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화하는 우주괴물이 되었다-180화 (181/400)

Ep. 180

스페이스 서바이벌에는 다양한 지성체 종족이 사는 만큼, 온갖 괴물들이 존재한다.

지구에 존재하는 야생 동물처럼 생긴 생물부터 시작해서 공포 영화에나 나올 법한 끔찍한 괴물,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신적인 존재까지.

그리고 그 생물들 중 몇몇 종은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바로 지성체를 따라 하는 것.

대표적으로 레드미스트라는 포식자가 있다. 붉은색 갈기가 난 재규어처럼 생긴 맹수로, 방어가 불가능한 환각 페로몬을 내뿜는 것이 특징인 놈이다.

놈은 환각 페로몬을 펼친 뒤, 인간의 발성을 따라 해서 플레이어들을 현혹한다. 특정 알고리즘을 기반으로 플레이어들의 대화나 움직임을 흉내 내는 것이라 하는데, 이게 제법 리얼하다.

환각 자체도 벗어나기가 힘든데 놈이 근처에서 동료인 것처럼 행동하니까 레드미스트에 대해 잘 모르는 플레이어들은 끔뻑 속아 넘어갈 수밖에.

‘괜히 밀림형 행성 최고 포식자가 아니지.’

오죽하면 게임 초창기 놈의 별명이 스페이스 장산범이었을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게임에 고인물들이 늘어나면서 놈의 속임수에 넘어가는 플레이어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아무리 AI가 뛰어나다고 해도 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속이는 주체가 인간이라면?’

어제까지 함께 게임을 즐겼던 동료인 척하고, 그가 무엇을 장비하고, 어떤 전술을 선호하는지 전부 알고 있다면.

과연 속지 않을 수 있을까?

즉, 인간을 제일 잘 속이는 존재는 같은 인간이다.

살짝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상대를 잘 아는 인간.

그리고 나는 아마 게임에서 다른 사람들을 가장 많이 속인 에이모프일 거다.

‘그럼 시작해볼까.’

모든 준비를 끝마친 나는 적 무리에게 접근했다. 내가 가까워지자 그들도 이동을 멈췄다.

‘역시 신전수호단.’

실력이 제법이다. 이 세계에 온 이후 내가 다가오는 것을 미리 알고 대비하던 자들은 별로 없었으니까.

갤러곤의 발톱으로 만든 칼을 뽑는 소리, 데몰리셔를 든 사수들이 무기를 장전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그 속에 말소리는 없었다.

아마 텔레파시 링크로 서로 어떻게 대응할지 맹렬하게 논의 중이겠지.

‘좋아.’

여기서 내가 할 일은 적을 몰래 기습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적들 간에 불신을 조장하는 것.

넓은 얼음 통로의 갈림길 너머에서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내 목에는 인간으로 치면 갑상샘이 위치한 부근에 특별한 기관이 있다.

‘의태기관’ 특성이 내 몸에 적용되면서 생긴 발성 기관이다. 새로운 유전자를 흡수할 때마다 초기화되어 새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는 기관.

수많은 먹이들을 속이고, 먹어 치우는데 사용한 그 ‘무기’가 다시금 활성화되었다.

“도, 도와줘!”

내 입에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 아이스 호러의 시체가 있는 공동에서 도망치다가 아드하이에게 당한 컬트의 목소리다. 아드하이에게 시체를 건네받은 뒤 한 입 물어서 의태기관용으로 쓴 것이다.

굳이 이 컬트로 한 이유는 하나.

‘꽤 중요한 자로 보였으니까.’

다른 단원들은 그녀가 무사히 도망칠 수 있도록 시간을 끌었다. 그걸 보면 정보 전송 관련한 사이킥 기술을 사용하는 자일 가능성이 높다.

어디든 마찬가지지만 발언자가 누구냐에 따라 신빙성과 그 중요도가 올라가는 법이다. 동료들이 목숨을 바쳐 보낼 정도로 중요한 자라면 저쪽에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되겠지.

“이건?!”

“셀로네야!”

내 예상대로 저쪽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동요하기 시작했다.

“모두 기다려!”

그때 한 여성이 굵고 씩씩한 목소리로 외쳤다. 목소리만 봤을 때 저 무리를 이끄는 리더 같았다.

동요하던 컬트들이 일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이어지는 침묵. 텔레파시로 대화하는 것이리라.

‘과연.’

내가 컬트, 아니 셀로네의 목소리를 흉내 냈을 때 저쪽에서 취할 행동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나를 돕기 위해 달려오는 것. 또 하나는 의심하고 공격 준비를 해서 달려오는 것.

그들에게 나는 즉각 토벌해야 할 대상이니 물러난다는 선택지는 없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적은 둘 중 어느 선택지도 고르지 않았다. 그들은 주변 경계를 유지하면서 입이 아니라 텔레파시를 나누고 있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얘기를 들었다 이거지?’

이 자리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자, 컬트 제사장.

스페이스 서바이벌에 잔뼈가 굵었을 그가 저들에게 나에 대해 설명한 것이 분명했다.

‘나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쪽에 아예 오지를 않겠지.’

내가 무슨 함정을 깔아놨을지 모르니까. 하물며 여기는 현실이다. 나나 적 플레이어나 죽으면 그걸로 끝. 저쪽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해도 과연 그렇게 쉽게 모험을 할 수 있을까?

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걸 이용하는 거지만.’

컬트 플레이어는 함정을 우려해서 이쪽으로 접근하지 않을 거다. 내가 자기 근처에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말이다.

이미 그는 첫 습격 소식을 들은 뒤, 내가 만든 둥지가 어디까지 퍼져나갔을지 파악해 뒀을 가능성이 높다. 그가 전진을 멈춘 것도 둥지 위에서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리라.

그가 고를 수 있는 안전한 선택지는 일단 먼저 부하들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다. 그 후 전략을 바꿔서 움직이거나 하겠지.

그의 의도대로 단원들은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들의 발걸음이 살짝 격해진 것을 보니 불만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럴 수밖에.’

당하지 않으면 모르는 거, 인간만 그런 게 아니다. 컬트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저들은 제국 최고의 육군 부대 중 하나인 신전수호단이다. 그런 명예로운 자들이 적인지 동료인지 확실하지도 않은데 버리고 간다는 것이 얼마나 불만스럽게 느껴질까.

‘여기서 쐐기를 박을까.’

나는 들고 있던 여성 컬트를 벽에 기대는 자세로 놓았다.

하늘의 어머니가 그녀의 목뼈를 부러트려 놨기에 그녀는 몸이 마비된 상태다. 덕분에 ‘작업’하기 쉬웠다.

나는 그녀의 머리를 뒤집어 나를 향하도록 했다. 나와 시선을 마주한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장되었다.

자기가 보고 있는 현실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이 가득한 눈빛.

그녀가 나를 본 순간, 나와 거리가 점점 멀어지던 단원들의 움직임이 멈췄다.

“이건?!”

“앨리야 님! 지금 보이십니까!”

소울링크는 매우 강력한 기술이다. 정보가 생명인 전장에서 넓은 시야만큼 중요한 요소는 없으니까.

하물며 아군의 시야를 원할 때마다 바로 확인할 수 있다면 작전 수행에 훨씬 수월할 것일 터.

이 기술 덕분에 컬트는 개개인의 무력도 뛰어나지만 팀플레이에서도 강세를 보일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자.

그 정보가 잘못 됐다면? 가령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실제와 다르다면?

“아직 살아 있었구나!”

“셀로네가 그녀를 구했습니다!”

나는 벽에 기댄 채 식은땀을 흘리는 컬트를 내려다 봤다.

그녀는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깨달았는지 미친 듯이 동공을 떨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네게 나는 무엇으로 보이냐고.

-

10위의 랭커 제이슨은 에이모프들과 악연이 깊었다.

그는 소위 ‘외모지상주의’를 기반으로 삼는 컨셉 플레이어였다.

그의 플레이 모토는 못생긴 외계인은 죽이고 미형 외계인은 노예로 삼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플레이 스타일이 딱히 특별한 것은 아니다. 스페이스 서바이벌에는 온갖 괴짜들이 득실거리는데다가 다른 게임에도 그와 비슷한 플레이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으니까.

그런 ‘평범한’ 컨셉 플레이어였던 제이슨이 유명해진 이유는 그가 괴물 플레이어를 괴롭히는 수준이 정도를 넘었기 때문이다. 그의 괴롭힘을 못 견디고 게임을 접은 플레이어도 적지 않다.

사실 이런 타입은 적을 많이 만들기 쉽지만, 그가 건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추종하는 팬들 덕분이었다.

제이슨은 스페이스 서바이벌을 메인 컨텐츠로 삼는 인터넷 방송인이었기에 따라다니는 팬들이 상당히 많았다. 제이슨은 추종자들을 이용해 게임에서도 제법 큰 세력을 거느리고 있었다.

그 때문에 괴물 플레이어 중 랭커라고 해도 그에게 덤비기 쉽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를 노리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지만 제이슨 또한 10위의 랭커.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애초에 ‘인본주의’ 컨셉 플레이어인 그가 인간이 아니라 컬트를 고른 것도 컬트 종족이 성능이 좋기 때문이다. 성능이 좋아야 다른 플레이어들보다 실력이 부족해도 쉽게 당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게 온갖 패악질을 부리며 게임을 즐기던 어느 날.

그에게도 끝이 찾아왔다.

최악의 종족으로 랭커가 된 자.

앙숙이었던 랭커들이 그 놈 때문에 동맹을 맺고 현상금을 걸도록 만든 자.

5위의 에이모프 랭커가 그를 노리기 시작한 것이다.

놈은 무려 반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매일 그의 뒤를 따라다니며 기상천외한 전술로 그를 농락했다.

특히 게임을 종료하기 위해 캐릭터로 수면실에 들어가려는 순간, 숨어 있던 놈이 덮친 일은 커뮤니티에서 도시 전설로 회자될 정도였다.

모프박이 때문에 그의 추종자들이 만든 클랜 2개가 박살이 났고, 그와 친하게 지내던 랭커와 관계가 파탄이 났다.

결국 버티지 못한 제이슨이 커뮤니티에 공개적으로 사죄문을 쓰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게임 세계로 들어오게 되면서 모두 과거의 일이 됐지만.

그가 스페이스 서바이벌의 세계에서 지낸 시간은 적지 않았다.

이제는 잊어버릴 만하다고 생각했는데.

여기 오기 전까지만 해도, 아니 놈과 마주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그에게 날아오는 텔레파시가 고이 잠들어 있던 악몽을 일깨웠다.

‘제이슨! 당신도 보고 있지? 빌로네의 눈을 보라고! 둘 다 죽지 않고 살아 있어!’

그는 연인 앨리야가 보내는 텔레파시가 참으로 거슬렸다.

그도 안다.

소울링크는 피술자(被術者)가 죽거나 사용자가 취소하기 전까지는 해제되지 않는다. 놈에게 납치된 빌로네의 시선에서는 멀쩡히 살아 있는 여성 컬트의 모습이 보였다.

그가 사이킥 파워에 장애를 일으키는 요소를 배제하라고 보낸 12명 중 한 명, 셀로네였다. 그녀는 기억 저장술을 배운 단원. 평소 같았으면 어떻게든 보호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모프박이에게 신물나게 당한 경험이 있는 제이슨은 안다.

‘함정이야.’

빌로네의 눈에 보이는 컬트. 심한 부상을 당했는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그녀는 애타게 동료들을 부르고 있었다.

어둠 때문에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마치 당장 쓰러질 것처럼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Bullshit! 가증스러운 모프박이 새끼가…!’

놈의 연기를 보니 과거에 경험했던 트라우마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느낌이다.

그는 확신했다. 저 목소리의 주인은 이미 죽었고, 소울링크가 연결된 빌로네는 기생충에 감염된 상태다.

이대로 구하러 갔다간 놈에게 조종당하는 컬트 때문에 엄청난 피해를 입을 거다. 게임에서도 놈은 NPC를 조종해서 전함을 폭파시킨 전력이 있으니까.

‘놈은 상대의 모습을 똑같이 따라 할 수 있다. 그뿐 아니라 기억도 빨아먹지.’

‘…그러면 빌로네는요? 빌로네도 조종당한다고 하는 겁니까?’

‘그래. 놈의 기생충이 그녀를 조종하고 있을 거다.’

‘그런 괴물이 존재한다는 건 들어 본 적 없습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게임에서도 놈의 변신 기술이 무슨 특성인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나마 아웃스페이서 플레이어들이 저 특성이 아주 희귀한 조합식으로 만들어지는 융합 특성이거나 볼텍스원 사냥으로 얻는 보상으로 추측할 정도였다.

저 변신의 정체가 뭐든 간에 저런 식으로 기생충, 변신 기술을 쓰는 괴물이나 플레이어는 놈 말고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모프박이를 병적으로 싫어하지만, 놈의 실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인정하고 있었다.

솔직히 특성 활용 능력 자체만 놓고 보면 아마 3, 4위랑 큰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사실을 알지만.’

여기 있는 신전수호단은 아니다. 그들은 정보로 놈을 접했을 뿐, 직접 마주해서 싸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수많은 괴물을 상대했다는 노련함이 지금 이 순간에는 역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놈은 그들이 봤을 때 존재할 수 없는 생물이었으니까.

모함전단을 궤멸시킨 괴물의 진정한 힘이 기생충과 변신을 이용한 기만 전술이라고 누가 생각할까?

‘다시 한번 말한다. 앨리야. 포기하고 이쪽으로 와줘.’

‘제이슨….’

머뭇거리는 앨리야.

놈도 이 부분을 노렸을 거다. 제이슨의 지휘력을 약화시키고 부하들과 그 사이에 분란을 조장하는 것.

그는 재차 연인에게 텔레파시를 보냈다.

그의 간절함이 닿은 것일까. 그녀가 부하들을 다독인 뒤 다시 이동하려한 그때.

소울링크로 보이는 시야에서 이변이 발생했다.

셀로네가 뭔가를 발견한 듯 당황한 몸놀림을 취했다. 그녀 뒤 어둠 속에서 괴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독수리 형태의 머리와 호박색 눈동자, 황금색 털이 인상적인 사자의 몸. 새로 나타난 괴물은 그리폰이란 이름을 가진 환수(幻獸)였다.

‘저건 신격화를 배운 볼프잖아? 저 녀석이 여길 왜…?’

그리폰이 공유된 시야와 점점 가까워진다. 놈의 날카로운 부리가 위협적으로 빛나는데 셀로네가 양팔을 벌린 채 갑자기 시야 앞에 섰다.

마치 나를 죽이기 전에는 못 간다는 듯이.

그 모습이 결정타였다.

‘젠장! 더 이상 안 되겠어! 앨리야 님!’

‘…제이슨, 미안합니다.’

‘잠깐! 모두 기다려! 저건 속임수야! 미친! 가면 안 된다고!’

제이슨이 급히 텔레파시를 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없었다. 앨리야와 그녀의 부하들이 텔레파시 링크를 끊은 것이었다.

대신 소울링크로 연결된 그녀의 시야에 빠르게 달려 나가는 단원들의 등이 보였다.

통로를 달리던 그들이 동시에 멈췄다.

그들의 앞에 있는 것은 멀쩡히 서 있는 셀로네와 벽에 상체를 기대고 있는 빌로네였다. 좀 전까지 있던 그리폰 볼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원들과 앨리야, 그리고 그녀와 시야가 연결된 제이슨은 느낄 수 있었다.

그들 앞에 있는 ‘저것’은 컬트가 아닌 무언가라는 것을.

앨리야를 통해 전달되는 시야가 살짝 떨렸다. 그녀의 당황한 심정이 눈동자에 반영된 것이었다.

‘그것’의 입이 움직이는 것을 앨리야의 시야가 읽어낸다.

놈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너희에게 나는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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