 다리를 접고 얌전히 나를 올려다 봤다.
“반갑습니다. 서브 컨트롤러. 무엇을 도와 드릴까요?”
원래는 26호를 혼낸 뒤, 스크리머를 잡아먹을 생각이었다.
다만 놈이 26호에게 순종적으로 구는 것을 보니 생각이 약간 바뀌었다.
‘정보를 빼낼 수 있겠어.’
나는 의태 기관 특성 효과 중 하나인 목소리 흉내 내기 기능을 활성화했다.
“너는 누구지?”
“제 코드명은 PS-111. 메인 컨트롤러를 대신해 하급 스크리머를 지휘하는 PS급 중간 단말기 모델입니다.”
머리만 남은 스크리머, PS-111은 일종의 야전지휘관 역할을 하는 개체였다.
“의외로군. 스크리머에게는 지휘관 개체가 없을 텐데?”
“구 기종까지는 그렇습니다. 전(前) 메인 컨트롤러 ‘피라 일레븐’이 해당 기종의 한계점을 지적, 슈프림 컨트롤러의 허가 하에 신 기종, ‘뮤턴트 스크리머’ 개발에 착수했습니다.”
“한계점이라 하면?”
“스크리머 머신과 동기화될 유기체의 취약한 내구도, 낮은 사이킥 파워 저항력, 부족한 전술적 사고입니다.”
녀석이 말한 세 가지는 스크리머가 갖는 고질적인 약점이다.
‘시스템상 제한되어 있던 문제였지만 이곳은 현실이니까.’
헐크 뮤턴트를 재료로 쓴다면 기계가 아닌 부분의 성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킬 수 있다. 거기에 사이킥 파워 능력을 부여하는 것은 덤이고.
문제는 전술적 사고에 대한 부분인데, 이것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아니다.
형벌부대에 가까운 스크리머에게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처럼 제한적으로 상급 개체를 섞어서 보조하는 방식을 택한 것이리라.
“과연. 너는 지휘관급 뮤턴트 스크리머라 보면 되겠군.”
“맞습니다.”
“피라 일레븐이라 했나? 메인 컨트롤러가 변경된 이유는 뭐지?”
“7등급 위험생물 ‘아이스 호러’의 공격으로 인한 내부 데이터 손상으로 시스템이 초기화되었습니다. 그때 새로 메인 컨트롤러로 등록된 대상이 8등급 ‘씨 데몬’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짐작 가는 부분이 있었다.
‘26호가 쏜 초능력 드릴.’
엄청난 사이킥 파워로 이루어진 그것이 아이스 호러의 내장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때 아마 그 여파를 받은 것이리라.
나는 다시 질문했다.
“다음 질문으로 넘어가지. 네 몸에 들어 있는 유전자들. 어떤 생물의 유전자인지, 누가 조작한 것인지 설명해.”
“제 몸에 적용된 유전자는….”
PS-111은 자기 몸에 들어간 생물 정보를 낱낱이 나열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 안에는 씨 데몬의 유전자가 소량 포함되어 있었다.
‘콜드블러드 유전자는 의외지만.’
지난번 만난 스크리머도 그랬고, 이번 녀석도 콜드블러드 유전자가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콜드블러드로부터 좋은 특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밸런스를 뒤흔들 정도로 강력한 것은 아니다. 굳이 스크리머 재료용 헐크 뮤턴트에 넣을 필요가 없다.
‘내가 모르는 사실이 있나?’
속으로 생각하는 동안에도 스크리머의 말은 이어졌다.
“이상 제 몸에 주입된 유전자 종류는 5가지입니다. 유전자 조작은 클로에 가르멜다 연구책임자, 리 자오 수석연구원이 담당했습니다.”
“잠깐. 가르멜다와 자오? 설마 메가콥의 가문들?”
“그렇습니다. 두 연구원은 각자 메가콥에 노블캐피탈, 프라임캐피탈에 소속된 인물입니다.”
녀석의 말을 듣고서야 나는 내 추측이 사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스타유니언의 대수령, 메가콥의 노블캐피탈 가르멜다, 프라임캐피탈 자오.
셋 다 메가콥과 스타유니언의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이들이다. 서로 전쟁 중인 집단의 우두머리가 내통하는 상황이라.
‘십중팔구 플레이어겠지.’
나는 손바닥 위에 놓인 PS-111를 내려다 봤다.
놈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들은 거의 얻었고, 제일 중요한 질문만 남았다. 대답 내용에 따라 녀석의 운명을 결정할 생각이다.
“전 메인 컨트롤러, 피라 일레븐이 지휘권을 빼앗을 가능성은?”
“시스템을 초기화해서 방화벽을 해제하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다른 중간 단말기도 너처럼 메인 컨트롤러를 변경시킬 수 있는 건가?”
만약 이것이 가능하다면 나는 적들이 만든 스크리머를 역이용할 수 있게 된다. 갤러곤 사냥에 도움이 될 것은 물론이고, 이후 플레이어와 싸울 때도 큰 힘이 되겠지.
하지만 PS-111의 답변은 내 기대를 부정했다.
“손상으로 인한 통제권 변경은 더 이상 불가능합니다.”
“왜지?”
“제가 피라 일레븐의 통제에서 벗어나기 전, 해당 오류의 발생 가능성에 대해 보고를 남겼습니다. 지금쯤이면 통제권의 취약한 부분이 개선되었을 겁니다.”
그 말은 더 이상 PS-111처럼 26호가 다른 지휘관 스크리머를 빼앗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녀석을 잡아먹는 게 이득인가.’
손바닥 위에 있던 녀석은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추가로 말을 덧붙였다.
“다만 하급 개체, S 모델들이 이용하는 회선에 접근 가능합니다.”
“그 말은 다른 스크리머의 작전을 엿볼 수 있다는 건가?”
“엿보는 것뿐만 아니라 S 모델에 대한 제한적 통제가 가능합니다.”
“제한적 통제?”
“스크리머 머신을 물리적으로 접촉해서 통제권을 뺏을 수 있습니다.”
스크리머 머신은 스크리머의 재료가 되는 생물을 감싸고 있는 전갈, 혹은 거미 형태의 기계 장치를 말한다.
스타유니언의 형벌부대라는 별명답게 스크리머의 모든 신체 활동은 스크리머 머신의 통제를 받는다.
그러니 녀석의 말은 곧 스크리머의 행동 자체를 조작할 수 있다는 의미가 된다.
‘물리적 접촉이라는 표현이 거슬리지만.’
스크리머는 내 기생충이나 인면수로 통제할 수 없다. 적 플레이어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을 터.
‘그 부분을 역이용하면….’
그들이 예상치 못한 부분을 찌를 수 있다.
“마지막 질문이다. 스타유니언에서 너를 추적할 가능성이 있나?”
“그들이 저를 찾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고?”
“제 몸에 있는 신호칩은 아이스 호러의 공격으로 파괴되었습니다. 저는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으로 처리된 상태입니다.”
나는 보조기관을 녀석의 볼에 갖다 댔다. 네 가닥의 긴 보조기관이 스크리머의 매끈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특별한 신호는 느껴지지 않아.’
혹시나 해서 외부로 유출되는 전자파가 있는지 확인했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추적당할 일은 없고.’
나는 속으로 지금까지 나눴던 대화들을 다시 검토해봤다.
놈을 살려 뒀을 때 얻는 이익과 놈을 먹었을 때 얻는 이익. 어느 쪽이 더 나은지는 명확했다.
“쓸모가 있는 것 같네.”
“도움이 되어 다행입니다.”
그걸로 PS-111의 운명은 결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