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76
자다 깬 아드하이와 하늘의 어머니는 머리만 남은 스크리머, PS-111을 멍하니 쳐다 봤다.
「다들 봐봐! 내 새 친구야!」
“반갑습니다. 야생 생물들. 저는 PS-111입니다. 메인 컨트롤러 ‘씨 데몬’, 서브 컨트롤러 ‘미확인된 적대적 생물’을 섬기게 됐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미확인된 적대적 생물이라 부르지 말고 간단히 에이모프라 불러.”
“확인. 서브 컨트롤러의 코드명을 변경합니다.”
26호의 몸 위에 올라탄 채, 자기소개를 하는 인간 여성의 머리를 본 하늘의 어머니가 입을 떡 벌렸다. 그녀의 시선이 흔들리다가 나를 향했다. 자기가 생각하는 그것이 맞느냐는 눈빛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게 맞아.’
놀란 독수리 얼굴을 한 그녀와 달리 아드하이는 뭔가 이상하다는 듯 연신 고개를 까딱였다.
「큰어른」「나」「질문」
[즈즈(뭔데?)]
「쟤」「말」「이상함」
아드하이는 PS-111이 내보내는 파장이 어색하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즈즈 즈즈즈 즈즈 즈즈(몸이 아파서 그런 거야)]
「상처」「많음?」
[즈즈즈(아마도)]
PS-111이 원래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모른다. 내가 사냥한 스크리머는 하급 스크리머인 S 모델이니 녀석의 본모습과 다르게 생겼을 거다.
‘뭐가 됐든 머리만 남았으면 치명상이라 봐야겠지.’
물론 PS-111은 부상으로 인한 통증을 느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녀석은 씨 데몬의 유전자 덕분에 중요 장기를 이동시킬 수 있으니까. 겉만 봤을 때 머리만 남은 것 같지만, 안에는 뇌와 기초적인 소화 기관 등이 있다.
다만 이를 아드하이에게 설명해주기는 복잡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쟤」「부상」「심각함」「불쌍함」
[즈즈 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네가 더 어른이니까 많이 도와줘)]
「나」「어른?」
직접 물어본 것은 아니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다. 게임 설정상 스크리머는 기대 수명이 1년을 넘기지 못한다.
PS-111은 신형 스크리머지만 그렇다고 해도 수명이 길 가능성은 낮다. 기껏해야 수년을 넘기지 못했을 터.
아무튼 내 말을 들은 아드하이는 자기보다 어린 생물을 본 것이 신기한지, 26호와 PS-111 곁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야생생물에 대한 외형 분석 결과, ‘그린 갤러곤’과 78% 일치.”
「작은애기야, 친구랑 친하게 지내.」
「아픈 아이」「불쌍함」「도와줌」
「친구도 작은애기랑 친하게 지내야 해. 알았지?」
“메인 컨트롤러의 명령에 따라 ‘그린 갤러곤(78%)’의 등급을 서브 컨트롤러2 ‘작은애기’로 재분류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작은애기.”
「아픈 아이」「말」「이상함」「나」「교육」「가능」
「응! 작은애기 착하다!」
“작은애기의 지원에 감사드립니다.”
개성이 넘치는 괴물들 세 마리가 서로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제법 흥미로웠다.
특히 아드하이는 하늘의 어머니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였다. 녀석은 PS-111에게 사근사근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자기보다 어린 생물을 봐서 책임감을 느낀 건가?’
아니면 자기와 비슷하게 신체적 결함이 있다고 판단해서 그런 것일지도.
사이좋게 지내는 녀석들을 흐뭇하게 보고 있는데, 하늘의 어머니가 나를 불렀다.
「어떻게 된 거야? 스크리머를 길들이다니 그게 가능한 거였어?」
[즈즈 즈즈즈 즈즈즈(내가 한 게 아니야)]
그녀는 우호적인 스크리머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했다. 게임에서도 무조건 적으로만 등장하는 존재이니 그녀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나 또한 직접 보지 않았다면 그녀와 비슷하게 생각했으리라.
나는 그녀에게 좀 전에 있었던 일을 요약해서 설명했다.
「26호가 저 신형, 뮤턴트 스크리머라고 했나? 녀석의 주도권을 빼앗아왔다고?」
[즈(그래)]
「사이킥 파워를 쓰는 스크리머라. 네 말대로야. 누군가가 스크리머의 약점을 보완하고 있어.」
내 추론에 동의를 표한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클로에 가르멜다라. 누군지는 얼추 짐작이 가네.」
「아마 12위겠지.」
메가콥 랭커 중에는 무기 개발에 주력하는 플레이어가 있었다. 희귀 장비 제작의 스페셜리스트로 나와 적대하는 플레이어들에게 무기를 제공하던 자였다.
「지난번 뮤리엘이 말한 후원자 둘. 한 명은 제이슨이라는 이름의 컬트 플레이어, 다른 한 명은 모른다고 그랬었잖아.」
[즈즈즈(그랬지)]
「너는 그 자가 가르멜다 사람일 것 같다고 추측했고.」
[즈즈 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둘이 동일 인물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비 제작에 일가견이 있는 랭커라면 둘밖에 없잖아. 그 중 1위는 이미 죽었으니 남은 자는 12위 밖에 없지.」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내가 알기로 12위는 남자라고 들었는데?)]
「게임에서야 자기 마음대로 성별을 고를 수 있으니까. 진짜 그런지는 알 수 없지.」
[즈즈(하긴)]
일리 있는 지적이다. 게임에서 그랬다고 이곳까지 똑같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
‘이건 조심해야겠네.’
이 세계에 온 지 반년이 넘었지만, 가끔 게임을 근거로 판단할 때가 있다.
나 자체도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의 원칙에서 벗어난 요소인데도 불구하고, 자꾸 이렇게 생각하다가는 낭패를 보게 될 수 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놔야 해. 주의하자.’
나는 속으로 다짐하며 하늘의 어머니와의 대화를 이어 나갔다.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즈 즈즈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즈(뮤리엘을 돕는 자와 스크리머 개발자가 연관성이 있다면 저 녀석이 더 중요해지겠네)]
「실제로 그럴지 안 그럴지는 좀 더 조사해 봐야겠지만.」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녀석의 전(前) 메인 컨트롤러라면 뭐라도 알고 있겠지)]
PS-111의 전(前) 메인 컨트롤러, ‘피라 일레븐’을 잡으면 좀 더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을 거다.
‘다만 시기가 문제네.’
블랙 갤러곤을 치고 잡을 것인지, 아니면 그 전에 잡을 것인지가 고민이다.
신형 스크리머들이 플레이어들과 관계가 있다면 그 지휘관인 피라 일레븐 또한 마찬가지일 거다. 나와 블랙 갤러곤의 싸움을 엿보고 그 정보를 플레이어들에게 전송할 수 있다.
‘그렇다고 스크리머 쪽을 먼저 치는 것도 쉽지 않아.’
다른 때 같았으면 피라 일레븐을 선공략하는 것이 유리했겠지만, 상황이 좋지 않다.
갤러곤들이 비정상적으로 돌아다니는 것은 이미 확인했다. 섣불리 스크리머를 찾아 나섰다가 갤러곤 무리에게 걸리면 이중 전선을 형성할 우려가 있다. 지금까지 싸워 본 스크리머의 무력, PS-111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보면 놈은 매우 강력한 적이다. 블랙 갤러곤보다는 약할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렇다고 쉬운 상대는 아니다.
그런 두 적과 동시에 싸운다면 그야말로 자살행위다.
‘어부지리를 노릴까? 아니야. 그러기에는 아직 아는 바가 너무 적어.’
이 부분은 아무래도 PS-111로부터 피라 일레븐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뽑아낸 뒤 결정해야 할 것 같다.
‘확신이 서기 전까지는 에이펙스 사냥 준비부터 먼저 끝내자.’
이 행성에 있는 포식자들을 잡아서 유용한 특성을 얻어놔야 누구랑 싸워도 원활하게 싸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추가로 하늘의 어머니의 웬디고 변신 능력 해금도 있고.’
머리 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는데 26호와 PS-111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메인 컨트롤러에게 질문합니다. 옆의 야생 동물은 무슨 종입니까?”
「야생 동물….」
“갤러곤과 유사한 사이킥 파워 감지됨. 고도의 지성체로 추정됩니다.”
「친구야. 이쪽은 중간애기야.」
“정보 불확실. ‘중간애기’라는 생물 검색 결과 0건.”
야생 동물 취급을 받은 하늘의 어머니가 어이없어하는 사이, 나는 PS-111에게 그녀에 대해 간단히 설명해줬다.
[즈즈즈 즈즈즈 즈즈즈즈 즈즈즈즈 즈즈 즈즈즈(그녀는 신격화에 오른 볼프, 그러니까 변신 능력을 지닌 볼프야)]
“변태 특성이 발현된 돌연변이 볼프입니까. 내장된 데이터베이스를 갱신합니다.”
「중간애기는 나쁜 애들을 잘 혼내주는 대단한 애기야. 친하게 지내.」
“서브 컨트롤러3 ‘중간애기’로 등급 재분류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중간애기.”
「…그, 그래.」
하늘의 어머니는 씨 데몬의 알선에 의해 스크리머와 인사를 나누는 초현실적 상황이 당혹스러운 듯 보였다. 그녀의 태도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볍게 소개를 끝낸 짐승 한 마리와 합성 생물 한 마리는 아드하이 쪽으로 가 버렸다.
“작은애기로부터 특별한 금속 기기가 감지됩니다.”
「그거 건드리면 안 돼. 큰애기가 가져온 거야.」
「큰어른」「친구」「둘」「사용 가능」「아픈 아이」「확인」「원함?」
“해당 기기를 흡수하면 빠른 회복에 도움이 될….”
옹기종기 모인 세 마리의 괴물들은 서로 사념파와 파장으로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언제 봤다고 사이좋아 보이는 모습을 보고 하늘의 어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너, 의외로 괴물을 잘 주워오는군.」
[즈즈즈(그러게)]
「이런 건 익숙하다고 생각했는데.」
다른 플레이어가 봤다면 환장할 조합이군.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지만 굳이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얘기를 나누던 셋은 다시 잠이 들었다. 하늘의 어머니도 낮부터 연달아 전투한 것 때문에 꽤나 피곤했는지 금세 잠에 빠졌다.
둥지에서 깨 있는 존재는 나와 머리만 남은 스크리머, PS-111뿐이다. 녀석이 둥지에 깔린 늪을 헤엄쳐서 내게 다가왔다.
“에이모프. 취침하지 않으십니까?”
“생각할 것이 있어서.”
아까 나는 자기 전 새로 열린 ‘특성 강화’ 시스템을 살펴보려고 했다.
26호가 몰래 둥지 밖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확인하지 못했으니, 지금이라도 봐둘 생각이다.
PS-111을 돌려보낸 다음, 반투명 텍스트박스를 띄우려고 하는데 녀석은 내 앞에서 둥둥 떠 있었다.
“할 말 있어?”
“예. 에이모프. 작은애기로부터 얻은 정보에 따르면 저 70L급 전술형 백팩은 에이모프 소유입니다. 맞습니까?”
녀석이 작은 금속 다리로 가리킨 것은 내가 뮤리엘로부터 확보한 장비들이 담긴 백팩이었다.
평소 아드하이가 등에 메고 다니는 저 가방 안에는 ‘제사장의 황금창’, 스타유니언의 유일급 무기인 ‘블러드 리버’ 8개가 들어 있다.
플레이어를 죽이고 얻은 ‘약탈자의 부정형 다면체’은 유일급 장비를 포식해서 고유 특성으로 전환시키는 효과를 지녔다. 그 덕분에 나는 컬트의 궤도병기 ‘뇌신’을 흡수해서 ‘신의 회초리’라는 특성을 얻은 상태고.
제사장의 황금창과 블러드 리버도 포식용으로 쓰게 될 수도 있기에 들고 다니는 중이다.
“저건 내가 얻은 게 맞아. 그건 왜 묻지?”
“저 안에 있는 금속 기계 장비 ‘블러드 리버’ 3개가 필요합니다. 해당 기기를 흡수한다면 비약적인 전투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흡수?”
“중간 단말기 이상의 상위 개체들은 적들의 집중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폭넓은 자가 수복 권한이 부여됩니다. 그렇기에 필요한 자재가 확보될 시, 수복용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녀석의 말을 들으니 지상에서 윈터워커를 죽인 스크리머가 떠올랐다. 놈은 시체를 먹어서 필요한 에너지를 보충하려고 했다.
‘고기나 사이킥 파워 말고도 장비도 포식이 가능한가.’
PS-111 또한 나와 비슷하게 금속이나 무기, 장비 등을 먹어서 활용할 수 있는 듯했다. 아마 녀석의 상위 개체인 피라 일레븐 또한 동일한 능력을 갖추고 있겠지.
“그런 중요한 얘기를 왜 이제 하지?”
“메인 컨트롤러 ‘씨 데몬’과 작은애기로부터 확보한 정보에 따르면 이 장소는 안전하지 않습니다. 메인 컨트롤러를 지키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전투 기능을 수복해야 합니다.”
나는 PS-111을 지그시 노려 봤다. 녀석의 모습을 봤을 때 일부러 중요 정보를 누락한 것 같지는 않았다.
‘설령 숨기려고 했다면, 지금 얘기하지는 않았겠지.’
녀석이 거짓말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블러드 리버를 넙죽 줄 수는 없다.
강력한 유일급 장비를 흡수했을 때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는 데다가, 내가 지닌 블러드 리버는 8개뿐이다.
‘그 중 3개면 사실상 절반.’
블랙 갤러곤과 싸울 때 써야 하므로 신중히 판단해야 한다.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데, 턱 아래의 보조기관이 아주 약한 진동을 감지했다.
‘방금 그건?’
이곳으로부터 꽤 떨어진 장소로부터 흘러들어온 진동. 지진이라 보기에는 뭔가 다른 느낌이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든 나는 엎드려서 보조기관을 둥지에 링크시켰다.
나의 감각이 둥지에 깔린 늪의 수면을 타고 지하 공간 전체로 퍼져나간다. 차가운 얼음의 벽, 서늘한 공기가 들락날락하는 통로들, 나와 아이스 호러의 격전으로 인해 발생한 구덩이들.
얼음 평야 아래에 넓게 펼쳐진 지하 공간 내부를 혀로 핥듯이 감시하던 나의 감각에 또다시 진동이 잡혔다.
쿵쿵 소리가 나자 통로를 막고 있던 얼음과 바위 더미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그리고 거기에서 뒤따라오는 사이킥 파워의 흐름과 금속 무기가 남기는 잔향.
이것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적!’
다수의 사이킥 파워 사용자들이 이 지하 공간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